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너머의 성은 오늘따라 유달리 더 반짝여 보였다. 스가와라는 가만히 창가에 붙어 그 꿈 같은 풍경을 한참 눈에 담다 이내 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무도회라니, 자신에게는 너무 아득하고 아득한 이야기었다. 맛있는 음식, 화려한 사람들과 아름다운 음악, 장식된 꽃에서 흘러나오는 향기. 언젠가 집에서 열렸던 작은 사교파티의 무도회를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자신의 발끝에 힘을 주었다. 그리곤 구멍이 난 가죽신을 신은 채로 먼지 바닥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보았다. 보통 머리의 기억에선 사라져도 몸의 기억엔 남아있다는데 자신은 예외였는지 뻣뻣하게 굳어 버린 몸이 삐걱거렸다. 왈츠 수업을 듣지 못한지 오래되었으니 이 스텝이 맞는지 저 스텝이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버지."
원망해도 소용없는 이름을 입에 담으며 스가와라는 풀썩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나라에서 큰 상단을 꾸리고 무역일을 하고 있던 아버지가 다음 일을 위해 새어머니와 누님들에게 저를 맡기고 떠난 지 벌써 5년이 흘렀다. 그리고 그 떠나는 길에 폭풍을 만나 배가 전복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도 꼬박 5년이었다. 스가와라는 아버지의 소식이라며 서둘러 저택을 달려 편지를 받았던 날을 떠올렸다. 그 안에 남겨진 아버지 소식에 주저앉아 울던 날도 떠올렸다. 무슨 일이니? 놀라 달려온 새어머니가 저를 달래며 편지를 읽고 흐느끼던 것도 떠올렸다. 딱, 거기까지였다. 자신의 평온하고 완벽하고 아름다웠던 생활은.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스가와라는 입고 있던 옷을 벗고 하인들이 입는 낡은 티셔츠와 바지를 입어야 했다. 자신의 방에서 쫓겨나 허름한 다락방으로 던져져야 했다. 피아노를 두드리고 붓을 쥐던 손으로 빗자루를 들고 걸레를 짜야 했다. 아버지가 있을 당시 자신을 친아들처럼 아껴주던 새어머니는 그렇게 자신을 버렸다.
오늘만 하더라도 다른 날도 아니고 왕자의 생일을 기념한 무도회이니 꼭 멀리서라도 보고 싶다 사정했지만 그녀는 냉정했다. "저택의 모든 계단을 깨끗하게 닦아내고 걸려있는 그림들의 먼지를 모두 털어내. 그리고 겨울용 식기들을 꺼내서 미리 날이 추워질 것을 대비해놓고. 아, 그 참에 겨울 이불들도 모두 빨래해줄래? 그게 끝나면 무도회에 와도 좋아." 붉은 입술을 올려 웃는 그녀의 말에 스가와라는 허탈해졌다. 그 모든 일을 끝내고 나면 무도회는 모두 끝나 있을 것이었고 하루는 지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을 제외하곤 이제 사용인들 누구 하나 저택에 남아있지 않았기에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포기가 되지 않아서 두 딸을 데리고 마차에 오르는 그녀를 배웅하기가 무섭게 스가와라는 자신의 앞에 쌓인 일 더미에 달려들었지만 예상대로 역부족이었다. 셀 수도 없는 계단을 무릎이 붉게 오르도록 굽혀 앉아 닦았고 아슬아슬하게 사다리에 올라 저택에 걸린 초상화들도 털어냈으나 그릇과 이불은 손도 대지 못한 채로 저녁이 찾아오고 말았다.
"가실 거면 저도 데려가시지 그랬어요. 아버지."
스가와라는 절대로 아버지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그런 목소리가 입을 타고 흘렀다. 침대에 걸터앉아 무릎 위로 꼭 주먹을 쥐었다. 거칠고 볼품없는 그 손 위로 망울망울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자신은 이제 고작 19살이었다. 19살이 혼자 서서 버티기에는 하루하루가 너무도 가혹했고 차가웠다.
