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거짓말은 때때로 힘들다.
2016. 4. 24. 22:27




"왜 안 깨웠어?! 또 지각이잖아!"



스가와라 코우시가 부산스럽게 외쳤다. 글쎄, 왜 또 안 깨웠을까. 오이카와는 바삐 움직이는 그를 멍하니 지켜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감지도 못한 머리 위에 얼마 전에 산 스프레이 샴푸를 잔뜩 뿌려대는 것으로 준비를 마무리한 후, 그가 괜찮아? 하고 급히 눈으로 물었다. 새벽 5시, 보통 사람은 '지각'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시각. 오이카와는 아직 덜 깬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든지 말든지. 알게 뭐람. 살짝 그런 불만을 담아 무언의 답을 했으나 평소와 달리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가 급히 어젯밤 자신이 골라놓은 셔츠를 걸치며 울상을 해 보였다.



"가서 선배들에게 엄청 깨질 거야. 긴장 풀렸다고 엄청 혼날 거 같은데."
"고작 늦잠 좀 잤다고?"
"생방송 뉴스에 나가는 사람에게 늦잠은 고작이 아니거든요? 오이카와 토오루 선수?!"



마무리로 역시나 자신이 골라 놓은 넥타이를 두르며 그가 날카롭게 외쳤다. 입사 선물로 사주었던 모 브랜드의 화이트 셔츠와 해외 원정에 갔다 사온 넥타이, 자신이 고른 물건이었지만 퍽 잘 어울리는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이내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갔다. 저 모습을 자신만이 아닌 그가 오늘 마주할 모두에게 보여준다 생각하니 입꼬리는 다시 올라올 줄을 몰랐다.



"표정이 왜 그래?"



이번에는 못난 자신을 눈치챘는지 막 아침도 거르고 곧장 현관으로 달려가 구두를 신던 그가 물었다. 저 구두는 생일 선물로 사준 것. 그런 생각을 하며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피곤해서. 잘 다녀와. 생방송 잘하고."



늦잠을 자다니, 자격 미달이야! 이럴 거면 사표 써! 라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군. 아니, 차라리 실수를 해버려. 커다란 실수. 그래서 미안한데, 스가와라군 이 일과 좀 안 맞는 거 같으니 그만두는 게 어때? 같은 소리를 듣도록 해. 집에서 지내는 쪽이 좋지 않아? 혹시 애인 있나? 애인 있으면 그냥 애인 부려먹고 집에서 편하게 지내는 건 어때? 그런 주제넘는 소리도 괜찮을 거 같은데.

그런 못된 생각이 우르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한 마디도 뱉지 못한 채로 오이카와는 손을 흔들었다. 조금의 진심도 담기지 않은 인사를 역시나 눈치챘는지 성큼성큼 구둣발로 걸어 들어온 그가 급하게 쪽, 하고 이마에 입술을 묻곤 떨어졌다.



"미안, 아침부터 정신없지?"
"아냐, 괜찮아."
"오늘 훈련 쉬는 날이지? 그럼 있다가 나와. 방송국 근처에서 같이 점심 먹자, 그 정도 시간은 뺄 수 있어."
"그래, 생각해 보고."
"생각해 보지 말고. 나와, 알았지?"



약아빠진 스가와라 코우시. 그렇게 웃으며 조르면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할 거 같아?



"알았어."



