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산 아래로 사라져 가는 붉은빛을 바라보며 스가는 한숨을 쉬었다. 도시와 달리 이곳에서의 시간은 빠르면서도 가끔은 더디게 흘러갔다. 오늘은 조금 더디게 흐르는듯했다. 터벅터벅 슬리퍼를 끌고 이 마을에 단 하나뿐인 슈퍼로 향하는 길, 스가는 자신이 이곳에 온 지 얼마나 흘렀는지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했다. 흰 눈이 뒤덮인 시기에 와 지금은 늦은 여름이었으니 꼬박 반년 정도 시간이 흐른 듯 보였다. 계절의 시간은 오늘과 달리 조금 빠르게 흘렀구나. 스가는 쓴 입안을 혀로 축이며 이제는 익숙한 작은 슈퍼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반쯔음 문이 열린 가게 안에는 슈퍼라고 부르기에는 무척이나 간소한 풍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은 냉장고에는 생수 몇 통과 우유가 전부였고 매대에는 생필품 몇 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장 아래에는 먼지 쌓인 과자들이 스가를 반겨왔다. 가끔 스가는 그것들을 털어내 사가곤 했지만 오늘은 그것을 지나쳐 가장 구석에 놓인 물엿 통을 집어 들었다. 저녁에 저 아랫집에 사는 나츠키 아주머니가 고구마를 가져다 주겠다고 연락을 하셨다. 딱히 할 조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맛탕을 해야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더니 집에 물엿이 없었다. 다행히 슈퍼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그것을 발견한 스가는 웃으며 슈퍼 안쪽의 방문을 두드리며 조심히 밀어 열었다.
"할머니, 저에요."
"오, 스가짱. 뭐 사러 왔어?"
"물엿이요."
탈탈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낡은 선풍기가 방 안의 더위를 쫓고 있었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킨 노인이 손을 뻗자 스가는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입구 근처의 작은 금고를 뒤적거리던 그녀가 거스름돈을 세어 스가의 손바닥 위로 내려주었다.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요즈음 너무 더워서 집에만 있게 되네요."
"쯧쯧, 젊은 친구가 활동적이지 못해서 어디다 쓰려고."
듣기 싫지 않은 그녀의 잔소리를 들으며 스가는 어색하게 웃었다. 웃지 말고,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사내자식이 이렇게 말라 빠져서 어쩌려고 그래? 진심 어린 그녀의 걱정 뒤로 스가는 반짝이는 TV의 브라운관으로 시선을 던졌다. 집에 컴퓨터도 TV도 심지어 전화기도 두지 않은 스가에게는 꽤 오랜만에 갖는 단절된 세상과의 만남과도 같았다. 해가 지는 주말의 저녁을 수놓는 메인 프로그램의 오프닝 타이틀을 보며 스가는 그녀에게 잘 있으라는 인사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내 화면을 타고 나오는 소리는 그런 스가의 목소리를 가져가 버렸다.
-"오늘의 선데이쇼의 게스트는 도쿄 가이더스의 에이스이며 일본 여성들의 마음을 흔드는 배구계의 슈퍼스타 오이카와 토오루상을 모십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 이름에 스가는 눈을 껌뻑이며 천천히 마른 입술을 떼었다.
"할머니, 저 잠깐 TV 좀 보고 가도 될까요?"
"응? 그럼, 들어와 들어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반 즈음 열었던 문까지 깔끔히 젖혀주며 스가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신고 있던 슬리퍼를 가볍게 벗어 던지며 스가는 작은 그 방에 들어가 소리 없이 무릎을 꿇고 TV 앞에 앉았다. 환호하는 방청객들의 목소리와 요란한 박수를 맞으며 한 사내가 사회자 뒤의 커튼 안에서 등장했다. 멋들어진 세미 수트를 갖춰 입은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잘 지냈어요? 친근한 그의 인사에 마련된 소파에 앉으며 오이카와 토오루가 웃었다. 그럼요, 잘 지냈죠. 여유로운 대답이었다. 가볍게 시청자에게 인사 한마디 해달라는 요청에 오이카와 토오루가 카메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단지 그는 카메라를 보았을 뿐인데 눈이 마주친 것과 같은 착각이 일었다.
