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미즈키 상자
2015. 3. 27. 00:35



나이를 먹어도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짊어지는 나이라는 숫자의 무게, 실연당한 다음 날의 아침 그리고-



"미-즈-키!!!"



아침을 깨우는 목소리. 애써 창으로 쏟아지는 빛을 무시하고 늘어지게 눈을 감고 있었지만 1층에서부터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쉬이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이 아닌지라 미즈키는 결국 눈을 올려 떴다. 슬쩍 고개를 젖혀 머리맡에 둔 시계를 보니 아직 오전 10시도 되지 않았다. 더 자고 싶은데. 늘어지는 몸을 휘적거리며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얼른 일어나!!"라는 잔소리가 뒤이어 아래층에서 울려왔다.



"일어났어!!!"



빽 소릴 지르며 서둘러 근처에 있던 머리끈으로 대충 엉망인 머리카락들을 하나로 모아 묶었다. 언제 샀는지 모를 다 늘어난 티셔츠 아래로 손을 넣어 볼록한 배를 긁적였다. 아직 잠에 빠져있는 무거운 몸을 끌고 나오자 방에 달린 전신 거울엔 28살의 애처로운 여자가 자신을 들여보고 있었다. 추하다, 추해. 스스로 그렇게 느끼면서도 생각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낡은 집의 삐걱거리는 바닥의 울림을 느끼며 미즈키는 천천히 1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주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나름대로 세련된 도쿄의 OL(오피스 레이디)였었다. 아니 그렇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해 그냥저냥한 건축 사무소에서 계약직으로 일했고 회사 동료들하고도 사이도 좋았다. 점심시간에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수다를 떨 친구가 있으니 그 정도면 아마 나쁘진 않았겠지. 그리고 사회생활과 함께 만나 사귀었던 4년 된 남자친구도 있었다. 얼굴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성격만큼은 최고라 홀로 도쿄에 상경한 자신의 외로움도 멋대로인 어리광도 받아주는 남자였다. 크진 않지만 적당한 월세의 독립생활도 좋았고 높진 않지만 연봉에 대해서도 크게 불만은 없었다. 그냥 이정도면 나쁘지 않지? 순탄하지? 싶은 생활들에 스스로 만족하며 잘 지냈는데- 사람 인생은 정말 한순간이라고 일은 갑자기 터져 나왔다. 같이 어울리던 회사 동료들 사이에서 묘한 이질감과 함께 은근한 따돌림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기류를 신경 쓰다 보니 회사 일이 제대로 될 일이 만무했고 결국 팀장에게 불려가 다음 계약 연장에 대한 논의를 들어야 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4년이나 사귄 남자친구는 상사의 소개로 선을 보게 되었다며 상대가 꽤 괜찮은 여자이니 미안하지만 헤어지자는 웃기지도 않은 소리를 했다. 윗집에 새로 이사 온 남자는 소음 공해를 내뿜으며 밤마다 자신을 괴롭혔다. 나름대로 만족하며 지냈던 생활이 그렇게 하나둘 흔들리기 시작하자 도쿄가 무서워졌다. 버티는 것이 힘들어졌다. 결국 에라이 모르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당장 짐을 싸 본가로 내려왔다. 커다란 짐 가방을 들고 대문에 선 딸을 본 부모님은 "너는 항상 그렇게 그냥저냥 사니까 그런 거야." 라며 인사 대신 쓴 잔소리를 뱉었다. 그러게, 그냥저냥 살다 보니 인생이 정말 그냥저냥이 되어버렸어. 이미 늦었지만 미즈키는 그런 후회를 하며 이 곳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이 마을은 한적하고 사는 사람들이 적어 조용하고 평화로웠지만 그만큼 사람도 없고 유흥거리도 없는 무척 심심한 곳이었다. 도쿄로 떠날 당시 절대로 이곳으론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자신이 우습게도 미즈키는 외로운 도시생활을 끝내자마자 이곳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조금 분하고 창피했지만 돌아올 곳은 이곳이 전부였다.



