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아카] 종말의 날
2015. 4. 24. 23:41



au세계관 주의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건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무감정. 아카아시는 세상을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여겨지는 것들이 결여된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여전히 대답 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아버지가 놀랍지는 않았다. 


방독면을 끼고 텅텅 비어 가벼운 가방을 메고 거리로 나오자 참 이상하게도 하늘이 맑았다. 어째서 하늘은 여전히 맑을까. 이상한 질문이지만 더는 이상하지 않은 질문을 떠올리며 아카아시는 아무도 없는 길을 익숙하게 걸었다. 예전에 이 길은 이 시간이 되면 자신과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로 넘쳐나는 곳이었다. 단정하게 블레이저를 걸친 남학생들과 바람에 휘날리는 스커트를 입은 여학생들이 오늘 하루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설레하며 걷던 길이었다.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을 과거의 풍경을 떠올리며 아카아시는 말없이 발만을 재촉했다. 아스라이 먼지만이 함께 걸었다. 


학교까지 가는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도보로 20분, 딱 적당한 위치였다. 금세 교문에 도착한 아카아시는 누군가가 단단히 잠가놓은 문을 가볍게 훌쩍 넘었다. 처음에는 몇 번 넘어지기도 했는데 이제는 눈 감고도 넘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텅 빈 우레탄 운동장에는 생명력을 자랑이라도 하려는지 이곳저곳 튀어나온 잔디로 엉망이었다. 더는 관리되지 않은 땅을 디뎌 걸으며 아카아시는 천천히 학교 건물로 들어섰다. 빈, 정확하게는 엉망으로 문이 열려있거나 닫혀있는 불규칙한 공간에서 신발을 갈아신고 가지런히 넣어두고는 제 교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는 아카아시의 낮은 걸음 소리만이 울려댔다. 본래대로라면 자신은 이미 3학년이 되어 있어야 할 시기였지만 여전히 자신은 2학년이었다. 선배들이 사용했을 책상과 걸상을 물려받고 입시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려야 할 시기였지만 여전히 아카아시 케이지는 2학년이었고 6반이었다. 시간도 생명도 죽어버린 복도를 걸으며 아카아시는 익숙하게 <2-6>반의 이름이 흔들리는 교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2년 전, 아카아시 케이지는 사망 선고를 받았다. 정확하게는 자신만이 아니라 전 인류 모두가. 처음에는 동물이었다. 어느 바다에서 돌고래들이 집단 자살을 했다더라 수천마리의 도마뱀이 도로 위에서 죽었다더라 하는, 살다 보면 한두 번은 만나게 되는 그런 평범한 이야기들이 시작이었다. 생선들이 거품을 물고 물 위로 떠오르고 동물원의 원숭이들이 모두 앓다 죽어도 누구도 그 문제를 심각하게 혹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인터넷 뉴스에 짤막하게 "원인을 모를 바이러스로 감염된 것으로 보이며-"라고 적혀 나와도 학교에서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어제 본 TV쇼나 요즈음 인기 있는 연예인에 대한 것이 전부였다. 물론 아카아시 케이지도 그랬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모르는 곳에서 바이러스는 퍼지고 퍼져 인간에게까지 뻗어 닿았다.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서 한 아이가 고열과 함께 피를 토하며 급사했고 약 이틀 뒤 그 마을의 몇 명이 같은 증상으로 죽었다는 뉴스가 퍼졌다. 그리곤 그 옆 마을, 그리고 그 옆, 그들을 도우러 간 봉사 단체의 의사들- 하나씩 하나씩 옮겨간 바이러스는 아프리카에 이어 유럽을 쓸었고 머지않아 아카아시가 살고있는 땅까지 뻗어왔다. 동물이 죽어나는 기이한 형상으로 인해 홀로 이 바이러스를 연구하고 있었던 스페인의 한 교수가 새로운 신처럼 추앙 받으며 매일 TV에 나왔다. 그가 하는 말이라곤 이 바이러스가 아주 속도가 빠르며 원인도 이유도 알 수 없다는 것과 증상이 전부였다. 그리고는 결국 "이 바이러스를 핀(fin)이라고 부릅니다." 멋대로 종말이라는 이름을 바이러스에 붙여주고는 죽었다. 원인은 바이러스의 전염이었다. 


