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로 주세요. 포장은 필요 없습니다."
카운터에 감색 넥타이를 내밀며 스가와라가 피곤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아침 일찍부터 들이닥친 첫 손님의 까칠한 요구에도 점원은 웃으며 바로 두를 수 있게 태그까지 제거해 건네주었다. 그렇게 계산을 끝낸 후 스가와라는 누가 볼세라 빠르게 걸어 가게 앞에 세워둔 자신의 차로 향했다. 올라타기가 무섭게 조수석에 던져 놓았던 싸구려 와이셔츠의 포장을 뜯었다. 편의점표 셔츠로 재질도 핏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급한대로 셔츠를 목 끝까지 채워 단단히 잠근 후 방금 사온 새 넥타이를 목에 둘렀다. 어제 둘렀던 것은 벗어 던진 셔츠와 함께 봉투에 쑤셔 넣었다. 차의 미러로 보이는 꼴이 별로였다. 그래도 새 셔츠와 새 넥타이니, 적어도 어제와 같은 옷차림이라고 눈치를 채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리고 스가와라는 그거면 충분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곁에 남자가 누워있는 것은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있어서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직업도 나이도 모르는 남자들, 심지어 이름을 모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러니 자신이 벌거벗고 처음 보는 호텔 방에서 남자와 아침을 맞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놀랐다.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허둥거리다 침대 아래로 넘어져 부딪힌 무릎이 시큰하게 아팠다. 제 옆에 직장 후배가 누워 있었다. 그것도 이제 막 들어온 신입 후배가. 반질한 얼굴로 잠결에 스스럼없이 제 쪽으로 손을 뻗는 행동에 스가와라는 놀라 피하며 마구잡이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도대체 왜 이 녀석이 여기 있는 거지? 왜 내 옆에서 옷을 벗고 있는 거지? 왜 나도 벗고 있는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은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아 금방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사고, 그야말로 대형 사고였다. 회식 때 팀장이 주는 술을 좋다고 받아먹다 벌인 최악의 사고였다. 처음 팀에 들어와 인사를 나눌 때부터 괜찮게 생겼네 라며 가볍게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후배를 홀랑 잡아먹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술, 망할 술. 술이 원수였다. 술은 사람의 정신을 흐트러트리고 무모한 용기를 내뿜게 한다. 그 액체에 절여진 머리가 요란하게 소리를 내고 어제의 일을 알리듯 허리와 말하고 싶지 않은 부위가 비명을 질러댔지만 스가와라는 제 옷을 챙겨 도망치듯이 호텔을 나왔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지독한 스트레스를 안고 출근길에 올라 있었다. 직장이 백화점 디자인팀이라 그런지 패션에 지대한 관심이 많은 여자들이 많았다. 그녀들이 얼굴을 붉히며 "스가와라상, 어제랑 옷이 똑같네요~"라며 지적할까 무서워 급한 대로 셔츠와 넥타이만이라도 바꿔 메었다. 자켓을 연속으로 입는 것은 그리 이상해 보이지 않겠지. 바지도 같은 색이 여러 벌이라고 우기면 될 것이었다. 누구도 아직 시작하지 않은 질문에 대한 변명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스가와라는 점점 죽어가는 자신의 몸을 끌고 백화점 지하로 향했다. 오픈 준비가 덜 된 식당가를 걸으며 저도 모르게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익숙한 직원들의 인사에도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누군가와 살갑게 아침의 인사를 할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잔뜩 긴장한 폼으로 팀 사무실로 들어서자 어제의 강도 높은 회식 덕분인지 대부분 자리가 비어있었다. 출근한 직원 몇 명의 얼굴은 피곤과 피곤으로 덮여 엉망이었다.
"스가와라상도 어제 수고하셨어요. 얼굴색이 많이 안 좋네."
"...하하. 너무 많이 마셔서."
