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밤의 진심
2015. 4. 22. 22:45



http://sannen-sei.tistory.com/47 의 외전










"어서 와."



커피를 내리던 아사히가 고개만 돌려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하지만 그 인사를 받을 정신도 없이 사와무라는 크게 한숨을 쉬며 카페의 바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왜 또 무슨 일인데 그래? 걱정스러운 친우의 목소리에 주머니에 꼬깃꼬깃하게 접어 가지고 나온 편지를 내밀었다. 



"스가야?"
"그래, 그 망할 자식이다."



아사히의 질문에 이를 갈며 대답했다. 달랑 한 통의 편지는 참으로 간단했다. 



[나 잘 있어. 걱정하지 마.]



그래, 잘 있겠지. 걱정해도 소용없겠지. 스가와라 코우시가 그냥 고집인가? 하지만 적어도 집에 전화 정도는 두었으면 했다. 자신의 명의라도 괜찮으니 휴대폰이라도 하나 쥐여주고 싶었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낡아 빠진 컴퓨터라도 들여 메일 정도는 보내줬으면 했다. 하지만 고작 저 편지가 전부였다. 꽁꽁 숨어버린 친구의 소식은 언제나 그렇게 간단하고 단출하게 날아들었다. 



"아직도 너희 조부모님네, 그 집에 있는 거야?"
"응."



사와무라는 답답한 심정으로 대답하며 테이블로 엎어졌다.



어느 날 스가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 당장 숨어 있어야 할 곳이 필요한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며. 울음에 잠긴 목소리로 횡설수설하는 친구를 달래며 사와무라는 상황을 요구했다.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런 전화를 했는지, 어디로 숨는다는 이야기인지 그리고 또 왜 숨어야 하는지를. 설마 범죄라도 저지른 걸까?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답을 요구하는 사와무라에게 우는 목소리는 어렵게 이름 하나를 뱉었다. "토오루." 단지 겨우 그 이름 하나를 들었을 뿐인데도 사와무라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스가와라 코우시를 뒤흔드는 문제는 언제나 저 이름에서 비롯되었고 저 이름에서 시작되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숨는다니. 어디로? 그렇게 고민하던 사와무라의 머릿속으로 그 옛날 자신의 어린 시절 여름 방학이나 겨울 방학을 가득 메우던 풍경이 떠올랐다. 지금은 텅 비어있는 조부모님의 낡은 주택. 사와무라는 차근차근 우는 스가를 달래며 그 주소를 불러주었다.

토오루라는 이름과 숨는다는 말로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은 2가지였다. 오이카와 토오루로 인해 원하지 않지만 숨는다, 혹은 원해서 숨는다. 사와무라 다이치가 알고 있는 오이카와틀 떠올리면 적어도 전자는 절대로 아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스가와라 코우시가 싫어할만한 짓은 절대로 하지 않는 남자였다. 사와무라는 절대로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은 하지 않지만 적어도 자신의 오랜 친우에게 있어서 좋은 연인이라는 것은 인정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결국은 후자. 스가와라 코우시가 원해서 숨는다. 오이카와 토오루에게서. 도대체 왜? 자신의 반대에도 쑥스럽게 얼굴을 붉히며 그와 연인이 되겠다고 선언했던 녀석이었다. 아직 어른이 채 되기도 전에 자신의 감정을 모두 인정하고 밝혔던 녀석이었다. 그랬던 녀석이 왜, 이제 와서, 무슨 이유로 자신의 연인을 두고 숨겠다고 이야기하는지 사와무라는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그 궁금증을 안고 지내던 어느 날, 사와무라는 그 추억의 집으로 향했다. 드르륵 문을 열고 자신을 반기는 스가와라 코우시는 얼마나 울고 지내는지 퀭한 눈이었다. 엉망인 그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텁텁 입이 말라왔다. 자신을 안으로 들이곤 닦달하는 질문에 가만히 상황을 설명하는 꼴이 미련해 보여서 바보 같아 보여 사와무라는 조금 화가 났다. 



"곁에 없는 게 무슨 사랑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서 지켜주고 같이 버티는 게 사랑이지."



스가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렇게 매섭게 외쳤다. 이렇게 아파할 거면 그냥 모르는척 붙어서 지내지. 답답한 마음이 목을 타고 흘렀다. 그런 사와무라의 화를 받아내며 너덜너덜해진 그는 살포시 웃으며 대답했다.