바이러스에 걸리는 것은 확률적인 증명도 어려웠다. 사람마다 모두 제각각으로 발병되며 증상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바이러스는 공기를 통해서인지,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서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주 쉽게 전염이 가능하며 옮겨진 이후로는 나아진다 혹은 산다는 선택지는 없다는 게 인류가 알게 된 전부였다. 잠복기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걸리고 나면 코피가 흐르거나 피를 토하다 끝내는 고열로 사망한다. 마치 감기처럼 누군가는 걸리고 누군가는 피해 가는 복불복이라 언제 어디서 걸릴지, 어떤 식으로 옮겨질지 예측할 수 없어 누구도 백신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 덕에 2년 동안 인류의 수는 급격하게 줄었다. 대부분 바이러스에 인한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그 외에도 원인은 많았다.

종말을 앞둔 세상이 가져온 것은 패닉이었고 공포였다.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로도 대부분의 사람은 살아가는 행위를 포기하고 스스로를 놓았다. 개중에는 아무렇지 않게 범죄를 저지르는 부류도 있었다. 밤에 비명을 듣는 것은 이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아직도 삶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여전히 세상을 돌아가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카아시는 자신이 그쪽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밥을 먹고, 등교한다. 바이러스로 인한 국가 비상령이 내려지고 학교의 기능은 사라졌지만 아카아시는 여전히 등교길을 걸었다. 그리고 학교에 와 자신의 반, 자신의 책상을 찾았다. 물론 처음부터 아카아시가 학교에 꼬박꼬박 출석 체크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카아시에게는 자신이 있을 장소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1년 전, 바이러스로 어머니가 죽고 나서 아버지는 사는 것을 포기했다. 경찰이셨던 아버지는 그전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은 부류였다. 위험하니 그만두라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경찰용 자전거를 끌고 밤마다 거리를 둘러보고 사람들을 도왔다. 이 동네의 유일한 경찰로 모두가 도움이 필요하면 아버지를 찾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그녀의 인생뿐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인생까지 끝내버리고 말았다. 사랑했던, 하던, 하는 여자가 죽자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죽여버렸다. 하염없이 거리를 헤맸고 창밖을 바라보았으며 밤이 되면 거리로 나갔다. 아카아시는 그게 더는 순찰의 목적이 아닐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아카아시는 유일하게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자신은 저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바이러스에 걸려 죽는다면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스스로가 스스로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세상이 멈추기 전의 생활로 돌아가길 결심했다. 학교에 나가 교실에서 교과서를 읽고 문제를 풀고 책을 읽었다. 점심시간이 되면 통조림을 따 대충 끼니를 때웠고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를 나왔다. 그게 아카아시가 유일하게 살아있다고 자신에게 증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 더는 자신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였다.






"...수학."



멍하니 교실 앞에 붙어진 시간표를 확인했다. 금요일의 1교시는 수학이었다. 뒤를 이어 영어, 체육, 문학 잠깐의 점심시간과 사회, 도덕 수업으로 하루가 끝나는 시간표였다. 점점 색이 바래져 가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카아시는 여전히 벽에 붙은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수학책을 책상 위로 펼쳤다. 수십 번의 수학 시간을 지나온 책은 더는 풀 문제도 없었다. 빽빽하게 연필심이 묻어나오는 페이지를 넘기고 또 넘기다 그나마 빈 곳을 찾아 샤프의 끝을 눌렀다. 몇 번이고 풀었던 문제를 그렇게 서걱서걱 풀어나갔다. 그렇게 몇 번의 페이지를 더 넘기고 몇 번의 문제를 풀었을까 죽어있던 공간으로 낯선 소음이 들려왔다. 사람의 발소리처럼 들리는 것이 아주 먼 곳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페이지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들어 멍하니 교실 문을 바라보았다. 요 1년간 학교를 드나드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아카아시 케이지. 자신뿐이었다. 단 한 번도 다른 누군가를 마주친 적이 없었다. 집을 잃거나 강도질을 일삼는 사람들은 학교를 택하지 않았다. 그저 남의 것을 빼앗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이 아침에 이 발소리는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꼴깍, 절로 침이 넘어갔다. 샤프의 끝을 쥔 엄지 손가락이 잘게 떨려왔다. 숨어야 할까? 방독면 안에서 뿜어지는 숨이 거칠어졌다. 흐린 시야 사이로 뿌연 공기가 굳었다 녹고 굳었다 녹았다. 바로 가까이 온 소리에 아카아시는 꾹 교복 위로 가슴께를 눌렀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아플 정도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안녕."



