Double
Casting
"더블 캐스팅?"
"뭐, 말이 그런 거지. 어디까지나 메인은 우리야. 그러니까 걱정할 거 없어."
단호한 실장의 말에 하카제 카오루는 조금 웃었다. 방금, "아니, 우릴 두고 더블 캐스팅이라니 말이 되느냔 말이야!!"라 외치던 그녀의 목소리가 복도까지 울렸던 참이었다. 지나가던 직원들이 놀라 어깨를 움츠릴 정도였는데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니. 하카제는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을 와그작 씹어 삼키며 소파에 자리 잡았다.
테이블 위에는 캐스팅 서류 그리고 볼펜이 놓여 있었다. 고딕체로 적혀진 MONDE는 프랑스와 일본 디자이너의 합작 브랜드로 하카제 카오루가 벌써 3년 째 쉬지도 않고 모델을 해왔던 의류 브랜드였다.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 총 6번의 시즌 모델로 이 브랜드와 함께했고 이제 7번째 시즌의 계약을 앞두고 있었다. MONDE라고 하면 하카제 카오루라고 할 정도로 이미 얼굴처럼 인정된 탓에 다음 시즌도 어렵지 않게 계약하겠거니 했더니, 더블 캐스팅이라니.
하카제는 심드렁한 얼굴로 서류를 들췄다. 언데드의 하카제 카오루와 나란히 이름을 올린 잘난 상대는
"유성대? 신카이 카나타? 이게 누구야?"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아이돌 활동 이제 5년 차, 크게 방송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래도 업계에 속한 이상 어느 정도 활동하는 연예인들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알기 마련인데 유성대란 이름도 신카이 카나타란 이름도 처음이었다.
"모리사와 치아키 몰라? 그 특촬물 뭐더라.. 무슨 레인저지? 거기 나오는 앤데."
"...모르겠는데?"
"왜, 전에 '당신의 소원을 들어드립니다. SP'에서 만났었잖아. 패널로 나왔던. 좀 시끄럽고 활달하던 애."
"아아아..."
실장의 열정적인 설명에 흐릿했던 얼굴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연초마다 진행되는 방송에 출연했을 때,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게스트였다. 무슨 아이돌인지 배우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잘생긴 얼굴은 흐릿하게 남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유성대인지 무성대인지 그런 그룹 이름을 댔던 것도 같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뭐 하카제 카오루에게 있어선 경쟁 상대도 되지 않을 인물이었기에 기억은 그게 다였다.
"걔랑 같은 그룹에 있는 애야."
"인기 많은가 보네?"
호들갑을 떨던 패널들의 반응이 기억 끝에 딸려 올라왔지만, 모르는 척 하카제는 무심하게 물었다.
"아니. 전혀. 없는 편이지! 아, 근데 원래는 인기 많았어. 유성대 초기는. 지금은 멤버들이 졸업하고 새로 영입하고 하면서 몇 기인지도 모르겠는데.. 뭐 다 과거의 영광이지. 모리사와 치아키랑 누구더라.. 또 배우로 활동하는 잘생긴 친구 하나 있는데. 그 둘이 그나마 잘나가서 조금 이름 알려지는 단계라고 해야 하나?"
"그럼 얘는?"
하카제는 서류 위에 둥둥 떠 있는 신카이 카나타를 콕 찍어 물었다.
"몰라. 나도. 원래는 늘 그랬듯이 네 단독 계약이었는데... 갑자기 오늘 서류 보내면서 바뀌었다고 통보 전화가 왔잖아.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냐 화를 냈더니 본사 디렉터가 직접 픽했다더라."
"스폰서라도 껴있나?"
"모르지, 나야! 어쨌거나 그래도 네가 메인이라고는 못 박아 뒀으니까... 일단 해. 작년에 계약 연장해놔서 무르지도 못해."
"엄연히 그때는 단독 계약이었잖아. 이렇게 나오면 위약금 안 물고 그냥 정리해도 되는 거 아니야?"
"갑자기 어떻게 그래. 기사라도 잘못 나오면 이미지는 이쪽만 망가질 텐데."
빌어먹을, 그녀가 살짝 혀를 찼다. 그녀도 계약 파기라는 방법을 고민해본 모양이었다. 자존심을 지키느냐, 이미지를 지키느냐.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끝에 그녀는 결국 하카제 카오루의 이미지를 선택한 모양이었고 전적으로 그녀의 지휘 아래에 놓인 하카제는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뭐 거기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인물이 툭 튀어나왔다고 해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 어딘가에 떠 있을 공기 중의 먼지 같은 정도나 되려나. 하카제는 여전히 씩씩대는 실장을 두고 펜을 들었다. 가볍게 그리고 망설임 없이 제 사인을 서류 위에 휘갈겼다.
***
아이돌 5년 차, 하카제 카오루라는 이름의 위력은 연예계에서 꽤 강력했다. 언데드는 싱글이든 앨범이든 나왔다 하면 1위를 차지하고 비켜서지 않았고 투어 콘서트가 열리는 시기에는 우스갯소리로 티켓보다 호텔을 먼저 잡아야 한다는 말까지 돌았다. 연기는 자신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20대 남자 배우가 필요한 역에는 1순위에 올랐고 현재 전파를 통해 흐르는 광고도 다섯 가지나 되었다. 그러니 아침부터 터진 더블 캐스팅에 대한 기사는 하카제 카오루에겐 익숙한 것이었다. 포털 사이트에 자신의 이름보다 신카이 카나타란 이름이 우위에 올라 있는 건 별로였지만, <하카제 카오루와 함께 MONDE의 얼굴이 될 신카이 카나타는 누구?> 같은 특집 기사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 자신의 이름 덕이니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다. 약간의 화제 그리고 관심은 하카제 카오루의 일상이었다.
"...식사요?"
그런데 저쪽은 아닌 모양이었다. 감사 인사는 캐스팅한 디렉터에게 해도 모자랄 판에 식사 제안을 해왔다.
"아니 무슨 드라마 같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예능을 같이 하는 것도 아닌데 식사는 무슨 식사인지... 어차피 메인은 우리이고 저쪽은 들러리인데 말이야."
실장도 황당하다는 듯 떠들었다. 그래서, 거절했죠? 귀찮은 건 질색이었기에 눈으로 물었지만 끄덕이는 대답 대신 그녀가 내민 것은 주소지가 적힌 쪽지였다. 한자로 유려하게 적힌 글자를 보니 스시집이라도 되는 거 같은데 저 같은 사람을 부르는데 그냥 일반 스시집은 아닐 테고.
"우리 쪽에 로비해서 뭐 어쩌려는 걸까요?"
이상한 제안에 살짝 혀를 차며 묻자 실장도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연줄이라도 쌓고 싶나 보지."
그래, 딱히 그거 아니면 이유가 없긴 하지. 친구 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 인물들은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았다. 한 번 사석에서 잠깐 본 거로 방송에 나가 친구라고 떠드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니 같이 카메라 앞에 설 상대와 밥 한 끼 어울려 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카제는 관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만큼이나 관대하지 못한 실장은 저녁 식사 자리에는 불참하겠다 선언했다. 굳이 그런 자리에 자기 급이나 되는 사람이 가 얼굴을 비출 필요는 없다는 게 그녀의 판단이었다. 덕분에 함께 가게 된 로드 매니저는 "비싼 스시겠지?"라 신이나 있었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운전대를 잡는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하카제는 슬쩍 고개를 젓고는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신카이 카나타의 이름을 쳤다.
유성대의 17기라고 적힌 그는 데뷔가 이제 5년 차로 자신과 같았다. 그러나 그의 프로필 아래에 뜬 노래들은 하카제 카오루가 들어본 적도 없는 곡들뿐이었고 그가 참여한 드라마나 영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역, 조연이라는 꼬리표가 약간 동정심을 일으켰다. 거기다 최근 기사라곤 모두 MONDE의 새 모델이 되었다는 비슷한 제목의 기사가 끝. 아마 소속사에서 돈을 주고 돌린 보도자료 같았다. 연예계에서 5년을 버틴 사람치고는 인터넷에 있는 자료도 거기서 거긴지라 그를 파악하는 데는 몇 분이면 충분했다.