"내 사랑은 이래."
"..."
"나는 토오루의 소문이 되고 싶지 않아. 추문이 되고 싶지 않아. 다이치."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반짝이면 반짝일수록, 그가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하고 걱정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그냥 지켜보았던 건 그 과정에도 오이카와 토오루가 스가와라 코우시를 지켜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스가와라 코우시가 숨어버리도록 두었다. 그가 사라지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홀로 울게 만들었다. 그 사실로도 사와무라는 더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스가를 홀로 두고 다시 도쿄로 올라온 밤, 사와무라는 자신의 맨션 앞에 서 있는 오이카와를 발견했다. 울던 스가와 다름없을 정도로 망가진 사내는 이 추운 겨울에 외투 하나 없이 덩그러니 그렇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담배를 태웠는지 그의 발치에는 이미 수북이 비틀어진 꽁초들이 쌓여있었다. 사와무라는 꾸역꾸역 튀어나올 것만 같은 한숨을 뒤로하며 그의 앞에 섰다. 



"무슨 일이야?"
"코우시 어딨어?"



용건은 간단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맨션 앞 화단에 엉덩이를 걸치고 선 사내는 살짝 고개만 들어 자신을 올려보았다. 그 눈빛이 마치 죽은 생선의 것과 같다고 사와무라는 생각했다. 퀭하고, 감정이 없었다.



"코우시가 어디있냐니, 그걸 왜 나에게 물어? 싸웠어? 너희?"



머릿속으로 자신의 조부모님의 집을 떠올리며 사와무라는 깔끔하게 거짓말을 뱉었다. 



"코우시 혼자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지지 못해."
"..."
"네가 도왔을 거야. 그렇지? 사와무라군."
"사라졌다니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어. 스가가 사라졌다고?"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가 자신을 파악하려 굴었지만 사와무라는 당당하게 뱉었다. 자신이 이렇게 거짓말에 능한 사람이었던가? 아니, 오이카와 토오루는 아마 조금도 이 말을 믿고 있지 않아 보였다. 그렇기에 사와무라는 자신의 거짓말이 얼마나 어리숙하고 어색한지 창피할 지경이었다. 그 우스운 1인 연극을 지켜본 오이카와는 비릿하게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마 위로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입을 열었다. 



"네가 말 안 해줘도 이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낼 거야."
"..."
"그러니까, 내가 찾아낼 때까지-"
그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코우시를 잘 부탁해."



그 목소리는 어둑한 이 밤을 닮아 있었다. 깊고 고요하고 정적에 가득 찬. 슬픈 것인지, 아니면 화가 난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말은 진심이었다. 잘 부탁한다는 말이 담고 있는 애정이 어마어마해 사와무라는 하마터면 돌아서는 그의 등에 스가가 숨어버린 곳을 알려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되었다. 큰 결심을 하고 저 오이카와 토오루를 지키기 위해 버티고 있는 스가를 생각하면 그래서는 안되었다. 사와무라는 그렇게 입을 다물었다. 그 후 오이카와는 가끔씩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디에 다녀왔다. 어디에 간다. 아주 간단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어렵지 않게 그가 지금 스가와라 코우시를 찾아 이 세상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사와무라는 알 수 있었다. 그 메시지는 일종의 어필과 가깝다고 느꼈다. 나 이만큼 그를 기다리고 있어, 그를 찾고 있어, 그를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까 제발 그가 있는 곳을 알려줘-라는.





두 사람의 숨바꼭질은 도대체 언제 끝이 날까. 아니, 끝이 나긴 하는 걸까. 스가와라 코우시는 적어도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평생을 도망칠 작정인 듯 보였다. 벌써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고 이 더운 여름에도 여전히 두 사람의 숨바꼭질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사히가 내미는 얼음이 가득 찬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빨대를 휘저으며 사와무라는 카페 한구석에 놓인 TV로 시선을 돌렸다. 음소거가 된 그 화면에는 이 여름에 보기에도 더워 보이는 세미 수트를 입은 오이카와 토오루가 유명 쇼프로의 게스트로 나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사히, TV 소리 좀 켜봐."



어차피 손님도 없는 카페였다. 카운터 아래에서 리모컨을 찾아낸 아사히가 버튼을 눌러 소리를 키워냈다. 



-"그나저나 녹화하는 오늘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인데 오이카와 선수는 초콜릿 좀 많이 받았어요?"
-"네. 어마어마하게 받았죠. 구단 사무실과 제 에이전트 사무실에 팬 분들이 보내준 초콜릿이 가득 쌓였어요."