드르륵, 자신 말고는 열고 닫는 이가 없던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들어섰다. 그리고 놀란 기색도 없이 대뜸 인사를 건네왔다. 아카아시는 방독면도 심지어 마스크로 끼지 않은 그를 보며 슬쩍 고개만 숙여 그 인사에 대답했다. 사내는 장신이었다. 그리고 눈매가 날렵했다. 어디서 눌렸는지 우스꽝스러운 머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게 또 어울리는 외모였다. 거기다 어디 상이라고 치루고 온 사람처럼 온통 검은색의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찬찬히 그를 살피는 아카아시를 보며 남자는 슬쩍 입꼬리를 올린 미소를 지은 채 멋대로 교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의자를 빼왔다. 그리곤 책상 앞을 차지하고 앉아 아카아시가 방금까지 들여보고 있던 교과서를 뺏어 들었다. 



"모범생이야? 같은 문제를 몇 번이나 푼 거야?"
"할 일이 없으니까요."
"생산적인 일을 해야지."



생산적인 일이라. 종말의 선고가 내려오기 전에는 이 문제를 푸는 것이 제일 생산적인 일이었을 텐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아카아시는 책상 아래의 손을 꾹 쥐었다. 그가 한참을 팔랑팔랑 페이지를 넘기더니 덮어 다시 건네주었지만 그것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는 아마 음성 판단을 받은 감염자였고 아카아시는 아직 코피 한 번 흘리지 않았다. 한 번의 실수로 바이러스에 걸리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꾹 버티고 앉은 아카아시를 가만히 지켜보던 남자는 조심스럽게 교과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미안, 함부로 만져서."
"괜찮아요. 어차피- 다 푼 교과서니까."
"그리 말해주니 고맙다."
"..."
"다음은 뭐 할 거야."



글쎄요. 아카아시는 방독면 뒤에서 탁하게 말했다. 다음은 영어 시간이었지만 눈앞의 남자가 편히 자신이 영어 지문을 읽게 둘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무릎에 올려진 손에 자꾸만 땀이 찼다. 



"할 일 없으면 내 이야기 좀 들어줄래?"
"..."
"누군가에게 꼭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죽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해."



남자는 코 아래를 시큰하게 비비며 중얼거렸다. 유언이라도 남기고 싶은 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마지막 이야기 따위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카아시는 차마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기엔 눈앞의 남자가 너무도 괴롭고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어진 저 이상한 미소가 그렇게 보였다. 거기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사람의 감정이었다. 그것도 넘치게 흐르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아, 고마워. 물론 거절했어도 이야기는 했겠지만."



