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신데렐라 2
2015. 4. 3. 00:17

무도회가 열리는 밤이라 그런지 성의 내부는 인파로 정신이 없었다. 이 시간을 당연하게 즐기는 사람들 틈에서 스가와라는 애써 요정이 만들어 준 드레스가 엉망이 되지 않도록 한 웅큼 크게 쥐어 잡으며 토끼 탈 사내의 손에 이끌려 열심히 걸었다. 



"사람이 많네요. 이래서 성에서 열리는 행사가 참 싫은데."



그는 웅웅 울리는 탈 너머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성큼성큼 걷다가도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는지 왕실 기사들을 발견하면 급히 몸을 돌려버렸다. 그 덕에 몇 번이나 그의 손에 이끌려 돌아야 했던 스가와라는 제 발이 시큰시큰 아파져 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요정의 구두라도 갑작스러운 움직임에는 대비를 하지못하는 모양이었다. 



"좀 조용하고 사람 없는 곳이 좋겠는데."



그런 곳이 오늘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그냥 바로 돌아가 버릴걸. 이상한 남자에게 붙잡혀 이게 무슨 고생이람. 차마 입으로 뱉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스가와라는 열심히 걸었다. 



"아, 왕실 정원으로 갈래요?"
"네?"
"거기라면 조용하겠다."
"안돼요!"



왕실 정원이라니. 큰일 날 소리였다. 스가와라가 놀라 외치자 토끼탈이 휙 돌아보았다. 



"왜요?"
"왜긴... 거긴 왕실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이잖아요. 우리 같은 일반인이 들어갔다간 화를 면치 못할 거라고요."
"몰래 들어가면 아무도 몰라요."
"...네?!"
"어차피 지금 무도회 중이고, 다들 연회장에 있을 텐데 뭐가 문제에요? 그리고 누가 잡으러 오면 도망가면 그만이고."



가벼웠다. 한없이 가벼웠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의 대답에 스가와라는 반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끌려 걸었다. 왕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정원에 무단 침입 한다는 것은 왕실 모독과도 같은 것이었다. 걸리면 분명 죄를 물을 터였고.. 그렇게 되면- 



"그 작은 머리로 뭘 그렇게 고민하는지 모르겠는데 괜찮아요. 나만 믿어요."
"...제가 뭘 보고요."



토끼탈을 쓴 남자를 어떻게 믿느냔 말인가. 스가와라는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하하하. 그냥요. 그냥 믿어 봐요. 재밌을 테니까."



아뇨, 절대로 재밌을 리가 없어요. 그리 툴툴거리면서도 그의 손을 놓지 못한 채로 스가와라는 결국 왕실 정원으로 향했다. 사람들 틈을 지나 계단을 내려가 잘 깎인 잔디와 꽃길을 걸었다. 언젠가 자신이 왕자의 손을 잡고 걸었던 그 길을 걸으며 저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슬쩍 돌아보니 시계탑의 바늘이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왕자님은 지금쯤 저 안에서 많은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계시겠지. 인사를 올리고 자신처럼 감사를 전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느라 정신이 없으시겠지. 늦어도 너무 늦어버린 생각들을 떠올리며 얼마나 그를 따라 걸었을까 덩굴이 가득 울타리를 감고 올라가 안이 보이지 않는 왕실 정원의 입구에 다 달았다. 



"오 열려 있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아가자 입을 열려던 스가와라는 가볍게도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의 행동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끼긱 작은 소음을 내며 열리는 문 안으로는 여전히 잘 가꾸어진 밤의 정원이 조용히 드러났다. 울타리 앞에 담을 쌓듯이 피어오른 붉은 장미들과 그 앞에 알록달록 피어난 제각각의 꽃이 작은 조명 아래로 아름답게도 반짝이고 있었다. 코끝으로 차오르는 향기를 들이키며 스가와라는 그의 손에 이끌려 정원 정 가운데에 위치한 분수대에 도착했다. 