건너편 직원의 말에 대충 대답하며 제 자리의 의자를 끌어 앉았다. 얼굴색이 안 좋은 것은 술 때문이 아니라 지우고 싶은 기억 때문이지만 뭐, 아무래도 좋았다. 한적하고 조용했던 사무실은 출근 시간이 임박해오자 익숙하게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저마다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 대신 "어제 수고했어요." 혹은 "어제 잘 들어갔어요?" 라는 말을 건네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 틈에는 어제의 빌어먹을 후배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왜 안 보이지? 설마 아직까지 호텔 침대 위에서 자고있는 것은 아니겠지. 째깍째깍 지각으로 향하는 시곗바늘을 바라보며 스가와라는 초조하게 문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연하의 후배라고해도 10살짜리 꼬맹이가 아니니 깨우고 씻기고 준비시킬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홀랑 두고 나온데에 죄책감이 살짝 일었다. 하지만 놈도 그리 양반은 못 되는지 스가와라가 정확히 5번째 그의 출근을 걱정할 때 즈음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센스없이 어제와 또옥같은 옷차림으로.
"카게야마군 어제 집에 못 들어갔어?"
기가 막히게 그 꼴을 캐치한 여자직원이 웃으며 물어왔다. 두리번두리번 돌아가던 시선이 스가와라에게로 꽂혀 들어왔다.
"네. 집에 못 들어가고 근처 모텔에서 잠들었어요."
"스가와라상이랑 같이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어? 혹시 스가와라상, 귀여운 후배를 버리고 혼자 가신 거에요?!"
저 커다란 녀석의 어디가 귀여운지 스가와라는 알 수 없었지만 장난스레 따져 묻는 여직원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하하, 저도 기억이 없어서. 새빨간 거짓말을 술술 뱉으며 카게야마의 시선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참 열렬하기 그지없는 다정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저런 종류의 관심은 스가와라가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도망치듯 고개를 돌렸음에도 따라붙는 시선에 하는 수 없이 스가와라는 모닝커피를 운운하며 몸을 일으켰다. 진짜로 아주 쓰고 쓴 아메리카노라도 제 속에 쏟아 넣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백화점 1층에 자리 잡은 커피 브랜드를 떠올리며 지갑을 챙겼다. 뒤쫓아 올까 불안했던 후배는 다행히도 여전히 '옷차림'에 대한 지적으로 여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시선만 쫓을 뿐이었다.
막 오픈의 시작을 알리는 노랫소리에 스가와라는 1층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벽에 붙어 섰다. 이른 아침부터 백화점을 찾은 고객들을 상대로 의미 없이 꾸벅꾸벅 인사를 하며 서둘러 이 노래가 끝나길 바랐다. 약 3분간의 긴 오픈 타임이 끝나자 마치 얼음과 같았던 직원들이 땡, 소리를 들은 듯 자리를 찾아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때와 다름없는 그 평범한 풍경을 눈에 담으며 스가와라는 비척비척 무거운 다리를 끌고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직원 명찰을 달고 고객 시설을 이용하는 뻔뻔함이라니. 하지만 본사 직원에겐 누구도 지적하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1층으로 올라오자 진득한 화장품 냄새와 잡화의 가죽 냄새가 익숙하게 뒤섞여 풍겨왔다. 자신을 알아보는 몇몇 직원들과 눈과 고개만으로 인사를 나눈 후 입구 근처에 있는 카페로 들어섰다. 백화점 바로 앞에 위치한 개인 카페가 커피 맛은 더 좋았으나 여긴 직원 할인이 되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아침부터 상냥함을 최대치로 끌어낸 직원의 말에 스가와라는 "얼음 가득 넣어 아이스 아메리카노요."라고 주문했다. 이로 시린 얼음을 으득으득 씹어 삼키면 좀 기분이 나아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신이 자신을 도울 생각은 없는지 막 계산을 위해 카드를 내미는 순간, 등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저도 한 잔만 사주세요. 선배."
