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스가오이] 그 정류장에서
2015. 3. 29. 22:11

-과거 날조 주의.






18살이 되던 생일, 부모님에게서 새 배구화를 선물 받았다. 매년 변하지 않는 선물에도 이와이즈미는 그 선물이 단 한 번도 질린다거나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배구는 자신에게서 더는 뗄려야 뗄 수 없는 무언가에 가까웠고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의 전부와 같았다. 그 크기와 비례하는 만큼 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되어 있었다면 참 좋겠지만 집 근처에는 마땅하게 배구 연습을 할 만한 연습장이나 공원이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주말이 되면 귀찮지만 오이카와를 불러내 버스로 세 정거장이 떨어진 공원으로 향했다. 도서관 근처에 있는 그 공원은 산책용이라기보다 농구코트와 축구 코트가 달린 체육공원으로 월요일 아침마다 있는 아이들의 라디오 체조용 그라운드가 있었다. 연습하기 딱 좋은 사이즈라 늘 아침부터 나가 그 위에서 질리지도 않게 배구 연습을 해왔다. 가끔은 마츠카와와 하나마키 혹은 후배들까지 불러 시원하게 땀을 빼고 나면 높던 하늘과 태양은 사라지고 늘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저녁이었다. 그렇게 땀을 빼고 도서관 근처의 편의점에서 하드 아이스크림을 하나 물면 자연스레 "내일 학교에서 보자."라는 인사가 나왔다. 전차를 이용하는 다른 녀석들과 헤어져 우물우물 하드를 물고 센다이 도서관 앞 버스정류장에 오면 언제나 그곳에는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언제나 단정해 보이는 사복에 크로스백을 메고 가지런히 책을 무릎에 두고 앉아 사락사락 페이지를 넘겼다. 귀에 꽂은 이어폰이 없어도 소년의 집중력은 흐트러질 줄을 몰랐다. 늦은 공원, 스쳐 지나가는 차, 밤을 울리는 계절의 벌레 소리에도 언제나 시선은 무릎 위 책이었다. 책은 매주 달랐다. 소설일 때도 있었고 시집일 때도 있었다. 문제집 일 때도 있었고 의미 없는 여행 가이드북일 때도 있었다. 그저 소년은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을 부질없이 보내는 것이 싫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말없이 무릎에 놓인 책을 한장 두장 넘기다 버스가 도착하면 뒤로 돌아간 자신의 가방을 앞으로 끌어와 챙겨 넣고선 버스를 타고 떠났다. 자신이 탈 수 있는 버스는 아니었지만 이와이즈미는 언젠가부터 운동복에 손을 찔러 넣고 소년이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걸음을 옮겨 자리를 잡고 앉는 모습을 배웅했다. 홀로 그렇게 스스로의 주말을 마무리했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자연스레 배구 연습은 미루어졌다. 그런날에는 집 앞 근처의 편의점에서 과자를 사와 늘어지게 침대에 누워 함께 사온 만화 잡지 따위를 넘겼다. 그리곤 이따금 오늘도 그 소년은 정류장에 나와 있을까, 혹은 그 소년도 이런 걸 읽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날은 배구 잡지를 사겠다는 오이카와를 따라 들어간 서점에서 소년이 읽던 소설책을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고나오기도 했으며 다른 날에는 보란 듯이 그 책을 들고 도서관 정류장 앞에 서 있기도 했었다. 물론, 소년은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진 오늘의 책을 읽느라 조금도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이와이즈미는 우습게도 스스로 자각도 없이 그 주말의 일방적인 만남을 기다렸다. 도서관 앞 정류장, 운동을 끝내고 하드를 물고 가는 길은 언제나 걸음이 빨랐다. 혹여 그 소년이 책을 덮고 일어나 버스를 타고 떠날까 자신을 재촉하곤 했다. 정류장에 소년이 없으면 자신의 버스를 두어대 정도 보냈다. 그래도 소년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 날은 어쩐지 기분이 우울했다. 대신 소년이 나타나면 입에 문 하드가 무척이나 달콤했다. 18살의 이와이즈미에게는 아직까진 그 감정이, 그 날들이 어떠한 의미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19살의 생일, 이번에도 부모님에게 배구화를 선물 받았다. 전국을 노릴 수 있는 마지막 대회 힘내라는 응원과 함께. 오이카와는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생각보다 덜 예민했지만 이와이즈미는 스스로 자신이 조금 초조하고 조바심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진학과 학교 시험을 앞두고도 주말이 되면 늘 공원에 나갔다. 신나게 땀을 빼고 배구공을 튕기고 맛있는 하드를 물고 언제나처럼 늘 변함없는 그 자리 그 정류장 그 소년을 보면 이 초조함이 가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년은 더는 그곳에 없었다. 몇 대의 버스를 더 보내고 몇 번의 주말을 더 기다려도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소년을 마주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흐르지 않은 방과 후였다. 중학교 후배인 카게야마가 진학한 학교와의 연습시합에서 후보 세터로 그 소년이 벤치에 앉아있었다. 소년의 무릎에는 늘 올라가던 책 대신 꽉 쥔 주먹이 올려져 있었다. 단정하게 차려입던 셔츠 대신 2번이라 적인 유니폼을 걸치고 있었다. 낯설었지만 이와이즈미는 괜스레 콧잔등을 밀며 몰래 작게 웃었다. 아마 아주 유치하게도 운명이라는 감상에 젖었던 것도 같았다. 2살이나 어린 후배 카게야마에게 밀린 그는 그 예전의 오이카와처럼 조금 속이 상해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보다는 더 씩씩하게 팀을 응원했다. 곧고 청아한 목소리였다.

