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아팠다. 너무너무 아팠다. 바람을 가르고 날아든 왕가의 화살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스가와라의 심장을 관통했다. 온기가 가득했던 풍경 속에서 스가와라는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살폈다. 경악으로 물든 그의 얼굴을 보며 추락했다. 안돼, 그가 슬프게도 중얼거렸다. 할 수만 있다면 괜찮다고 웃으며 그의 뺨이라도 쓸어주고 싶은데 생명이 꺼져감을 암시하듯 아무리 힘을 주어도 날개가 움직이질 않았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렇게 달래주고 싶은데 조금의 노랫소리도 부리를 타고 흐르질 못했다. 천천히 시야로 내려앉는 어둠 속에서 스가와라는 처음으로 신에게 감사했다. 자신에게 생명을 주어서 고마웠고, 자신에게 이 커다란 날개를 주어서 고마웠다. 마지막으로 그의 심장을 뺏기 위해 날아든 화살을 막게 해주어서 고마웠다. 그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스가와라에게는 영광이었다. 두고 가야 하는 그의 얼굴은 안쓰러웠지만 스가와라는 행복했다. 간헐적으로 떨리던 날개의 움직임이 멈춤과 동시에 스가와라는 눈을 감았다.
스가와라는 까마귀였다. 그리고 까마귀의 떼에서 태어났다. 누가 주인인지도 모를 알을 스스로 깨고 태어난 새였다. 달라붙은 껍질을 깨고 처음 세상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디뎠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은 까마귀들이 부리를 모아 날이 선 노래를 불렀다. 넌 돌연변이야. 흰 까마귀라니, 너는 돌연변이야. 어린 스가와라는 가만히 제 날개를 끌어와 살폈다. 밤을 닮은 그들의 깃털과 달리 자신의 것은 색이 없었다. 아니야, 곧 나도 검게 변할 거야! 짹짹 열심히 항변해 보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날개에 색이 돋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것으로 태어난 스가와라는 자연스레 까마귀의 떼에서 외톨이가 되었다. 날갯짓을 하는 법도, 먹이를 구하는 것도 모두 눈동냥으로 배워 스스로 깨우쳐야 했다. 다치고 돌아와도 달래주는 부모가 없었으며 함께 애벌레를 잡으러 갈 친구도 없었다. 어린 스가와라는 그 순간마다 자신의 생명이 보잘것없게만 느껴졌다. 신님은 왜 나를 만드셨을까? 왜 나를 돌연변이로 만드셨을까? 세상에 태어난 생명체는 모두 고귀한데 왜 자신은 그렇지 못할까? 제 털이, 제 몸뚱아리가 자꾸만 미워지고 또 미워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또래 까마귀들을 따라 뒤뚱뒤뚱 어설픈 날갯짓을 하며 사냥에 나섰을 때 저 멀리서 커다란 총탄 소리가 울렸다. 까악-까악- 사냥꾼이 왔다며 모두가 요란을 떨어댔다. 하늘에서 후두둑 검은 날개들이 떨어졌다. 다시 둥지로 돌아가자, 어서 이곳을 벗어나자! 잽싸게 방향을 돌려 날아가는 무리를 따라 스가와라도 힘차게 날갯짓을 해댔다. 아직 어린 스가와라에게는 사냥꾼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몰랐지만 그들이 쏘아대는 무시무시한 무기는 까마귀는 물론 커다란 동물들도 가차 없이 잡아먹는다는 것은 알았다. 둥지에 숨어 그렇게 잡아먹히는 동물들을 몇 번이고 보아왔으니까. 멀리 그리고 빨리 도망치지 못하면 다음은 자신이라는 생각에 스가와라는 푸드득 푸드득 빠르게 날갯짓을 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제대로 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까마귀는 총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탕.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무언가가 왼쪽 날개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통으로 맞지 않아 추락하진 않았지만 기우뚱 몸이 쏠리며 날개의 움직임이 더뎌졌다. 까악- 멀리멀리 날아가는 까마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누구도 스가와라를 위해 돌아오지 않았다.
탕.