"바다를 좋아하고 해산물을 좋아하고 해양 생물을 좋아하고... 뭐야 이게. 이런 콘셉트가 먹힐 리가 있나.."
여기가 유치원도 아니고. 유성 블루라는 그의 네임에 맞춰 그런 콘셉트를 짠 모양이었는데, 우스울 뿐이었다. 그래도 실제로 꽤 먹히긴 한 모양인지 몇 번 출연한 쇼 프로에서는 모두 그 취향을 앞세워 오징어잡이를 하러 가거나 해산물 많이 먹기 같은 이상한 기획에 메인으로 나타났다. 웃으며 열심히 입에 새우를 우물거리는 모습은 행복해 보였으나 어딘가 안쓰러워 하카제는 흘러나오던 영상을 얼마 보지 못하고 꺼버렸다. 깜깜하게 암전된 화면 속에서 새우 비린내가 나는 거 같아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좋은 데 가는데 얼굴이 왜 그래."
매니저가 지적했지만, 좀처럼 기분이 풀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짜증을 안고 도착한 곳은 롯본기에 위치한 스시집이었다. 빌딩에 덜렁 들어선 가게는 예상대로 홀이 없이 모두 룸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매니저가 익숙하게 예약자의 이름을 뱉자 곱게 기모노를 갖춰 입은 직원이 안으로 안내했다. 금방 나무 냄새를 뱉을 거 같은 목재 문들을 지나 하카제는 가장 안쪽 룸을 안내받았다. 일행이 도착했다는 안내와 함께 직원이 반질하게 마감된 나무문을 밀어 열자 안쪽의 두 사람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어서 와요. 오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나이가 진득해 보이는 중년의 사내 하나 그리고 말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하는 푸른 머리 하나. 하카제는 방금까지 자신이 휴대폰으로 들여보고 있던 이의 머리통을 바라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중년의 사내가 서둘러 안쪽 포켓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기획 대표 무카이 신이치로라 적힌 명함이 로드 매니저의 명함과 교환되었다. 생각보다 높은 사람의 등장에 매니저도 당황했는지 "저희 실장님이 오늘 일정이 있으셔서요."라 어색하게 변명을 했다. 다행히 상대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 대단한 자리는 아닙니다. 그냥 큰 프로젝트에 들어가다 보니 얼굴 좀 뵙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만든 자리니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카이 신이치로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자릴 잡았다. 따라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직원이 차와 애피타이저를 내왔다. 몽글몽글해 보이는 두부가 아름답게 세팅되어 각자의 앞에 놓였다.
"식사는 코스로 저희가 대접하겠습니다. 편하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조금 딱딱하게 인사가 나갔지만, 굳이 웃어주진 않은 채로 하카제는 스푼을 떴다. 반대편에 앉은 신카이 카나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 자리가 불편한지 시선은 계속 아래쪽을 향해 있었다.
"유성대라는 그룹이 워낙 이미지가 특수하다 보니까 이런 모델 제의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요. 하카제 카오루군과 더블 캐스팅으로 모델이라니 영광스러워서 놀랐습니다."
치켜세우는 말에 하카제는 어색하게 웃었다. 부끄럽거나 그런 감정 때문은 아니었다. 바로 본론을 꺼내는 그의 장단에 맞춰주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칭찬을 좋게 받아드렸다고 생각하는 건지 그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 신카이군이 아직 모르는 게 많으니 현장 일이나 뭐.. 좀 잘 알려주세요. 이 녀석 친하게 어울리는 동료라고는 유성대 멤버뿐이고 ...바다나 해양생물 같은 거 외에는 관심이 없어서 걱정이 많습니다. 하카제군이 친하게 지내주면 기쁠 거 같아요.”
유치원 보내는 부모도 아니고 참 이상한 자리였다. 하지만 대충 의도는 알 거 같았다. 더블 캐스팅이 확정되고 쏟아졌던 기사들. 갑작스럽게 등장한 새로운 얼굴에 대해 대중들은 그리 다정하지 못했다. 이렇게 큰 프로젝트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가 등장하면 보이는 반응은 뻔했다. 돈을 썼거나 몸을 썼거나. 사람들은 그리 순진하지 않으니까. 잘 돌아가던 하카제 카오루의 캠페인에 갑자기 등장한 데다 그렇게 기사들을 쏟아 냈으니 아마 반응은 그리 좋지 못했겠지. 그러니 저에게 달려온 것이었다. 친하게 지내 달라고. 절친한 사이까지는 아마 저쪽도 바라진 않을 테고. 아마 SNS 같은 곳에다 <오늘 같이 식사했어요! 즐거운 시간~> 같은 걸 적어달라는 정도려나. 홍보 목적으로 올릴 때는 반드시 회사와의 계약과 돈이 움직인 후에야 가능한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굴러가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하카제는 그저 웃기만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쉽게 굴면 돌아가 실장에게 잔소리를 들을 게 뻔해 보였으니 나름의 계산된 미소였다.
“그럼 식사를 할까요?”
긍정도 부정도 없는 반응에 당황했는지 무카이 신이치로가 서둘러 사람을 불러 음식을 세팅했다. 싱싱해 보이는 회부터 시작해 튀김, 알, 구이, 국물 요리까지 끊임없이 음식들이 테이블을 차지했다. 네 명에서 먹기엔 많은 양이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곁에 앉은 매니저는 급하게 젓가락을 들었다. 조명을 받아 반지르르 빛나는 생선살을 바라보며 하카제도 젓가락을 들었다.
식사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다. 몸집이 다르니 일 이야기를 하기에도 어색했고, 무언으로 대답한 바람에 더는 상대도 요구성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곧 대학에 들어가는 딸이 언데드 팬이라며 그 주제를 억지로 끄는 무카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카제는 가만히 반대편의 그릇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한마디를 꺼내지 않은 신카이 카나타는 사라진 말만큼 식욕도 없는 모양인지 그릇이 채워지질 않았다. 몇 점을 우물거리나 싶더니 물을 마셨고, 그러다 또 다른 걸 입에 넣더니 헹궈내듯 물을 들이켰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행동을 신경 쓰다 보니 뒤에 가서는 자신이 회를 먹는지 신카이 카나타가 내는 작은 소리들을 먹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피곤한 식사 자리였다.
“차를 빼러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계산하고 있을 테니 천천히 나오세요. 아, 매니저분은 잠깐 이야길 나눌 수 있을까요?”
식사가 적당히 끝나고 후식으로 나온 셔벗까지 비운 후, 무카이 신이치로가 일어섰다. 매니저까지 챙겨 나가는 걸 보니 단둘이 남겨놓고 이야기라도 나누라는 거 같지만, 지금껏 한마디를 뱉지 않은 상대를 두고 뭘 이야기해야 하는지 하카제는 알 수가 없었다. 노력은 저쪽이 해야 하는데 이쪽이 해야 할 판이라니. 드르륵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하카제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대로 신카이 카나타는 입을 다문 채였다.
“카나타군?”
비위를 맞춰주는 사람들 틈에 지내다 보면 주변은 언제나 시끄러웠다. 말 한마디에 다들 웃어주고 어떻게든 더 대화를 이어나가려고 안달 나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토록 조용한 상대는 처음이었다. 여러 의미로 참 신경 쓰이는 상대였다. 별수 없이 하카제는 조용히 그를 불렀다. 그제야 그가 푸른 눈을 제대로 맞춰왔다.
“프로필 보니 나이도 같던데 말 편하게 할게. 촬영, 잘 해보자. 도와줄 거 있으면 말하고. 내 선에서 해줄 수 있으면 도와줄 테니까.”
“... 고마워요.”
“으음. 그래.”
이쪽이 편하게 하면 저쪽도 편하게 나올 줄 알았는데 묘한 거리감이었다. 아니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거리감을 좁히는 것도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노력에 비해 어색함은 계속 공기 중에 맴돌았다.
“있지, 카나타군.”
그래서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될 문제를 입으로 꺼냈다.
“혹시 해산물 싫어해?”
분명 오는 길에 차에서 그가 여러 가지 해산물을 먹어대는 영상을 보았음에도 그런 질문을 던졌다. 아니, 오히려 그런 영상을 봤기 때문에 더더욱 신경 쓰였고 궁금한 건 참고 싶지 않았다. 곤란한지 그가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나, 전에 커피 머신 광고를 찍은 적이 있는데 실은 나 커피 싫어하거든.”