"조용하니 좋잖아요. 그쵸?"



아마도 탈 안에서 씩 웃고 있을 그가 그리 말하며 대리석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졸졸졸 흘러나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스가와라도 슬쩍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다리도 아팠던 김에 다행이다 싶어 서둘러 유리구두를 벗어 던졌다. 



"그렇게 벗어 던져도 안 깨져요? 그거? 비싸 보이는데."
"안 깨져요."



아마. 요정의 것이니까. 대충 대답하고는 뜨겁게 올라온 발의 열을 식히기 위해 돌아 은은하게 빛나는 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드레스 자락이 젖지 않게 사내가 함께 붙잡아 올려 주었다. 차게 흔들리는 물이 발끝을 간지렷다. 



"기분 좋다."



왕실 모독이니 뭐니 들어오면서 걱정했는데 막상 발을 딛고 나니 정말 좋았다. 처음으로 밤에 찾아온 정원의 풍경도 좋았고, 발을 간질이는 물의 느낌도 좋았다. 살랑살랑 흩어지며 뺨에 닿는 밤의 공기와 바람마저도 좋았다.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네요." 그가 탈 안으로 웅웅거리며 조용히 말했다. 어릴 때에도 왕자와 한참을 어울려 놀다 정원에 오면 이렇게 나란히 신을 벗어 던지고 발을 식히곤 했는데... 다른 사람에겐 비밀이야. 왕자의 체면이 있으니까. 어린 소년은 짐짓 어른스러운 말투로 그리 신신당부를 했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자꾸 웃음이 나왔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요? 그가 물었지만 소중한 기억을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남에게 알려주고 입으로 뱉어 닳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발을 식힌 후에야 물에서 빼내 말리기 위해 공중으로 쭈욱 뻗었다. 뚝,뚝 발등을 타고 떨어지는 물이 잔디 위를 적시며 반짝였다. 



"받침대 만들어 줄까요?"
"네?"
"그렇게 들고 있으면 힘드니까."



그리 말하며 그가 자신이 쓰고 있던 토끼 탈을 벗었다. 훅 끼치는 가벼운 땀 냄새와 함께 가볍게 탈을 벗어낸 그가 답답함을 털어내려는지 탈탈 고개를 흔들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보고 웃었다.



"아..."



정원 아래로 내리는 달빛이 비춰낸 사내의 얼굴에 스가와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사람이었다. 자신이 오늘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상대가 눈앞에 있었다. 그날의 온기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어? 내 이름 알아요?"



저도 모르게 입을 타고 흐르는 이름에 그가 씩 웃으며 바닥에 탈을 내려놓더니 이내 굳어있던 스가와라의 다리를 눌러 그 위로 내려주었다. 젖은 발이 힘없이 눌려 단단한 분홍색 탈 위로 앉았다.



"하긴, 모를 수가 없지. 내가 왕잔데. 그쵸?"
"....그..."
"이렇게 잘난 얼굴이 세상에 나 말고 존재할 일도 없고."
"그..."



말해야 하는데. 어린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어서 감사했다고. 두려움과 공포로 눌려있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어서 고맙다고. 한 번 꼭 만나고 싶었다고, 인사를 이렇게 드리고 싶었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놀라 벌어진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아, 미안. 많이 놀랐어요? 숙녀를 에스코트할 때는 정중하게-라고 배우긴 했는데 해봤어야 알지. "



그가 손으로 거칠게 제 머리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리곤 서둘러 붙였다. 어울려줘서 고마워요. 라고.