"아직 10시인데 벌써 깨워 왜?"
"너 너무 쉬고 논다고 게으르잖아. 할 일 없으면 가게 일 좀 돕고 그래."



앞치마를 두른 엄마의 잔소리에 미즈키는 잔뜩 인상을 구기며 화장실로 가 대충 물을 끼얹는 것으로 세수를 대신했다. 다 큰 여자애가 그게 뭐니? 지겨운 잔소리에도 쌩 무시하며 건네주는 앞치마를 받았다. 가게 일이라고 해봤자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대대로 미즈키네 집에서 해 온 작은 빵집을 돕는 것이 일이었다. 원래도 집에서 도쿄로 대학을 가는 것보다 일을 잇기를 원했지만 절대로 그것만은 싫다고 우기며 멋대로 떠났었는데 이렇게 스스로 앞치마를 두르다니.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본가로 내려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미루고 있었지만 슬슬 눈치가 쌓이는지라 하는 수 없었다. 밥 값은 해야지! 강하게 자신을 다독이며 그렇게 가게로 나섰다. 드르륵 무겁고 지친 심정으로 집에서 연결되는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서자 뜻밖에도-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남자가 인사를 해왔다. 자신과 같은 앞치마를 두르고 정갈하게 셔츠 소매를 말아 올린 은발의 사내는 눈가에 참으로 보기 좋게 점이 찍혀 있었다. 그 점으로 인해 조금 야하게 보일 수도 있을 법도 한데 그런 분위기는 요만큼도 없는 사내였다. 오히려 부드러워 보이는 이미지였다. 살짝 미소를 그리며 전하는 그 인사에 미즈키는 놀라 저도 모르게 서둘러 다시 문을 열고 집으로 도망쳤다.



"엄마!!!"
"왜?!"
"뭐야? 가게에 저 미남은?!"



저런 미남이 일하고 있었다니! 왜 이야기해주지 않은 거야? 그랬더라면 한 시간 전에 일어나서 머리를 감고 화장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미즈키는 창피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에 부끄러워 절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 28살의 세심하고 예민한 여성의 감성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엄마는 태평하게도 웃으며 "아, 스가와라군?" 이라며 부드러운 미남의 이름을 멋대로 불러왔다.



"이..이름이 스가와라 군이야?"
"그래, 스가와라 코우시군."
"저런 미남이 이 마을에 살아? 이런 구닥다리 마을에? 왜 난 몰랐지?!"
"이 마을이 어때서? 스가와라군은 1년 전에 이 마을로 이사 왔어. 와서는 일자리 없냐고 묻길래 네 아버지는 주방 전담이고 나도 주방하고 카운터 이동하기 힘들고 해서 채용했지."



그럼 저 미남이 1년이나 이 가게에서 일했단 말이야? 어째서 본가에 내려오지 않았을까. 물론 내려왔다고 해서 자신의 새로운 로맨스가 시작될 일도 없었고 1년 전에는 이미 자신에게도 빌어먹을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늦게 미남의 존재를 알게 된 자신이 후회되었다. 



"일도 잘하고 상냥하고 착해. 마을 어르신들이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일단 얼굴이 잘생겼잖아."
"그렇지? 스가와라군 친구는 더 잘생겼어."
"친구? 친구도 있어?"
"응, 있어. 훤칠하고 아주 잘생긴 친구. 둘이 같이 산다나 뭐라나."