자- 그럼. 내 이야기를 해줄게. 남자는 똑바로 아카아시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내게는 두 살 아래의 여동생이 있어. 여기서 역 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혼자 자취를 해. 직업은 무용수로 무용단에 소속되어 있는데 예뻐서 꽤 인기가 많은 애였어. 자랑같이 들리지? 미안. 그런데 오빠인 내가 보기엔 뭘 해도 예쁘거든. 왜 너도 관심 있어? 하하, 안돼. 어쨌든 그런 애야. 다른 집은 두 살 터울이면 많이 싸우고 부딪힌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게 없이 자랐어.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치기도 했지만, 그 녀석이 나를 정말 잘 따랐거든. 독립해서 집도 일부러 내가 지내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잡았어. 혼자 지내는 오빠를 본인이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나 봐.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면서 매번 내게 잔소리를 시끌시끌하게 늘어놨지. 그래도 무용에 대해서 만큼은 야무진 애라 해외 무용단에서 스카웃 연락이 올 정도였어. 꽤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라 엄청 자랑하면서 기뻐하더라고. 그런데 알다시피 국가 비상령이 걸렸잖아? 그 시기였어. 무용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가는 게 당장의 문제가 되어버렸지. 여동생은 비상령이 선포되자마자 당시 사귀던 녀석과 식을 올렸어. 사람들이 포기하고 미쳐가는 판국에 가족을 꾸린 거야. 대단한 녀석이지? 나라면.. 방에 박혀서 죽는 날만 기다렸을 텐데. 그런 녀석이 동생이라 그런지 나도 평범하게 생활을 이어가게 되더라고. 동생은 진짜 잘 지냈어. 남편 녀석도 꽤 바르고 곧은 녀석이라 사는 것을 그만두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지. 그러던 어느 날, 둘이 날 찾아오더니 놀라운 소식이 있다는 거야. 심장이 막 불안하게 뛰더라. 혹시... 양성 반응이 나왔나 싶어서. 벌벌 떠는 오빠에게 그 녀석이 전한 소식이 뭐였을 것 같아? 별로 놀랍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음... 임신이었어. 임신 소식을 알려왔어. 별로 놀랍진 않지? 근데 나는 진짜 놀랐어. 그 소식을 듣기 전날 밤에 위 층에 살던 남자가 투신자살을 해서 한바탕 난리가 난 참이었단 말이야. 그런데 얘는 새 생명을 만들어 온 거잖아. 그래서 놀랐어. 그런데 놀람과 동시에 걱정이 되더라. 혼자 살기도 힘든데 뱃속에 아이까지 있는 거잖아. 거기다 나중에 태어날 때 병원은 어쩌고. 지금 당장이야 구하면 의사를 구할 수도 있지만.. 10개월 뒤에 의사가 모두 사라질 수도 있는 거잖아? 그래서.. 반대했어. 그냥 지금 조금이라도 안정적일 때 아이를 지우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부모님도, 녀석의 남편도, 나도 모두 반대했어. 그런데도 그 멍청이가 자기는 꼭 아이를 낳겠데.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아이에게 이 세상을 보여주고 싶데. 멋지든 그렇지 않든 이런 곳이 있다고 보여주고 싶데. 그리고 자신이 엄마라고 인사를 하고 싶다는 거야. 엄마인 당사자가 그렇게 말하는데 누가 말릴 수 있었겠어? 아무도 없지. 그래서 모두 두 손 두 발을 들었어. 여동생이 그러더라. 아이가 자신의 뱃속에서 살아 숨 쉬는 동안은 어떻게서든 자신은 살 수 있을 것만 같다고. 바이러스에 걸려도, 피를 토해도 아이에게 이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버틸 수 있을 것만 같다고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그래, 이제부터가 하이라이트야. 



남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석 달 전에- 그러니까 여동생이 임신 7개월에 들었을 때의 이야긴데 여기가 중요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여기부터 시작이거든. 다행히도 여동생과 아이 모두 건강했어. 먹는 음식이 중요한데 그 조달이 쉽지 않아 고생하긴 했지만... 뭐 어쨌든 잘 버텼지. 근처에 아직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가 있어서 매주 가서 검사도 받았어. 남편은 아기용품도 어디서 구해와야 하고 음식도 구해야와 해서 집을 자주 비웠는데 그게 불안해서 내가 우리 집으로 옮기라고 했지. 방을 하나 내어줄 테니 거기서 지내면 서로 편하지 않겠냐고. 그래서 그렇게 결정하고 그 주 주말에 이사하기로 했어. 뭐 말이 거창하게 이사지 사실은 그냥 단출하게 짐을 챙겨 건너오는 것뿐이었지. 그런데 그 날 아침부터 비가 오는 거야. 불안하게. 그 비는 멈추지 않고 저녁까지 내리는데, 빗속을 뚫고 동생네가 도착을 안 하더라고. 휴대폰은 신호가 엉망이라 전화가 잘 연결도 안되고 시간은 흐르고.. 불안해서 미칠 것 같더라고. 그래서 밖으로 나갔어. 동생네 집까지 역 두 정거장이니 걸으면 금방 도착할 거리였지. 짐이 많은가? 비가 와서 오지 못하는 건가? 이유가 뭐든 일단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내 안에서 핀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거야. 그래서 무작정 달려서 어두컴컴한 길을 걷는데... 그 길에서 동생을 만났어. 동생이.... 빗속에 누워 있더라고. 그 옆에는 남편도 함께였어. 남편 머리는 무언가에 얻어맞았는지 이미 박살이 나서 붉은 피를 끊임없이 흘려대고 있었어. 손과 발이 덜덜 떨리고 내 안에 흐르는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어. 끔찍한 그 광경에 비명도 나오지 않았어. 숨을 들이켜기 위해서 입을 열었는데 이상한 울음소리만 났어. 서둘러 달려가 여동생을 확인했는데 이미 다리 아래로 붉은 피가 웅덩이처럼 고여 있었어. 그래도.. 다행인 게 숨이 붙어있더라고. 머리를 맞았는지 얼굴이 엉망이었는데 이렇게 막 눈을 흔들면서 나를 찾았어. 몇 번이고 녀석의 이름을 불렀지. 괜찮아, 오빠가 왔어. 집에 가자, 병원에 가자. 괜찮아, 괜찮아. 나는 무슨 소리를 하는 줄도 모르면서 계속 그렇게 중얼거렸어. 동생의 몸이 자꾸만 비 때문에 식어가서 슬펐던 것도 같네. 그런데 여동생이 겨우, 겨우 붙은 숨으로 뱉으며 힘겹게 무언가를 자꾸만 말했어. 빗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인지 내 울음소리가 커서인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이윽고 나는 그걸 담았지.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여동생이 눈을 감았어. 그리곤 영원히 뜨지 않았지. 나는 한순간에 가족을 셋이나 잃은 거야. 그 비 내리는 밤에.
사실, 더 조심했어야 했어. 그래야만 했었어. 그런데 난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새 가족이 생긴다고 들떠서 멍청하게 굴었지. 그래 인정해. 내가 멍청했어. 양성 반응자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나 분노로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강간하고 괴롭히는 것을 수도 없이 보고 들었으면서 내가 조심하지 못했어. 그러니.. 1차적으론 내 잘못이었어. 하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용서가 되거나 이해가 되는 문제는 아니잖아. 이게. 여동생이 죽었다고. 지금 즈음 아이를 낳았어야 할 그 아이가.. 아직 빛도 보지 못한 생명과 사랑하는 남편과 길바닥에서 맞아 죽었다고. 그걸 어떻게 용서하겠어. 어떻게 이해를 하겠어. 안 그래? 그래서 나는 결심했어. 범인도 똑같이 만들어 주겠다고. 소중한 걸 잃은 지독한 고통을 맛보게 해줄 거라고. 그래서 밤마다 거리를 걸었지. 거리를 걷는 범인을 따라 몇 번이고 걸었어. 그놈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 그걸 알아내고 싶어서. 그리고 나는 찾아냈지. 