"제가 저렇게 시끄러운 걸 별로 안 좋아 해서요. 남들 앞에서 춤추고 연극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그보다는 이렇게 정원을 걷고 책 읽으면서 공상하는 게 좋거든요. 아버님은 왕자가 그러면 안된다고 야단이지만."
"..."
"왕실에는 제 또래도 없고 친구도 없어서 사실 그런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어서. 아, 그렇다고 저 왕따는 아니에요. 아.. 아닌가 맞나? 하하.. 어릴 땐 그래도 있었는데. 거하게- 친구는 아니고... 아버님을 만나러 온 상단 주인의 아들이었는데 작고 귀여웠어요."
"..."
"상단 주인이야 얼른얼른 아들을 키워서 이리저리 얼굴도장 찍을 셈으로 데리고 들어왔겠지만 어린 꼬마에게 이 성이 얼마나 크고 무서웠겠어요. 처음에 만났을 때는 진짜 오줌이라도 지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니까. 원래 제가 진짜 남에게 관심이 없는데.. 그때는 저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서 가서 말을 걸었는데 냉큼 제 손을 잡아 오는 거예요."
"...그래서요?"
"그래서 성을 구경시켜줬죠. 나중엔 자주 왔어요. 같이 복도를 걷고, 이 정원에 와서 놀았어요. 지금은 옮겼지만 저쪽에 있던 도서관에서 서로 동화책을 읽어도 주고 가끔 숨바꼭질도 하고.. 날 따르는 게 귀여워서 그렇게 자주 지냈는데... 어느날부터 잘 오지 않더니 아예 보이지 않더라고요. 아버지를 따라 상단일을 시작했는지, 어쨌는지.. 이런 이야기 재미없죠? 미안해요. 오늘 그쪽을 보니까 생각나서요."



오이카와가 웃으며 손을 뻗어왔다. 자신과 달리 보드랍고 단단한 손이 천천히 어깨 위로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이 머리색을 했거든요. 그 녀석도. 이 달빛과 같은 색이요."
"..."
"아까, 아가씨도 이 성의 기에 눌린 것 같아서 참견했어요. 꼭 그 녀석 같아서."
"...무척 옛날 일 같은데 기억하시네요?"



나도 하는데. 스가와라는 지금의 모습으로는 절대로 뱉지 못할 말을 삼키며 물었다. 그 질문에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뭐라 입을 열려는 찰나-



"왕자님!!!!"



정원의 문을 열고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아, 젠장. 왕자는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서둘러 스가와라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마치 항복을 하듯 두 손을 올리며 분수대에서 일어섰다.



"네, 갑니다. 가요. 숨바꼭질 끝. 너희가 이겼어."



건성건성 그렇게 말한 그는 여전히 미소띄운 얼굴로 멍하니 앉아있는 스가와라를 내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무릎을 굽혀 앉아 바닥에 벗어 던졌던 유리구두를 들어 아주 조심스럽게 토끼 탈 위에 얹어있던 발에 신겨주었다. 부드러운 장갑의 촉감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렸다.



"가죠."
"..네?"
"나랑 춤 한 곡 추고 가요."
"아니, 전 춤을..."



못추는데..! 거기다 여자 스텝은 절대로 모르는데! 당황한 입은 말을 끝내지 못했고 그 찬스를 놓치지 않은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일으켜 세웠다. 



"못 춰도 괜찮아요. 내가 있는데. 뭘."
"많이 밟을 거에요. 저 정말 조금도 못 춰요."
"밟아요. 나도 배우면서 내 스승의 발을 많이 밟았으니까."
"그게 아니라.."
"아, 왕자 발이라 그래요? 비싼 발이라 밟기 좀 그래요? 그럼 아까 토끼 탈 다시 쓸까요?"



