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스가와라 코우시는 서른 살이 되는 날 죽기로 결심했다.
바스락, 침대 시트가 구겨지는 소리에 스가와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앉아있는 의자에서 살짝 떨어져 있는 침대 위에서 나는 소리였다. 슬슬 정신이 돌아오는지 그가 목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말을 걸어야 할까?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아픈 곳은 없느냐고? 자신이 몇 시간 전 그의 머리를 야구 배트로 휘둘렀다는 사실도 잊은 채 스가와라는 고민에 쌓여 있었다. 적막함이 가라앉은 방 안에는 시곗바늘의 소리만이 울려댔다. 한참 동안 침대 위에서 뒤척이던 그는 이내 짜증 섞인 욕설과 함께 허리를 일으켰다. 그것이 마치 신호라도 된 듯 스가와라는 의자 위에 함께 올렸던 무릎을 내리며 몸을 세웠다.
"...아, 더럽게 아프네."
그가 마른 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늘 TV에서 보던 그 목소리와 똑같았다. 고운 그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제 심장이 쿵쿵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테이블에 올려 둔 물을 따라 그에게 건넸다. 두어 차례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던 그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보았다. 짙은 눈동자에 오롯이 스가와라 코우시가 담겼다. 하마터면 너무 좋아서 웃음이 비집고 나올 뻔했다.
"당신, 누구야."
그가 아주 낮고 어두운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약간 짐승과 같다고 스가와라는 느꼈다.
"일단 물부터 마셔요. 아직 약 기운이 있어서 머리가 아플지도 몰라요."
"뭐? 당신 나 약도 먹였어?!"
그가 그 짙은 눈을 크게 띄우며 바락 외쳤다. 아뇨,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먹인 게 아니라 주사로-"
"그게 그거잖아."
"그냥 마취약이에요. 운동선수 몸에 해롭지 않게 신경 써서 골랐어요."
이미 의사 소견 없이 선수에게 약물 투여한 자체가 해로운 거거든? 그가 빈정거리며 내민 물컵을 거칠게 빼앗아갔다. 슬쩍 스친 손끝에서 스가와라는 짜릿함을 느꼈다. 꼴깍꼴깍 미지근한 물을 단숨에 비운 그가 슬쩍 컵을 바라보았다. "일회용 컵이에요." 스가와라는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될 문제를 친절하게 짚어주며 말해주었다. 그리곤 덧붙였다.
"유리 컵은 없어요."
자해하면 안 되니까. 스가와라는 그가 자신의 서른 번째 생일까지 부디 무사히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다. 다치거나 아픈 것은 싫었다. 물론 저 잘생긴 얼굴로 울거나 괴로워하는 모습도 보고 싶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웃거나 즐거워하는 얼굴이 더 좋았다. 거기다.. 울거나 괴로운 모습이 보고 싶으면 우승에 좌절했을 때 펑펑 울며 인터뷰 하던 녹화 테이프를 돌려보면 그만이었다.
"일단, 배고프죠? 밥 먹어요."
"넌 지금 내가 밥이 넘어갈 것 같아?"
"선수에게는 균형 잡히고 규칙적인 식사가 중요하잖아요."
뻔뻔해 보일지 모르지만 스가와라는 웃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그리곤 어느새인가 그의 손에 구겨진 플라스틱 컵을 억지로 거두어가며 물었다.
"운동선수의 신경 줄을 끊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어, 아킬레스건 같은."
말 그대로의 협박이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 해를 가하겠다는. 그는 코트 위의 제왕으로 불리는 사람만큼 그리 멍청하지는 않은 지 깊은 한숨과 함께 침대에서 몸을 빼냈다. 그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덜그덕 거리는 기다란 사슬이 함께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침대 다리에서부터 연결되어 제 발목에 묶인 족쇄의 감촉이 별로인지 그가 단박에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스가와라도 그에게 족쇄 따위는 채우고 싶지 않았다. 운동선수에게, 특히나 다리가 중요한 사람에게 족쇄라니. 그래서 양심적으로 오른쪽 다리에만 채워 놓았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가 제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만의 준비를 해놨지만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훌쩍 큰 사내가 그것도 현역 운동선수가 마음먹고 덤비면 스가와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러니,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을 그가 이해해주길 바랐다.
덜그럭거리며 그가 몸을 일으키긴 했으나 둔기로 맞아서인지 아니면 주입한 마취제의 문제인지 스스로 걷는 게 어려워 보였다. 휘청이는 그를 보며 스가와라는 손을 뻗었지만 차마 닿지는 못하고 허공을 맴돌았다. 자신의 선수에게 더러운 것을 입히거나 주거나 먹이거나 닿게 할 수는 없었다. 필요하지 않은 이상 스가와라는 그에게 닿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야, 안 잡아 줘?"
"애도 아니잖습니까. 스스로 일어나세요."
