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선수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팬들이나 대중들의 눈에 보일 정도라면 분명 오이카와 토오루 선수도 자각은 하고 있을 겁니다. 항상 무릎으로 고생하더니 이번 시즌에도 어김없이 발목이 잡히는 듯 보이죠?"
-"아직까지는요.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팬들의 환호를 이끄는 만큼 팀의 주축 선수로서는 이번 시즌 보여준 게 없어도 너무 없죠. 현재 팀은 오늘로 6연패를 기록하고 있고-"
지직-소리와 함께 라디오가 넘어갔다.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스가와라 코우시는 익숙하게 여유로운 손을 뻗어 주파수를 넘기고 넘겨 적당하게 음악이 흐르는 채널에 맞추었다. 창에 팔을 대고 기대 누워있던 오이카와는 떴던 눈을 감고 방금 자신에게 신랄한 평을 내린 기자들의 멘트를 곱씹었다. 경기를 앞두고 시작된 중계이니 오늘의 경기, 중점적인 포인트, 선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넉넉하지 못한 자신의 평가를 들으려니 속이 다 쓰렸다. 하지만 틀린 말은 조금도 없었다. 팬들 사이에서 농담으로 불리는 그 '유리 무릎'이 올 시즌도 비켜가지 못하고 또 말썽이었다. 두 달 전에 염좌로 약 한 달을 휴식하고 돌아왔지만 모두의 기대만큼의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패배는 팀의 사기를 떨어트렸고 오이카와는 이제 이 상황이 너무도 익숙해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덩달아 질려서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못난 자신과 달리 연인 스가와라 코우시는 이런 날카로운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오늘도 그랬다. 자신을 까내리는 스포츠 기사를 읽으며 묵묵히 시리얼을 씹어 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가와라는 말없이 다가와 손에서 신문을 빼앗고 눈앞의 그릇을 빼앗았다. 원망스러운 얼굴로 돌아보자 "경기 앞두고 호랑이 기운이라도 필요해?" 라며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던졌다. 기자들의 폭격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기에 일부로 팀원들과 합류하지 않고 따로 가겠다고 이야기해놓은 상황에서 늦장을 부렸다. 유치원 가기 싫어하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구는 자신에게 스가와라는 조금의 화도 내지 않으며 대신 짐을 챙겨 제 팔을 잡아끌고 나섰다. 그리고 지금. 금요일 저녁, 쉬지도 못하고 자신을 코트 위에 세우기 위해 운전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지겹지?"
"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음악에 볼륨을 높이며 그가 반문했다. 이렇게 심통 부리고 다 커서는 어린아이처럼 구는 오이카와씨가 지겹지? 고작 무릎 부상 가지고 엄살 부리고 동굴로 숨어버리는 오이카와씨의 꼴이 지겹지? 그렇게 물으려던 말은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The Verve의 Bitter Sweet Symphony에 묻혀 사라져버렸다. 달콤하지만 씁쓸한 교향곡, 그게 바로 인생이라며 시작하는 노래 가사에 오이카와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그냥 달콤하기만 한 인생이 좋은데. 그편이 더 편한데. 씁쓸한 것은 필요 없었다. 어두운 거리에 반짝이는 네온사인이 창을 통해 몇 번이고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풍경을 물끄러미 눈에 담으며 오이카와는 노래에 맞춰 흥얼거리는 스가와라의 목소리를 들었다. 엉망인 자신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연인 스가와라 코우시 밖에 없었다. 그런 그를 몰아세워서 멍청한 자신 때문에 잃고 싶지는 않았다. 못된 질문으로 많이 참고 견디고 있을 그를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남아있는 자신의 어른스러움을 대견해 하면서 오이카와는 눈을 감았다.
가뿐하게 금요일 저녁의 거리를 달린 차는 이윽고 오늘의 시합이 기다리고 있는 경기장 근처로 진입했다. 제각각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 유니폼을 갖춰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발견되었다. 그 틈에서 여전히 자신의 셔츠를 입고 있는 몇몇 팬들을 보며 오이카와는 숨이 막혀옴을 느꼈다.
"괜찮아."
호흡이 거칠어진 저를 눈치챘는지 스가와라가 관계자 주차장으로 들어서며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토오루."
괜찮을 리가 없어. 오늘로 지면 7연패고 이제 이건 마치 기록 세우기처럼 흘러갈 거야. 그럼 모두가 나에게 책임을 물을 테지. 팀의 중심 선수이며 세터이면서 왜 조율을 하지 못하는 거죠? 그 무릎 부상은 도대체 언제 낫는 거죠? 이 패배에 책임을 어떻게 질 거죠? 팬들의 분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죠? 빤히 예상되는 질문들이 자신에게 쏟아져 올 것이었다. 반짝이고 모든 색들이 이루고 있던 자신의 세상은 맛이 가버린 TV처럼 이제는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끼익- 차가 서고 시동이 꺼지자 오이카와는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스가와라는 가만히 앉아 오이카와가 먼저 차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가자."
안 그래도 늦장을 부려 팀 일정보다 10분이나 늦어버린 상황이었다. 몸도 제대로 못 풀고 코트에 서는 최악의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다. 폼도 별로인데 성실하지 못하다며 다른 비난까지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코트 위에서만큼은 꼿꼿하게 서 있고 싶었다. 그건 전부터 버리지 못하는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과도 같았다. 서둘러 짐을 챙겨 차에서 내리는 자신을 따라 스가와라도 함께 내렸다. 조용히 코트를 여미며 곁으로 붙어서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이제 자신은 라커룸으로 향해야 하는 데도 불안해서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아,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약해졌을까. 오이카와는 절로 흘러나오는 자신을 향한 비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내보였다.