그래, 맞아. 언제나 그에겐 항복이지. 오이카와는 보이지 않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스가와라 코우시에겐 어떠한 사나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제야 조금 안심했는지 그가 멋대로 머리를 헝클어트리곤 돌아섰다. 가지마, 그 말이 목까지 꽉 차올랐지만, 자신의 작은 투정으로 발목을 잡은 데에 만족하며 오이카와는 바람같이 달려나가는 스가와라 코우시를 배웅했다.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더는 잠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소파에 몸을 구겼다. 구겨진 몸을 필 생각은 멀리 던지곤 팔만 뻗어 리모컨을 들었다. 삑, 전원 버튼을 누르자 언제나 고정된 한 방송 채널이 흘러나왔다. 현재 스가와라 코우시가 아나운서로 몸담고 있는 유명 방송국 채널이었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이곳의 매일 아침 가장 첫 뉴스의 기상 캐스터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가 처음 아나운서 시험을 통과해 뉴스 캐스터 일자리를 받아 왔을 때, 오이카와는 케이크와 와인으로 그의 입사를 축하했다. 그래, 축하했었지. 과거의 멍청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오이카와는 멍하니 <오늘의 방송 안내>가 흐르는 TV를 노려보았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건 스가와라 스스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곁에서 오래 그를 보아온 오이카와 역시도 그리 느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조금 화낼지도 모르지만, 고교 시절 배구로 전국 우승을 했을 때도 그리 느꼈고 대회를 뛰느라 입시에 소홀했음에도 명문 대학에 붙었을 때도 그리 느꼈다. 물론 그 아래에 깔린 스가와라 코우시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보통 사람이라면 조금 어려우려나? 싶은 일에 그는 강했다. 아마 그의 노력에 운이 답해주는 거겠지. 어쨌건, 아나운서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대형 방송국이라 경쟁이 심했는데 남자로는 유일하게 그해의 신입으로 뽑혀 들어갔다. 그보다 쟁쟁한 학력을 가진 이들이 많았음에도. 그도 모자라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아침 방송의 기상 캐스터가 되었다. 주말 뉴스도 아니고 무려 평일. 이른 아침이긴 했으나 이른 출근을 하는 이들에게는 필수적인 시간대의 뉴스. 지금까지 젊고 어린 여성 아나운서들이 담당했던 기상 캐스터의 자리를 무려 남자인 스가와라 코우시가 따낸 것이었다. 그 소식을 안고 "기적이야!" 라며 뛰어들어오던 스가와라 코우시를 오이카와는 번쩍 안아 올리며 축하했다. 진심으로 축하했었다. 그때는.


하지만 금세 그 기분은 사라졌다. 6시 50분 즈음 흐르는 스가와라 코우시의 기상 안내는 단숨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른 출근을 하는 이들이 일본에 이토록 많았던가. SNS로 뉴스 장면이 떠다니며 일약 스타처럼 되었고 놀랍게도 방송국의 간판 아나운서가 되어 현재는 저녁 메인 뉴스의 기상 캐스터와 심야의 음악 프로 MC 자리까지 차지했다. 일단은 사원이라는 점에서 다른 언론 매체에는 나가지 않고 있었지만, 아마 그가 빠른 프리 선언을 한다면 그를 광고나 잡지에서 보는 것도 어렵지 않을 듯 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분명 축하할 일이었지만, 오이카와는 그렇지 못했다.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한 운동선수 입장이라 그를 질투하거나 그의 성공에 배 아파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냥 사람들 입에 스가와라 코우시라는 이름이 오르고 내리는 게 싫었다. 여자 아이돌이 TV에 나와 "엣? 이상형이요? 하하, 부끄러운데! 으음~ JBS 방송국에 스가와라 아나운서요!" 라고 떠들어 대는 것도 싫었다. 가끔 커피 사러 가는 카페에서 여대생들이 "오늘 아침 기상 예보 봤어?" "봤지! 스가와라군 오늘 셔츠 잘 어울렸지?" "그치이~?" 하며 떠들어 대는 것 역시도 싫었다. 모처럼 오프가 맞아 같이 외출해도 "스가와라군 팬이에요!" 라던가 "스가와라군 악수해 주세요!" 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것도 싫었고 동네 슈퍼에 갔다 "아이고 잘생겼네!!" 하며 툭툭 그의 엉덩이를 두드리는 할머니들은 더 싫었다. 그가 이렇게 유명해지고 모든 사람이 그를 좋아할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아나운서 시험 따위 보지 못하게 했을 텐데. 이미 늦은 후회였다. 자신의 시선도 붙잡아 붙들어 매고 묶고 고정하지 않았던가,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런 스가와라 코우시였다. 그러니 그에게 모두의 시선이 닿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오이카와는 견딜 수 없이 슬펐고 싫었고 질투가 났다.