그를 불편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기에 하카제는 분위기를 녹이려 급히 입을 열었다. 의심을 지우지 않는 얼굴을 향해 정말, 정말이야! 라고 결백을 덧붙이며.
“커피보단 초코나 아이스티와 같이 단 게 좋거든. 근데 뭐 어쩌겠어. 폼 난다고 계약한 내 탓이지. 하필 그날 마셔야 하는 게 에스프레소인 거야. 데뷔 초에 커피나 카페 광고하고 싶어서 커피 잘 마신다고 거짓말한 탓에 들어온 광고라 이제 와 못 마신다고 말을 못 하겠더라고. 그래서 그날 진짜 에스프레소 여러잔 비웠는데... NG가 나올 때 내 얼굴과 아까 젓가락질하던 카나타군 얼굴이 비슷해서 찍어 봤어.”
“....”
“거기다 에스프레소 마시고 물로 입 gpd구던 내 방식과도 닮았고.”
쓴맛이 싫어서 마신 에스프레소의 몇 배로 중간에 물을 입으로 털어 넣었다. 그러고 있는 걸 들키기라도 할까 화장실 칸에 들어가서 뱉어내고 또 뱉어내며 촬영을 했다. 다행히 광고는 잘 나왔고 선물로 머신기에 평생 먹고 남을 커피 캡슐을 받았지만, 베란다에 박혀 가끔 집에 방문하는 지인들에게 한 박스씩 안겨주는 중이었다. 쓴 기억을 떠올리며 웃자 조금 인상을 풀어낸 신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좋아하진 않네요.”
“역시? 그럼 그건가? 유성 블루라는 이름 때문에 잡은 콘셉트나 뭐 그런 거?”
“맞아요.”
“하하, 그럼 다른 걸 하면 되잖아. 예를 들어서 유성 핑크라던지.”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썩 내키지 않은 모양인지 그가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치아키가 레드니까요.”
“치아키? 아, 모리사와 치아키?”
“네. 사무실에선 대비되는 컬러가 좋다고 했거든요. 치아키는 레드가 좋다고 했으니까...”
그러는 카나타군은? 그렇게 묻고 싶었으나 다른 아이돌 그룹의 사정까지 참견하고 싶진 않았기에 하카제는 더 질문하지 않았다. 그럼 슬슬 나갈까? 더는 나눌 이야기도 없었기에 먼저 일어섰다. 그다지 비워지지 않은 상을 두고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매니저가 다가왔다.
“차 대기했어.”
“아, 응. 그럼-“
아 잠깐, 잠깐. 밥 값은 해야지. 하카제 카오루는 뒤따라 나온 신카이 카나타를 향해 걸었다. 그리곤 무카이 신이치로를 찾는지 두리번거리는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자, 치-즈.”
휴대폰 촬영 버튼을 누르자 작은 셔터음과 함께 사진이 곧장 앨범에 저장되었다.
“그럼 촬영 때 봐.”
갑작스러운 제 행동이 혹은 접촉이 불편했는지 인상을 찌푸린 신카이를 두고 하카제는 서둘러 매니저를 따라 차로 향했다. 쓱, 손가락만 밀자 앨범으로 사라졌던 사진 하나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웃고 있는 자신과 달리 놀란 신카이 카나타의 얼굴이 우스웠다. 동그랗게 뜬 눈, 살짝 벌어진 입. 5년이나 이 바닥에서 지냈다면서 처세도 못 하고 이용도 못 하는 그가 조금 가엽고 동시에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나타군과 촬영을, 앞두고, 의기투합.”
툭툭 SNS에 올리기 위해 자판을 눌렀다. #언데드 #하카제카오루 #유성대 #신카이카나타 #MONDE까지 적고 저장하려다가 하나 더 덧붙였다.
#유성블루는 회를 좋아해.
***
유명 연예인들은 보통 SNS에 사진을 올리는 것으로 돈을 벌기도 한다. 구독하고 있거나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들고 찍는 음료 하나도 홍보가 되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광고를 계약할 때도 ‘이 차의 모델이니 이 차를 사용할 것’ 혹은 ‘이 화장품의 모델이니 이 화장품만 사용할 것’과 함께 SNS 노출 조항이 명시되기도 했다.
그러니 하카제 카오루는 예상했다. 자신이 올린 신카이 카나타와의 사진이 별 거 없는 아이돌의 일상으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예상대로 사진은 금방 화제가 되었다. 반은 저쪽 소속사에서 <MONDE의 얼굴들의 다정한 투샷> 같은 제목으로 기사화해서 얻어낸 화제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실시간 검색에서 나란히 이름이 올라갔으니 비싼 밥과 약간의 아부가 효과를 본 셈이었다.
“그렇다고 꽃까지 보낼 건 없지 않나.”
하카제는 매장 앞에 선 커다란 화환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WAVE의 오픈을 축하드립니다. 유성대 신카이 카나타>라는 푯말이 박힌 화환은 노란 장미와 파란 장미가 뒤섞여 있었다. 언데드의 속 제 컬러가 노란색이다 보니 노란 장미는 이상하지 않았지만, 같이 섞인 파란 장미가 유독 튀었다. 대놓고 어필한 꼴을 보니 신카이 카나타의 작품은 절대로 아니고 아마 무카이 신이치로, 아니면 그의 직원들의 작품일 게 뻔했다.
“이야, 안 그래도 너랑 검색어 오르락거리고 관련 검색어에도 걸려서 실장님 별로 안 내켜 하던데.. 저쪽 아예 너를 이용하려고 작정을 했나 보다.”
매니저가 화환을 찍어가는 기자들을 보며 속삭였다. 아마 몇 분 후면 열렬한 친분 과시라는 말로 저 남사스러운 화환이 인터넷에 돌아다니게 될 게 뻔했다. 치울까, 그런 생각이 슬쩍 치밀었지만 어쨌거나 축하 화환이었다. 다른 화환들과 함께 있는 걸 굳이 치워 괜한 말이 나오는 게 더 피곤했다. 거기다
“내버려 둬, 그거 말고 신경 쓸 것도 많은데.”
오늘은 몇 년을 준비했던 제 꿈이 하나 더 실현되는 날이었다. 하카제는 화환을 시선에서 밀어낸 후 눈앞의 매장을 바라보았다. 목재로 인테리어 된 외관에는 블랙 볼드의 WAVE의 간판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제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취미 중의 하나인 서핑으로 차린 개인 브랜드 숍이었다. 서프보드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용품과 디자이너, 아티스트들과 콜라보한 굿즈들을 판매할 예정이었다. 정식 오픈일은 내일 모래였지만 오늘은 기자들을 초대한 홍보 가오픈일이었다. 꽃 화환보다는 신경 쓸 게 더 많았다. 대표에게 조르고 졸라 겨우 허락받은 개인 사업, 중요한 첫 삽을 푸는 날에 노랗고 파란 장미는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사람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머릿속에는 <하카제 카오루의 첫 브랜드 WAVE!>와 같은 타이틀과 관심을 기대했건만, 기자들 초청 행사가 끝나고 나니 남는 거라곤 신카이 카나타가 보낸 화환뿐이었다. 타인이 보기에도 좀 우스운 디자인이었는지 그다지 좋지 못한 방향으로.
“애초에 MONDE 모델로 발탁되었을 때도 갑작스러운 큰 건이라 말 많았잖아. 모리사와 치아키랑 타카미네 미도리가 조금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으니 저쪽 소속사에서 전투적으로 몰아붙이나 봐. 지난 유성대로는 그다지 돈을 못 벌었을 테니까, 지금 노라도 젓겠다는 거 같은데... 아무래도 이렇게 전투적이면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게 당연하지.”
행사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 매니저가 내민 태블렛 PC에는 오픈 기사대신 화환 기사가 차지하고 있었다. 댓글 반응은 매니저의 말대로 그다지 좋지 못했다. 기사를 푸는 건 잘하면서 댓글 알바를 풀 생각은 못 하는 건가. 하카제는 인상을 찌푸리며 쭉쭉 화면을 내려 댓글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 하카제 카오루의 인기에 묻혀 가려는 거 너무 티 나서 별로.