연회장으로 가는 길,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스가와라와 달리 완벽하게 즐기는 말투고 그가 물었다. 아뇨. 그런 수치스러움을 왕자에게 남길 수는 없었다. 고개를 젓는 스가와라에게 "고마워요. 덕분에 정상적인 춤을 추겠네."라며 그가 농담을 던졌다. 어차피, 자신이 고개를 끄덕였어도 다시 탈을 쓸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뒤를 따르는 기사들과 함께 왕자의 손에 붙잡혀 걷고 있으려니 아까까지만 해도 복도를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양옆으로 비켜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채를 흔드는 여자들의 시선도 그의 곁에 선 남자들의 시선도 모두 자신에게로 닿기 시작했다. 그 어마어마한 관심에 스가와라는 얼굴이 타올라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도망칠 곳이 없을까 고민하며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 시계탑에 뜬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10시를 훌쩍 넘겨 11시를 향해 바늘이 달리고 있었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빠져나가지 않으면 이 마법이 끝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더럽고 추한 자신의 모습을 왕자에게 들킬 것이었다. 



"저 12시까지 가야 해요."
"춤추는데 한 시간이나 걸리지 않아요."



간절한 부탁에도 오이카와는 단호했다. 열려 있는 연회장 문을 넘어서자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과 함께 춤을 추던 사람들이 모두 비켜나기 시작했다. 텅 비어가는 가운데를 바라보며 완전히 굳어버린 스가와라와 달리 오이카와는 아주 익숙하게 쥐고 있던 손목에서 올라와 손을 가볍게 쥐었다. "가실까요?" 에스코트를해 본 적 없다는 말치고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당겨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저 진짜 춤을-"



못 춘다고 한 번 더 경고하려는 찰나 왕자의 여유 있는 팔이 허리에 둘러졌다. 저도 모르게 흡,하고 숨을 들이키자 귓가로 그의 작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힘 안 줘도 괜찮은데. 말랐어요. 짖궃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하지만 핑핑도는 머리 탓에 그의 말이 안까지 닿질 않았다.



"원,투-"



시작되는 새로운 음악에 맞춰 작은 박자를 넣어준 그가 휙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춤에 맞추기 위해 스가와라 역시 서둘러 뒤로 발을 빼내었다. 춤을 못 춘다는 자신의 말을 거짓말로 들은 것은 아니었는지 그가 리드하는 박자와 스텝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 스가와라는 곧 그 호흡에 맞춰 움직일 수 있었다. 유리구두의 마법인지 분명 잊었다 생각했던 움직임이 음악을 타고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이름이 뭡니까?"



오이카와가 뒤로 빠짐과 동시에 함께 허리를 당기며 물어왔다. 



"스텝이 엉키니 말 걸지 말아 주세요."



자꾸만 발을 확인하고 싶어져 내려가는 시선을 겨우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이름만 알려주면 말 안 걸게요."
"싫어요."



너무하네. 그가 작게 투정하며 허리에서 손을 풀더니 크게 스가와라를 밀듯이 제 품에서 풀어냈다. 그 반동에 휘리릭 빠져나간 몸을 그가 다시 힘으로 당겨 제 품으로 품었다. 



"원래 춤이 이렇게 격해요?"
"때에 따라서?"



얄미운 대답이었다. 음악이 끝날 때까지 그와 호흡을 얽고 발을 얽히며 춤을 끝내고 나자 절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운동이야 못했지만 가사노동으로 체력만큼은 자신 있다 생각했는데 무거운 드레스를 입고 알지도 못하는 왈츠를 추려니 영 쉬운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다음 노래로 바뀌자 오이카와는 자연스럽게 스가와라에게서 한걸음 떨어져 두르고 있던 팔을 풀어냈다. 그리곤 다리 하나를 뒤로 빼내며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서둘러 스가와라 역시 언젠가 사교파티에서 보았던 여성들을 따라 흉내 내며 양손으로 드레스를 잡아 올려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아주 어색한 인사였다.



"뭐라도 먹을래요?"
"아뇨."



다시금 정중하게 내미는 그의 손에 이끌려 무대 밖으로 걸어나오며 스가와라는 시계를 확인했다. 11시가 넘어있었다. 아직 조금은 괜찮은 걸까. 조금 더 욕심을 부려도 되는 걸까. 흘러가는 시곗바늘의 야속함을 탓하지 않으며 스가와라는 테라스로 향하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밖으로 나서자 기사들이 조용히 문을 닫아주고 커튼을 쳐 안과 차단해 주었다. 



