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을 알리는 빛이 커튼을 가르고 떨어졌다. 조각조각 얼굴 위로 쏟아지는 그 빛에도 스가와라는 마치 아직 깜깜한 한 밤을 보내듯 살짝 눈을 떴다 다시 꾹 감았다. 귓가를 가볍게 훑고 떠났다 다시 돌아오는 숨소리, 고르고 가지런한 그 소리에 취해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섰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이 미세한 움직임이 등 뒤에 잠든 이를 깨우기라도 할까 서둘러 물어 숨겼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한참을 그렇게 버티고 있다가, 결국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벽의 시계는 2시 30분, 그리고 35분 사이를 어정쩡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시계가 시간을 알리고 있다고 해서 지금이 그 시간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약이 떨어져 멈춰버린 지 오래인 시계를 빤히 들여보다 여전히 잠들어있는 이가 깨지 않도록 살살 매트리스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 벽에 걸린 달력에 오늘이 며칠째인지 숫자를 적기. 액이 다 달았는지 뻑뻑한 잉크를 뱉어내는 마카로 스가와라는 여러 번 반복해 날짜를 세었다. 341일째였다. 더는 별 감흥도 생기지 않는 숫자를 가만히 들여보다 이내 욕실로 향했다. 간신히 돌아가고 있던 수도가 석 달 전부터 끊긴 이후, 근처 강가에서 열심히도 나른 물이 욕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름대로 몇 번이고 걸러내고 또 걸러낸 물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시설을 걸치지 않은 자연의 물이라 그런지 색은 탁하고 더러웠다. 처음엔 저 물로 씻는 다는 게 끔찍했는데, 이제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손을 담그고 얼굴을 담았다. 흘리지 않게 조심조심 낡은 대야로 쓸 만큼만 덜어 가볍게 세수를 하고 반으로 잘라 놓은 치약 통의 안을 칫솔로 훑어 이를 닦았다. 미리 사놓은 생필품 목록에 새 치약이 몇 개는 남아 있긴 했지만, 아끼고 조심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렇게 가볍게 씻어내고 나와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씻고 먹을 물도 모자라 닦아내지 못한 그릇 중에서 그나마 제일 깔끔한 것을 꺼내 티슈로 박박 문질렀다. 대충 닦아낸 후에는 위에 달린 수납장을 열었다. 가득 채워진 통조림들은 스가와라가 1년도 전에 미리 사다 놓은 것들이었다. 그것도 꽤 힘들게. 특히 콘소메 통조림 수프로 어느 아저씨와 실랑이가 붙었을 때는 정말 끔찍했다. 등에 업은 아이를 내세워 빽빽 소리를 질러대는데 거의 악다구니에 가까운 욕설들이 담겨있었다. 물론, 자신 역시도 지지 않고 왁왁 질러대긴 했지만. 그렇게 목숨 걸고 차지한 콘소메 통조림 수프는 가장 끝으로 밀어 넣고 삶은 콩 통조림을 꺼냈다. 스가와라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맛있는 건 가장 나중에라니."
나중에 분명 후회할 거야. 콘소메 수프를 두고 가게 된다면 말이지. 따각, 통조림 뚜껑을 가볍게 따며 스가와라는 중얼댔다. 어려서부터 여러 반찬 중에서 맛없는 것을 가장 먼저 입에 대는 습관을 아직 자신은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그런 소소한 습관대로 움직이는 자신을 놀랍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그런 자신을 비웃듯 픽, 웃으며 스가와라는 그릇에 보기 좋게 콩을 담아냈다. 약간 붉은 기가 도는 콩, 다음에는 햄. 물론 이것 역시 통조림이었다. 삶거나 구워야 먹기 좋았지만, 가스는 꿈도 못 꾸었기에 대충 수저로 잘라 그릇에 담아냈다. 전혀 그럴듯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럴듯해 보이는 그릇을 챙겨 다시 방으로 돌아가자 여전히 잠들어있는 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토오루, 완전 낮이야."
"...응..?"
"완전 낮이라고, 이제 일어나."
"완전 낮이면 몇 시지..?"
"2시 33분."
"거짓말."
고장 난 시계 좀 버리라니까. 푸스스 그가 시트 위에 웃으며 중얼댔다. 어쨌건, 일어나. 대충 그릇을 내려놓고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 조금만 더! 입은 그렇게 떠들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한 그가 몸을 일으켰다.
"아침 먹어."
"또 콩이네."
"이게 제일 많단 말이야."