따라왔어. 지독한 자식. 슬쩍 고개만 돌려 돌아보자 뻔뻔하게도 카게야마 토비오가 서있었다. 저 녀석은 술 먹고 선배랑 그것도 남자 선배랑 뒹굴었는데 껄끄럽지도 않나? 자신이야 게이었으니 아무렇지 않다고 쳐도 저놈은 아니었다. 아닌데 왜 저렇게 태평한지 모르겠다. 오히려 이쪽을 슬금슬금 피해야 정상이 아니냐고.
"뭐 마실래?"
"같은 거로요."
뻔뻔하게도 주문까지 던지는 후배를 흘겨보며 스가와라는 추가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부탁했다. 대신 샷을 가득 넣어서 쓰고 또 쓰게. 그렇게 소심한 복수 아닌 복수로 나온 아메리카노를 녀석에게 쥐여주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울리는 구두 소리의 박자에 맞추어 녀석의 것이 따라붙었다. 얼른 사무실로 돌아가야지. 적어도 그곳에 가면 어제의 일을 언급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단둘만의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선배, 거긴 안 돼요."
하지만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인지 카게야마가 막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려던 스가와라의 팔뚝을 멋대로 잡아 세웠다. 멈칫한 고객들에게 죄송하다 사과를 하며 끌어냈다.
"고객 시설물은 이용하면 안 되는데요."
이래서 신입이란. 융통성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쪼록, 쓴 아메리카노를 아무렇지 않게 스트로우로 빨아 마시며 카게야마가 잡은 팔뚝을 이끌었다. 놓으라고 말 할 타이밍을 놓친 스가와라는 멍하니 손에 젖은 컵을 쥐고 직원용 통로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장소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녀석은 가볍게 팔꿈치를 놓아주더니 빙글 돌아섰다.
"왜 그렇게 도망갔어요?"
"...뭘?"
알면서 스가와라는 시치미를 뗐다.
"아침에요."
"우리가 다정하게 아침을 함께 맞을 사이는 아니잖아."
"왜요?"
왜요 라니. 따지는 것도 그렇다고 화내는 것도 아닌 순수한 궁금증을 담은 질문에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카게야마 토비오 후배님. 어제는 그냥 사고였어. 사고..."
"전 술 먹고 사고 치는 타입 아니에요."
"그럼 어제가 첫 사고가 되겠네. 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컵을 흔들었다. 할 말이 없어 스트로우를 물고 시원한 액체를 목으로 넘겨 삼켰다. 나름대로 평온을 유지하려 한 행동이었으나 대뜸 던져지는 카게야마의 말에 그 노력마저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제가 책임질게요."
"...뭐?!"
"그 사고, 제가 책임진다고요."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여자도 아니고. 하하하.. 임신도 안 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런 이야기가 아닌데요."
단호하고 진지한 눈빛. 그럼에도 저 다정함이라니. 스가와라는 자신을 내려보는 후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찬 것을 삼켜도 뜨거워진 머리는 식을 줄을 몰랐다.
"카게야마."
"네."
"나 한번 뒹군 남자랑 다신 안 뒹굴어."
질척이는 관계는 딱 질색이었다.
"그리고 연애도 안 해."
애정이 부여되는 관계 역시도 질색이었다. 외로우면 그냥 그 외로움을 풀면 그만이었다. 그것은 성욕과 다름없어서 하룻밤이면 모두 해소가 되는 것이었다. 애정도 그에 따른 관계도 스가와라에게는 불필요한 것들이었다. 지금이 좋았다. 누구에게도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자유롭게 상처받지 않게 적당하게 놀고 싶었다.
"왜요?"
"...뭐?"
"제가 별로였어요?"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묘하게 핀트가 어긋난 그 질문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단편적으로 기억나는 어젯밤은 별로긴커녕 끝내줬던 것만 기억에 남았다. 엉엉 울면서 토비오라고 이름까지 불렀던 것 같은데. 하지만 좋았다고 해서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멍청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그런 거야.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그런 거니까 그냥 개에게 한 번 물렸던 셈 쳐."