다시 한 번 아래에서 총탄이 울려댔다. 탕,탕. 여러 번 울려댔다. 스가와라는 날던 속력을 줄여 추락하듯 커다란 나무 위로 숨어들었다.
"잡았어!!! 내가 흰 까마귀를 잡았어!! 추락했으니까 이 근처 어딘가에 떨어졌을 거야!!!"
나무 아래에서 웅웅 인간의 목소리가 울려댔다. 기름진 사내의 외침에 동료인듯한 다른 남자들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이 세상에 흰 까마귀가 어딨어? 어렸을 때 너무 동화를 많이 읽은 거 아니야?"
"봤어. 분명히 봤다고! 까마귀들 틈에서 흰 털을 가진 놈을 내가 똑똑히 봤다고."
"똑똑히 봤으면 뭐해, 그게 진짜 흰 까마귀라고 하더라도 죽으면 의미가 없는 거잖아? 전설 속에 나오는 흰 까마귀는 노래로 모든 병을 낫게 해준다잖아."
"죽었으면 푹 고아서 국으로라도 끓여 팔아버리지 뭐. 아니면 피를 뽑아 술로 만들자. 뭐든 효과는 있겠지? 안 그래?"
듣기만 해도 끔찍한 소리에 스가와라는 꾹 나무 위에서 몸을 낮추고 숨을 죽였다. 왼쪽 날개에 자리 잡은 상처에서 꾸물꾸물 비어나오는 피들이 축축하게 온 털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얼른 밤이 되기를, 밤이 되기를. 밤이 되면 숲은 온통 어둠으로 잠겼다. 그 어둠 속에는 인간들이 설 틈은 없었다. 우렁찬 울음을 내뿜는 짐승들의 공간이었으니까. 신님, 어서 해님를 가져가 주세요. 어서 달님을 보여주세요. 스가와라는 부리를 타고 흐르는 신음도 견뎌내며 저 먼 존재에 간절히 빌었다. 한참을 나무 아래에서 자신을 찾던 사냥꾼들은 점점 숲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자 걸쭉하게 성질을 내며 숲을 벗어났다.
스가와라는 죽고 싶지 않았다. 이런 자신에게도 태어난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외롭고 고독한 돌연변이이지만, 무리에 낄 수도 없는 흰 까마귀지만 분명히 이유가 있어 태어났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그 의미를 알기 전까지는 죽고 싶지 않았다. 또록 또록 흰 까마귀의 눈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뚝뚝 떨어지는 그것은 어둠을 적시며 조용히 흘러갔다. 제 죽음을 앞두고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었다.
다음 날 아침, 스가와라는 자신의 몸을 감싸는 따뜻한 온기에 기분 좋게 눈을 뜨였다. 신님이 자신을 가엽게 여겨 천국이라도 보내주었구나 싶을정도로 다정하고 따스한 온기였다.
"눈을 떴네?"
하지만 그 천국을 감상할 겨를도 없이 머리 위로 낯선 목소리가 울려댔다. 퍼뜩 눈을 뜬 스가와라는 급히 제 몸뚱아리를 일으키려 했지만 쉬-쉬- 하며 달래는 커다란 손가락이 부드럽게 눌러 내렸다.
"괜찮아, 괜찮아."
눈앞에 작은 인간이 있었다. 아마 잠든 사이 나무에서 똑 떨어진 저를 주운 모양이었다. 햇빛을 받은 그의 갈색머리가 스가와라의 눈동자 안에서 유리처럼 부서져 내렸다. 저를 호기심 어린 얼굴로 바라보는 그의 진한 눈 색이 스가와라의 눈동자 안에서 부서져 내렸다. 이와짱, 이거 봐. 흰 까마귀가 눈을 떴어. 그가 즐거운 목소리로 노래하듯 외치며 살살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 목소리에 뒤쪽에 있던 소년 하나가 튀어나와 무뚝뚝한 얼굴로 스가와라를 내려보았다. 그 강압적인 눈빛에 스가와라는 저도모르게 뾰로록 소리를 내며 울었다.
"하하, 이와짱이 무서운가 본데?"
"산책을 너무 멀리 나오셨습니다. 성으로 돌아가시죠."