-"도쿄 가이더스의 세터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밝은 미소에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그의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방청객의 환호가 터지니 사회자가 웃으며 "엄청난 인기네요."라고 부러운듯 외쳤다. 스가는 조심스레 사회자를 따라 웃었다. 그렇게 시작된 토크쇼는 최근의 근황과 배구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저번 시즌 마지막에 슬럼프와 함께 무척이나 성적이 좋지 않았는데 괜찮았냐, 지금은 다시 폼을 회복하고 날아다니는데 기분이 어떠냐, 올 시즌에도 우승을 노리고 있느냐- 오이카와를 이루고 있는 세계에 관해 진지하게 묻는 사회자의 말에 그 역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지난 시즌 막바지에 안 좋은 일이 많아 정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괜찮다, 염좌가 재발해 고생하긴 했으나 컨디션은 나쁘지 않다, 시즌 초반 시작이 좋아 마음에 든다, 선수로서 우승은 언제나 목표하고 있다. 조근조근 대답을 뱉는 오이카와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으며 스가는 손에 쥔 물엿을 괜히 품으로 꽉 끌어안아 보았다.
-"그나저나 녹화하는 오늘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인데 오이카와 선수는 초콜릿 좀 많이 받았어요?"
-"네. 어마어마하게 받았죠. 구단 사무실과 제 에이전트 사무실에 팬 분들이 보내준 초콜릿이 가득 쌓였어요."
-"트위터에 올린 사진 봤어요. 안 그래도 오늘 저희 스튜디오에도 오이카와 선수에게 전해달라며 많은 팬레터와 선물들이 도착했는데 끝나고 꼭 찾아가도록 하세요."
-"아, 정말요?"
-"인기가 어마어마하던데요?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궁금한데, 애인은 있어요? 워낙 오이카와 선수가 사생활 적으로 공개된 적이 없으니 여러 추측이 많던데요. 소문도 많고요."
-"하하하, 맞아요. 좀 많죠."
-"그래서 애인은요?"
사회자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떻게서든 제대로 된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와 같아 보였다.
-"지금은 없어요."
-"없어요,도 아니고! <지금은>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에는 있었다는 이야기네요?!"
-"제 나이도 이제 스물여섯인데요, 과거에 누구 하나 즈음은 있었겠죠? 안 그래요?"
유려하게 질문에서 벗어나는 행동에 사회자가 당했다는 듯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꽤 끈질긴 타입이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좋아하는 사람이라던가, 관심이 생기는 사람도 없어요?" 라고. 오이카와는 살짝 눈썹을 찌푸려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오는 무의식의 버릇과도 같은 얼굴이었다.
-"오, 이건 좀 곤란한 질문인데.."
-"그럼 있다는 의미인가요?"
부추기는 사회자의 말에 오이카와가 살짝 입술을 축이며 웃었다.
-"네.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
-"세상에 있어요? 역시 있구나! 와, 지금 막 우리 쇼 시청률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요?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이냐면... 글쎄요. 뭐라 표현해야 하지? 음.. 청초하다는 말이 사람이 되면 아마 그 사람일 거에요. 약간 물을 먹은 안개꽃을 닮았어요."
-"낭만적이면서 시적인 표현 같아요."
-"저에겐 그런 사람이거든요. 제게 있어 낭만적인 사람이었어요. 물론 지금도. 제 로맨스는 오로지 그 사람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있어요."
-"약간 말이 이상해요. 였다-라고 하셨는데 그럼 헤어진 거에요?"
-"네. 열아홉에 만난 첫사랑이었고 작년까지 사귀었어요. 제 인생에서 배구만큼이나 소중한 사람이었죠. 아니, 모르겠어요. 따지고 보면 배구보다 더? 하하.. 배구는 언젠가 은퇴하면 그만둘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아니에요. 절대로 그만둘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왜 헤어졌어요?"