그런 단순한 사고. 오케이? 툭툭 어깨를 치며 그렇게 말했다. 이 대화는 그만두자는 의미이기도 했다. 출근하자마자 너무 자리를 비우는 것도 아닌지라 서둘러 카게야마를 지나쳐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손가락이 미처 그 버튼에 닿기도 전에 뒤에서 뻗어온 것이 그 위를 덮어 막았다. 커다란 손에 가려진 버튼을 보며 스가와라는 얕게 한숨을 쉬었다.
"선배는 개가 아닌데요."
아, 진짜. 너 왜 그러니? 나도 내가 개가 아닌 것 정도는 알거든? 스가와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카게야마를 올려 보았다.
"왜 이래, 도대체."
선배가 이렇게 덮겠다고 나오면 오히려 고마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귀찮게 책임져라 어쩔거냐 울며 따져 묻는 것보다 훨씬 깔끔하고 좋지 않냐고. 그런데 카게야마는 뭐가 불만인지 이렇게 질척이는 걸까.
"저 선배가 좋아요."
"..."
"어제 사고 아니라는 소리에요."
그만, 뜬금없는 그 고백에 지긋지긋한 목소리로 거부하려는 찰나였다. 등 뒤로 쾅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직원용 비상계단 문이 열렸다. 누가 저렇게 뻥뻥 문을 열어? 매너 없이? 깜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돌아보자 참 빌어먹게도
"좋은 아침."
그곳에는 반갑지 않은 얼굴, 오이카와 토오루가 있었다. 왜 아침부터 싸우고 그래요. 직원들끼리. 그가 웃으며 찰그락 찰그락 차키를 던졌다 받아냈다. 놀라 굳은 스가와라 대신 카게야마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엘리베이터가 주차장까지 잘 안 내려와서 오랜만에 계단을 썼는데 힘드네."
그가 웃으며 스가와라의 바로 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방금까지 카게야마가 막고 있던 그 버튼이었다.
"아, 맞다. 스가와라군."
"네."
"이번 세일 대비 쇼윈도 디자인 때문에 그러는데 잠깐 올라갔다 가요."
그가 깜빡깜빡 변하는 붉은 숫자들을 올려보며 말했다. 그건 팀장님과 하시죠. 카게야마 토비오와 둘이 남는 상황보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둘이 되는 상황이 더 최악이었다. 스가와라는 반 즈음 녹아 밍밍해진 아메리카노를 손바닥 아래로 요란하게 흔들며 말했다.
"아니, 스가와라군이랑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내려오는 숫자에게서 시선을 떼어낸 오이카와가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가 입술만 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스가와라는 잘 알고 있었다. 나 지금 매우 몹시 기분이 더러워. 그 말은 즉, 반항하지 말라는 의미와도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스가와라는 멍하게 이 상황을 지켜보는 카게야마에게 컵을 안겨 주었다.
"그거 버리고 먼저 들어가요."
눈치 없이 싫다고 할까 겁이 났는데 그 정도로 멍청이는 아닌지 카게야마는 다시금 오이카와를 향해 허리를 숙인 후 비상계단으로 사라졌다. 제멋대로 구는 것은 선배 한정인 모양이었다. 띵, 엘리베이터의 도착 음이 울리자 오이카와는 빈 상자 안으로 스가와라의 팔을 잡아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백화점 건물의 가장 끝인 12층과 11층 버튼을 동시에 눌렀다. 지점 대표실로 향하는 직행 버튼이었다.
"누구야, 아까 그 꼬맹이는."
"...26살 먹은 남자애가 꼬맹이는 아니죠. 대표님."