"아직 새끼인가 봐. 상처가 얕긴 하지만 피가 배 있는데."
"...괜한 것을 성으로 끌고 들어갔다가-"
"어머니에게 혼나겠지? 뭐 어때, 새 하나 정도야. 이렇게 작으니까 잘 숨길 수 있을 거야."
그가 웃으며 다시금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기분 좋게 그의 손가락에 뺨을 부볐다. 하하, 즐거운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그래, 새야. 나와 함께 갈래? 그 질문에 스가와라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다리로 손바닥을 두드리며 울었다. 같이 가겠데. 그는 자신의 울음을 바로 알아들었다.
"이름을 스가와라라고 부르자."
그리곤, 처음으로 자신에게 돌연변이나 흰 까마귀가 아닌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주었다.
스가와라는 그렇게 그의 새가 되었다. 그의 집은 아주 크고 높아 자신이 살던 숲의 둥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어린 주인은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살았다. 모두가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숙였다. 스가와라는 그의 어깨에 앉아 그들을 구경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다 가끔은 제 주인에게 못된 소리를 일삼는 사람에게 날아가 골려주기도 했다. 모자를 물어다 던지고 어느 날에는 가발을 날려버리기도 했다. "안돼, 그러지 마." 그렇게 스가와라가 사고를 치고 돌아오면 주인은 엄하게 일렀으나 털을 쓰다듬는 손길은 언제나 부드러웠다. 어느새 스가와라는 커다란 새가 되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걸음은 언제나 엉망이고 한 번 다친 날개는 상처가 남아 멀리 날아갈 수는 없었지만 스가와라는 행복했다. 주인의 어깨에만 앉을 수 있다면 무엇도 무섭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의 집에 비상이 걸렸다. 사람들이 모두 우왕좌왕 달리고 누군가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인의 외출로 얌전히 새장에 기다리고 있던 스가와라는 그 불안한 기운에 푸드득 푸드득 날개만 흔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제 주인님은요? 언제나 따뜻했던 그 공간을 메우는 쇠비린내에 스가와라의 작은 심장이 불안하게 뛰어댔다. 얼마나 그렇게 주인을 찾으며 소용없는 날갯짓을 했을까,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주인이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침대 위로 눕혀지고 있었다. 그의 허리 아래론 검붉은 피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감각을 일깨우던 그 비린내는 주인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모여 피를 닦아내고 지혈하며 무언가를 요란스럽게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스가와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 내려앉은 불안과 어둠이 곧 제 주인의 끝을 말하는 것만 같아 스가와라는 슬펐다. 그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그의 곁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그러면 언제나처럼 제 머릴 쓰담아 줄 것만 같았다. 어서 여기서 날 꺼내줘요, 주인님에게 가게 해주세요. 스가와라는 쿵쿵 제 몸을 새장에 부딪히며 항의했다. 흔들흔들 매달려 있던 새장이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걸이에서 빠져나와 요란하게 바닥을 굴렀다. 쇠가 바닥 위로 떨어져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잠겨 있던 문의 걸쇠가 돌아갔다. 바닥으로 나동그라진 덕에 찡하니 머리가 아팠지만 스가와라는 힘차게 그 문을 열고 날아올랐다. 제대로 날지 못하는 날갯짓으로 주인의 방을 곧장 올라가 사람들을 헤치고 침대에 올라섰다. 누군가가 쫓아내려 팔을 휘젓고 손을 뻗었지만 스가와라는 재빠르게 피하며 왕자의 얼굴 옆에 내려앉았다. 주인님, 주인님. 눈을 감고 있는 그의 곁에서 노래를 불렀다. 어서 눈을 떠요. 제가 여기 있잖아요. 저를 구해 주셨잖아요. 까마귀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울음소리를 내며 스가와라는 간절하게 그를 불렀다. 얼마나 그렇게 주인을 애타게 불렀을까, 울고 있는 스가와라의 머리 위로 부드러운 손가락이 올라와 닿았다.