"얘-"
차라리 아버지를 따라 나설걸. 그 차가운 바다에 삼켜져 죽었더라면 이 악몽은 꾸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
"얘!"
노동이 힘든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힘든 것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새 어머니와 두 누님의 냉대와 괴롭힘이었다.
"저기, 얘?!"
그것만 사라져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저기, 스가와라 코우시군?!"
머리 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스가와라는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어두컴컴한 자신의 낡은 다락방에 분홍머리의 사내 하나가 팔짱을 낀 채로 저를 내려보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공중에 둥실둥실 떠서. 스가와라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놀라 저도 모르게 펄쩍 뛰어 벽으로 붙어 앉았다.
"뭘 그렇게 놀라? 요정 처음 봐?"
"네...?"
"요정 처음 보냐고, 요정."
요정이라니.. 스가와라는 멍한 얼굴로 두 팔을 올려 파닥파닥 날개짓을 해 보였다. 이런 요정이요? 날아다니는? 동화 속에 나오는? 페어리? 그런 의미를 담아 묻자 그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5년 동안 구경도 못 한 책 속에서나 등장하는 줄 알았던 요정이 제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스가와라는 서둘러 제 눈을 비벼보았다. 아니, 그보다 자신이 상상했던 요정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믿을 수가 없었다.
"못 믿네."
그는 그리 중얼거리더니 이내 두 손가락을 마찰시켰다. 딱,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반짝이는 투명한 날개가 그의 등 뒤에서 나타나 파닥이기 시작했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와-하고 작은 탄성을 뱉었다.
"착한 아이에게는 상이 내려지는 법이지. 널 도와주러 왔어."
"...저를요?"
"그래, 무도회에 가고 싶은 거지?"
"네."
"그런데 여자아이도 아니고 남자애가 혼자 가서 뭘 하려고? 여자라도 만나려고?"
"아뇨,아뇨! 그냥... 맛있는 것도 먹고요, 꽃도 구경하고, 멋진 음악도 듣고 싶어요. 춤은 이제 못 춰서 싫고.. 그리고 또... 멀리서나마 왕자님을 뵙고 싶어요."
"왕자?"
요정의 물음에 스가와라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 스가와라는 가끔씩 아버지를 따라 성에 방문하는 일이 많았었다. 처음 성에 들어간 날은 어린 마음에 그 웅장함과 위엄에 질려 잔뜩 긴장했었다. 아버지의 손을 꽉 잡고 있어도 놓칠까 두려워 눈물이 났다. 그래도 성을 거닐 때는 항상 아버지와 함께여서 괜찮았는데 아버지가 폐하에게 인사를 드리러 사라지자 혼자 남은 두려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커다란 복도에 홀로 남았다는 사실에 몸이 달달 떨릴 정도였다. 그래도 착한 아이는 떼를 쓰면 안된다 들어왔고, 특히 예의와 격식을 갖춰야 할 성안에서 아버지를 창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스가와라는 꾹 주먹을 쥐고 긴 시간을 버텼다. 그럼에도 그 시간이 어린 자신에게는 너무도 무섭고 외로웠다. 그때였다. 복도에서 아름다운 소년이 나타난 것은. 넌 누구야? 부드럽게 웃으며 걸어오는 말에 스가와라는 아버지의 이름을 대며 신분을 밝혔다. "아, 오늘 아버님을 만나러 왔구나? 지금 혼자 기다리는 거야?" 다정한 질문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기다릴 동안 내 산책에 어울려 주겠어? 어른스러운 제안에 고민도 없이 냉큼 내밀어 진 손을 잡았다. 그렇게 혼자 남았던 두려움을 지우고 왕실 정원을 마음대로 구경하며 한참을 뛰어놀았다. 맨발로 분수대에 발도 담그고 그가 알려주는 꽃 이름을 외우며 다정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사라진 외로움을 뒤로하고 아버지를 다시 만나러 갔을 때 그가 자신과 같은 그저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 이 나라의 왕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뭐해, 코우시! 