- 그전까지는 완전 무명이었지? MONDE 모델되고 나서 벌써 이런 기사만 몇 개임? 가수가 음악으론 기사가 안 나고 맨날 친분 과시만 하네.
- 유성대가 누군데? 8년 전에 오카다 아츠시 있던 데가 유성대인가? 해체한 거 아니었어?
- 10년 전에야 유성대라고 인기 있었지만, 지금은 별로 의미 없는 거 아닌가? 그냥 모리사와 치아키 혼자 솔로로 나오는 게 나을 듯.
- 나 쟤 싫어. 저번에 방송에서 해산물 좋아한다고 삼시 세끼를 해산물 먹는다고 보여주는데 작위갑.
- 참치 쇼 하는 건 재밌게 봤는데.
- 언데드 팬들 짜증나겠다.
- 바이럴 마케팅?
계속해서 읽어내리는 댓글 중에선 긍정적인 반응도 없었고 자신의 첫 브랜드에 대한 기대나 감상도 없었다. “실장님이 화가 났어.” 제 눈치를 보며 건네는 매니저의 말에 하카제는 태블렛 PC를 구석으로 밀어 던졌다. 차라리 돈이라도 내고 홍보로 써먹던가. 남의 브랜드 홍보 행사에 이게 무슨 짓인지. 슬쩍 짜증이 치밀어 올라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하지만 짜증 이상으로 심장이 답답했다. 악플을 받고 보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데드의 하카제 카오루에겐 응원해주는 팬들이 더 많았다. 만약 이게 제 기사였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자신의 팬들로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신카이 카나타에겐? 하카제는 식사 자리에서 마주했던 그를 떠올렸다. 조금도 웃지 않았던 얼굴을 떠올렸다. 사무소의 공격적인 홍보에 결국 얻어 맞는 건 대중 앞에 서는 신카이 카나타였다. 그 혼자였다.
“하.. 나도 참 속이 좋지.”
“뭐?”
“신카이 카나타 연락처 알 수 있어?”
“왜? 직접 연락하려고? 뭐 너까지 나서. 실장님이 아마 저쪽에 그만하라고 연락을-“
“아니, 그냥 알려줘.”
WAVE야 뭐 커다란 브랜드도 아니고 그저 서핑이 좋아 시작한 일이니 크게 홍보되지 않아도 아쉬움이 남을 뿐,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신카이 카나타는 다르겠지. 그가 하지도 않은 일로 이렇게 가루가 되도록 욕을 듣고 있으니 신경이 쓰였다. 언데드 데뷔 당시에 ‘사쿠마 레이와 아이들’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괴로웠던가. 어차피 위에서는 잘되면 그만이라고 할 게 뻔했다. 이런 건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알지 못할 괴로움이었다. 위로라도 해야지. 이상하게 쓰이는 마음을 굳이 접지 않은 채, 하카제는 매니저가 금세 알아온 번호로 메시지를 남겼다.
-오늘 화환 고마워. 기사는 신경 쓰지 마.
이렇게 보내면 뭐라고 답변이 오려나. 제가 보낸 거 아닙니다? 보통은 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소리를 할 상황이지만 신카이 카나타는 좀 다를 거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답장 없는 화면만 노려봤을까. 기다렸던 말풍선이 떠올랐다.
-미안해요.
짧은 말이었고 평범한 말이었다. 그런데 왜 혀가 바짝 마르기 시작하는 걸까. 하카제는 서둘러 손가락을 움직였다.
-어디야? 지금 잠깐 만날까?
미안해요,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니고 이 상황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이 말풍선 뒤에서 조금은 울적한 얼굴로 있을 신카이 카나타가 절로 떠올라 답답해졌다. 아니, 미안할 게 뭐 있어? 사과는 저쪽 사무실이 해야지. 화환을 보낸 것도 파랗고 노란 장미를 보낸 것도 그가 아닌데.
“잠깐... 신카이 카나타를 만나야겠어.”
“뭐? 지금? 설마 화내려고? 야, 그러지 마라. 뜨려면 무슨 짓을 못하-“
“그런 거 아니거든?! 차 좀 돌려줘.”
-집인데요?
-그럼 내가 집 앞으로 갈게. 주소만 남겨줘.
분주하게 화면을 들여보며 하카제는 신경질적으로 매니저에게 외쳤다. 차 돌려, 차. 갑작스러운 요청에 거절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주소 하나가 바로 화면에 나타났다.
“그리고 인터넷에 내가 오늘 신카이 카나타 만났다고 목격담 같은 거 좀 풀어줘.”
“에엑? 왜?”
“화환이 친분 과시용이 아닌 거처럼 하려고.”
“굳이? 실장님 아니면 싫어할걸.”
“뜨려면 뭔들 못하겠냐며. 내가 어울려 줘야지. 비싼 밥도 얻어먹었잖아.”
매니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우기자 그는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끄덕였다.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실장이 있다면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했겠지만, 도망칠 곳이 없었던 그는 하는 수 없이 차를 돌렸다. 주소지는 시나가와로 아직 이름 없는 아이돌이 살기에는 꽤 비싼 집들이 모인 곳이었다. 혹시 원래 잘 사는 편인가. 약간 속물처럼 느껴지는 계산을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훅훅 스쳐 가는 여러 간판 속에서 ‘시나가와 수족관’이라는 이정표를 발견했을 때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속이려면 철저하게 속이긴 해야 하지만.”
설마 이런 거까지 염두에 두고 기획을 했을 줄이야. 그러고 보면 저도 커피 머신 모델일 때는 계약 기간 동안 아메리카노만 마셨다. 머신으로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만 뽑아낼 수 있는 게 아닌데, 어른의 모습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콘셉트 때문에. 어른도 라떼 마시고 코코아 마신다고 외치고 싶었으나, 그때는 그럴 힘이 없었다. 그러니 유성블루니까 수족관 근처에 살아! 라는 요구에 신카이 카나타가 뭐라 대답했을지는 뻔해 보여 더 황당해하지 않기로 했다.
영 탐탁지 않은 얼굴의 매니저가 차를 세운 곳은 수족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층 맨션이었다. 그리고 신카이 카나타는 전화를 넣을 필요도 없이 건물 앞에 얼굴을 드러낸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데뷔도 안 한 연습생들도 얼굴을 가리고 마스크를 쓰는 세상에 저렇게 무방비한 모습이라니. 작게 혀를 차며 하카제는 가방을 챙겼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너 피해 안 가는 선에서만 행동해라! 알았지? 막 때리거나 그러진 말고? 말로 해, 말로. 실장님 뒷목 잡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고!!”
도대체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 등에 닿는 매니저의 당부를 무시하고 하카제는 차에서 내렸다. 탁, 차 문을 닫음과 동시에 바닥으로 떨어져 있던 고개가 올라섰다. 밤바람에 나부끼는 푸른 머리카락 사이로 신카이 카나타의 시선이 다가왔다.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는데 신카이 카타나가 더 빨랐다.
“우리가 곤란하게 만든 거, 맞나요?”
조심스레 묻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젓고 싶었으나 굳이 그러진 않았다.
“이번 유성대가 최근 몇 년 동안 진행된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성과가 좋았다고 해요.”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가 슬쩍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그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휴대폰에는 해파리 모양의 고리가 걸음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다.
“치아키가 특촬 배우로 살짝 이름을 알리고, 미도리가 드라마의 조연으로 나가면서 조금 팬이 늘었거든요. 대단한 마케팅이나 돈을 쓴 것도 아닌데 이번엔 운이 좋다고 대표님이 신나서 말하곤 해요.”
“...그래?”
“네. 조금 우습죠? 사실 아직 저희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게 잘 된 거라니.”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맨션 내에 딸린 작은 놀이터였다. 그네와 미끄럼틀이 아이들이 떠난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있었다. 얼마만의 놀이터인지. 신인 시절 화보 촬영 때 이후로는 놀이터란 장소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하카제는 어색하게 신카이를 따라 덜렁 놓인 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시노부라고 닌자를 좋아하는 동료가 있는데 닌자를 다루는 뮤지컬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테토라도 좋은 선배들하고 친해진 덕에 주말 버라이어티 방송에 패널로 계속 나가고 있고요. 아직 아무것도 성과를 못 낸 건 저 뿐이에요.”