소년의 이름을 카라스노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슬쩍 훔쳐 들었다. 스가와라 코우시, 발음이 좋았다. 울리는 소리도 좋은 것 같았다. 다가가 혹시 저를 기억하느냐고 묻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돌아올 대답이 "아니"라면 조금 상처를 받을 것만 같아 코트를 떠나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그저, 정류장이든 코트 위에서든 그를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오이카와는 그 소년을 <상쾌군>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별명으로 불렀다. 차라리 <2번군>이 더 듣기 편했다. 하지만 그것을 말리지 못했던 것은 이와이즈미 스스로도 그 별명이 그 소년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소년을 떠올리는 만큼 오이카와의 입에서 나오는 <상쾌군>이라는 이름이 늘어났다. 자신이 소년을 그리는 만큼 오이카와의 입에서 나오는 <상쾌군>이라는 이름이 늘어났다. 이와이즈미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상기하기 전에 자신의 감정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 인정이란 행위는 19살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내리기에는 무척이나 힘들고 무섭고 미지의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첫사랑의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오이카와가 추월했다.


"이와짱, 나 상쾌군이 좋아."


자신이 인정하고 바로잡기엔 이미 너무 모든 것이 늦어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자신의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소중한 친구였다. 누군가 말로 소리를 내어 이 관계를 그리 정의한다면 당장에라도 엉덩이를 차주고 싶겠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그리고 확실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와이즈미는 그 말에 "나도."라는 간단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도 첫사랑이었지만 오이카와 스스로 누군가를 "좋아."라고 뱉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모든 걸 같이 해내고 해오던 소꿉친구는 첫사랑도 같은 모양이었다. 최악이었다. 


굼뜨고 느려터진 자신과 달리 오이카와는 스스로 내린 감정의 정의만큼이나 고백도 빨랐다. 자신을 앉혀놓고 바닐라 쉐이크를 사주며 "놀라지 마. 이와짱"이라고 말을 꺼냈을 때엔 저 녀석이 무슨 소릴 해도 안 놀랄 거라 자신했지만 "나, 상쾌군이랑 사귀기로 했어!"라고 외쳤을 때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쭉 빨아 삼키던 쉐이크에 사례가 걸려 크게 기침을 했다. 목이 아파 눈물이 맺히는 건지 자신의 완벽한 실연에 눈물이 맺히는 건지 이와이즈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매일같이 아니 시간마다, 혹은 분마다 오이카와의 입에서 흐르는 스가와라 코우시라는 이름이 무척이나 싫었다. 발음도 울림도 이쁘다 생각했던 그 이름은 차곡차곡 자신의 안에서 상처가 되어 쌓여갔다. 자신은 절대로 쉬이 담을 수 없는 그 이름을 간단하게도 뱉는 오이카와를 보며 언제나 자신이 먼저였음을 떠올렸다.
그래서 모든 연습이 끝난 방과 후, 이와이즈미는 결심을 했다. 사실 이 결심은 이미 몇 번이고 해왔고 그 수만큼 몇 번이고 포기해왔던 결심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자신하며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


막 연습용 유니폼을 벗어 락커로 던지며 녀석이 돌아보았다. 왜?


"사실은-"
"..."
"사실은 나도-"


나도 스가와라 코우시가 좋아. 아니, 내가 먼저 좋아했어. 내가 먼저 발견했어.
자신이 몇 번이고 뱉고 싶었던 감춰진 고백을 던지기 위해 혀를 굴렸다. 말을 골라내기 위해 버텼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아니.. 아니다. 얼른 정리해, 집에 가자."


입을 타고 흐르는 말은 싱겁기 그지없었다. 싱거워 이와짱. 오이카와가 웃으며 정확하게 핀잔했다. 이와이즈미는 마주 웃었지만 입을 타고 흐르는 것은 쓰고 또 쓴 것이었다. 돌아가는 길, 스가와라를 잠깐 보고 가겠다며 자신을 두고 오이카와가 돌아섰다. 텅 비어버린 거리를 걸으며 이와이즈미는 집으로 가는 이 길이 무척이나 아득하고 어둑하다 느꼈다. 그 길을 얼마 걷지 못하고 땀이 가득 찬 손을 뻗어 눈가를 가렸다. 19살 소년이 감내하기엔 이 모든 것은 커다란 고통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 집중하는 소년을 불렀더라면 그 시선은 책이 아니라 자신을 향했을 것이었다. 책을 집어넣고 버스에 오르려던 소년을 불렀더라면 그 시선은 버스가 아니라 자신을 향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이와이즈미는 스가와라 코우시의 이름을 담지 못했다. 다른 것에 집중하는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버스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그저 배웅했다. 정류장에 남은 것은 늘 그렇듯이 자신 혼자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19살의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그 사실을 너무도 늦게 알았다.







-


For.새우님



오늘 연성 두개나 하느라 이제 막 뽕같은게 딸리는 느낌.

낮에 새우님과 딜했던 연성교환. 이와스가오이... 널 믿었던 만큼 네 친구도 믿었기에...는 되지 않았지만.

이와스가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