그가 어이없는지 짜증을 내며 벽을 짚었다. 음, 그가 스스로 걷는 게 힘들면 어디서 목줄이라도 채워 당겨드려야 할까? 스가와라는 후우,후우, 숨을 뱉는 그를 보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을 눈치챘는지 그가 "이상한 생각 하지마." 라며 짜증을 내비쳤다. 어쩜, 내 선수는 모르는 게 없을까. 스가와라는 감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둘,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천천히 벽을 짚고 걸음을 옮기는 그를 찬찬히 지켜보며 스가와라는 보폭을 맞췄다. 그렇게 거실로 나오자 그가 "돈도 많네."라며 중얼거렸다. 그럼요, 여긴 나와 당신을 위한 성인데. 스가와라는 그의 칭찬에 기뻐 웃었다.
이 집을 위해 스가와라는 전국을 뒤져서 가장 찾기 힘들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찾기만 힘들어서는 안 되었다. 추가로 도망치기도 힘들어야만 했다. 거기다 내 선수가 지낼 곳이니 아주 안락하고 시설이 좋아야만 했다. 그러던 와중에 걸린 집이 바로 이 건물이었다. 인가에서 걸어서 족히 세 시간은 떨어진 산 중턱의 집이었다. 산 자체도 험해서 등산용이 되지 못했다. 누가 이런 곳에 집을 지어놨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도 사용되지 못하고 매물로만 남아있던 것을 스가와라는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그리곤 이 집을 오로지 그를 위해 채웠다. 커다란 TV도 사고 최신식 냉장고도 들였다. 그를 위해 넓은 침대도 주문하고 사이즈에 맞는 옷과 속옷 심지어 구두와 시계까지 채워놓았다. 물론 함부로 나가지 못하게 비싼 도어락에 CCTV를 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그를 위해 준비된 성과 같았다.
히죽거리며 웃는 스가와라의 생각을 읽었는지 그가 누구도 앉지 않았던 식탁 의자를 빼 앉으며 "칭찬하는 거 아닌데."라고 잘라 말했다. 칭찬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가 주는 것이라면 스가와라는 뭐든지 달게 받을 자신이 있었다. 웃음이 떠나지 않는 스가와라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손을 뻗어 제 머리에 둘린 붕대를 만지작거렸다.
"배트를 좀 세게 휘둘러서 피가 났어요. 있다 밥 먹고 치료해 줄게요."
어느 정도로 야구 배트를 휘둘러야 사람을 기절시킬지 몰라 스가와라는 온 힘을 다해서 휘둘렀다. 피까지 줄줄 흘리는 턱에 하마터면 그가 죽은 줄 알고 눈물까지 났었다. 미친놈. 그가 잘게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스가와라는 딱히 지적하지 않은 채로 몸을 돌려 미리 준비한 식사준비를 서둘렀다. [Q. 요즘 빠져있는 게 있다면요? A.주말에 게임을 해요. 그리고 나폴리탄. 나폴리탄에 빠져있어요.] 얼마 전에 읽었던 인터뷰 기사를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냄비 한가득 준비한 소스를 휘적휘적 나무 주걱으로 저어댔다. 팔팔 끓는 물에 적당한 양의 면도 투하해 익혔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등 뒤로 날카로운 시선이 닿았지만 스가와라는 그것을 의식하지는 않았다. 얼추 요리가 정리되자 커다란 그릇에 보기 좋게 삶아진 면을 담고 그 위에 소스를 얹었다. 준비해 놓은 치즈까지 솔솔 갈아 올려 내밀자 그가 픽 웃었다.
"뭐야, 살찌워서 날 죽일 셈이야?"
"아뇨."
"그럼 뭔데,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니야? 내가 여자 팬들에겐 시달려 봤어도 이렇게 적극적인 남자 팬은 처음이라 도무지 감히 안 잡히네. 원하는 게 뭐야, 돈?"
날이 선 질문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으며 수저와 포크를 겸용으로 쓸 수 있는 식기구를 그에게 내밀었다. 돈 같은 것은 스가와라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밀어 진 식기구를 살피던 그가 "야, 이걸로 면을 어떻게 말아 먹어?" 라며 짜증을 내왔다. 뭐, 힘들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못 할 것까지는 없어 보이는데. 잘난 사람인 만큼 참 손이 가는 스타일인 모양이었다.
"이렇게요."
스가와라는 천천히 그의 손에서 수저 포크를 빼냈다. 그리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을 하나 짧은 이로 찍은 다음 둘둘 수저에 말았다. 깔끔하고 적당한 한입 크기로 말린 것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
"독 안 들었어요."
"..."
"아- 해요. 아-"
말려진 나폴리탄을 한 번, 그리고 스가와라를 한 번. 눈치를 살피듯 눈동자를 굴리던 그는 착하게도 크게 입을 벌렸다.
족쇄를 길게 늘어뜨린 그가 움직일 수 있는 행동반경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를 위한 방, 그 안의 화장실과 욕실, 거실이 전부였다. 현관이나 베란다까지는 발걸음이 닿을 수 없었다. 주방도 식탁까지가 그의 한계였다.