"스크램블 먹고 싶다."
"이 세상에 닭은 모두 멸종되었을 거야."
보이는 대로 다들 잡아먹었을 테니까. 반찬 투정을 하는 오이카와에게 스가와라는 딱 잘라 말했다. 닭뿐만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자주 길목에서 보이던 고양이들도 자취를 감췄다. 그 많던 고양이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궁금했지만 스가와라는 굳이 답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341일 전, NASA에서는 우주의 커다란 돌 하나가 지구를 향해 곧장 떨어져 오고 있으며 지금 인류의 기술과 능력으로 그걸 멈출 수 없다 발표했다. 낙하하는 속도를 계산했을 때, 지구에 도달하기까지는 약 2년. 예상 피해 규모는 측정 불가. 한 마디로 멸망이었다. 이 소식은 곧 속보라는 이름을 달고 전 세계로 퍼졌고, 매일 같이 요란한 이야기들이 TV를 타고 흘렀다. 더는 오리 가족이 호수를 헤엄치고 있다거나, 계절 과일의 중요성 따위는 흐르지 않았다. 하나 둘 무너지는 인류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는 현실보다는 좀 더 나았다. TV 밖 세상은 더 빠르게 변화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리에는 비명이 넘쳤고, 가게의 도난 벨은 멈출 줄을 몰랐다. 물론, 스가와라 역시 그 틈에 있었다. 누군가를 밀치거나 때리기도 했고, 저보다 힘없어 보이는 이의 쇼핑백을 훔쳐 달아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었다.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2년을 살기 위해서는 바보처럼 착하게 굴거나 인정을 베풀면 안되었다.
그렇게 모은 물건들은 모두 빈 옷장과 수납장에 숨겼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현관은 커다란 가구로 막았다. 시간이 조금 있었더라면 누군가처럼 사냥용 총이라도 샀을 텐데, 아쉽게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요리용 칼과 소화기뿐이었다. 그것들은 현관 가장 가까이에 놓았다. 만만의 준비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생존 준비였다. 현실을 부정하고 도망치는 이들도 있었지만, 스가와라는 꽤 현실적으로 굴었다.
그렇게 시작된 생존을 위한 날들. 하루, 이틀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언제라도 누군가가 창을 깨고 들어올까 무서웠다. 심지어 불을 켜지도 못했다. 일주, 이주는 울기도 많이 울었다. 고향에 있을 부모님이 걱정되었지만,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통신망은 모두 끊긴 지 오래였다. 누구도 일하지 않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다시 한 달, 두 달이 지나자 놀랍게도 이 상황이 적응되기 시작했다. 푹 잠도 잤고, 울지 않고 밥도 챙겨 먹었다. 가끔은 바람을 쐬겠다고 슬쩍 맨션의 로비까지 산책을 다녀오기도 했었다. 물론, 밖으로도 나가볼까 생각했는데 로비 앞의 붉은 웅덩이를 보니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갔다.
그리고 또 얼마나 흘렀을까. 가끔 잡히는 누군가의 라디오 신호를 벗 삼아 외롭지 않은 척 버티며 지내던 어느 날, 똑똑 노크 소리가 집을 울렸다. 누군가가 현관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자신이 환청을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찾아올 이는 누구도 없었다.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소화기를 꽉 쥐고, 여차하면 당장 휘두를 생각으로 다가간 순간, "코우시!" 하고 제 이름이 불렸다. 다급하게 두드리는 노크소리와 함께 흘러들어오는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소화기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쿵, 집이 살짝 울렸다. 그리곤 다급하게 가구를 치워내고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자신이 보아왔던 그 어떤 모습보다 가장 꾀죄죄한 오이카와 토오루가 바보 같이 웃고 있었다.
"보고 싶었어."
인사도 없이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렇게 말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그런 인사를 건넬 상황은 아니었지만,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보고 싶었다는 인사가 참 뜬금없고 이상하게 다가왔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사랑하는 이와 마지막을 보내겠다는 사람들이 넘쳐 흘렀다. 거리에는 누군가를 찾는 벽보들도 붙었다. 고속도로 앞에는 소식을 전해달라며 편지를 붙여놓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절망 속 감성의 틈에 제가 속할 거라 생각한 적 없었던 스가와라는 꿈처럼 느껴졌다. 그런 주제에 현실적인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너, 가족은?"