-"모르겠어요. 왜 헤어졌는지. 그냥 어느 날 갑자기 헤어졌어요. 일방적인 통보를 당해서 일방적으로 이별을 당했어요. 이유가 뭔지, 나에게 왜 이러는지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그 질문할 틈도 주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날 정신을 차리니 헤어져 있었어요. 사실 작년 마무리가 나빴던 것은 그 이별의 탓이 컸어요.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었거든요. 마치 제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 뭐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 이별로 슬럼프가 왔군요?"
-"뭐 꼭 반드시 이유를 찾는다면 그렇겠죠."
오이카와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소파의 팔걸이에 기댄 팔꿈치를 떼지 않은 채로 손만 움직여 손가락으로 작은 네모를 만들며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저에게 방공호와 같았어요. 어떤 태풍과 폭풍에도 저를 막아주는 단단한 울타리와 같았죠. 그래서 뭐든지 그 사람에게 주었어요.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 소중한 것들, 없어서는 안될 것들을 그 방공호안에 집어넣듯이 그 사람에게 주었어요. 위험이 닥치면, 이 세상에 내가 살 공간이 사라지면 적어도 그의 안에서 살 수 있도록.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폭격이나 요란한 공습에 내가 피할 수 있는 곳, 숨을 수 있는 곳, 숨을 쉴 수 있는 곳. 그 사람은 저에게 그런 존재였어요. 힘들면 그 사람에게 숨었고, 안식이 필요하면 그 사람에게 찾았어요. 나에게 그 사람은 그랬어요."
손가락으로 만들어낸 조그마한 네모의 공간은 오이카와의 씁쓸한 미소와 함께 분리되어 사라졌다. 가만히 손을 내린 오이카와는 그 미소를 지우며 평온한 목소리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아직 좋아해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사랑을 했는데 그게 쉬이 잊혀지면 제 감정이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아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간단하게 잊혀질만큼 단순하지 못하거든요. 그 사람이라던가, 제 감정이라던가."
-"그럼 다시 만나실 거에요?"
-"모르겠어요. 그러고 싶은데, 어디 있는지 몰라서 지금 찾고 있거든요."
찾고 있다. 찾고 있다. 스가는 그 목소리를 머릿속으로 되뇌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으로 불안감이 감겨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더 보고 가는 거 아니냐는 할머니의 질문에 피곤해서 돌아가겠다는 어색한 변명을 뱉으며 벗어둔 슬리퍼에 발을 꿰었다. 품에 봉지를 끌어안고 땅거미 진 어둠으로 몸을 던졌다. 도시와 달리 시골의 밤은 높고 깊고 맑아서 별을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스가는 그 풍경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지만 오늘만큼은 그 어둠이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조금도 반짝이는 별을 눈에 담지 못하며 스가는 터벅터벅 자신의 집으로 걸음을 바삐 옮겼다. 이미 저녁이니 나츠키 아주머니가 고구마를 가져왔을지도 모르고, 맛탕을 할 준비도 해야 하고, 어제 걸어둔 빨래들도 정리해야하는데... 머릿속으론 그리 생각하면서도 드문드문 가로등에 떠오르는 검은 그림자는 길게 뻗어 자꾸만 스가의 발목을 쥐어 잡았다. 그 덕에 늦어지는 걸음은 이내 뚝 거리의 한가운데에서 멈췄고 스가는 그대로 꽉 봉투를 안은 채 무릎을 굽혀 앉았다. 마른 흙바닥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눈을 감아 차단하려 했지만 뚝뚝 잘려나간 눈물은 방울방울 흙 위로 조용히 흔적을 남겼다.