스가와라는 붙잡혔던 팔뚝을 찬 손으로 슬쩍 문지르며 대꾸했다. 뭐, 상관없어. 찬찬히 올라가는 숫자를 보며 그가 대답했다. 그래 상관없겠지. 아마 30분 이내로 카게야마 토비오의 이력서며 지원서 보고서까지 모두 정리되어 저 인간의 책상 위에 올라갈 테니까. 11층과 12층의 버튼이 동시에 눌린 탓인지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직행했다. 띵, 익숙한 음과 함께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내려. 말도 아닌 턱짓으로 명령하는 그 오만한 자태에 스가와라는 속으로 그를 짓이기며 먼저 내렸다. 뒤따라 내린 오이카와를 확인한 여비서가 웃으며 "출근하셨습니까, 대표님."이라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요, 짧게 대꾸한 그가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문을 보고 있으려니 처음 이곳에 올라왔던 날이 떠올라 스가와라는 슬쩍 웃었다.
그러니까 작년 봄 이야기였다. 뇌물을 먹었네 어쨌네라며 소문이 돌던 지점 대표가 짤리고 본사에서 새 대표가 온다며 백화점이 난리가 아니었다. 디자인팀 소속으로 백화점이 아닌 이 백화점의 브랜드 소속이었지만 사실 돌아가는 판을 몰랐던 스가와라는 누가 오든 아무렴 좋았다. 지하 1층에 위치한 디자인팀은 따로 대표를 만날 일도 없는 데다 일개 팀원인 자신이 팀장 회의 같은데 낄 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대표의 첫 출근날, 그를 본 여직원들의 쑥덕거림이 호기심을 동하게 했다. 회장 아들이라며? 서른도 안됐데. 얼굴 봤어? 장난 아니더라, 같은 이야기들. 금수저를 든 탯줄에 젊고 능력 있고 잘생긴 대표라. 잡으면 신데렐라라고 호들갑 떠는 여직원들 사이에서 한번 얼굴은 보고 싶네- 정도의 호기심이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뜻밖에도 대표실에서 부른다는 호출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13층까지 올라갔었다. 내가 뭘 실수를 했나? 하는 불안감과 소문의 진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설레임이 공존해 마구 심장을 두들겨 댔다. 그리고 어땠더라? 이 문을 열고 오이카와 토오루를 마주했을 때? 비명을 질렀던가? 아니, 입만 떡 벌렸던 것 같다. 잘 닦인 유리 데스크 위에 <대표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이름과 그 뒤로 비싸 보이는 수트를 빼입은 사내의 얼굴은 입을 벌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도 그럴게, 우리 5년이나 사겼으니까. 옛 애인을 직장 상사로, 그것도 어마어마한 하늘과 땅 차이의 거리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던 일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헤어지고 삼 개월 만의 일이라 더 충격이었다. 잘 지냈어? 반질하게 웃으며 묻는 그 질문에 뺨을 안 때린 자신을 스가와라는 다독이며 칭찬했다. 그렇게 살갑게 질문을 나눌 정도로 좋게 헤어진 사이가 아니었다. 그와 자신은.