남자가 웃었다.



"너야, 아카아시 케이지군."



놀랍게도 뻔한 대답이라 아카아시는 숨을 쉬는 것도 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내 여동생이 죽기 전, 지목한 경찰이라는 단어가 닿는 놈은 이 마을에 너희 아버지뿐이니까."
"..."
"거기다.. 그렇게 미행하면 내 여동생 말고 몇 명이나 그렇게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걸 내가 봤어. 원하면 사진도 있어. 보여줄까?"



남자는 주머니를 뒤적여 구겨진 사진들을 꺼내 내밀었다. 마구잡이로 접히고 구겨져 선들이 그어져 있었지만 아카아시는 어렵지 않게 아버지의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자신은 오래부터 아버지가 순찰을 위해 밤거리를 걷는 게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가 입고 있던 경찰 셔츠에 묻은 피를 몇 번이고 지우기도 했었다. 그러니, 이 사진은 그리 놀랍지도 충격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카아시의 쥔 손은 땀이 차다 못해 축축하게 젖어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너를 죽일 거야. 그럼 네 아버지가 괴롭겠지. 나처럼."



남자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 안에는 분노도 기쁨도 없었다. 그저 슬픔만이 울릴 뿐이었다. 아카아시는 남자의 엉망인 감정을 받아내며 천천히 숨을 뱉어 쉬었다. 방독면 안으로 거친 숨소리가 웅웅 울렸다.


지금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사는 것을 포기한 아버지에게 자신이 소중한 존재가 된 것이 기쁜가? 아니면 이 지긋지긋한 반복의 도돌이표를 끝낼 수 있어서 기쁜가? 그것도 아니면.. 무서운 걸까? 


모르겠다. 아카아시는 가만히 자신의 손바닥을 교복 바지에 문질러 닦아냈다. 그리곤 3년 전 사형 선고와 함께 마지막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이 쓰고 다녔던 방독면을 위로 당겨 벗어냈다. 꽉 조였던 얼굴 위로 아직 평범한 공기가 차갑게 달라붙었다. 막힘없이 숨이 터져 나왔다. 


살아있다, 죽는다. 살았다. 죽어간다. 멈춰버린 그리고 죽어버린 공간에 엉망인 두 감정이 흘러넘쳤다.






-



종말을 앞에 둔 세계관으로 이런저런게 보고 싶었는데.

나중에 오이스가 버전도 써보고 시프다. 

머리가 너무 아프고 배가 고파서 퇴고는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