"그러니 물이 마시고 싶으면 절 부르세요."
"새벽엔?"
"소리라도 질러요. 밤잠 없어서 저 금방 일어나요."
가뿐한 스가와라의 대답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억지로 소파에 앉혀놓고 스가와라는 막 붕대를 풀어내는 중이었다. 둘둘 붕대를 풀어내자 제대로 닦지 못한 피들이 굳어있었다. 그 위로 달라붙은 거즈를 떼자 그가 요란한 비명을 내질렀다. 엄살은. 슬쩍 혀를 차며 스가와라는 그의 부드러운 턱을 잡아 고정시켰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살살 소독약을 묻힌 솜으로 그것들을 닦아냈다.
"너 가족이 이러는 건 아냐?"
"아뇨."
자신을 설득하려는 듯 조금 누그러진 그의 목소리에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피를 닦아냈다. 세게 휘두르긴 했지만 찢어진 상처를 보니 조금 마음이 아팠다. 꿰맬까요? 마치 자신이 당한 것처럼 울상을 지으며 묻자 그가 "미쳤어?!" 라며 다시 화를 내왔다. 아니 왜 화를 내고 그래. 아플까 봐 그렇지. 스가와라는 살살 그의 상처 부근을 닦아내며 툴툴거렸다. 다행히 그렇게 깊어 보이진 않아 지혈하고 약을 바르면 나을 것 같기도 했다. 박스에 들어있던 연고를 뜯어 새끼손가락에 묻혔다. 그리곤 저를 노려보는 시선을 무시하며 천천히 상처 위에 덧발랐다.
"흐-"
그가 아픈지 신음을 삼켜냈다. 살살 휘두를 걸, 그냥 마취제만 넣을걸. 이제 와 후회해도 늦었지만 잘난 얼굴을 상하게 한 터라 스가와라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밴드까지 이마에 붙이고 나자 그나마 칭칭 붕대를 두르고 있던 것보다야 상황이 나아 보였다. 탁,탁 처음처럼 약품 상자를 닫아 정리한 후 스가와라는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덥썩 제 손목을 움켜쥐는 그의 행동에 채 몸을 다 일으키지는 못하고 어정쩡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손목이 타들어 갈 듯이 뜨뜻했다. 그가 내 손목을 잡다니. 더러워진다고 빨리 빼내야 하는데 그보다 너무 좋아서 심장이 요란하게 춤을 쳐댔다.
"네가 나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아."
"말을 잘 들으면요."
"원하는 게 뭔지 이야기를 해. 해줄 테니까. 이런 장난 그만하고."
그는 자신을 설득하려는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냉정하게 얼굴을 굳히고 그의 손에서 제 손목을 빼내었다. 얼마나 강하게 쥐었는지 하얀 피부에 붉은 자국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조금만 같이 지내면 돼요. 제 통제 아래에서 허튼짓만 하지 않으면 전 언제든지 친절할 거예요."
"...같이 지내자고? 여기서? 너랑? 내가?!"
"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서른 살 생일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적어도 이 세상에 태어난 자신을 위해 선물이라는 것을 하고 싶었다.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반짝이는 것으로. 스가와라의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그 존재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었다. 눈앞의 사내를 찬찬히 눈에 담으며 스가와라는 베란다로 향했다. 그가 일어난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 깜빡하고 같이 지낼 식구를 소개하는 걸 잊어먹고 말았다. 잠겨있던 창을 열자 산의 찬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얇은 커튼을 흔들어대며 들어오는 바람 속에서 스가와라는 저 멀리 가만히 앉아있는 녀석을 불렀다.
"토오루!"
어둠 속에서 검은 물체가 유연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번뜩이며 빠르게 달려왔다. 금세 베란다 앞까지 달려온 새 식구를 보고 그가 요란한 비명을 질렀다. 헥헥 혀를 내민 커다란 도베르만이 고개를 갸웃하며 까만 눈으로 겁에 질린 그를 담았다.
"경비견이에요. 개 무서워하죠?"
"..."
"그러니까, 쉬이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요. 얘, 주인 말고는 못 알아보니까."
윤기가 흐르는 털을 살살 긁어주며 스가와라가 경고했다. 토오루, 이제 가 봐. 가벼운 명령에 똑똑한 개는 후다닥 달려 다시금 정원에 놓인 자신의 집을 향해 사라졌다. 탁, 문을 닫아 찬 공기를 차단하자 어느새 잔뜩 땀을 흘린 그가 어이 없다는 듯 물어왔다.
"근데 당신, 지금 개에게 내 이름을 붙인 거야?"
"네. 제가 아는 이름 중에서 제일 괜찮은 이름이거든요."
토오루. 스가와라가 한 번 더 개 이름을 담으며 웃었다. 하얗게 질린 눈앞의 오이카와 토오루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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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맛이 간 스토커 스가와라와 적응이 빠른 배구계의 슈퍼스타 오이카와..........
새벽에 갑자기 이런 병맛 스토리가 보고시퍼따!!!!!!! 원고 안하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