"네가 노래를 불렀구나."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한 주인이 웃으며 속삭였다. 네가 나를 불렀어. 그리 속삭이는 그의 상처가 감쪽같이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나도 책에서만 본 이야기야. 100년에 한 번씩 흰 까마귀가 태어 나는데 다른 까마귀와 다르게 예쁘게 우는 아름다운 새라고 그랬어. 흰 까마귀가 노래를 부르면 어떠한 병도 낫는다는 전설이 있다고 해. 솔직히 널 주울 때만 해도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네가 나를 살린 것을 보니 진짜인가 봐."
주인은 다행히 빠르게 나았다. 왜 다쳤는지 스가와라는 알 수 없었지만 예전처럼 주인이 제 곁에 있어만 준다면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이 주인을 살린 후, 스가와라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늘 그의 곁에 머물렀다. 그의 식사 시간에도, 산책 시간에도, 책을 보는 시간에도, 잠이 드는 시간에도 스가와라는 언제나 주인의 곁을 지켰다. 조금이라도 그에게 문제가 생기면 스가와라가 구할 수 있도록.
"난 괜찮아. 스가와라는 새잖아. 인간의 생활을 따를 필요는 없어."
주인은 단호하게 말했지만 스가와라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주인이 다시 그렇게 피를 흘리고 아픈 것보다야 자신이 조금 힘든 것이 더 나았다. 정말로 더 나았다.
다행히 그 이후로 주인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아주 가끔 종이에 손이 벤다거나 사냥에 나가 넘어지는 사소한 상처를 만들긴 했지만 그건 주인의 목숨을 위협하진 못했다. 그저 그 자잘한 상처를 보며 스가와라는 그의 어깨를 콩콩 빠르게 밟으며 재빠르게 노래를 불러댈 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평화롭게 흘러가던 때에 불행은 아주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깊은 새벽 스가와라는 도롱도롱 주인의 곁에 자리 잡고 제 큰 날개를 감싸며 잠에 빠져 있었다. 그 달디 단잠도 잠시,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스가와라는 슬며시 눈을 떴다. 아주 깜깜한 어둠이 침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지런한 숨소리가 여전히 제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이질적이게 느껴질까? 평소와 다름없는 풍경인데 무언가가 자꾸 신경을 긁어댔다. 가만히 잠에 취한 눈동자를 굴리던 스가와라는 바람이 들어오는 창을 확인했다. 부드러운 커튼이 바람을 타고 흔들리고 있었다. 창이, 왜 열려있지? 주인님 감기 들게. 한가로이 그런 생각을 하며 막 시트 위에 묻었던 몸을 드는 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빛을 받고 반짝였다. 스가와라는 그 반짝임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온통 그늘의 가려진 그 얼굴에 스가와라는 목청껏 울음을 터트렸다.
"스가와라?"
새의 울음소리에 주인이 깨어났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감춰진 빛이 날아들었다. 휙, 바람을 가르는 그것은 스가와라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가끔 주인을 따라 사냥을 나갔을 때 보았던 것이었다. 아주 빠르고 날카롭게 짐승에게 날아 박히는 물건이었다. 그 사냥 때처럼 재빠르게 날아드는 그것을 향해 스가와라는 몸을 던졌다. 날카로운 촉이 가차 없이 몸을 찌르고 들어왔다. "이와짱!!!!!" 비명과 같은 주인의 목소리와 함께 그늘 속의 사내가 열어진 창을 타고 사라졌다. 이와짱은 내가 시트 위에 뭘 묻힌다고 매번 잔소리했는데 이번에는 좀 클 것 같았다. 제대로 몸을 찌른 화살을 타고 피가 하염없이 시트를 적셨다. 멍해져 가는 정신 속에서도 스가와라는 저를 만지지도 못하는 주인의 얼굴을 담았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아직 어린 태가 나는 주인의 얼굴을 보며 스가와라는 구슬프게 울었다. 그를 만나 자신은 행복했다. 그러니 그를 위해 얼마든지 죽을 수 있었다. 안돼, 스가와라. 울음 섞인 주인의 목소리와 함께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어둠. 어둠. 어둠. 계속되는 어둠이 아득히 주인의 목소리를 앗아갔다. 주인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제 심장을 조여대던 아픔도 멀리 사라져 버렸다. 스가와라는 눈을 깜박였다. 여기가 어딘지 살피기 위해 몸에 힘을 주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제 몸이 아예 사라진 것도 같았다. 이게 죽는 거구나. 스가와라는 멍하니 생각했다. 죽으면 천국에 갈 줄 알았는데 주인님을 속상하게 했으니 벌을 받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주인님이 아픈 것보다는 나았는데. 애써 변명을 해보았지만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는 듯 보였다. 얼마나 그렇게 홀로 어둠 속에 잠겨 있었을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뭐가 이렇게 억울해서 제대로 죽지도 못하고 어둠에 먹혔니?"