발렌타인? 사와무라는 사회자의 말에 인상을 구겼다. 지금은 7월이었다. 5개월 전의 발렌타인에 찍었다는 녹화가 왜 이제서야 방송을 타는 걸까. 이미 지나버린 시즌에 대한 목표를 말하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참으로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며 사와무라는 커피로 목을 축였다. 반짝이는 브라운관에서 오이카와는 무척이나 슬픈 얼굴로 스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애정이 가득 담긴 말들을 뱉으며 그는 자신을 상처입히는 듯 보였다. 스가는 과연 이 방송을 보고 있을까. 아니 아마 보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 집엔 TV가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군, 사와무라는 쓰게 웃으며 다시 커피로 입을 가져갔다. 



"이거 재방송인데."
"뭐?"
"재방송. 지역 케이블 재방송이라고."



아사히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하, 재방송이라. 사와무라는 미적지근한 마음으로 어설프게 괜찮은 척 웃고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지켜보았다. 툭 치면 무너질 것 같은 미소로 그는 웃고 있었다. 아마 저 연극에 스가와라 코우시는 깜박 속아 넘어가겠지. 그가 괜찮다고 믿고 지내겠지. 스가와라 코우시는 오이카와의 문제라면 약간 멍청해지는 경향이 강했다. 



-"지금 찾고 있거든요."



화면을 타고 슬픔에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시간이 흐른 지금도 오이카와 토오루는 스가와라 코우시를 찾고 있었다. 쭈욱 마지막 남은 커피를 빨대로 빨아 들이키던 사와무라는 주머니 속에서 지잉지잉 울리는 휴대폰의 진동음에 허리를 펴 손을 넣었다. 메시지였는지 뚝 끊긴 진동음을 손가락으로 걸어 끄집어내며 액정을 확인했다. 화면 가득 사와무라가 알고 있는 장소의 주소가 찍혀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 낡은 집. 아니, 지금은 스가와라 코우시가 유일하게 숨을 쉬고 숨어있는 그 집. 멍하니 뜻밖의 메시지를 눈으로 담으며 사와무라는 발신인을 확인했다. 발신인은-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벌떡, 몸을 일으킨 사와무라는 급히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하고 울리는 신호음이 길고 초조해 심장이 쿵쿵 뛰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신호음이 아슬하게 끊어질 즈음 찰칵하는 연결음이 들려왔다. 그리곤 너무도 평온한 목소리가 



-"여보세요?"



태평하게도 말을 걸어왔다. 



"그러지 마."



사와무라는 자신이 누군지도 밝히지 못하며 그를 말렸다. 



"그냥 둬. 그걸 원해. 스가는 그걸 원하고 있어. 그러니까 그 녀석을 그냥 둬. 오이카와."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오로지 오이카와 토오루를 향한 애정으로 살아가는 녀석이었다. 그걸 지켜내기 위해 이 긴 시간을 버티고 참고 살아왔다. 그런 스가와라 코우시를 물거품으로 만들지 말아줘. 사와무라는 간절하게 부탁했다. 



-"나는 사와무라군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없는데."



하지만 드디어 원하는 것을 발견한 오이카와는 냉정했다.



-"지금 역에 도착했어. 여기, 진짜 아무것도 없더라. 이런 데다 꽁꽁 숨겨두니 못 찾았지."



수화기를 타고 마른 웃음이 들려왔다.



-"게임 끝. 수고했어, 사와무라군."



그리고 고마워. 무엇이 고맙다는지 사와무라 다이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고맙다는 말은 조금의 의도도 담지 않은 순수한 것이었다. 뚜우-뚜우- 끊어진 전화의 마지막 신호음을 들으며 어쩐지 허탈한 마음에 어색하게 웃으며 여전히 반짝이는 TV로 다시 시선을 던졌다. 



-"그 사람이 이 방송을 본다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요?"
-"도망가지 마. 거기 있어. 내가 갈게."



정말이지 끝내주는 타이밍이었다. 브라운관 안에서 서글프게 웃으며 그리 말하는 오이카와를 보며 사와무라는 끊어진 제 휴대폰만 바라보았다. 자신은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오이카와보다 더 빨리 도달할 수 없었다. 전화도, 메일도, 편지도, 스스로도. 참 얄궂은 타이밍이라 생각하며 사와무라는 천천히 엉덩이를 붙이고 다시 툴의자에 몸을 앉혔다. 그리곤 생각했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오이카와의 소문 따위가 아니었다. 그 녀석의 유일한 진심이었다. 아마 그것은 쉬이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



원고 안하고 컴퓨터 파일 정리하는데 2월에 전력 참가하고 그 뒤를 써놓은 얘를 찾아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