말을 흘리며 오늘 내놓을 빵을 바구니에 담는 엄마를 도와 미즈키는 서둘러 장갑을 끼고 그것을 도왔다. "일 잘하는 사람에게 허튼 마음 먹지마." 갑자기 의욕에 불타는 자신에게 던지는 매정한 말에 미즈키는 입을 삐죽였다. 보통 저런 괜찮은 남자를 보면 "우리 딸 어때?" 라던가 "둘이 잘해봐!"라고 하는 게 어른들의 흐름 아니었던가. 딸보다 미남 아르바이트생을 보호하는 말에 미즈키는 조금 서운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조금 두근댔다. 2주 동안 지겨웠던 자신의 하루가 조금 산뜻하고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냥저냥 흘러가던 일상에 아주 달콤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같았다.



쨍쨍한 여름, 멋대로 봄이 온 기분을 만끽하며 미즈키는 조심스럽게 바구니들을 챙겨 들고 다시금 가게로 들어섰다. 낡아빠져 닦아도 닦아도 깨끗해질 리 없는 가게 유리창을 열심히 문지르던 그가 웃으며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왔다. "미즈키 아야노라고 해요." 대뜸 던진 자신의 소개에도 그는 당황하지 않으며 "스가와라 코우시. 편하게 스가와라라고 불러주세요." 라며 받아냈다. 이름도 참 느낌있는 사람이었다.



"2주 전에 막 본가에 내려왔는데 짐도 정리하고 이것저것 하느라 가게에는 나올 시간이 없었어요."
"아, 사장님에게 말씀 들었어요."
"앞으로는 자.주.자.주! 나올 거니까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싱그럽게 웃으며 사내가 대답했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돌려 창을 닦아내는 그를 보며 미즈키는 문득 저 얼굴을 자신이 어디서 봤던 기분이 들었다. 잘생겨서 어디 잡지 독자모델 같은데 실렸었나? 도쿄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갔었나? 분명 자신과 같은 대학이라던가 이 마을에서 마주칠 리는 없었으니 가능성을 생각하자면 그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마땅하게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빤히 보이는 작업 멘트 같았지만 미즈키는 조금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런데 스가와라군."
"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어요?"
"네? 아뇨?"



놀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그런데 왜 이렇게 낯이 익을까. 미즈키는 저도 모르게 나오는 혼잣말을 곱씹으며 서둘러 빵을 진열했다. 그 덕에 자신의 중얼거림으로 스가와라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는 것은 조금도 눈치 재지 못한 채로.


스가와라가 마을 어르신들에게 예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이었는지 빵집을 찾아오는 손님마다 그와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곳에서 자라 오랜만에 온 자신보다 매일 매일 이 가게를 지키고 있던 그가 더 마을 사람들에게 반가운 모양이었다. 버터 냄새가 가득한 곳을 제집마냥 휘저으며 손님을 상대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잘 어울려 미즈키는 그저 카운터에 앉아 그의 모습을 구경했다. 그걸로도 충분히 가게에 나와 있는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학교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린 여고생들에게 붙잡힌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즈키는 문득 오전에 엄마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스가와라군."
"네?"
"미남 친구 있다면서요?"
"아.. 네."
"우리 엄마가 엄청 칭찬하던데. 잘생기고 훤칠하다고."
"아.. 조금요."



어쩐지 그가 쑥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적당한 대답인 듯 보이면서도 어쩐지 듣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그의 말에 미즈키는 저도 모르게 어색하게 웃었다.



"그 친구는 이 마을에서 뭐해요?"
"아... 공방에서 일을 돕고 있어요."
"공방? 혹시 다케무라 할아버지 공방이요?"



공방이라는 말에 퍼뜩 떠오르는 곳을 입에 담으며 미즈키가 물었다. 다케무라 할아버지의 공방은 도자기를 취급하는 곳으로 마을의 자랑이었다. 장인인 그를 취재하기 위해 방송국에서 오기도 했었고 제자로 삼아달라며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워낙 성격이 고집불통인 노인이라 방송 출연도 안 해왔고 심지어 제자라고 곁에 두는 이도 없었다. 위치조차도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 초입에 덜렁 놓여 있었으니까 말 다했지. 그런데 그 공방에서 일한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스가와라의 말에 미즈키는 믿을 수가 없어 눈만 깜박였다.