막 20대에 들어서 제 성 정체성을 알았을 때 스가와라 코우시에겐 혼돈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세계에 발을 담그는 게 무서워 찔금거렸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발견한 게 저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같은 대학, 같은 학부를 전공했던 그는 스스럼없이 스가와라의 빈틈을 다정하게 파고들었다. 그래서 철석같이 믿었다. 첫사랑, 첫 데이트, 첫 키스, 첫 경험- 스가와라의 모든 처음은 모두 오이카와 토오루가 가져갔다. 너무 좋았고 너무 사랑했고 너무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 그가 다른 여자와 차에서 뒹굴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지. 연락이 뜸했던 오이카와가 걱정되어, 아니 사실은 불안해서 밤늦게 그의 집을 찾았을 때였다. 그의 집 앞에서 들썩이는 익숙한 차체에 뭣도 모르고 순진하게 다가가 안을 들여본 게 화근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안에서 여자의 스커트를 걷어 올리고 자신을 안는 것처럼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지만 오이카와는 멈추지 않았다. 놀라 튀어나와 사과를 한다거나 변명하지도 않았다. 황급히 창에서 떨어져 숨을 몰아쉬는 스가와라를 달래려 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끝냈어야 했는데. 미친 새끼라고 욕을 하고 돌아서야 했는데. 이제와 후회해도 늦었지만 스가와라는 그러질 못했다. 멍하니 그 차가 움직이지 않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이윽고 엉망인 꼴로 걸어 나온 오이카와가 웃으며 "잘 지냈어?" 라고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냐고? 적어도 애인 사이에 나눌 인사는 아닌 모양새였다. 오이카와는 변명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집에서 정해준 약혼녀야." 그저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오픈 릴레이션쉽,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에게 이상한 것을 가르쳤다. 너랑 관계는 유지할 거야. 그런데 난 다른 사람하고도 뒹굴고 싶어.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어리석었던 자신은 도망치지 못했다. 오이카와가 자신을 붙잡고 있는 감정에 사랑은 없었지만 자신이 그를 붙잡고 있는 감정에는 있었다. 어쨌거나, 그와 사귀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와 나누는 입술에서 립스틱 맛이 나고 그의 셔츠에서 다른 남자의 로션 향이 풍겨와도 결국은 돌아오는 곳이 자신이라는 것으로 버텨냈다. 그런데 그것도 시간이 흐르니 부질없어졌다. 이렇게 관계에 목을 매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그것도 나만. 사랑을 갈구하고 애정을 바라며 고통받을 필요가 있을까? 스가와라는 외로웠다. 견딜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가 미웠다. 동시에 너무도 좋았다.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질척이고 싶지 않았다. 이 외로움을 고독을 들켜 귀찮은 존재가 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스가와라는 그와 똑같이 굴기로 결심했다.
바에 가 남자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혐오스럽고 스스로가 역겹기도 했는데 시간이 흐르니 그것도 괜찮아졌다. 자신이 다른 남자를 만나고 돌아올 때마다 오이카와는 심기가 불편했다. 역으로 당하니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니, 자신에게 보이는 애정이라 생각하니 좋았다. 이 관계가 자신이 하는 짓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가와라는 그렇게 오이카와의 애정을 확인해댔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더라 마지막에는? 결국 서로에게 지쳐 이별. "다른 남자에게 안기든 벌리든 네 마음대로 해. 대신 돌아만 와."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은 오이카와에게 있어서 크나큰 고백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스가와라에겐 아니었다. 그건 이별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랑하는데 왜 못된 나를 그냥 둬? 사랑하는데 왜 너는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해?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스가와라는 오이카와를 버렸다.
말이야 버렸다지 솔직히 따지고 보면 버림받은 것은 자신이었다. 실제로 오이카와가 아닌 자신이 엉엉 울었으니까. 그리고 나서는 뭐, 물 흐르는 대로 살았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겠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그저 일회용 관계가 편해졌다. 신나게 즐기고 뒹굴고 난 다음에는 도사리고 있던 외로움도 쏙 사라져버렸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자신에게 이렇게 못된 것들만 가르쳐놨다. 사랑과 외로움. 공존해서는 안 될 것들이 스가와라 안에서 공존하며 이상한 소리만 내었다.
그랬으니 다시 만난 재회가 반가울 리가 없었다. 그때 그 약혼녀랑은 파토가 났는지 그의 손에 반지가 없는 것에 안심하는 스스로도 반갑지 않았다. 그래도 이 취업난에 구한 번듯한 직장을 빌어먹을 옛 애인, 아니 뭐 그렇게 부를 가치도 없는 사람 때문에 잃고 싶지 않아 꾸역꾸역 버텼는데.. 아침부터 곤란한 꼴을 보였다. 아니, 곤란할 것도 없나. 이제 끝났으니까? 완벽하게?
"뭘 그렇게 머리를 굴려."
