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언제나 안 좋은 소식을 몰고 온다. 미신을 믿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것만큼은 오이카와 인생에서 빗겨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 비도 역시나.
"나 좀, 들여보내 줘."
5년 만에 만나는 과거의 연인은 빗속에서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며 말했다.
5년 전, 훌쩍 "헤어지고 싶어." 라는 말로 이별을 고하고 제 이야기는 조금도 귀담아듣지 않은 채 도망치듯 짐을 챙겨 사라진 연인은 5년 만에 돌아와 말했다. 나 곧 죽는데, 라고. 무척이나 덤덤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라 오이카와는 이게 꿈이라 생각했다. 꿈이 아니라면, 눈앞에 헛것이 있다든지. 하지만 잔인하게도 마주 앉은 연인, 스가와라 코우시는 실제했다. 숨 쉬고 있었고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병명은 어려웠다. 신경 무슨 종양이라는데 태어나 처음 듣는 병이었다. 발견이 늦어 헤어질 당시에는 이미 간에 전이되어 있었고 이별 후에 간을 꽤 많이 도려내는 대수술까지 했지만 손쓸 방도가 없었다고 했다. 조용조용 설명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오이카와는 슬프지 않았다. 슬퍼야 정상인데 치고 올라오는 화가 커서 슬프지도 못했다.
"그래서?"
"..."
"그래서 지금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정말 어쩌라는 건데? 이제 와서. 멋대로 헤어지고, 아프고, 고통스러워하다 이제야 나타나 어쩌자는 건데? 화가 머리를 채우다 못해 줄줄 몸을 타고 흘러나왔다.
"병원에서-"
가만히 그 화를 받아내던 스가와라 코우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결정하라고 했어. 더 방도가 없을 치료를 하며 버텨볼 건지 아니면 이 고통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보내다 갈 건지."
"그래서."
"그래서... 나는 지쳤다고 말했어. 5년 동안 싸웠는데 계속 지기만 하면, 이미 게임은 끝난 게 아니냐고 했어."
꽉, 커피잔을 쥔 손을 오이카와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저렇게 작고 말랐던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안한데, 부탁이야. 내가 이기적인 거 아는데... 마지막을 너랑 보내고 싶어."
목소리엔 울음이 섞여 있었지만, 스가와라 코우시는 울지 않았다. 대신 오이카와가 울었다. 빌어먹을, 화가 입을 타고 흘렀다. 잔인해도 너무 잔인했다. 지난 5년 동안 약 냄새에 담가져 있었을 그를 모르고, 돕지도 못하고 살게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마지막을 함께 보내 달라니. 당장 쫓아내고 싶었다. 꺼지라고, 다신 나타나지 말라고 욕을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내보내면 이 빗속에 스가와라 코우시가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가 비누도 아니었고 설탕도 아니었으나, 지금보다 더 빨리 자신의 품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오이카와는 그래선 안 된다는 걸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도 그를 거절하지 못했다.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스가와라 코우시의 짐은 단출했다. 가벼운 트렁크가 전부였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가 살다 나갔던 이 집에는 여전히 그의 물건이 남아 있었으니까. 고스란히 놓여있는 칫솔이나, 자신이 아껴 쓰던 유리컵을 바라보며 스가와라는 바보같이 웃었다. 그러다가 미안하다며 울었다. 앙상한 가지 같은 팔에 얼굴을 묻는 그가 보기 싫어 오이카와는 당겨 제 품에 감췄다. 가벼운 트렁크에는 홈웨어를 비롯한 몇 가지의 옷과 속옷 그리고 반을 채운 약들이 들어있었다. 묻지 않아도 뻔한 목적이라 오이카와는 고개를 돌렸다.
"지금 세포가 뼈로 옮겨가는 중이라 다리가 퉁퉁 붓거나, 가끔 넘어지거나 할 지도 모른대."
바스락대는 약봉지를 차곡차곡 정리하며 그가 말했다.
"그다음은?"
"걷지 못하겠지."
"그다음은?"
"신경으로 아예 옮겨가면 마비가 와서 더는 말도 못할 거고 먹지도 못할 거고.."
"..."
"죽겠지."