다정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스가와라는 그 목소리의 주체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눈을 굴려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음, 억울한 건 없는데. 스가와라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있다. 주인님을 홀로 두고 온 것. 억울한 것은 아니지만 그게 너무도 걱정이었다. 주인님의 아침도 깨워야하고, 주인님의 테이블에 올라오는 차에 이상한 냄새가 나면 발로 뻥 차주기도 하고, 주인님이 어디서 다치면 얼른 가서 노래도 불러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못해 걱정이었다.
"주인님을 다 지키지 못해서 속이 상한 거구나?"
음, 네. 뭐 말하자면 그런 것 같아요. 형태는 없었지만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다시 주인에게 돌려 보내 줄게."
정말요?
"응, 대신-"
그녀가 속삭였다.
아름다운 네 노래를 내게 줘.
번쩍 눈을 떴을 때 스가와라는 여전히 어둠에 있었다. 아니 그냥 계속 어둠에 있던 걸까? 어디가 현실이고 꿈인지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언가에 억눌린 듯 답답한 게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것만 같았다. 허억 허억, 거칠게 숨을 들이켜며 스가와라는 마구잡이로 어둠을 헤집었다.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함께 울렸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쿵쿵 무언가가 제 날개에 부딪혀왔다. 앞을 가로막은 벽 같은 그 존재를 스가와라는 망설임 없이 훅 밀어냈다. 끼긱- 낡은 소리를 내며 육중한 무언가가 흔들렸다. 그 틈으로 빛이 훅 끼쳐 들었다. 빛과 동시에 맑은 공기가 코를 타고 폐까지 들어찼다. 드디어 터진 숨에 스가와라는 가차 없이 그것을 확 밀어 열었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뚜껑으로 보이는 것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가와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둥근 천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나하나 하늘로 뻗어 중간에서 이어진 것이 마치 커다란 새장처럼 느껴졌다. 주인님이 처음에 자신에게 만들어 주었던 그 보금자리. 나중에야 주인님의 침실이 모두 제 보금자리가 되어버렸지만.
후우-
그 새장 아래에서 스가와라는 숨을 잘게 뱉어 쉬며 제 몸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내렸다. 화살에 맞은 상처를 살펴볼 셈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눈에 들어온 것은 인간의 신체였다. 쭉 뻗어 있는 나체였다. 하얗게 뻗어진 그 몸에 놀라 스가와라는 서둘러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부들부들해야 할 깃털은 어디 가고 차고 까슬까슬한 무언가가 바닥에 닿았다. 바닥? 이번엔 쭉 제 날개를 앞으로 뻗어 보았다. 풍성하고 희게 펼쳐져야 할 것은 온데간데없이 다섯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며 저를 반기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놀라 서둘러 다리에 힘을 주었다. 커다란 상자 안에 꽃들과 파묻혀 있던 다리가 후들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새였을 적에도 제대로 못 배워 엉성하던 걸음은 인간이 되어도 마찬가지인지 이내 힘이 풀리며 우당탕 상자 박으로 고꾸라져 버리고 말았다. 대리석 계단에 처박힌 몸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짜 아파, 스가와라는 시큰하게 올라오는 무릎과 팔의 고통에 끙끙 목 앓이를 하며 허리를 세웠다. 그나저나 정말 인간이 된 건가? 믿을 수가 없어 더듬더듬 제 몸을 만져 보았다. 어릴 적 샤낭꾼에게 당했던 날개의 상처는 왼쪽 어깨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거기다 죽기 전 화살을 맞았던 흔적인지 왼쪽 가슴 부근에 커다란 흉도 자리 잡고 있었다. 벌거벗은 제 몸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던 스가와라는 서둘러 상자위에 덮어져 있던 천을 끌어 둘둘 제 몸을 가렸다. 