"우연히 알아서요. 친구가 배워보고 싶다고 멋대로 찾아가서 졸랐는데-"
"안 받아줬죠?"
"네. 처음에는요. 근데.. 조금 자랑처럼 들리겠지만 제 친구가 좀... 말도 잘하고 이것저것 보고 자란 게 있어서 미적 감각도 있는 편이라-"



스가와라는 어쩐지 부끄러운 듯 뺨을 붉혔다.



"그래서 매일 매일 찾아가 말 상대도 해드리고 멋대로 눈동냥으로 보고 배우고 그랬는데.. 뭐가 마음에 드셨는지 받아주셔서. 지금은 거기서 일하면서 배우고 있어요."
"와.. 대단하다. 친구분 근성이 장난 아니신가 봐요."
"원래는 없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변했나 봐요."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제 친구를 칭찬했다. 어쩐지 아까부터 그 친구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보이는 스가와라의 반응에서 미즈키는 살짝 이질적임을 느꼈지만 애써 그것을 눈치채려고 들지는 않았다. 어쨌든 눈앞의 미남은 보기 좋았고, 그가 전하는 이야기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냥저냥 마인드로 살아온 자신과 달리 이 작은 마을에서 열심히 지내고 있는 두 사람이 부럽기까지 했다. 자신에게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은 열정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누군가를 마주하니 살짝 샘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다음 주부터 저 일찍 와서 사장님에게 빵 굽는 법도 배우기로 했어요." 자랑스레 말하는 그의 이야기에 미즈키는 쓰게 웃었다.



저녁 7시, 해가 떨어질 무렵 가게의 셔터를 내렸다. 종일 안에서 빵을 만들던 엄마는 뒤늦게 나와 퇴근하는 그에게 이것저것 남은 빵을 챙겨 주었다. 매일매일 받아가면 질릴 법도 한데 그는 "친구가 빵을 좋아해요."라고 웃으며 감사하다는 진심이 담긴 인사를 던지고는 가게를 나섰다.


"참 싹싹하고 착해, 그렇지?"
"응. 그렇더라. 다음 주부터 제빵 배운다던데?"
"더 일찍 나와서 배우기로 했어. 뭐라도 배우고 싶다나?"
"진짜 열심이네. 친구는 다케무라 할아버지를 함락시켰다던데."
"젊은이들이 열정이 가득해서 참 보기 좋아."
"내 열정은 어디 갔지?"



쓰게 히죽이며 묻는 미즈키의 말에 엄마는 "네 열정, 창고에서 찾아 방에 올려놨다." 라며 모를 소리를 던졌다.



"왜, 너 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배구 선수 있잖아. 창고 정리하다가 니가 모은 자료 찾았다. 그거 버릴 것인지 아닌지 가서 정리나 해."