“...”
“그래서 MONDE의 캐스팅 요청이 왔을 때, 대표님은 신이 내려주신 기회라며 호들갑을 떨었어요. 저까지 잘되면 이번 유성대는 다시 과거의 영광을 찾을 수 있다고요. 그래서 조금... 전투적이세요.”
“이해해.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손 놓고 있는 게 멍청한 거니까.”
“하지만 카오루에게 피해를 줬잖아요.”
아니, 피해까지야. 지금 신카이 카나타가 제게 피해를 줘봤자 바위에 던진 달걀 정도의 수준이었다. 아니 모래알? 그보다, 카오루라니. 갑작스러운 이름 호칭에 하카제는 당황했다.
“벼...별로 피해까진...”
그래서 저도 모르게 말이 꼬이고 씹혔다..
“카오루에게,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무언가 이루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있지 않아요. 저는.”
“그러니까 이름.... 아니, 왜?”
욕심이 없다니. 이 업계에 욕심이 없는 자는 없었다. 아니, 욕심이 없으면 버티기 어려운 곳이니 기본 옵션이라 해야 맞겠지. 그러나 신카이 카나타는 욕심이 없단다. 뭐, 그래 보이긴 했지. 정말 욕심 혹은 야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식사 자리에서 그렇게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굴지도 않았을 테고, 자신이 먼저 뻗은 손에 뭉그적거리지도 않았을 거였다. SNS에 사진을 올려준 순간부터 친한 척 댓글을 3,4개씩 달아도 모자랄 판에 그는 맞팔로우도 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럼 왜 아이돌이 된 거야?”
“치아키요.”
“모리사와 치아키?”
“네.”
예상도 못 한 대답에 방금까지 목에 가득 올랐던 열이 쑥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모리사와 치아키?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하카제는 멍청하게 눈만 깜빡였다.
“노래하는 게 좋지만, 노래를 해서 무언가 이루고 싶은 생각은 없었거든요. 저. 잘한다고 생각도 안 했고. 정말로 잘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그런 제 목소리가 유성대에 필요하다고 했어요. 치아키가. 같이 아이돌이 되지 않겠냐고 그랬어요.”
치아키는 제게 새로운 세상을 알려준 사람이에요. 마치 꿈을 꾸는 사람처럼 신카이가 조용히 말했다.
언데드 결성 당시, 하카제 카오루는 리더인 사쿠마 레이가 들락거리던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토마토 주스를 매번 시키던 그와 안면을 트고 이야기를 나누다 언데드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대로 메이저 데뷔까지 올라와 지금의 하카제 카오루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쿠마 레이가 하카제 카오루의 아이돌의 혹은 인생의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도움을 준 좋은 동료이자 은인,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신카이 카나타에게 있어서 모리사와 치아키는 그 이상처럼 느껴졌다. 성공하고 싶다거나 노래를 하고 싶다거나 그런 커다란 욕심 하나 없이 오로지 누군가를 위해 이 하루들을 살아가고 있다는 그의 말은 마치-
“특이하네.”
고백과 같아서 하카제는 모르는 척 잘라버렸다. 그런 거 아무에게나 털어놓으면 안 돼. 농담처럼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 사과도 받았고... 갈게.”
“네.”
사과는 문자로도 받았다. 굳이 그를 찾아올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도 궁금한걸 신카이 카나타는 관심도 없는지 짧은 대답으로 차단했다. 아, 기분이 이상해. 이런 기분을 뭐라고 하더라. 하카제는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켰다. 매니저를 먼저 보낸 게 민망할 정도로 짧고 간단한 만남이었다.
“다음엔 촬영장에서 보겠네.”
“네.”
“응.”
끝까지. 뭐 처음 봤을 때도 그리 말이 많지는 않았다. 하카제는 배웅도 하지 않는 신카이 카나타를 오히려 배웅한 후, 걸음을 옮겼다. 몸 안에서 덜그덕 덜그덕 소리가 나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기분처럼 참 이상한 소리였다.
***
촬영지는 오키나와였다. 시즌에 맞게 바다를 배경으로 한 콘셉트였다. 아직 바다에 들어가기엔 차고 추운 계절이었지만, 보통 패션 업계가 몇 발자국 빨리 계절을 맞이하고 준비했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다. 아시아 캠페인이긴 했으나 유명 브랜드인 만큼 스태프는 모두 국내에서 내놓으라는 얼굴들이 모였다. 신카이 카나타를 캐스팅했다는 본사의 디렉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어쨌거나 본사 요청으로 캐스팅이 된 얼굴에게 스태프들의 태도는 그리 좋지 못했다. 마치 어시스던트 혹은 엑스트라를 다루듯 굴었다. 물론 엑스트라에게 그렇게 굴어도 된다는 건 아니었지만, 여하간 저와 취급 자체가 달랐다. 단독 호텔 룸에 대기실을 꾸며준 자신과 달리 신카이 카나타는 스태프들이 사용하는 야외의 천막이었다.
“차별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머리를 세팅하며 슬쩍 테라스 쪽을 바라보자 매니저는 고개를 저으며 “별걸 다 신경 쓰네.”라며 웃었다. 그러게. 이런 촬영장의 격차를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니고 본 것도 아닌데 별것이 다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런 차별에도 불구하고 브랜드의 모델이 될 얼굴, 천막에서 탄생한 MONDE의 신카이 카나타는 완벽했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와 그의 눈동자와 어울리는 에메랄드빛의 셔츠, 그리고 흰 쇼츠. 새 시즌 MONDE의 콘셉트가 바다의 보석이라더니 그 단어와 완벽하게 잘 맞아 떨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무어라 생각할지 몰라도 일단 하카제의 눈에는 그랬다.
“긴장해?”
슬쩍 타는 목을 침으로 눌러 삼키며 하카제는 성큼 신카이 카나타에게로 다가갔다. 스트라이프에 작은 산호초의 자수가 들어간 제 셔츠도 마음에 들었지만, 신카이 카나타의 셔츠가 무척이나 예뻐 보였다. 셔츠가 예뻐 보이는 거 맞겠지. 머릿속에 차오르는 허튼 생각도 침으로 눌러 삼켰다.
“네. 조금요.”
신카이가 대기 되어있는 행거를 보며 말했다. 오늘 입어야 할 의상과 소품들이 알 수 없는 번호와 알파벳으로 정리되어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아. 별로 어렵지 않아.”
여유 있는 척 떠들며 하카제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의자에 자릴 잡았다. 그 옆에는 다행히도 같은 종류의 의자에 신카이 카나타라 종이가 붙어있었다. 그가 따라 앉기 무섭게 오늘 사진을 담당한 작가와 카메라 감독이 와 인사를 건넸다. 사진작가는 지난 시즌에도 함께한 인물이었고 카메라 감독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근처에 있던 매니저가 “독립 영화로 유명한 감독이야. 매니아 팬들도 많고. 본사에서 직접 골랐다더라.”라 속삭였다. 지난 시즌도 그렇고 지지난 시즌도 그렇고 MONDE는 화보 자체보다 캠페인 영상에 더 공을 들였다. 아무래도 최근 트랜드가 영상 광고라 그런 모양이었다.
“그럼 촬영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현장 스태프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침에 매니저에게 안내받았던 대로 촬영은 바다로 정확하게는 요트 위였다. 미리 수배한 흰 요트에서 이뤄진다며 그는 “인생 첫 요트!”라 흥분했다. 하지만 온갖 촬영 스태프를 비롯해 개인 스태프도 모자라 홍보를 위해 불러들인 연예 방송팀까지 다 태울 수는 없어 요트에 오르는 건 최소 인원, 그 외엔 보트에 나눠 올랐다.