덜그덕거리는 제 안의 소리를 들었는지 오이카와가 물었다. 내 머리로 내가 생각 좀 하겠다는데 뭐.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럴 자격도 없었고.
"걔랑 잤어?"
"...뭐?"
"아까 그 머리 검은 꼬맹이랑 잤냐고."
오이카와가 걸치고 있던 수트 자켓을 벗어 보기 좋게 걸어두며 물었다.
"너 네 생활 반경에 든 놈들하곤 안 뒹굴잖아."
"누구처럼 공과 사는 구분 못 하는 병신이 아니라서요. 대표님."
"내가 좀 병신 같기는 해."
그가 웃으며 인정했다. 다행이네, 스스로 병신인 건 알아서. 스가와라는 차마 그 말은 입에 담지 못했다. 어쨌거나 제 목숨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니까. 천천히 걸음을 옮겨 책상에 걸터앉은 그가 단정한 셔츠의 커프스단추를 끌었다. 그리곤 곱게 접어 올리며 말했다. 이리 와, 라고.
"싫어."
"내가 너에게 가면 별로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협박 같은 소리를 잘도 웃으며 떠들었다. 오이카와에게는 좋은 일, 자신에게는 좋지 않은 일. 여러 가지 경우를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하는 수 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만족했는지 씩 입꼬리를 올린 잘생긴 얼굴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보았다.
"싸구려 셔츠. 급하게 샀나 봐. 접는 선이 다 살아있네."
"..."
"아침까지 뒹구느라 집에 들를 시간도 없었어?"
"..."
"응?"
그리 물으며 그가 셔츠로 손을 뻗었다. 아차 싶은 생각에 뒤로 몸을 뺐지만 그보다 손을 움켜진 오이카와가 더 빨랐다. 하지 마.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뻗어진 손이 단추를 풀러 내리나 싶더니 이내 잡아당기며 뜯어냈다. 투둑, 힘없이 싸구려 단추들이 떨어져 대표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끝내주네."
휘파람을 불며 중얼댔다. 그러게, 젊은 애가 보통이 아니더라고. 자신도 아침에 놀랐다. 대충 옷가지를 들고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울긋불긋하게 핀 제 몸의 흔적들에 하얗게 머리가 비는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보이는 목이나 팔 언저리에 남기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싸늘하게 닿는 공기에 스가와라가 여유 있는 손으로 셔츠를 잡아 감추자 그제야 오이카와가 손을 놓아주곤 몸을 일으켰다.
"카드 줄 테니까 아래 내려가서 새로 사 입어."
"..."
"그리고 그대로 조퇴해."
"뭐?"
"쇼핑하고 있으면 비서에게 시켜서 네 짐 챙겨놓으라 할 테니까 집으로 가라고. 스가와라 코우시."
빙글 책상으로 돌아선 그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셔츠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마치 화대를 받는 기분이라 아주 불쾌했다.
"말 들어."
"..."
"그 꼴로 사무실로 내려가 앉으면, 네 팀원들이 보는 앞에서 박아줄 테니까. 그런 게 취향은 아니잖아."
그렇지? 웃으며 묻는 그 말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오이카와를 5년이나 겪은 스가와라는 이게 농담이 아니라는 것 즈음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망할 놈. 차마 입에 담아 씹지 못하는 그를 속으로만 밟아대며 스가와라는 대표실을 나왔다. 막 차를 준비해 들어오려던 여비서가 놀라 토끼 눈을 떴지만 이런 꼴을 한 두 번 들키는 것도 아닌지라 창피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13층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에 오른 스가와라는 팔짱을 껴 단추 대신 셔츠를 여몄다. 그리곤 1층에 도착하기 무섭게 명품관에 들어가 외쳤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라고. 물론 사용한 것은 빌어먹을 그의 화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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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ㅏ점인 이유는 스가와라가 오이카와의 카드로 쇼핑질을 아주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퇴고는 언제나처럼 나중에!!!!!!!!!!!!!!!!!!!!!! 나가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