얼른 왕자님께 예를 갖추지 않고!" 놀란 아버지의 말에 그제야 스가와라는 소년의 손을 놓고 서둘러 머리를 조아렸었다. "아닙니다, 덕분에 즐거운 산책을 보냈는걸요." 무례한 자신에게 끝까지 따뜻했던 그 소년. 그 이후 아버지가 성에 방문하는 날이 될 때면 스가와라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단장을 했다. 왕자를 볼 생각에 즐겁고 설렜다. 그에게 흠이 되고 싶지 않아 최선을 다해 몸가짐을 했다. 크고 무섭기만 했던 복도를 가볍게 걸으며 오늘도 왕자님을 만날 수 있을까? 하고 기대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언제나 현실로 이루어졌다. 커다란 문 뒤로 아버지를 보내고 나면 어김없이 왕자가 나타났고 어김없이 장갑을 벗으며 가지런히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 손은 다정함을 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자신보다 살짝 큰 그 손이 언제나 설렜다. 그 따뜻했던 시간도 자신이 자라 학교에 다니고 아버지의 일이 바빠지면서 사라져 더는 이어질 수 없었지만 스가와라는 그 날의 기억을 여전히 안고 있었다. 그 날의 관심과 작은 애정이 이 차가운 냉대 속에서도 버티게 만들었다. 그러니, 멀리서라도 그 왕자를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 그 날의 햇살 같았던 미소를 다시 보고 싶었다. 그 날의 따뜻함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게 언제야?"
"10년도 더 되었어요. 그 이후에 제가 학교에 다녀서 성에 자주 출입하지 못했고 아버지도 외국으로 자주 나가시느라.."
"그럼 잊어먹지 않았겠어? 왕자도? 왕자란 자리가 그렇잖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날 텐데."
"그래도요, 멀리서라도 꼭 한번 만나고 싶어요. 잘 계시는지, 잘 지내셨는지."
미련하네. 요정은 아픈 소리를 뱉으며 혀를 가볍게 찼다.
"뭐, 그래도 내가 너를 안타깝게 여겨 이렇게 왔으니 소원을 들어줘야지!"
그 혀 차는 소리와 달리 경쾌하게 말하며 이번에도 딱 소리가 나게 손을 마찰시켰다. 그러자 공중에서 사내 몇 명이 방안으로 떨어졌다.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사내들의 모습에 스가는 놀라 비명이 터져 나올까 제 입을 틀어막았다.
"망할, 하나마키. 부를 때 예고를 좀 하고-"
"마법이 그렇게까지 친절하진 않거든요. 인사해 스가와라군. 이쪽은 마츠카와, 오늘 스가와라군을 성까지 모실 드라이버야. 이쪽은 이와이즈미, 무뚝뚝하게 생겼지만 스가와라군을 에스코트해 줄 기사님이지. 여기는 긴다이치와 쿠니미. 스가와라군이 없는 동안 빠르게 집안일을 끝내줄 만능 살림꾼!"
"...그.. 겨울 식기와 이불 빨래라 두 사람으로는 무리-"
"내 사전엔 무리란 없어. 그렇지? 긴다이치? 쿠니미?"
요정의 말에 가장 끝에 서 있던 소년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제 스가와라군을 무도회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신 시켜야지."
콧소리까지 흥얼거리며 요정이 벽에 붙어 굳어있는 자신의 팔을 잡아끌었다. 엉겁결에 침대에서 끌려 나온 스가와라의 주변을 돌며 그가 알 수 없는 이상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다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음색이었다. 흥얼흥얼 알 수 없는 가사를 뱉으며 주변을 돌면서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퐁!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제 머리가 불쑥 길어졌다. 한 번 더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더럽고 낡은 옷 대신 순백에 가까운 아름다운 드레스가 제 몸 위로 떨어졌다. 퐁! 퐁! 가벼운 소리가 날 때마다 길어진 머리가 절로 빙그르르 돌아 꽃과 함께 가지런히 어깨를 타고 내려앉고 목에는 아름다운 보석이 찰랑거리며 떨어졌다. 마지막 손가락 마찰소리와 함께 구멍이 난 가죽신이 반짝이는 유리구두로 변했다.