“바다 수영할 틈이 있으면 좋겠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 신이 난 매니저가 허튼소리를 했다. 이리저리 카메라를 들이대는 그를 두고 하카제는 뒤따라 오는 신카이 카나타의 팀을 살폈다. 여전히 별 표정이 없는 신카이 카타나의 곁에서 그의 매니저가 “잘할 수 있지? 감독님들에게 잘 보여야 해. 알았지?”라며 긴장한 얼굴로 쉴 새 없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마치 자식을 세상 밖에 처음 내놓는 사람처럼 보였다. 버라이어티 방송에도 몇 번 나갔고 참치 해체 쇼까지 할 정도면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인터넷에서 보았던 영상을 떠올리며 하카제는 조용히 웃었다.
“그럼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에 하카제는 매니저가 걸쳐준 외투를 벗고 요트로 나섰다. 매우 추운 날씨는 아니었으나 반팔, 반바지, 샌들로 서기에는 확실히 좋은 계절은 아니었다. 부르르 떨리는 몸을 애써 감추며 카메라 앞에 서자 감독이 다가와 콘셉트와 컷들을 설명했다. 오늘 오전, 매니저에게 미리 들었던 설명이었다.
“이번 시즌의 콘셉트가 바다의 보석이에요. 쉽게 찾아지지 않는 이 보석을 우리는 사랑으로 표현할 거고 카오루씨와 카나타씨가 그 보석을 지닌 커플이길 바래요. 하하, 카나타군 표정 봐. 물론 편한 콘셉트는 아니지만, MONDE에서 원하는 그림이니 별수 있나요. 이런 내용이 아니었다면 여기 여자 모델이 있었겠죠.”
마치, 네가 아니라. 설명을 못 들었는지 당황해 표정이 어그러진 신카이 카나타를 향해 카메라 감독이 웃으며 비꼬았다.
“뭐.. 괜찮아요, 저는. 화보로도 비슷한 주제로 찍어본 적이 있어서.”
그때도 주제는 사랑이었다. 더 나아가는 일본이란 국가 메시지에 아부하듯 찍어낸 화보였다. 언데드는 모두 남자 모델들과 함께 커플 화보를 찍었고 가장 진한 사진을 남겼던 오토가리 아도니스는 한동안 그 사진으로 멤버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별로 어려울 건 없었는데, 어려워 죽겠다는 얼굴을 한 신카이 카나타를 앞에 두니 어려울 거 같았다.
“긴장 풀어. 뭐 우리가 90분까지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배우도 아니니 엄청난 감정이 필요하진 않을 거야. 그냥 어려우면... 그래, 친구라고 생각해. 모험을 왔다거나?”
음, 아닌데. 연인의 여행과 친구와의 모험은 분위기와 느낌부터 다른데. 하지만 긴장하는 상대를 위해 설명은 이 정도가 적당해 보였다. 그 말에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신카이의 표정이 조금 풀려나갔다. 아니, 연인이면 좀 어때. 뭐 어려운 거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툴툴거림을 누르고 하카제는 웃으며 카메라 앞에 섰다.
촬영은 순조로웠다. 모델 일이 처음인 신카이 카나타가 조금 어려워했지만, 금방 여유를 되찾았다. 셔터소리에 포즈를 바꾸고 얼굴을 바꾸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기에, 하카제는 신이 난 사진작가의 사인에 맞춰 몸을 움직이며 자세를 잡았다. 홍보 영상도 함께 촬영되었다. 그렇게 약 네 벌의 옷을 갈아입었을 즈음
“혹시 카나타군, 뛰어들 수 있어?”
보트에 올랐던 영상팀에서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뛰어들다니? 어딜? 바다에? 믿을 수 없는 요구에 농담하지 말라며 입을 열려는 순간, 신카이 카나타의 매니저가 더 빨랐다.
“그럼요! 됩니다!”
누가 저한테 물었나? 왜 자기가 대답해? 쏜살같이 튀어나온 말에 상대를 바라보았으나 이미 늦었다. 제 매니저가 대답한 덕에 모양이 이상해진 신카이 카나타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애초에 잡혀있던 컷도 아니었다. 오키나와까지 날아와 천막에서 바람맞아가며 머리며 얼굴이며 다 세팅해놨더니 바다에 뛰어들라니. 한여름에도 함부로 요구해선 안 될 컷이었다.
“잠깐-”
손을 잡았다. 눈도 마주쳤다. 웃기도 많이 웃었다. 언데드 동료들과도 해보지 않은 살가운 포즈들을 수십 번을 했다. 그들이 원하는 그림, 나아가 브랜드가 추구하는 콘셉트를 위해서. 그런데 굳이 거기까지? 하카제는 항의하려 했으나 그보다 제 팔을 잡아 오는 신카이 카나타가 빨랐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멈춘 입술을 다시 열었다.
“굳이 그 장면이 필요할까요? 감독님? 예정된 콘티에는 없었던 거 같은데요~”
하하, 바람도 찬데. 분위기가 험악해지지 않게 살짝 애교를 섞어 물었다. 이 자리에서 중심을 잡고 싶어 하는 이에게는 반항보다 적당히 맞춰주는 게 더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뭔가 임팩트가 없어서 말이야. 다정한 연인도 좋지만, 30초 나갈 영상에서 다정한 것만 보여주기엔 좀 약하잖아. 현실에서 동떨어진 연인, 모든 걸 잊고 세상에 단둘만 남은 순간, 그럴 때 충동적으로 미친 사람처럼 굴어보는 거지. 너무 즐거워서, 행복해서. 날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고 누구도 우릴 멈추지 못해! 뭐 그런 느낌을 담아서?”
그러니까. 그 느낌이 뭔데요. 그리 따져 묻고 싶었지만 흥분해 외치는 감독은 말린다고 말려질 거 같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선택지를 내밀었다.
“그러면 제가 뛰어들게요.”
“안돼!” 저 멀리서 매니저가 눈치 없이 외쳤다. 그 말에 웃으며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에이, 내가 보고 싶은 건 카오루씨가 아니야. 한 번에 가자고. 젖어버리면 다시 준비하는 데 오래 걸리니까 시간 잡아먹지 마요.”
마치 NG를 내면 가만 안 두겠다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아까 콘셉트 설명 때 신카이 카나타가 내켜 하지 않았던 게 마음에 남은 건가. 그 정도로 쪼잔하게 보이진 않는데. 하지만 현장에 있다 보면 별별 감독들을 다 만났다. 하카제는 슬쩍 입술을 물었다. 차라리 겨울 서핑도 즐기는 자신이 뛰어드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 거기다 너무 즐거워서, 행복해서 미친 짓을 벌이는 사람을 연기하기엔 신카이 카나타는 좋은 배우는 아닐 거 같았다.
“풀 샷으로 찍을 거니까, 정말 세상에 우릴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라는 느낌으로 부탁해요!”
멀어지는 보트 위에서 감독이 스피커로 외쳐댔다. 이 사달을 낸 신카이 카나타의 매니저는 뭐가 좋은지 웃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화이팅 소리나 하고 있었다.
“준비 운동이라도 해요. 갑자기 뛰어들면-”
“그럼 갑니다!!”
잠깐, 잠깐. 말릴 틈도 없이 큐 사인이 떨어졌다. 어차피 지금 내는 NG는 NG도 아닐 거 같았기에 하카제는 서둘러 신카이 카나타를 붙잡으려 했다. 준비 운동은 해야지. 몸에 물도 좀 묻혀야지. 서핑해봐서 아는데 그런 여름 셔츠로 뛰어들기에 바다라는 게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라니까. 하지만 그 말은 손끝에서 끊어졌다. 스르륵 손에서 빠져나간 신카이 카나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공중으로 뜬 몸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다가왔다. 제 속도 모르고 그의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흰 요트 밖으로 떨어지는 몸을 당장 낚아채고 싶었지만, NG를 낼 타이밍은 끝났다. 하카제는 가까스로 정말 가까스로 제 몸에 힘을 주었다.
“오케이!”
잘나고 대단하신 사인이 단숨에 나왔다. 그제야 하카제는 요트 난간으로 붙었다.
“카나타군?”
낮게 혀를 차며 달라붙은 난간에서 신카이 카나타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파랗고 짙은 바다만이 고요히 떠 있었다. 신카이 카나타가 보이지 않았다.
***
“카나타군?!”