그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가던 여성을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물었다. 눈물로 그를 보내고 술로 속을 달래다 병원 신세를 지던 게 아득하긴 하지만 아직 생생했다. 그 응어리가 아직 가득 남아있는지 말투에서 가시가 뾰족하게 솟았다. 보고 싶었어, 나도.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데도 참아내며 딱딱하게 울었다.
"본가에 데려다줬어. 뉴스를 듣자마자 네게 오고 싶었는데, 미안. 마지막이니 할 수 있는 건 해야 할 거 같았어."
"..."
"데려다 주고 오는데 중간에 기름이 떨어지지 뭐야."
"..."
"그래서 걸었지. 걷고 또 걸었어."
"..."
"그래서 이런 꼴이긴 한데, 나 좀 안아줄래?"
만약 정상적으로 세계가 돌아가고 있다면 미쳤어? 돌아가, 라고 매정하게 쫓아냈겠지만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는 이제 이곳에 없었다. 남은 시간은 이제 2년도 되지 않았고, 홀로 마지막을 기다리는 것은 너무도 외롭고 무서운 일이었다. 거기다 뭐, 여기서 또 돌아가는 건 너무도 긴 여정이기도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보고 싶었어."
잊었다 말해도 아마 마지막까지 잊을 수 없었던 이가 여기 있는데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엉망인 오이카와의 모습에도 스가와라는 망설임 없이 와락 끌어안았다. 입도 맞췄다. 무너진 세계에선 그 누구도 자신들을 손가락질할 수 없으니 참았던 그리움을 모두 풀었다.
혼자가 둘이되니 죽어가는 세상에서 무서운 건 없었다. 맨션 로비의 굳어버린 웅덩이도 더는 두렵지 않았다. 햇볕이 좋은 날에는 아무도 없는 공원에 가 산책을 했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렌탈 DVD숍에서 아무거나 집어와 종일 영화를 보았다. 조용한 낮에는 침대에 나란히 앉아 온갖 책을 읽었고 조용한 밤에는 좁은 침대에서 꾹 눈을 감았다. 스가와라는 더는 울지도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으며, 외롭지도 않았다.
"그래도 끝이 온다는 건 좀 쓸쓸하네."
"응? 뭐가?"
하나둘 생각을 돌려보다 툭 중얼대자 입안 가득 콩을 삼킨 오이카와가 우물대며 물었다.
끝이 온다는 것은, 정말로 그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 더는 빛을 볼 수 없고, 어둠도 볼 수 없다는 것. 이렇게 마주 앉아 무언가를 먹고 삼킬 수 없다는 것. 서거나 걷거나 산책할 수도 없다는 것. 대화를 나누거나 마주 웃을 수도 없다는 것. 누군가와 만나거나 헤어질 수도 없다는 것.
그리고 오이카와 토오루와 함께할 수 없다는 것.
울지도 슬프지도 외롭지도 않았지만, 끝을 생각하면 스가와라는 때때로 울고 싶거나 슬퍼지거나 외로워졌다. 하지만 이 기분을 부러 타인에까지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토오루."
"응?"
"마지막 날에 우린 뭘 하고 있을까."
이제 채 1년도 남지 않은 시간. 그즈음에 가면 식량이 떨어져서 쫄쫄 굶었을지도 모르고 혹은 어딘가 다쳐, 누군가에게 습격받아 몸이 망가져 있을지도 몰랐다. 애써 우울한 생각은 하지 않으려 고개를 저었는데 떠오르는 건 다 그런 것뿐이었다.
"글쎄."
"계획 같은 거 없어?"
"음, 기념이니까 사진이나 찍을까."
깨끗하게 접시를 비운 오이카와가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 세상이 번쩍하고 빛나는 순간을."
"그게 뭐야."
좀 더 근사하거나, 로맨틱한 거 없어? 그리 툴툴대자 "그럼 넌?" 하고 화살이 돌아왔다.
"나는.."
글쎄.
아마, 셔터를 누르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옆 모습을 보고 있겠지. 빛이 번쩍이는 순간, 엄청난 굉음이 울리고, 모든 게 사라져 가는 걸 지켜보며 마지막으로 눈에 담는 것은 분명 오이카와 토오루일 테니까.
"모르겠어."
하지만 어쩐지 부끄러워 스가와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게 뭐야, 똑같이 날아오는 반응에 장난스레 웃으며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그의 이마에 꾹 입을 맞췄다.
341일째, 여느 때와 같은 오후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설정 날조.
그냥 이렇게 저렇게 멸망 앞두고 열시미 사는 두 사람이 보고시퍼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