"끝!"
간단한 그 말과 함께 스가와라는 서둘러 벽에 붙은 거울로 달려가 섰다. 처음으로 여성의 구두를 신었는데도 제 발처럼 편해서 아프지도 않았다. 빙그르르 한 바퀴 돌며 거울 속에 믿을 수 없는 미녀를 바라보았다. 드레스며 머리와 장식된 꽃이며-
"....잠깐!!! 그런데 왜 여장이에요?! 이게 아닌데?!"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고! 스가와라가 놀라 파인 드레스의 가슴 부분을 두드리며 말했다. 이 부근에 있어야 할 것이 당연히 없는 자신은 남자였다.
"아, 그 문제야?"
그가 별 일 아니라는듯 웃으며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텅 비어있던 드레스가 후두둑 올라가 목까지 단단히 잠겼다.
"안에는 휴지를 넣든가 해. 요정의 능력으론 그.. 가슴 생성은 불가능이라."
"아니..그..그게 아니라! 왜 이러고 가야 해요?"
"왕자님을 만나고 싶다며? 그럼 당연히 아름다운 미녀가 되어야지."
"...그냥 가서 뵈면?"
"왕자 생일기념 무도회에 그냥 가서 서 있으면 퍽이나 왕자랑 만나겠다. 5년 동안 이런 먼지투성이 방에 박혀 있더니 아주 사교계가 기억도 안나나 보지?"
아니, 그래도.. 이 꼴은 싫은데. 이 꼴로 가면 왕자는 절대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었다. 물론, 왕자가 자신 같은 것을 기억할 거라고 스가와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거기다! 그냥 그대로 무도회 갔다가 네 새어머니와 누님들을 만나면? 당장 쫓겨날걸. 이게 최선이야."
"그럴까요?"
"그럼!"
요정이 단호하게 외쳤다. 그것만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문 스가와라를 만족한 듯 바라보며 요정이 벽에 달린 시계로 시선을 던졌다.
"시간이 9시를 넘었네. 도착하면 10시가 되려나. 일단,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해줄게. 스가와라군."
"네!"
"내 마법은 그다지 효력이 좋지 않아서 12시가 되면 마법이 풀려.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이 집에 돌아와야 해."
"12시요?"
"그래, 12시. 기억해. 12시가 끝날 때까지 꼭 돌아와야 해."
엄하게 내려앉는 그의 말에 스가와라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얼른 무도회에 다녀오도록 해! 씩 웃으며 비켜 서주며 그가 인사했다. 말끔하게 정장 수트를 갖춰 입은 이와이즈미가 손을 뻗어 스가와라를 에스코트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그 손을 잡고 스가와라는 자신의 다락방을 떠났다. 저택의 현관으로 나오자 잘 닦인 자동차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레스가 구겨지지 않게 접어 앉자 운전석에 올라탄 마츠카와가 미러를 보며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속도 좀 내겠습니다."
허락과 같은 스가의 끄덕임과 함께 차는 거칠게 출발했다. 스가와라는 점이 되어 사라지는 자신의 저택의 지켜보았다. 오랜만에 타보는 고급스러운 승용차의 움직임 만큼 스가와라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밖으로 터져 나올까 서둘러 제 손으로 꾹 눌러 감추며 자세를 바로잡아 앉았다. 빠르게 달리는 차의 속도 만큼이나 빠르게 반짝이는 성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숨을 못 쉴 것 같아요."
"쉬어야 가서 춤도 추죠."
"아... 춤은 진짜 안 되는데."
이와이즈미의 말에 스가와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꿈만 같아요. 항상, 항상 저 성에 가보고 싶었어요.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모두 저에게 돌아섰을 때.. 저에게 공포스러웠던 저 성안에서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었던 왕자님이 너무너무 그리웠어요. 그분을 생각하며 그때처럼 좋은 일도 생길 거라 믿었는데.. 정말로 생겼어요!"