[헤어지자]
종이에 그 메시지를 남길 때도 이렇게 울었었다. 그때는 종이에 눈물 자국이라도 날까 급하게 훔치며 적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스가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이루는 뜬소문을 좋아했다. 사귀는 여자가 있다거나, 만나는 사람이 있다던가, 어느 배우와 만난다든가, 모델과 사귄다거나 하는 그런 추문을 좋아했다.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그 추문은 스가에게 방패와 같았다. 자신을 가려주는, 오이카와의 곁에 있는 자신을 감춰주는 그런 방패. 하지만 그 소문들이 흐르고 흘러 어느 날 [오이카와 토오루가 게이라는데 맞아?] [오이카와 선수 남자랑 동거한다는 소문 진짜야?] 라고 속삭이며 스가에게 흘러 들어왔을 때에는 좋아할 수 없었다. 그것은 거대한 파도와 같았다. 높고 높은 파도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입안에 알 수 없는 모래들이 까슬까슬 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스가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소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추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가십은 언제나 다른 소문에 묻혀 사라지기 십상이였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는지 오이카와의 에이전트에서까지 스가에게 부탁을 해왔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당분간 둘이 따로 지내는 게 어떻겠냐는. 소문이 소문인지라 파파라치들이 기승이다, 이러다 아웃팅 당하면 오이카와 선수 생활도 끝이다, 그걸 원하는 건 아니지 않으냐- 스가는 그 말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당분간이라는 시간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1년? 2년, 아니면 우리가 만났던 그 5년도 그 당분간이라는 기간에 들어가는 시간일까. 적어도 스가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코트 위에 서 있어야 하는 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적어도 그 이후에 코치라든지, 감독이라든지, 과거의 영광으로 주목받고 살아가야 할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 시간들이 스가에게는 모두 당분간에 속했다. 어림잡아도 10년은 더, 아니 20년? 혹은 평생의.
그 시간을 담은 <당분간>이라는 말은 결국 <영원히>라는 말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 시간을 위한 이별만이 자신이 오이카와에게 해줄 수 있는 아주 간단하고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게 멋대로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했다. 작은 가방에 멋대로 짐을 싸 집을 나왔다. 갈 곳이 마땅히 생각나지 않아 정처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무작정 다이치에게 전화해 숨을 곳이 필요하다며 울었더니 자신의 돌아가신 할머니가 남긴 집이 있다며 그가 주소를 불렀다. 기차역에 가 티켓을 끊고 차를 기다리며 엉엉 울었다. 지나가던 꼬마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스가는 터져버린 울음을 멈출 방법을 몰랐다. 그렇게 도착한 마을, 스가는 다이치의 조부모님이 사용했다는 집에 들어섰다. 목재로 이루어진 낡은 옛 집은 정돈이 필요했으나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무엇보다 갑자기 들이닥친 외부인인 저에게 모두가 살갑게 대해주었다. 스가는 이곳에서 그 <당분간>이라는 시간을 살기로 결정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찾지 못할 곳에서, 그를 위해 사라지고 그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그랬는데- 그가 자신을 찾고 있었다. 저를 두고 도망친 자신을 찾고 있었다. 스가는 괴로움에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뿌옇게 변한 시야는 어둠을 담아내며 끊임없는 긴 밤과 악몽을 예고하는 것만 같았다. 비척비척 겨우 다리에 힘을 넣은 스가는 몸을 일으켰다. 뜨뜻한 여름 바람을 밀어내며 서둘러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너무도 그리웠다. 그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서 지금 견딜 수가 없었다.
느릿느릿 시작한 걸음은 어느새인가 바삐 달리기 시작했다. 흙바닥을 디뎌 달리며 스가는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목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드르륵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봉투를 근처에 적당히 던져두곤 2층으로 올라섰다. 쾅쾅쾅 자신의 발소리와 함께 삐걱삐걱 나무소리가 온 집안을 울렸다. 이 집의 가장 끝, 가장 구석, 가장 어두운 방. 스가는 이곳에 온 처음을 제외하고 발걸음을 하지 않았던 그 방의 문을 열었다. 까슬까슬한 다다미를 발로 밟으며 방 한가운데에 놓인 자신의 짐가방 앞에 앉았다. 이곳에 올 때 들고 왔던 그 가방이었다. 조심스레 열어 안을 확인했다. 전등을 켜지 않아 밖의 어스름한 빛이 가방 안을 겨우 보여주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스가는 익숙하게 이미 전원이 나간지 오래된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곤 가장 깊숙이 넣었던 옷가지를 꺼내 들었다. 민트색의 푸른 유니폼이 스가의 손에 들려 공기 중으로 나왔다.
