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졸업
2014. 10. 26. 11:16



밤이 찼다. 차다 못해 시렸다. 아카아시는 후드를 더 깊게 눌러 쓰고 찬 공기를 뒤로 한 채 발을 움직였다. 매일 동네를 러닝하고 걷는 것은 하루의 마무리와 같았다. 배구부의 다른 팀원들에 비해서 파워가 부족하니 그걸 어떻게서든 채우고 싶었다. 선배들의 발목을 잡는 후배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랬는데 - 벌써 졸업이라니. 내일이 졸업식이라는 것을 상기하고는 아카아시는 천천히 달리던 발을 멈춰 세웠다. 무릎을 짚고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지끈거리는 심장 부근을 꽉 눌렀다. 졸업이라니... 단 한 번도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가 3학년의 은퇴와 함께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네가 주장이야라는 보쿠토 선배의 말과 함께.

싫어요, 선배와 더 배구가 하고 싶어요.
그런 억지는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런 소리를 평소에 잘하는 성격도 아닌 데다가 <졸업>이라는 것은 18살 소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인생의 이벤트였고 흐름에 가까운 문제였다. 그래도....

"싫어."
헤어짐이 싫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쿠토와의 이별이 싫었다. 그를 존경하고 동경하고 좋아하는 이 마음을 이제 없는 것처럼 누르고 평범한 19살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입 밖으로 싫다는 말을 내뱉은 아카아시는 도시의 흔들리는 조명과 까만 밤하늘을 올려 보았다. 선배의 졸업을 순수하게 축하도 못 하는 이 일그러진 자신이 너무도 추하다고 느껴졌다.

선배가 좋아요, 선배와 하는 배구가 좋아요, 선배와 하는 연습이 좋아요, 선배와 하는 시합이 좋아요, 선배에게 올리는 토스가 좋아요, 선배가 내려치는 스파이크가 좋아요, 선배와 하는 하굣길이 좋아요, 선배와 하는 작전 타임이 좋아요, 선배가 부르는 내 이름이 좋아요-
보쿠토라는 남자가 이만큼이나 2년의 시간을 자신의 안에서 자리 잡았는데 그 어떠한 말도 전할 수 없다는 것이 아카아시는 분하고 또 분했다.

내일이면 더는 함께했던 라커룸에서도 체육관에서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아카아시는 다시 발을 움직였다. 달려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지, 아니면 이 일방적인 감정 때문인지도 모른 채로 아카아시는 무작정 달리고 달렸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익숙한 집 앞에서 거침없이 벨을 눌렀다. 늦은 밤에 찾아온 방문객에 중년의 여성이 "누구세요?" 라며 인터폰을 통해 말을 건넸다. 하아,하아 숨을 뱉어내며 아카아시는 침을 삼켰다. 목이 아픈 것 같았다.

"늦은 밤 죄송합니다.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보쿠토 선배 계신가요?"
잠깐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한참 뒤 놀란 얼굴로 현관을 열고 보고 싶었던 얼굴이 나타났다. 아카아시는 어색하게 웃으며 보쿠토를 바라보았다. 다 늘어난 잠옷 티셔츠에 아직 추운 날씨에도 끄떡없다는 듯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나온 꼴이 너무도 못났는데 그게 또 멋있어 보여서 심장이 아팠다.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놀라 묻는 보쿠토의 말에 아카아시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선배가 보고 싶어서요, 좋아해서요, 졸업하지 말았으면 해서요- 그런 말을 입으로 뱉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저 웃으며 답했다.
"모르겠어요. 선배."

모르겠어요 선배. 왜 나는 선배에게 솔직하게 굴지 못하는 건지, 이 관계의 마지막을 두고 고백조차 못 하는 겁쟁이인지 정말로 모르겠어요.

"내일 나 졸업해서 쓸쓸해졌어?"

네,쓸쓸해요. 쓸쓸해서 울 것 같아요. 새 학기가 시작되면 선배의 빈자리를 보고 울지도 몰라요.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진짜 쓸쓸해? 아니면 주장이 되는 게 무서워? 괜찮아!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나보다 똑똑하잖아."

제가 무서운 건 이제는 제 하루에 선배가 없다는 사실이에요. 잘해낼 자신이 없어요.

"아카아시 케이지군. 괜찮아?"
대답 없이 서 있는 아카아시를 걱정하며 보쿠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제야 아카아시는 웃었다. 울고 싶었지만 억지로 웃었다. 그리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졸업 축하해요, 선배."
이 말을 하러 온 것은 아니지만 이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카아시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