목소리가 높아졌다. 뒤늦게 신카이 카나타의 매니저가 달려왔다. “설마, 수영 못하는 거 아냐?” 스태프중 누군가가 작게 걱정을 담아 물었다. “아니야, 방송에서 수영 잘한다고 그랬어. 바다 좋아하잖아. 카나타군.” 그 불안을 잠재우려는 듯, 다른 스태프가 빠르게 외쳤다.
“수영... 못해요.”
난간을 쥔 그의 매니저가 당황한 눈으로 중얼댔다. 아니, 그걸 알면서도 할 수 있다고 한 거야? 차게 식었던 머리가 뜨거워졌다. 하카제는 입고 있던 가디건을 빠르게 벗어 던졌다. 가죽 샌들도 차 뒤로 던졌다. 야!!! 제 매니저의 비명이 들려왔지만, 난간의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풍덩,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찬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젠장, 얼어 죽겠네. 순간적으로 굳어버린 몸을 재빠르게 풀어내곤 주위를 살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바둥대는 신카이 카나타가 눈에 들어왔다.
해산물을 좋아하고 바다를 좋아하는 유성 블루. 내보인 이미지가 그러니 수영을 못한다는 생각은 자신을 비롯해 이 자리 누구도 하지 못했다. 그가 해산물을 싫어하고 바다에도 그리 관심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아니, 못하면 못 한다고 말을 했어야지. 미련하긴. 닿지도 않을 짜증을 풀어내며 하카제는 뒤에서부터 신카이 카나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물 밖으로 빼내었다. 어릴 때 잠깐 했던 해양 구조 아르바이트에서 배운 게 이제야 쓸모가 있었다.
“괜찮아?”
“쿨럭!”
“갑자기 뛰어들어서 다리에 쥐가 났나 봐요!!”
웅성대는 스태프들을 향해 하카제가 빽 외쳤다. 그리곤 요트가 아닌 배 쪽으로 몸을 틀었다.
"기다리세요!"
방향을 틀어 헤엄치자 현장 스태프가 소릴 질렀다. 그리고 이어서 누군가가 바다로 몸을 던졌다. 혹여 있을 사고에 대비해 배에 오른 구조 요원인 듯 보였다. 그의 도움으로 우선 정신을 못 차리는 신카이 카나타를 배 위로 올린 후 따라 올랐다. 카오루! 바다에 빠진 건 이쪽인데 보트로 옮겨 탄 매니저가 허겁지겁 달려와 커다란 타올을 둘러주었다.
"난로 있어요? 난로?!"
"난 괜찮아. 카나타군은??"
아직 겨울에 닿지 않은 날씨라 난로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사람들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수건에 외투에 덮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덮고 있는 신카이 카나타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매니저가 손을 문지르고 무어라 이야길 하고 있었지만, 신카이 카나타에겐 닿지 않는지 그는 덜덜 입술을 떨며 시선을 한 곳으로만 떨어트렸다.
"좀 진정해야 할 거 같으니까 자리 좀 비켜주실래요?"
이런 상황이 처음일 그의 매니저를 대신해 하카제는 기꺼이 나섰다. 커다란 사고를 마주할 뻔했던 사람들이 급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선내가 금방 비워졌다.
“괜찮아?”
“괜.. 괜찮습니다.”
“매니저님께 물은 거 아닙니다.”
대신 대답하는 매니저의 말을 잘라냈다. 원인을 따지자면 많았지만, 그의 몫도 있어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못하겠으면 이야기해. 내가 적당하게 핑계 만들어서 접게. 더 촬영분도 없어.”
연예 방송과의 인터뷰가 남아있긴 했지만, 그거야 미뤄도 그만이었다. 사람이 먼저지 그깟 인터뷰가 뭐 중요하다고. 하지만 일 이야기에 정신이 들었는지 신카이 카나타가 고개를 들었다. 반짝이던 푸른 머리가 물에 젖어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여.”
“...괜찮아요.”
그깟 인터뷰, 하지만 신카이 카나타에겐 중요한 일이겠지. 하아, 한숨을 막지도 못하고 뱉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에 여전히 달싹이는 입술. 제대로 웃고 말이나 할 수 있을까. 그가 어린 애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 애처럼 느껴졌다. 물에 빠졌으니 비슷하다면 비슷하지만.
“카나타군. 난 단 거 좋아해.”
하카제는 슬쩍 무릎을 굽혀 앉으며 입을 열었다.
“핫케이크 완전 좋아해. 그 위에 메이플 시럽까지 세트로. 휘핑크림 올리거나 초코 소스도 좋아.”
“...그렇군요.”
“카나타군은 뭘 좋아해?”
“..저요?”
“응. 꼭 음식이 아니어도 괜찮아. 그냥 카나타군이 좋아하는 걸 떠올려봐.”
가끔 눈 뜨기 싫은 아침이 있다. 가끔 서기 싫은 무대가 있다. 가끔 노래를 부르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그럴 때마다 하카제는 억지로 좋아하는 것에 대해 떠올렸다. 핫케이크, 서핑, 바다, 여름, 아이스크림, 메론 소다 등등. 그런 걸 떠올리고 있으면 그걸 위해서 힘내야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무대를 끝나면 핫케이크를 먹어야지. 스케줄 다 끝내고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사 먹어야지. 투어가 끝나면 서핑하러 가야지. 좋아하는 것들은 언제나 긍정적인 기운을 주고 힘을 주었다. 다시 웃고 걸어갈 내일도 주었다.
“그러니까 카나타군도 좋아하는 걸 떠올려. 그럼 기분이 나아질 거야.”
“모르겠어요.”
“너무 광범위하면 주제를 하나 정해보자. 좋아하는 음료는?”
“...레모네이드요.”
“그럼 인터뷰 끝내고 내가 레모네이드를 사줄게.”
“...”
“오키나와에서 가장 맛있는 레모네이드를. 그러니까 레모네이드를 생각하면서 후딱 해치우자.”
이왕이면 하카제 카오루가 사주는, 이라고 앞에 붙이면 더 좋고. 농담처럼 하지만 조금의 진심을 담아 덧붙이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는지 신카이 카나타가 미세하게 웃었다. 그리곤 끄덕였다.
“좋아요. 레모네이드.”
카오루가 사주는, 정확하게 대답했다.
***
갑작스러운 사고로 가라앉은 현장 분위기였지만, 촬영은 무사히 종료되었다. 그나마 방송 인터뷰에서 신카이 카나타가 생각보다 잘 웃고 적극적으로 나서준 덕에 눈치만 보던 스태프들도 뒤에 가서는 조금씩 웃으며 마무리를 지었다. 모두가 애쓰는 와중에 정작 원인 제공자인 감독은 사과 한마디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구는 그의 행동이 짜증 나 하카제는 몇 번이고 눈치를 주었지만, 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붙잡는 신카이를 보고 참았다.
하지만 촬영이 끝나고 하루 뒤, 모든 포털 사이트에는 촬영 당시 연예 방송팀이 찍은 영상과 함께 온갖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심 감독의 강압적인 분위기와 갑질에 포커스가 맞춰지길 기대했으나 대부분 기사는 신카이 카나타를 구하러 뛰어든 하카제 카오루에게 맞춰져 있었다. 이렇게 멋진 기삿거리를 묵히는 건 말도 안 된다던 실장의 솜씨였다. 덕분에 MONDE의 캠페인은 공개도 전에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다. 위험하게 촬영된 장면인 만큼 어떻게 포장되어 나오는지 다들 궁금해했다.
대망의 캠페인 발표일. 생각보다 많아진 대중의 관심에 더 불을 붙이기 위해 동 시간대 모든 채널의 광고를 확보했다. 화제성을 안고 더 나아가겠다는 브랜드의 전략이었다. 추운 겨울 날씨와는 다른 영상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에메랄드빛 바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연인의 모습, 마지막으로 바다로 뛰어드는 신카이 카나타. 실제로 수영도 못한다는 그는 영상 속에서만큼은 마치 바다로 돌아가는 인어처럼 매끄럽게 물로 사라졌다. 깊게 흔들리는 수면 위로 MONDE라 브랜드 이름이 뜨고 끝. 30초의 광고가 그렇게 세상에 나갔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감독의 실력만큼은 최고였다.