이런 이야기가 익숙한 듯 웃으며 말했다. 만약 이게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다면 "웃음이 나오냐?" 하고 비웃었겠지만, 자신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었기에 오이카와는 웃지 못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스가와라 코우시와의 생활은 전과 많이 달라졌다. 오이카와는 몇 번이고 새벽에 일어나 스가와라의 숨소리를 확인했다. 주방에서 이른 아침을 보내며 맞이하던 스가와라는 이제 대부분 시간을 침대 속에서 보냈다. 졸려, 피곤해. 퀭한 눈으로 연신 그리 말했다. 코트에서 공을 올리던, 자신이 처음 눈에 넣었던 그 소년은 더는 이곳에 없었다. 그러다가 가끔 우울한지 홀로 울기도 했다. 전처럼 그에게 용서를 빌거나, 선물을 사주거나, 입을 맞추는 거로 그의 기분을 낫게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더는 그 방법을 써먹을 수 없었다. 미안해, 나 좀 지치지? 그리 말하며 사과하는 그에게 고개를 젓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참 무기력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나마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스가와라 코우시의 고집일까. 전에도 한 고집했던 그는 여전히 한 고집 했다.
"병원 가야 하잖아."
"싫어."
그의 어머니가 잡아준 정기 검진들이 주마다 달력을 채우고 있었지만,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곤 거부하기 일쑤였다. 싫다는 걸 억지로 안아 차에 태우면 엉엉 울기 바빴고, 그렇다고 가만히 침대에 두기엔 그의 상태가 걱정되었기에 언제나 '정기검진의 날'은 전쟁과 같았다.
"고집부리지 마."
"고집부리는 거 아니야."
"애처럼 굴지도 마."
"애처럼 구는 거 아니야."
"...코우시!"
"약도 아직 있잖아. 어차피 검사받아도 뻔해. 어디까지 전이되었다, 이런 증상 없느냐, 약은 잘 먹고 있으나, 밥은 잘 씹어먹느냐. 저번 주에도 들었고 저저번 주에도 들었잖아!"
"..."
"싫어, 나 이제 약 냄새 싫어. 토오루."
5년 동안 질리게 맡았단 말이야.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스가와라 코우시가 또 울었다. 달라지지 않은 건 또 하나 있었다. 자신이 스가와라 코우시의 눈물에 약하는 점. 입을 타고 한숨이 터졌다. 포기의 의미였다.
[정기 검진 잘 다녀왔니? 미안해. 이렇게 맡겨둬서.]
늦은 오후, 스가와라의 어머니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은 쉬고 싶다네요, 다음 주에 꼭 데리고 가겠습니다.] 흘러내린 머리를 대충 넘기며 오이카와는 어렵게 답장을 보냈다. 이후로 돌아오는 메시지는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로 소개했을 때에는 꽤 다정하셨지만, 연인임을 알았을 때에는 매정하게 굴었다. "오이카와군도 알겠지만, 코우시는 내 하나뿐인 귀한 아들이에요. 어떤 어미가 아들을 그런 길을 걷게 그냥 둬요." 내 아들은 말을 듣지 않을 거 같으니 부탁한다며 찾아왔던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토오루, 라고 살갑게 불러주던 과거를 떠올리면 참 매정한 말이었다. 그래서 우리 어떻게 되었더라? 한동안 휴대폰을 압수당한 스가와라 코우시와는 연락이 되지 않았고, 자신은 헤어지자는 말을 하려 부단히도 연습했었다. 헤어지자, 우리 안 맞는 거 같아, 더 좋은 사람 나타날 거야. 참 지루하기 짝이 없는 멘트를 달달달. 다행스럽게도 그 말을 뱉을 기회는 오지 않았다.
"나 집 나왔어."
어마어마한 짐가방을 들고 스가와라 코우시가 제집에 쳐들어 왔으니까. 그때가 22살로 대학 2학년 때의 일이었다.
당시 살던 자신의 자취방은 아주 좁고 낡았었다. 대학 근처의 저렴한 방이 다 그렇듯 방음도 형편없고 에어컨도 없는 방이었다. 그곳에서 스가와라와 항상 붙어있었다. 작은 상에 마주 앉아 과제를 하고, 새벽 느지막이 편의점에 가 야식을 사 먹고,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입술을 맞췄다. 혹여 옆 방에 들릴까 두 손으로 꽉 입을 틀어막고 제 아래에서 울던 스가와라 코우시가 무척이나 예뻤던 게 아직 기억에 남아있다. 4학년 즈음에 올라가서는 서로 취업 자리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고 신경이 예민해 있었다. 툭하면 싸웠고, 툭하면 헤어지자며 소리 질렀다. 그래도 헤어지진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다행히 비슷한 시기에 서로 입사를 했다. 집을 좋은 곳으로 옮겼다. 텅 빈 집을 하나둘 서로 고른 물건으로 채우며 행복해했다. 식을 올린 것도 아니고 서류에 이름을 적은 것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완벽하게 부부처럼 굴었고 그렇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스가와라 코우시가 이 집을 나가기 전 까지는.