아, 맞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흔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아이돌만큼 좋아했던 배구 선수가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이름이 쉽게 잊히지 않을 만큼 빠져서 그의 기사를 스크랩하고 용돈을 모아 그의 경기를 보러 가곤 했었다. 도쿄로 대학을 진학한 이유의 반도 조금은 그가 포함되어 있었다. 도쿄에서 활동하는 그를 더 자주 보고 싶어서. 지금 생각하니 참 그리운 이름이었다. 그가 은퇴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도 그를 응원하고 있을 텐데. 미즈키는 앞치마를 풀러 대충 걸어놓으며 자신이 온 열정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을 추억했다. 방으로 올라가자 엄마가 찾아 놓았다던 박스에는 그동안 빛을 보지 못한 티를 내려는지 잔뜩 먼지가 묻어 엉망이었다. 슬쩍 손가락 끝을 세워 열자 안에는 경기 녹화한 테이프나 스포츠 잡지를 사고 받은 엽서 같은 것들이 한가득 놓여 있었다. 푸른 유니폼을 입고 코트에 서 있는 잘생긴 사내를 오랜만에 마주하며 미즈키는 슬쩍 엄지손가락으로 그 얼굴을 쓸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시절엔 자신이 이 오이카와 토오루랑 결혼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얼마나 순수했던가. 자신은. 참 유치하고 어이없는 망상들이었다. 그래서- 그가 유명 모델과 약혼을 발표했을 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스캔들 하나 없던 그의 갑작스러운 발표에 자신을 포함한 모든 여성팬들이 슬픔을 토해냈었다. 차라리, 그렇게 약혼을 하고 결혼을 했더라면 아직도 그는 코트 위에 서 있을 텐데. 그랬더라면 아직도 그를 응원하고 있었을 텐데. 하지만 슬프게도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미즈키는 한동안 잊고 있던 일을 떠올리며 저도모르게 폭 한숨을 내쉬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약혼 발표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남자와 입을 맞추고 있는 파파라치가 주간지에 실려 난리가 났었다. 그 사진뿐만 아니라 둘이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이나 오이카와 토오루가 살고 있다는 맨션으로 들어가 다음날 함께 나오는 모습까지- 변명이 들어 먹히지 않는 사진들이 잔뜩 공개되었다. 약혼 발표를 했던 모델은 자신은 이용당했다며 눈물의 기자회견을 했고 한동안 모든 뉴스와 신문의 메인 소식은 모두 오이카와 토오루가 가져갔다. 당시 막 대학 라이프에 적응하며 도쿄 생활에 흠뻑 취해있던 자신은 그 모든 것이 충격이었다. 그를 향한 비난과 관심은 자신에게도 똑같이 닿는 것 같았고 마스카라가 다 번질 정도로 카메라 앞에서 엉엉 우는 약혼녀를 보며 차마 오이카와 토오루를 변호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사건이 터지고 일주일 뒤 오이카와 토오루는 커밍아웃과 함께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나이 고작 26살이었고 당시 일본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활약을 하던 선수로서 무척이나 빠르고 성급한 결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미래보다 그가 표현하길 "자신이 평생 지켜주고 싶은 남자"를 선택했고 그 이후 정말로 조금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완벽하게만 보였던 슈퍼스타의 커밍아웃과 은퇴 소식으로 일본 전역이 흔들렸는데 은퇴 회견 이후로는 어떻게 지낸다더라 하는 소식도 조금의 사진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항간에는 외국으로 떠났다더라 하는 소문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미즈키는 아마 자신의 첫사랑에 가까웠을 그를 추억하며 당시 파파라치가 찍혔던 주간지를 들어 올렸다. 그 시절 기록적인 판매 부수를 찍어 옥션에까지 올라왔던 물건이었다. 아침 일찍 소식을 듣고 한겨울에 맨발로 편의점으로 뛰어가 사 왔던 그 잡지였다. 그때에는 떨리는 손으로 믿을 수 없다고 연신 중얼거리며 읽었는데 지금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그 시절 누군가를 향한 열정은 이미 하얗게 사라져 버렸고 그때의 감정도 잊혀진지 오래였다. 벌렁 바닥에 드러누워 얇은 종이들을 팔락팔락 넘기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오이카와 토오루 의문의 남성과 심야의 밀애>라는 유치한 타이틀이 보였다. 흑백으로 찍혀진 그 사진을 들여보던 미즈키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손에 잡혀 있는 <의문의 남성>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스가와라군?!"