가까워지는 성을 바라보며 스가와라가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무리라며 단념했던 그 꿈이 현실로 다가오니 정말이지 심장이 터져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스가와라의 말에 이와이즈미가 "더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라며 듣기 좋은 응원을 해왔다. 이윽고 마츠카와가 거칠게도 몰았던 차가 성 앞에 멈춰 섰다. 먼저 차에서 내린 이와이즈미가 익숙하게 돌아 문을 열어 스가와라가 나올 수 있도록 도왔다.
"지금까지 절 버티게 해 주었던 그 날의 왕자님에게-"
스가와라는 결심한 듯 웃으며 말했다.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하고 올게요!"
"다녀오세요."
"12시까지만 오시면 됩니다!"
두 사람의 응원을 받으며 스가와라는 서둘러 성안으로 들어섰다.
오래전에 왔던 기억을 되살려 연회장으로 향하는 길, 신기하게도 다 잊은 줄 알았던 기억들이 현실과 겹쳐 눈앞으로 펼쳐졌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었던 길, 저 코너를 돌면 폐하를 만나는 접견실이 있었고 그 앞에서 늘 왕자님을 만났었는데- 또 이 계단을 내려가면 왕실 정원까지 곧장이었고, 그 건너에는 왕자님과 함께 책을 읽었던 도서관도 있었는데. 하나둘 떠오르는 기억에 스가와라는 눈물이 날 것 같은 자신의 눈에 꾹 힘을 주었다. 바보처럼 청승 떨 시간이 없었다. 12시까지는 꼭 왕자님을 만나야 했다. 멀리서라도 그를 보아야만 했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좋으니, 부디. 사락사락 다리 사이로 흐트러지는 드레스 자락을 감기지 않게 꾹 붙잡으며 스가와라는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울리며 이 무도회를 위해 참석한 많은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둘 오늘을 준비한 아름다운 여인들과 차려입은 사내들의 틈을 지나칠 때마다 저도 모르게 팍팍 기가 죽었다. 여인이 아닌 자신은 그들보다 아름답지 않았고 사내이면서 그들처럼 당당하게 이곳에 서 있지를 못했다. 거기다 구멍이 난 신발에 낡은 옷차림, 먼지 묻은 앞치마를 방금까지 두르고 있던 터라 어디 얼굴에 먼지 자국이 묻어있진 않은가, 얼룩이 남아있지 않을까 두렵기까지 했다. 촛불이 밝히고 꽃들이 환영하는 길을 걸으면서도 차라리 그냥 돌아가 버릴까. 그냥 좋았던 기억은 좋은 채로 남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이런 추한 꼴로 왕자님을 만나는 것 자체가 민폐이지 않을까, 그보다 만나도 되는 것인가- 끝도 없는 자기혐오로 머리가 엉망이었다. 그래서 빠르게 걷던 걸음은 이내 점점 속도를 잃고 느려지다 멈추고 말았다.
"....어차피..."
왕자님을 만날 확률도 희박했다. 물론 자신을 기억해 줄거라던가 대단한 만남이라던가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창피했다. 지금의 자신으로는 이 성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 기적이니까. 역시.. 그냥 돌아가자. 요정에게는 정말 미안했지만 더는 나아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멀지 않은 연회장 앞의 열린 문을 두고 스가와라는 걸음을 돌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돌리려고 했다. 돌자마자 누군가와 부딪히지 않았더라면.
"아, 죄송합니다."
쿵, 단단한 가슴에 부딪힌 덕에 머리가 띵했다. 그럼에도 서둘러 몸을 빼내며 허리 숙여 사과했다. 이런 실례를 범하다니. 상대방이 화를 내어도 할 말이 없었다. 절대로 성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기에 스가와라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괜찮아요."
당황한 상대가 웃으며 스가와라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다친 곳 없으니 괜찮습니다."
그래도 다시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든 스가와라는 눈앞의 상대를 보고 놀라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뭐야, 저 이상한 탈은? 멋진 목소리만큼이나 진 녹색에 멋들어진 연미복을 완벽하게 입고 있는 남자는 그 의상과 전혀 다르게 어디서 주워왔는지 분홍색 토끼 탈을 쓰고 있었다.