"....읏..."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기 위해 스가는 서둘러 제 입술을 물었다. 오이카와의 집에서 나오면서 멋대로 들고나온 그의 유니폼이었다. 고교시절 자신이 반했던 그 오이카와 토오루가 입었던 유니폼. 이제는 맞지도 않을 그것을 스가는 그 몰래 멋대로 들고 나왔었다. 쫙 펴 한참을 젖은 시야로 눈에 담던 스가는 천천히 유니폼을 품으로 끌어안았다. 보고 싶어. 안고 싶어. 만지고 싶어. 닿을 리 없는 자신의 바람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스가는 한참을 어둠과 정적 속에서 오로지 오이카와 토오루만 떠올리며 그렇게 울었다. 꿇은 무릎에 아프도록 자국이 날 정도로 한참을 그렇게 밤에 녹아내렸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스가는 다시금 품에 안고 있던 유니폼을 들어 보였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심스레 접어 다시 가방에 넣었다. 이 괴로움은 모두 오이카와 토오루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면 아슬하지만 버틸 수 있었다. 자신은 오이카와의 소문이었다. 소문은 사라지는 것이 맞았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틀리지, 않았다. 스가는 멍하니 그리 생각하며 가방을 정리하고 다시 방을 나왔다. 손바닥의 아래를 이용해 꾸욱 눈두덩이를 눌러 남아있던 눈물을 짜냈다. 이제 울지 말아야지.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를 그 결심을 떠올리며 계단을 밟았다. 아까와 달리 조용한 발소리가 울렸지만 여전히 나무 계단은 비명을 뱉어냈다. 그 비명이 어쩐지 자신의 몸 안에서 나는 것만 같다고 느끼며 스가는 주방으로 향했다. 나오기 전 미리 부어놓은 기름이 펜에 담긴 채로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기억나는 대로 적어 놓은 레시피 쪽지가 식탁에 가만히 놓여 있었다. 식사시간은 이미 훌쩍 지났는데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대신 허기진 감정만이 스가의 안을 긁어내리고 있었다. 역시, 맛탕은 그냥 내일 하자. 그리 결정하며 스가가 막 주방을 치우려는 순간 쾅쾅-울리는 요란한 소리가 현관문을 뒤흔들었다. 나츠키 아주머니가 고구마를 가져다준 모양이었다. 다시금 꾹 눈위를 누른 스가는 자신이 바보같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네- 나가요!"
잠긴 목소리를 뱉으며 불이 꺼져있던 집에 전등을 켰다. 온몸을 뒤덮고 있던 어둠을 스스로 지워내며 스가는 웃으며 서둘러 현관문을 밀어 열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훅, 여름 바람이 끼쳤다. 그리고 그 바람을 등지고 현관 앞에 서 있는 것은 기다렸던 나츠키 아주머니가 아니었다. 스가는 자신이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꿈이 아니라면 오이카와 토오루가 자신의 이 현관 앞에 서 있을 리가 없었다. 밤이었다. 자신은 잠들었다. 이것은 꿈이었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스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밤을 가르고 "코우시-"라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스가는 이것이 그 지독한 악몽보다 더 지독한 현실임을 알아챘다. 서둘러 팔을 뻗었다. 그리고는 열어젖혔던 문을 닫기 위해 당겼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에 안도하기가 무섭게 급히 뻗어진 손이 그것을 방해하며 쾅, 소리가 나도록 다시 열었다. 도망쳐야 해. 머릿속에서 요란하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스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쑥 뻗어온 손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뻗어온 온기는 익숙하게 스가의 팔을 잡아당겼다. 힘에 딸려 당겨진 몸은 그대로 오이카와 토오루의 품으로 안겼다. 단단하고 커다란 손이 스가의 목을 뒷목을 잡아 눌렀다. 참 이상했다, 어째서 자신은 이 품에 안겨있는 걸까? 왜 사라지지 않는 걸까? 자신은 소문이었는데. 흔적도 없이 떠돌며 흐르다 사라지는 그런 소문이었는데 왜 오이카와 토오루 앞에서 또다시 실체화가 되어버리는 걸까.