집을 나간 그가 갈 곳은 별로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사와무라 다이치의 집이라 생각했다. 미안해,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오이카와는 수십 통의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 없는 휴대폰을 언제나 쥐고 살았다. 전처럼 잠깐 틀어진 거야. 이러다 다시 돌아오겠지. 그럼 또 우린 아무렇지 않게 입술을 맞대고, 사랑한다 속삭일 거야. 그런 생각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고마워요.] 라고 적힌 그의 어머니의 연락이었다.
그때는 그 메시지가 완벽한 이별의 의미라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 메시지였다. 고맙다니. 병이 들어 아픈 몸으로 돌아간 아들인데 그런데도 돌려주어 고맙다는 의미였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에 대한 질책이었을까. 어쨌거나, 그녀는 다시 자신을 토오루라 부르기 시작했다. 끝에 와서야 그의 부모님에게 인정을 받다니, 참 서글펐다.
"표정이 왜 그래."
"왜?"
"입술이 이렇게 씰룩댔어."
케이크를 양껏 베어 물며 스가와라 코우시가 입술을 삐죽댔다. 내가 그랬다고?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묻자 끄덕였다. 아니야, 그런 적 없어. 입술에 힘을 풀어내며 손을 뻗었다. 엉망으로 묻히고 먹은 크림을 훑어내 삼켰다. 언제나처럼 달았다.
"병원 안 갔으니까, 약은 챙겨 먹어."
"알았어."
"꼭."
"알았다니까."
마지막 남은 케이크 조각을 와구 입에 쑤셔 넣으며 스가와라 코우시가 짧게 대답했다.
그렇게 한가하게 티타임으로 시간을 때우고 오후에는 나란히 누워 낮잠을 잤다. 자기 직전에는 온갖 이야기를 떠들었다. 네가 헤어지자고 했던 거 생각나? 아니, 너무 많아서 생각 안 나. 키득대며 스가와라가 품으로 파고들었다. 진짜로 헤어지자고 했던 거. 잘라 말하니 더더욱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그때, 너무 아팠어. 그의 머리에 입술을 묻고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떠들자 스가와라가 대답했다. 나는 그때, 진짜로 슬퍼서 죽을 거 같았어. 라고. 있지, 스가와라. 만약 내가 네 병을 눈치채고, 네가 아팠던 걸 눈치채고, 함께 버텼으면 어땠을까? 오이카와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그의 지난 5년을 떠올리며 물었다. 음, 아마.. 많이 힘들었을 거야. 그리고 지쳤을 거야. 나도, 너도. 가슴께를 더듬거리며 스가와라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싫어졌을 거야. 나 막 약 먹고 매일 토하고,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서 시트도 더럽히고 그랬어. 머리도 막 한 웅큼씩 빠져서 대머리가 되는 줄 알았어. 그런 거 봤으면, 토오루 나 싫어졌을 거야. 그래서 보여주기 싫었어. 그렇게 중얼대다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끊겼다. 잠이 들었는지 새근대는 숨소리만이 방을 가득 채웠다. 아니야.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오이카와는 말했다. 밉고 지치고 보기 싫고 그랬을 수도 있어도, 네가 싫어지진 않았을 거야. 그건 확실했다. 지난 시간들 동안 스가와라 코우시와 싸우면서 늘 느꼈던 감정이니까.
그리고 그 감정은 변함없이 똑같이 흘렀다. 밉고 지치고 보기 싫은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래도 스가와라 코우시가 싫어지진 않았다. 시트 가득 코피를 쏟아낸 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때려도, 먹은 것을 다 게워내 바닥을 더럽혀도 싫어지진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정말 가끔은 그가 싫어지는 순간이 있었는데
"너 약 버렸어?!"