그리고 광고의 효과는 대단했다. 영상 사이트에서 광고 조회 수는 매일매일 최고치를 갈아 치웠고, 늘 차트 밖에 있었던 유성대의 싱글이 역주행으로 1위까지 올라왔다. 하카제 카오루도 그를 구하러 바다에 뛰어든 일 때문인지, 약간은 가볍게 보이던 이미지가 좋은 방향으로 달라졌다.
이게 모두 촬영이 끝나고 두 달 만에 일어난 일. 정신없이 화제의 중심에 올라 무사히 언데드의 새 싱글로까지 반응을 이어가 하카제 카오루는 데뷔 이래 가장 핫한 시기를 맛보고 있었다.
“라고 해도. 역시 유성대만큼은 아니려나.”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완전한 겨울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카제는 홀로 중얼거리며 방송국 앞에 대기하고 있는 방청객 무리를 바라보았다. 알록달록 무지개색이 찬 겨울 속에서도 묵묵하게 자릴 지키고 있었다.
“오늘 유성대가 사전 녹화라고 했던가?”
옆에 나란히 걸으며 오오가미 코가가 물어왔다. 금요일 저녁마다 진행되는 음악 방송이 있는 날. 언데드는 컴백하고 매주 나가고 있었고 유성대는 오늘 첫, 데뷔 후 첫 출연이 잡혀있는 날이었다. 그 영광스러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많은 팬이 방청 신청을 한 모양이었고 방송국에서는 따로 사전 녹화를 잡았다. 첫 출연에 엄청난 특혜라며 오오가미가 곁에서 툴툴댔다.
“뭐 어때. 잘 되면 좋은 거지.”
“하. 뭐야. 친구 생겼다고 챙기는 거야? 답지 않게.”
“친구라니.”
아직 그런 단어를 쓰기엔 실제론 딱 3번 만난 사이였다. 그 정도면 그냥 남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진실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과 신카이 카나타가 대단한 절친인 거처럼 대했다. 인터뷰나 방송에서도 몇 번 그에 관한 질문을 받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대충 속여 대답한다는 게 어찌나 어렵던지. 그나마 처음에 그의 영상들을 찾아보았던 게 조금 도움이 되었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도 오간 방송국 로비를 지나 대기실로 향하자 반가운 스태프들이 웃으며 반겨주었다. 아직 그대로인 얼굴도 있었고 새로 보는 얼굴도 있었다. 대기실에 편하게 자리 잡기 무섭게 조연출이 나타나 매니저를 불러갔다.
“그럼 난 오랜만에 온 방송국 공기 좀 만끽하고 올게.”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문고리부터 잡으며 보고하자 막 소파에 눕던 사쿠마 레이가 웃었다. 마치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안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짜증 났지만, 따지고 들면 무덤을 팔 거 같아 그만두었다. 그래, 방송국 공기는 무슨. 한두 번 맛보는 공기도 아니고 어디를 가나 공기 맛은 늘 똑같았다. 하카제는 “웃기지도 않는 소릴 하네.”라는 오오가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 아까 슬쩍 확인했던 유성대의 대기실 쪽으로 향했다. 굳이 인사를 할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엔 절친한 친구로 알려져 있으니까 이상하진 않겠지? 괜히 긴장되었다.
하지만 대기실로 찾아갈 필요도 없이 몇 걸음 걷지 않아 밖에서 본 팬들만큼이나 알록달록한 복장을 한 유성대가 눈에 들어왔다. 첫 출연이라 그런지 다들 얼굴에 긴장 그리고 흥분이 들러붙어 있었다. 스태프의 말을 경청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하카제는 자연스럽게 가장 뒤쪽에 서 있는 신카이 카나타에게로 눈을 고정했다. 두 달 전, 오키나와에서 호텔 로비에서 레모네이드를 함께 마신 이후 처음이었다. 오키나와에서 가장 맛있는 거로 사주겠다 했지만, 스케줄상 불가능했던 게 아직 살짝 마음에 걸렸다.
“카나타군.”
스태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카제는 조용히 신카이 카나타를 불렀다. 부를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닌데 등을 돌리는 그를 보자마자 입이 먼저 움직였다. 신카이를 비롯한 다른 얼굴들까지 이쪽을 바라봤다.
“어, 카오루.”
다행히 이름을 까먹진 않은 모양인지 제대로 알아봐 주었다. 하카제는 잘 모를 안도감을 품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유성대의 다른 멤버들이 “언데드다.”라고 저를 알아봤지만, 굳이 인사를 하진 않았다.
“잘 지냈어?”
“네.”
신카이 카나타가 웃으며 끄덕였다. 정말 잘 지낸 모양이네. 카메라 앞에서야 잘 웃었지만, 이렇게 조명도 렌즈도 없는 곳에서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거 같았다.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놀이터에서 그가 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니 그 웃음이 조금 편하게 다가왔다. 홀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신카이 카나타가 유성대에게 이런 기회를 주게 되었으니, 부채감도 덜었겠지. 욕심이나 의욕도 좀 생겨 보였다.
“아, 카오루 인사해요. 여기는-”
“알아. 유성대. 모리사와군과는 저번에 같이 방송도 했는걸.”
아는 척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소개까지 하는 마당에 거절할 수는 없어서 대충 인사를 했다. 고맙게도 멤버 중 하나가 눈치가 있는 모양인지 “그럼, 대화들 나누십쇼! 저희는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겠슴다!”라 자릴 비켜주었다.
“어때? 뮤직 스테이지 출연하는 기분은? 나는 진짜 떨렸는데.”
뮤직 스테이지는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음악 방송이었다. 금요일을 마무리하며 모두가 보는 프로로 가수라면 누구나 출연하고 싶어 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언데드가 처음 이 무대에 오를 때, 하카제는 잠도 자지 못했다. 학창시절 그렇게 챙겨보던 방송에 이제 자신이 나온다니, 조금 꿈 같아서.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사무소 식구들도 팬들도 모두 그랬다.
“얼떨떨하네요. 조금 긴장도 되고요. 생방송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노래하는 건 처음이라.”
그가 손을 조물거리며 이야기했다. 꼭 잡아주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하카제는 웃었다.
“나도 그랬어. 우리 멤버중에 오오가미는 화장실만 몇 번을 오갔다니까. 그래도 지금은 다 추억이야.”
“그런가요?”
“응. 카나타군도 곧 그럴 거야. 지금 이 긴장이나 떨림도 다 익숙해지게 될 거야.”
“참 이상해요.”
응원을 담아 던진 말에 신카이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카오루가 말하면 정말 그렇게 될 거 같아요.”
“..그래?”
“네. 오키나와에서도요. 레모네이드를 생각하면 괜찮다고 그랬잖아요.”
“...”
“그때, 정말로 그랬거든요. 좋아하는 걸 떠올리니까 차가웠던 몸도 바다도 다 괜찮았어요.”
그래서 오늘도 그러려고요. 그가 스테이지가 있는 스튜디오 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방청 입장이 시작되었는지 안이 소란스러웠다. 유성대의 첫 출연을 축하하고 기념하고 응원하기 위해 모인 팬들의 목소리가 웅웅 복도를 울렸다. 그 소리가 긴장되는지 신카이 카나타의 기다란 손이 마이크를 꾹 쥐었다.
“유성대, 오키나와 바다, 레모네이드 그리고 카오루.”
“...응?”
“제가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
“카오루 덕분이에요. 앞으로 더 욕심내서 나아가고 싶어요.”
그렇게 말한 후, 신카이 카나타가 돌아섰다. 자신을 부르는 스태프를 향해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카제는 조심스레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쿵 쿵 쿵. 심장이 요동치듯 뛰었다. 어떤 것에도 관심과 흥미를 두지 않고 표정 없이 마주했던 신카이 카나타는 이제 없었다. 그는 하나둘, 여러 가지를 배웠고 배워나가며 앞으로 걸어 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다 하카제 카오루 덕분이란다.
“젠장..”
심장의 울림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하지만 굳이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알 수 없이 덜거덕대던 소리가 아니라 분명히 신카이 카나타를 떠올리며 뛰는 소리였다. 빠르고 요란했지만, 정확하고 반듯한 소리. 하카제는 그 소리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와 이번에는 정말로 맛있는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싶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누구도 속이지 않는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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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카나 교류회 배포본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