"코우시."
"..."
"대답해, 코우시."
조용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코안으로 가득히 그토록 그리웠던 사랑의 냄새가 파고들었다. 스가는 잡힌 팔이 덜덜 떨려오는 것을 느끼며 급히 숨을 쉬었다. 목을 움켜잡은 손바닥이 너무도 뜨거웠다.
"널 찾으면 어떻게 할까 많이 고민했어."
사내의 목소리가 조용한 밤을 울렸다.
"..."
"이유를 물어야지, 왜 날 버렸느냐고, 왜 그렇게 날 두고 사라졌느냐고 이유를 물어야지 생각했는데 사실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
"네 다리를 자를까? 아니면 네 눈을 멀게 할까? 문고리조차 쥐지 못하게 손가락을 망가트릴까? 발목을 부러트려 곁에만 있게 만들까? 온갖 험한 생각을 하면서 여기에 왔는데-"
"..."
"그랬는데- 내가 어떻게 너에게 그러겠어. 안 그래? 이렇게 도망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것조차도 속상하고 아픈데 내가 어떻게 널 망가트려."
오이카와의 입술이 머리 위로 조심스레 닿았다. 익숙한 그 입맞춤에 스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곤 다급하게 내려트렸던 팔을 뻗어 그의 옷을 붙잡았다.
"그래서, 이제 다 숨은 거야?"
"응..."
"꼭꼭 다 숨은 거야?"
"응..."
"그럼, 이제 내가 찾아냈으니, 끝난 거지?"
모르겠어. 스가는 품에서 고개를 저었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어서, 그에게 이유를 설명하고 싶어서 입을 열었는데 터져 나오는 것은 괴로움에 범벅된 울음 소리뿐이었다. 그 울음은 말이 되지 못하고 그저 안타까움을 내포하며 스가의 입을 타고 흐를 뿐이었다.
"괜찮아, 내가 끝냈어. 이제 도망가지 않아도 괜찮아."
오이카와가 속삭였다.
"숨바꼭질, 끝났어. 코우시. 그러니까 이제 숨지 않아도 돼. 사라지지 않아도 돼."
응, 나를 사라지게 두지 마. 스가는 그리 바라며 꽉 오이카와의 옷깃을 잡아 안았다. 커다란 등 뒤로 어둑한 어둠이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스가는 이 밤이 오이카와 토오루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멀고, 높고, 광활하고, 무한하며 반짝이는. 자신은 그 밤의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별? 조용한 바람? 잠깐의 새벽?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그런 아름다운 것은 아닐 것이었다.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사라지고 싶지만 않았다. 소문으로 남아, 그를 갉아먹고, 정처 없이 떠돌다 그리 지워지고 싶지 않았다. 반듯하게 숨을 쉬며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그의 곁에서 숨을 쉬고 살고 싶었다. 스가는 목놓아 울며 가득 밤을 감싸 안았다.
"토오루-"
밤의 이름을 불렀다.
"보고 싶었어."
그에게서 사라진 동안 가장 하고 싶었던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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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주제 / 밤
밤과 소문의 숨바꼭질!!!!!!!!!!!!!!!!!!!!!!
지각이라 일단 올리고 수정은 천천히...!!
뒤늦게 추가하는 이야기지만 스가가 방송을 본 것은 7월의 여름으로 저 방송은 시골 케이블에서 때리는 재방송이었....!
만날 운명이었고 그 타이밍이었다는 설정이었는데=_=...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