약을 빼먹을 때. 그때만큼은 어쩔 수 없이 오이카와는 스가와라가 싫었다. 휴지통에 차곡차곡 빈 약봉지가 쌓이길래 잘 먹고 있는 줄 알았더니. 매번 싱크에 던져놓고 녹여 버리고 있었다.
"너 진짜 이럴 거야?"
"약을 먹으면 머리가 너무 아프단 말이야!"
"그렇다고 약을 버려?! 너 미쳤어?!!"
"머리가 아프면, 무섭단 말이야!!"
이대로 다 끝날 거 같아서. 엉엉 울며 그가 짜증을 뱉어냈다. 자신의 티셔츠 아래로 빠져나온 다리가 점점 말라갔다. 너 진짜 싫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내려갔다.
"토오루, 토오루."
달래주지 않는 자신을 찾는 스가와라를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싫어서 안아주고 싶지도 않았고 입을 맞춰주고 싶지도 않았다.
"토오루!!!"
탁탁 발까지 굴러가며 엉엉 제 이름을 부르는 꼴이 너무 싫어서 오이카와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화가 나서인지, 아니면 자신이 울어서인지 손이 너무 뜨겁게 느껴졌다.
그 이후로는 약 먹는 시간은 항상 전쟁이었다. 스가와라는 아이도 아니면서 매번 울었고, 오이카와는 매번 화를 냈다. 하지만 결국 언제나 승리는 오이카와의 몫이었다. 잔뜩 붉게 오른 눈으로 스가와라는 꾸역꾸역 약을 삼켰다. 그렇게 무사히 삼키면 다행인데, 가끔 화장실로 가 토해내는 날도 있었다. 그럼 오이카와는 또 화를 냈다. 일부러 토하는 거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그렇게 외치며 그의 등을 두들기다, 또 싫었다, 미웠다, 지쳤다를 반복하다 그래도 스가와라 코우시가 여전히 사랑스러워서
"미안해."
엉망인 그의 입에 키스하곤 했다.
그 시간을 제외하면 제법 평화로웠다. 나란히 누워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고 그걸 실천하며 보냈다. 대부분은 모두 '오이카와 토오루와-' 로 시작되는 일이었다. 여행도 몇 번 다녀왔다. 해외로도 다녀왔다. 스가와라는 장기간 보내고 싶어 했지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치사한 의사'는 거기까진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들은 마구잡이로 벽에 붙여졌다. 옛날부터 미적 감각이라곤 조금도 없는 스가와라 코우시의 작품이었다. 그렇게 조용한 하루들을 보내다 밤이 찾아오면 스가와라는 억지로 눈을 뜨며 온갖 이야기를 쏟아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가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옆 침대의 할머니, 소아 병동에서 만난 꼬마, 커다란 주사를 들고 나타난 간호사 등등. 그 이야기는 자신에게 있어 무척이나 괴로운 것들뿐이었지만, 오이카와는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밤새워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하고, 마치 아무 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웃고 떠들다 다시 싸우고를 반복하는 사이 계절들은 여러번 바뀌었다. 그리고 겨울이 성큼 찾아왔을 때, 스가와라 코우시는 더는 걸을 수 없었다. 언젠가 그가 말한 대로였다. 의사는 병원에서 지내기를 권했지만, 스가와라는 단호했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사의 말에 둘 다 울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오이카와는 휠체어를 샀다. 사면서도 와, 최악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네 싶었는데 받은 스가와라 역시도 그랬다. "내가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 중에서 가장 쓰레기 같아." 라고.
뼈를 갉아먹은 죽음은 점점 퍼져 머리로 전이되었다. 봄이 오기 전, 스가와라 코우시는 더는 '토오루'라고 정확하게 저를 부를 수 없었고 이내 엉성하게 부르던 말조차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스가와라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봄이 만개해 온갖 꽃들을 피워내던 시기에 눈을 감았다.
스가와라가 죽은 후에는 꽤 정신이 없었다. 그의 장례를 지켜야 했고, 그가 가는 마지막 길도 지켜야 했으니까. 장례식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익히 아는 얼굴도 있었다. 그들이 너무 울어서, 오이카와는 울지도 못했다. 모든 일이 끝나고, 한동안은 스가와라의 본가에서 지냈다. 그의 물건을 정리하는 걸 도와야 했고 또, 자신이 만난 적 없었던 스가와라 코우시를 그 안에서 추억해야 했으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가도 좋다는 그의 부모님 말에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골랐다. 자신이 처음 반했던 스가와라 코우시가 거기 있었다.