"생각보다 잘 추던데요? 춤."
"...거짓말."
"네, 맞아요. 거짓말. 발을 아주 야무지게 밟던데."
"발은 안 밟았어요..!"
"아, 기억하네? 정신없어 보여서 못하는 줄 알았지. 그나저나, 지금까지 춤 하나 배우지 않고 뭐 했어요? 사교파티 같은데 안 나갔어요?"
"네."
"집안에서 엄청 보석처럼 안고 살았나 보네. 어느 집안이에요."
"스-"



물 흐르듯 물어오는 그의 질문에 하마터면 제 성을 말할 뻔했다. 서둘러 손으로 입을 막자 그가 "아, 들켰네." 라며 아쉬운 듯이 가볍게 혀를 찼다. 



"이름 못 알려주는 이유라도 있어요?"
"네."
"그럼 나중에 만나면 알려 줄 생각은 있고?"
"..."
"나중에 날 만날 생각은?"
"...그.."
"설마, 없어요? 나 왕잔데?"



있어요. 있어요. 하지만 만날 수 없었다. 지금 오이카와 토오루가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 속에 있는 자신이 아닌 눈앞에 있는 여인이었다. 요정이 만들어 낸 자신의 가짜. 오늘이 끝나면 영영 사라질 환상. 가만히 손을 내리고 말이 없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던 오이카와는 천천히 다가와 손을 잡았다.



"난 왕자가 애프터 신청하면 무조건 오케이가 돌아오는 줄 알았는데."
"..."
"아닌 상황도 있네. 지금 나 차인 거죠?"
"아니에요."
"그럼 만나 줄 생각 있어요?"



그럴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라- 그가 가볍게 말하며 쥔 손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장갑 안의 손가락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나 싶더니 이내 제 장갑을 벗어내곤 스가와라의 장갑을 벗겨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스가와라는 급히 손을 빼내려 했지만 콱 쥐어오는 그가 더 빨랐다. 트고 건조하고 상처투성이에 엉망인 못난 손인데. 보여주고 싶지 않은데.



"뭔가, 거추장스러워서."



그는 그리 중얼거리며 아무렇지 않게 손을 손가락으로 살살 부드럽게 밀어 만지더니 꼭 깍지를 끼어 잡아왔다. 긴장으로 차게 식은 손으로 그의 따뜻한 온기가 자연스럽게 겹쳐 얽혀왔다.



"왕자님."
"왜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해요."
"오늘, 고마웠습니다."



도망치려는 자신을 잡아 주어서 고마웠고, 새어머니와 누님들에게 피했던 자신을 가만히 도와주어서 고마웠다. 또 추억 속의 정원을 가게 되어서 고마웠고, 그곳에서 자신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고 이야기해주어서 고마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옛날, 어리고 어렸던 자신을 지금처럼 잡아주어서 고마웠고 그 덕에 잊지 못할 따뜻한 추억을 남겨 준 것이 제일 고마웠다. 그 기억이 지금까지 자신이 버틸 수 있는 온기가 되었듯이 오늘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자신의 앞날을 또 버티게 해 줄 것이었다. 


그가 웃으며 살짝 잡은 손을 당겼다. 그리곤 테라스 난간에 엉덩이를 붙이고 걸터앉았다. 침묵이 바람을 타고 좁아진 거리를 스쳐 지나갔다. 오늘을 조금도 잊지 않기 위해 스가와라는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오이카와를 눈에 담았다. "그렇게 보면 닳아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곤 손을 뻗어 다시금 내려앉아 있는 머리카락을 슬며시 들어 올리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쥐어 보였다.



"나도 고마웠어요. 정말로. 덕분에 나도 무척 즐거웠거든."
"저도-"



정말 즐거웠다고 인사를 하려는 찰나, 딩-하고 시계탑이 울기 시작했다. 놀라 돌아보자 어느새 12시 정각에 가까워진 바늘이 이 마법의 끝을 알리고 있었다.