그러니 기상방송 따위 안 보면 그만인데



"그게 또 마음대로 안 되지. 나는."



자신이 골라준 옷, 타이를 두르고 "오늘 날씨입니다." 하고 웃는 스가와라 코우시는 최고니까 포기가 쉽지 않았다.

간단한 방송 안내가 끝나자 빠르게 아침 뉴스 로고송이 흘렀다. 매일 아침 보는 아나운서들이 가벼운 인사로 뉴스의 시작을 알렸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고, 나라에서 무슨 일을 했고, 어디서 무슨 행사가 열리는지 매일과 같은 시시콜콜한 뉴스들이 흐르고 또 흘렀다. 전혀 머릿속에 남지 않는 이야기들을 눈으로 담고 귀로 흘리며 오이카와는 구겨진 몸을 더 웅크리고 반짝이는 브라운관에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의미 없는 것들을 담았을까 드디어 "이어서 날씨입니다." 하는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상쾌하게 울렸다.



"오늘 날씨입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흘렀다.



"도쿄의 기온은 20도로-"
익숙한 머리카락이 움직임과 흔들렸다.



"아직은 일교차가 심하니 꼭 겉옷을 준비해 나가세요."

익숙한 시선이 닿았다.



"한 주 날씨입니다."
익숙한 손짓이 커다랗게 곡선을 그렸다.



"이번 주 주말엔 비 소식이 있으니 외출을 준비하는 분들께서는 우산을 챙기세요!"
익숙한 얼굴이 웃었다.



그렇게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스가와라 코우시가 화면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오이카와는 리모컨을 들었다. 삑, 버튼을 누르자 방금까지 요란했던 집안에 고요함이 가득 찼다. 살짝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처음엔 정말 기분 좋게 뉴스를 봤던 거 같은데, 그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봤던 거 같은데. 매일매일 그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작아지고 깎아지고 녹아갔다.
가장 싫은 것은 자신에게 익숙한 스가와라 코우시가 모두에게 익숙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그의 모습, 그의 얼굴, 그의 목소리, 그의 움직임, 그의 얼굴 모든 것이 저 만의 것이 아니게 되어가는 것.
그러니 이제 더는 "항상 응원할게." 같은 거짓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루빨리 일 따위, 그만두면 좋을 텐데."



아직 운동선수로서 갈 길은 멀지만, 갓 데뷔한 프로 선수로서는 나쁘지 않은 주목도를 받고 있었다. 지금처럼만 하면 스가와라 코우시를 먹여 살리는데 어떠한 어려움도 없을 터였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 그만 웃어주고 내 앞에서만, 여기서만 웃어주면 좋을 텐데. 스스로가 짜증 나고 못되고 치졸하고 엉망이라는 걸 알면서도 생각은 멈출 줄 몰랐다. 멈출 줄 모르고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오늘 예보도 좋았어. 있다가 방송국 앞에서 연락할게.]


그래도 이런 자신을 알면 그가 질려 도망갈지도 모르니 오이카와는 구겨진 몸을 쭈욱 펴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메시지를 보냈다.


적당하게 홀로 오전 시간을 보낸 후, 그의 시간이 빌 타임에 맞춰 집을 나섰다. 구단 스케쥴이 없는 날의 외출이라면 보통 운동복에 대충 후드를 뒤집어 쓰기 일쑤였지만, 스가와라 코우시를 만날 때는 달랐다. 정성스레 면도까지 하고 세팅까지 한 머리 꼴로 집을 나섰다. 많이 힘쓴 척 하지 않으려 적당하게 셔츠와 바지를 골라 입었지만, 구김 하나 없도록 세세하게 굴었다.