"학생 때는-"
"..."
"지는 게 정말 싫었어. 모든 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는 건 진짜 싫었어."
"..."
"그런데, 지금은 진다는 게 이렇게 익숙해."
희한하지? 긴장을 풀 겸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자 스가와라는 슬쩍 주먹을 쥐어 아프지 않게 제 옆구리를 쿡 찔러왔다.
"익숙해지지 마."
패배에. 그런 거에 익숙하다고 말하지 마. 단호한 말투였다.
"너는 잘 할 수 있어. 항상 그랬으니까. 그게 내가 아는 오이카와씨야."
"...."
"내 말 틀려?"
아니.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인생이 흐르고 스쳐 가는 길에 벌어지는 아주 작은 과정일까. 자신이 눈물을 삼키고 혹은 홀로 울며 삭혔던 또 다른 패배들의 날처럼? 답은 지금 당장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천천히 잡히지 않은 손을 뻗어 차게 식은 자신의 뺨에 댄 스가와라가 웃으며 다독였다.
"경기 잘해. 네 눈이 닿는 곳에 있을게."
"응."
떨어져 나가는 손을 잡고 싶었지만 등 뒤로 울리는 경기장의 소음에 오이카와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스가와라를 그렇게 보내고 오이카와는 애써 걸음을 끌며 라커룸으로 향했다. 이미 모인 선수들과 감독 그리고 팀 스태프들의 시선이 꽂혀 들어왔지만 누구도 지각에 대해 비난하진 않았다. 아마 제 슬럼프에 대해 모두가 함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늦어서 코트에 나가 몸을 풀 시간도 없이 빠르게 유니폼을 갈아입고 언제나와 다름없는 미적지근한 기분으로 전술 회의에 참가했다. 감독이 열변을 토하며 코트 시트가 인쇄된 보드에 무언가를 휘갈겨 적고 표시하고 그려댔지만 어느 하나도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오이카와씨, 너 프로잖아. 스스로를 다독여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억지로 끌려간 수영 교실의 풍경이 떠올랐다. 태어나 처음으로 닿는 홀로 닿아야 하는 물이 무서워서 패닉이던 그 순간. 지금이 마치 그 수영장 타일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오늘도 잘 부탁해, 에이스."
전술 회의를 끝내고 코트로 향하는 길, 등을 가볍게 치며 주장이 격려인지 아니면 압박인지 모를 말을 던졌다. 네, 오이카와는 멍하니 그리 대답했다. 입장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근처에 서 있던 상대 팀과 함께 선수들이 저마다 코트로 향했다. 까맣고 하얗기만 한 그 풍경을 눈에 담으며 오이카와는 내키지 않은 발을 당겨 자신이 있어야만 하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홈 경기라 그런지 경기장의 절반은 홈 팬들이 차지해 격려와 오늘의 승리를 위한 응원의 목소리를 내었다. 그것에 감격할 틈도 없이 마지막 화이팅을 위해 감독이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던 모두가 감독의 주변으로 원을 짜 모여들었다.
"7연패는 당하지 말자. 돌아가는 길, 기분 좋게 버스에 오를 수 있도록 우리의 게임을 하자. 알았지?"
이쯤이면 흔들릴 만도 한데 팀의 사령관은 조금도 거침이 없었다. 굳고 단단한 그 목소리에 선수들이 저마다 기합을 넣고 흩어졌다. 오이카와도 그 무리에서 벗어나며 코트 위 자신의 자리를 찾아 걸었다. 저를 부르고 환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조리 몸으로 흡수시키며 그 안에 있을 단 한 사람을 찾아 주변을 둘러 보았다. 온몸을 팀 굿즈로 도배를 한 아저씨, 양손에 응원 도구를 든 소년, 팀 머플러를 귀엽게 두른 여학생. 찬찬히 흑백의 사진처럼 시선 속으로 사람들이 박혀왔다. 그리고-
"오이카와!"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오이카와는 어렵지 않게 자신을 부르는 스가와라 코우시를 발견했다. 참 이상하지? 방금까지는 정말 도망치고 싶었는데 저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절로 입꼬리를 타고 미소가 흘렀다. 자신의 번호가 박힌 유니폼을 입고 크게 팔을 휘젓고 있는 그가 모든 어둠과 빛을 밀어내고 있었다. 제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일그러지고 흔들리던 불안한 세계가 완전하게 굳어 멈추었다. 환하게 짓는 그 미소가 흑백의 세상에 찬찬히 색을 물 들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습관적으로 그의 이름이 세겨진 손목의 아대를 꽉 쥐었다. 어느새인가 눈앞의 풍경은 다시 아름다운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숨을 고르게 한번 내쉰 뒤, 오이카와는 제 눈가를 밀어 닦았다. 겁에 질려있던 아이의 눈동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 자란 어른의 것이 돌아와 있었다.
스가와라 코우시가 거기 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자신을 응원한다. 그 사실로도 오이카와는 이 위에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의 미소만이 언제나 아슬아슬한 오이카와 토오루를 붙잡았다. 버티게 만들었다. 힘차게 발을 뻗게 만들었다. 오늘도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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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주제 / 미소
오이카와의 슬럼프를 기다려주는 것은 언제나 스가와라 코우시게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