주인님이나 다른 사람들도 무언가를 입고 다녔지 이렇게 맨몸으로 돌아다닌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창피하다는 생각에 둘둘 천으로 몸을 가린 스가와라는 자신이 기어 나왔던 상자를 조심스럽게 닫아놓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새로 살았을 때에는 제 걸음 소리는 언제나 작고 또 작아 들리지 않았는데 이번엔 타박타박 소리가 온 공간을 울렸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지? 어디로 가야 주인님을 만날 수 있을까? 뒤뚱뒤뚱 걸으며 스가와라는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도 잠시, 커다란 새장과 같은 그 공간을 나오자 자신을 반겨주는 쨍한 해님에 그저 웃음이 나왔다. 어둠 속에서 주인님 만큼이나 그리웠던 존재였다. 발아래로 쏟아지는따스한 빛에 스가와라는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아보았다. 기둥이 되어 내려앉은 빛들은 얄밉게도 스가와라에게는 잡혀주질 않았다. 그래서 마음을 바꿔 손가락을 펴 이번엔 손바닥에 담아보았다. 빛 기둥이 고스란히 그 위로 내려앉았다. 새로 살았을 적에는 가져 본 적 없는 빛들이 가만히 자신에게 안겨 들어왔다. 하하, 스가와라는 웃으며 한참을 그렇게 손바닥 위에서 일렁이는 빛을 바라보았다. 아마 잔디를 밟는 다른 발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영원히 그렇게 있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바스락바스락 잔디를 밟는 소리에 스가와라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가 꽃을 안고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장신의 사내였다. 흰 셔츠 위로 커다란 띠가 패널처럼 둘러 있었다. 그 위에 달린 온갖 보석들이 쏟아지는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듯 스가와라는 멍하니 그 사내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거리가 점점 좁아졌다. 하나, 둘. 천천히 그리고 절도 있으면서도 우아하게 걸어오던 사내는 이내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스가와를 발견하곤 걸음을 멈추었다. 저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는 사내를 눈에 담으며 스가와라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주인님.
그가 거기 있었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조금 키가 커졌고, 어깨가 넓어졌지만 제 주인이 분명했다. 여전히 가지고 있는 반짝이는 갈색빛 머리와 짙은 눈동자가 자신의 주인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크게 그를 불렀다. 반갑고 기쁘게 그를 불렀다. 또한 그리움을 담아 불렀다. 하지만 목을 타고 흐르는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주인님, 주인님! 몇 번이고 전처럼 노래 부르듯 힘을 주었지만 그저 공기가 빠지는 듯한 소리만이 목을 타고 흐를 뿐이었다.
"너, 누구야."
멀지 않은 거리에서 날이 선 경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집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그제서야 꿈속에서 만났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여성의 목소리. 아름다운 네 노래를 내게 줘. 그녀는 자신에게서 목소리를 앗아갔다. 주인님을 부를 목소리를 가져가 버렸다.
아아, 말이 되지도 못하는 어설픈 소리들이 목을 타고 흘렀다. 뿌옇게 번져가는 시야 사이로 그리웠던 얼굴을 물들이며 스가와라는 주저앉았다. 흰 까마귀는 노래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노래하지 못하면 그에게 돌아온 의미가 없었다. 뚝뚝 눈물만 쏟아내는 저를 보며 주인은 칼을 빼 들었다. 칼집에서 나는 요란한 마찰소리에 소름이 돋았지만 스가와라는 입을 벙긋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날카로움의 끝에서 그리웠던 빛이 반짝였다. 그리웠던 모든 것을 눈앞에 둔 스가와라의 입에선 여전히 소리 없는 노랫소리만이 입을 타고 흐를 뿐이었다.
나는, 주인님의, 흰 까마귀예요.
그렇게 닿을 수 없는 말들이 눈물이 되어 흘렀다. 닿을 수 없는 말들이 공기가 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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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기르던 새도 못알아 보는 븅딱 오이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