"가야 해요."
"어디를요?"
"아까 말했잖아요! 12시 전엔 가야 한다고!"



딩-딩- 쉴 새 없이 12시를 알리기 시작하는 소리에 스가와라는 서둘러 잡혀있던 손을 빼냈다. 멀어지는 몸과 함께 오이카와의 손에서 머리카락도 빠져나왔다.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가 다시 손목을 잡아왔으나 스가와라는 빠르게 그 손길을 피해냈다. 불안하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에 귀가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황급히 드레스를 크게 움켜쥐며 테라스에서 빠져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당황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았다.



"출구요!!"



그들에게 크게 외치자 열려있는 연회장 문을 가리켰다.



"이봐요!"



따라 나온 오이카와가 급히 저를 불렀지만 스가와라의 귀에는 오로지 울리기 시작하는 시계의 울음 소리만이 가득 찼다. 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사람들 틈을 거칠게 밀어내며 복도로 나오자 달리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이름, 이름 알려주고 가요. 아니 어디 사는지.. 내가 어떻게 찾아가면 되는지-!"



등 뒤로 달라붙는 다급한 외침에 스가와라는 제 입술을 꽉 물었다. 그 어느 것도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당장에라도 저 물음에 뱉고 싶은 말이 수만 가지였지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무엇도 없었다. 어쩐지 시야가 급히 아른해지기 시작했다. 뜨뜻하게 눈가로 차오르는 것들을 무시하며 복도를 빠져나와 차가 세워져 있던 성의 정문으로 향하자 차 앞에 서 있는 마츠카와와 이와이즈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빨리 와요!!"
"시간이 없습니다!!"



두 사람의 다급한 외침이 정말로 위험 신호와 같이 들려와 스가와라는 내려가는 계단을 두 칸 세 칸 뛰어 밟았다. 그렇게 서두른 탓일까, 결국 유리구두 하나가 미끄러져 발에서 빠져나오고 말았다. 줍기 위해 돌아섰으나 그랬다간 계단을 밟기 시작하는 오이카와에게 붙잡힐 것 같았다. 요정에게 미안하지만 하는 수 없이 스가와라는 그 구두를 포기하곤 이와이즈미가 열어 준 차 문으로 뛰어들어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마츠카와가 차를 출발시켰다. 뒤늦게 차에 도착한 오이카와가 문을 두드리며 뭐라 외쳤지만 스가와라는 꽉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의 목소리에 절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것 같기 때문이었다. 성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12시가 되었는지 더는 시계의 울음소리가 따라붙지 않았다. 



"우린 여기까집니다."



끼익,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와 함께 아직 저택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차가 멈춰 섰다. 그리고 나타날 때처럼 퐁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모든 것이 사라졌다. 털썩, 사라진 차에서 떨어진 스가와라는 가만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왕자에게 잡혀있던 손이었다. 그가 쥐었던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장식되어있던 꽃만이 파스스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름다웠던 드레스 역시 사라지고 늘어나고 낡은 자신의 옷으로 돌아와 있었다. 함께 있던 마츠카와도 이와이즈미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자신의 발에서 떨어져 나간 한 짝의 유리구두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게 끝나 버렸다. 슬픔 보다는 외로움이 차올랐다.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간신히 참아내며 힘이 빠져 흔들리는 손을 뻗어 반짝이는 그 구두를 꽉 품에 안았다. 유일하게 이 구두만이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꿈이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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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습이 점점 불가능하다.

토끼 탈은


이거에 순화된 귀여운 버전을 상상했다. 왜 내 폴더에 토끼 탈은 이 사진뿐인가..!!

그리고 결국 삼학년은 아직 영화 신데렐ㄹ ㅏ를 못보았다는 슬픈 소식.. 엉엉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