"그.. 토끼..."
"아! 오늘 가면무도회라고 들어서 준비했는데 아니었다네요."
"...아..."
미친 사람.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더 뒤로 몸을 빼었다. 하지만 붙잡힌 팔 덕분에 멀리까지는 떨어질 수가 없었다.
"이거 쓰고 있으니 뭐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고, 덥고, 답답하고-"
"벗으면..."
"이왕 쓴 거, 더 버텨 보려고요. 무도회 왔어요?"
"네. 아뇨, 아뇨. 아니에요."
무심결에 대답했다 서둘러 손을 저었다. 이제 갈 거예요.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리 말하자 토끼 탈이 갸웃하며 "왜요?" 라고 물었다.
"저랑 안 어울리는 곳이라서요."
"그 쪽에게 수준이 낮아요?"
"무슨 그런..!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제가요. 제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서요."
흐음- 토끼 탈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죽어가는 목소리를 가만히 들어 주었다. 모르는 타인에게 자신의 상황까지 설명하며 청승을 떨고 싶지 않았기에 스가와라는 작별을 고하고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팔을 틀었다. 아니, 이번에도 그러려고 했다. 그의 등 뒤로 익숙한 얼굴들이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엄마, 엄마. 어때? 내 머리? 괜찮아? 나쁘지 않아?"
"엄마! 나는? 드레스 색 너무 칙칙하지 않아? 역시 붉은색이 더 섹시해보이고 낫지 않았을까?"
한껏 치장하고 멋을 부린 두 여성이 가운데에 선 중년 여성에게 매달리며 난리법석을 떨고 있었다.
"예뻐. 너희가 오늘 가장 예뻐. 왕자도 너흴 보면 눈이 멀 거다. 당연하지, 누구 딸인데."
붉은 입술을 끌어 올리며 아름답게 웃는 새어머니의 모습에 스가와라는 숨을 멈추고 몸을 가리듯 사내를 당겨 잡으며 그의 품으로 숨었다. 저도 모르게 잡은 그의 옷자락이 무슨 생명줄이라도 되는 마냥 꼭 쥐고.
"그나저나 오늘은 왕자님을 위한 무도회니 꼭 나오시겠지?"
"나오실 거야. 지금까지 사교 파티에는 참석하지 않으셨지만 성년을 맞이하는 해니까 오실 거야."
들뜬 그녀들의 목소리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스가와라는 숨을 다시 뱉는 것도 잊은 채로 버텼다. 얼마나 그렇게 사내의 그늘에 숨어있었을까 그늘을 만들어 준 일등공신인 토끼 탈이 슬쩍 돌아간다 싶더니 그가 다시 자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갔는데요." 하고.
"아.. 감사합니다."
"별로 만나기 싫은 사람들이었나 봐요?"
"조금요. 아니.. 사실은 많이요."
"아, 나도 그런 사람 있는데. 그래서 쓰고 있어요. 이거."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내며 툭툭 제 머리를 두드렸다. 정확하게는 그 분홍 토끼 탈을. 어쨌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스가와라는 그의 어색한 웃음소리에 따라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이왕 온 거 더 있다 가요."
"네?"
"아직 무도회 분위기 무르익으려면 시간 좀 남았고, 피차일반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같이 시간 좀 보내자고요."
이상한 토끼 탈을 쓴 사내와 시간을 보내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다. 스가와라는 슬쩍 돌아 성에 달린 커다란 시계탑으로 시선을 던졌다. 10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어차피, 뭐 상관없나. 방금 왕자님을 만나길 포기했던 참이었고- 성에 온 김에 대신 그 날의 기억을 추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가만히 선 것이 승낙의 의미라고 생각했는지 그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스가와라는 가만히 그 손을 바라보다 이내 결심한 듯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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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
그러니까 지금 영화를 보러 갈 예정이라..
갑자기 생각났다. 동화적인 전개와 병맛을 지향했지만 그 어느것도 성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