차를 몰고 방송국으로 향하는 길, 언젠가 스가와라 코우시가 "거기 엄청 맛있어!" 라며 극찬했던 베이커리에 들려 빵을 몇 가지 골랐다. 강한 맛을 좋아하는 그의 취향을 고려해 마늘 향이 강하게 나거나 치즈 향이 강한 것들로. 그렇게 포장해 나오는 길에 달갑지 않게도 참으로 우연히 가게에 들어서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오늘 예보 봤어? 스가와라군이 두른 넥타이 생로랑 넥타이 맞지? 전에 잡지에서 본 거 같단 말이야."
"그런가, 스가와라군 패션 센스 좋잖아. 똑똑하고 다정하고 옷 잘 입는 남자라니, 그런 남자 어디 없나?"



절대로 듣고 싶지 않는 이야기들, 그래도 귀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 오이카와는 베이커리의 봉투를 구겼다. 지금이라도 붙잡아 "걔 패션 센스 없어요. 그 넥타이 내가 선물한 거고, 매일 내가 골라주는 옷 입고 나가요. 똑똑하고 다정한 건 맞지만, 그건 당신이 알 거 없고." 라 쏘아주고 싶은 걸 참으며 다시 차에 올랐다. 마구 짜증을 풀어내고 싶었지만, 견뎌내었다. 오이카와에게 이런 일은 이제 익숙한 하루의 일과였다.


차를 몰아 방송국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어디까지 왔어?} 라는 스가와라 코우시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바로 아래. 빵도 사 왔어. 커피만 들고 내려와.] 조금 무뚝뚝하게 답장을 하자 금세 [만세↖^0^↗] 라고 다시 날아왔다. 젠장, 이게 뭐라고 또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차창 넘어 스가와라 코우시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 아침 자신이 골라 준 그 복장 그대로, 뉴스에 나왔던 모습 그대로, 거기에 출입증만 건 채로 달려 나온 그가 익숙하게 차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를 향한 시선들, 관심들, 따라붙는 눈들. 그게 요즘 들어 무척이나 많다는 것을 알고 있고 실감하고 느끼고 있었지만, 환하게 웃는 그를 마주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또 마음이 사납게 굴어



"미안."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어? 놀란 그가 무어라 거절도 하지 못하도록 익숙하게 목 뒤를 잡아당겼다. 가볍게 끌려온 고개를 제 그림자로 덮어 누르곤 입을 맞췄다. 자신과 같은 스킨향이 코끝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으응, 살짝 거부하듯 그의 눌린 목소리가 뒤엉킨 혀와 함께 울렸다. 툭툭 어깨를 두드리는 주먹을 알면서도 오이카와는 멈추지 않고 고개를 틀어 벌어진 입술을 모두 머금었다. 약해빠진 귀를 손가락으로 살짝 문지르자 미약하게 반항하던 주먹이 이내 제 어깨를 붙들어 잡았다. 치아를 훑고, 혀를 뒤엉켜대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들이 뒤섞이며 소리를 내고, 한참을 그렇게 맞물려 있다 아쉬움에 슬쩍 그의 아랫입술까지 품어 본 후에야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에게서 떨어졌다. 하아, 하아. 조금 놀란 얼굴이 저를 들여보고 있었다.



"왜 내가 깨우지 않은 줄 알아?"



당장 그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은, 제 이름을 부르게 하고 싶은, 발갛게 울리고 싶은 그런 충동질을 꾸역꾸역 눌러 앉히며 오이카와가 물었다.



"왜?"



스가와라 코우시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차가움이 전혀 담기지 않은 그 눈동자를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웃었다.



그건, 네가 깨지 않았으면 해서. 나에게서.



날뛰는 감정은, 마음을 오늘도 눌러 죽이며 오이카와는



"그냥"



거짓말했다. 이력서에 한 줄도 쓰지 못하겠지만, 매일 하니 이것도 꽤 자신 있는 특기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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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살짝 썰풀었던 애...

이 이후 스가와라 코우시는 대문짝하게 스캔들이 터지는데...!


지각을 피하고자 정신없이 썼으나, 지각하고 말아따...

전력 주제는 늦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