그 후에는 뭐, 당연하게도 집으로 돌아갔다. 봄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스가와라 코우시가 병원에 입원한 이후 한동안 들어가지 못했던 집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서 나갈 때, 같이 돌아 올 거라는 생각을 했던가? 오이카와는 멍하니 소파에 앉아 생각했다. 구급대원과 함께 스가와라를 옮길 때는 너무도 정신이 없어서 아무 생각도 못 했던 거 같다. 한동안 멍하니, 아니 밤새 멍하니 소파에서 시간을 보내다 해가 뜨고 나서는 방을 정리했다. 1년 남짓, 다시 함께 살았는데 워낙 늘린 짐이 없어서 그런지 정리할 것도 그리 많지 않았다. 서랍장에 고이 접힌 옷가지, 여전히 놓여있는 칫솔, 그가 버킷 리스트를 적고 그어대던 노트, 읽던 책, 먹다 남은 약들,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사진들. 그리고 상자. 처음 이 집에 들이닥친 스가와라가 자신에게 준 것이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열어보라는 말에 열어보지 못하고 고이 모셔두었던 것. 오이카와는 가만히 그 상자를 들여보다 이내 가볍게 열었다. 그 안에는 작은 녹음기용 카세트와 온갖 테이프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자신이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야 썼던 물건들이지만 사용법은 익히 알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1이라고 적인 테이프를 카세트에 밀어 넣었다. 그 상태로 잠시 손에 쥐어보다 덜덜대는 손가락으로 꾸욱 재생버튼을 눌렀다. 요즘 같은 시대에 구하기도 힘들었을 거 같은 작은 테이프가 지잉지잉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토오루. 나야."
그 안에는 아직 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스가와라 코우시가 있었다.
"나 지금 병원이야. 진짜 떨려."
잔뜩 긴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부터 입원해. 네가 여기 있었으면 좋을 텐데. 나 진짜 무서워."
테이프는 한 번 소리 없이 흘러가더니 이내 다시 "토오루." 라는 말을 뱉어냈다. 그렇게 돌아가는 테이프에는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오늘은 누굴 만났고, 뭘 했고, 무슨 치료를 받았고. 큰 수술 때에는 울기까지 했다. 중간중간엔 그가 언젠가 떠들어댔던 병원 사람들의 목소리도 더러 섞여 나왔다. 이 세상에 남은 이도 있었고 스가와라 보다 먼저 떠난 이들도 뒤섞여 멋대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댔다. 수십 개의 테이프가 그렇게 흘러갔다. 지난 5년의 스가와라 코우시가 거기 다 있었다. 오이카와는 씻고 옷을 갈아입고 자야 한다는 생각도 잊어버리곤 계속해서 스가와라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테이프에는
"나 치료 포기하기로 했어. 네가 보고 싶어서 안 될 거 같아."
지난 5년 중, 가장 멍청한 스가와라 코우시가 있었다.
"나 쫓아내면 안 돼? 알았지? 지금 바로 갈 거야. 퇴원 수속도 했어. 옷도 다 입었어."
그러니까, 기다려.
그 목소리를 끝으로 퉁, 하고 재생버튼이 튕겨 올라왔다.
"잔인하기는."
그 빗속에 저를 찾아와 마지막을 부탁할 때도 느꼈지만, 스가와라 코우시는 참 잔인했다. 거기다 이기적이기까지 했다. 이런 걸 남기고 가면 자신은 어떡하라고. 오이카와는 멍하니 다 돌아간 테이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돌아 벽면 가득 웃고 있는 수많은 스가와라 코우시를 보며 생각했다. 언젠가 그를 정리할 수 있는 날이 올까, 하고. 이 사진을 떼고, 그의 물건을 버리고, 그의 테이프를 모두 공백으로 돌릴 수 있을까, 하고. 아니, 아마 오지 않겠지. 완벽하게 헤어졌다 생각했던 지난 5년 동안도 스가와라 코우시를 정리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이별도 제대로 못 한 지금은 아마 절대로 그를 정리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하하,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며 오이카와는 카세트의 재생과 녹음버튼을 동시에 눌렀다. 그리고 말했다.
"코우시. 나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