흑백인 데다 오래된 잡지라 좀 변색이 되었지만 어렵지 않게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스가와라 코우시, 조금 전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던 그 남자가 사진 속에서 오이카와의 환한 미소를 받으며 함께 웃고 있었다. 어쩐지! 낯이 익는다 했지! 아니 그보다 왜 이 얼굴을 잊고 있었을까! 보통 주간지는 일반인의 신상을 위해 늘 모자이크를 했었는데 이때만큼은 달랐다. 워낙 큰 특종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오이카와 토오루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는지 일반인인 상대의 얼굴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잡지에 실었고 덕분에 그의 신상이 공개되면서 오이카와 토오루는 순순히 커밍아웃하고 은퇴를 한 것이었다. TV에서도 분명 이 남자의 컬러 사진을 보며 "저 정도니까 우리 토오루 오빠를..!" 하고 부들부들했었는데... 왜 잊었을까. 이 얼굴을 어떻게 바로 알아보지 못했을까!



"잠깐... 혹시 그럼.."



엄마가 말했다던 그 잘생긴 친구. 훤칠하다는 친구가 오이카와 토오루일까? 미즈키는 자신의 심장이 내는 요란한 소리가 이 집을 무너트릴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아까 스가와라 코우시와 대화하면서 그가 친구의 이야기를 하며 웃던 미소 하며 붉히던 얼굴에서 느낀 이질감, 그건 그가 분명하게 그 이야기에 담은 애정 때문이었다. 그건 친구를 대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미즈키 자신도 담아 본 감정이었다. 누군가를 향한 애정. 2주 전까지 자신도 4년 동안 망할 남자친구에게 품었던 그 감정이었다. 정말로 이 사진 속 남자가 스가와라 코우시라면, 그가 애정을 담아 말하던 친구가 오이카와 토오루라면 두 사람은 아직도 함께하고 있다는 이야기었다. 분명 오이카와 토오루가 은퇴를 발표할 당시 미즈키는 코트와 팬이 아닌 사랑을 택하고 사라지는 그의 행동에 지독한 배신감과 함께 눈물을 터트렸음에도 아직도 두 사람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인지 모를 사실에 심장이 떨렸다. 이거, 진짜 대단하지 않아?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던 두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 어마어마한 특종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다음날, 미즈키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가게로 내려갔다. 한 시간이나 먼저 일어나 어제와 달리 말끔하게 준비를 하고 내려가자 조금 놀란 얼굴의 스가와라 코우시가 웃으며 반겼다. "왜요? 여자의 변신이 놀라워요?" 날카롭게 하지만 나쁜 뜻은 담지 않고 묻자 그가 "아뇨!"라며 당황해 손사래를 쳤다. 과거에 자신에게 나름의 상처를 주었던 남자를 이런 식으로 소심한 복수로 괴롭히곤 미즈키는 평범하게 가게 오픈을 도왔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슬쩍슬쩍 얼굴을 확인했다. 자기 전 인터넷으로 찾아본 당시의 공개 된 그의 사진과 비교하면 조금 나이가 느껴지긴 했으나 머리색도 얼굴의 점도 옅은 인상도 가지고 있는 분위기도 그대로였다. 같이 사는 친구가 오이카와 토오루 맞아요? 둘이 아직도 사귀어요? 1년 전에 이 마을에 오기 전까지는 뭘 했어요? 미즈키는 묻고 싶은 것이 참 많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실례라는 것 정도는 아는 어른이 되었기에 입에 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시선을 스가와라는 무시하지 못했는지 "혹시 뭐 묻고 싶은 거 있어요?" 라고 물어왔으나 입을 타고 흐르는 말은 "빵이 왜 좋아요?" 라는 허튼 질문이었다.



"같이 사는 친구가 빵을 좋아해요."
"...아."
"우유 크림 빵. 그래서 그걸 사다 주려고 이 빵집에 자주 들렸거든요. 그러다 그 친구가 공방에 들어가게 되고, 저도 뭔가 보탬이 되고 싶어서 사장님에게 혹시 일자리 있냐고 물어봤어요."
"공고도 안 붙였는데?"
"네. 조금 떨렸는데.. 그래도 사장님이 웃으면서 받아주셔서 다행이었죠."



엄청 용기 냈어요. 이런 거 처음이라.. 그가 살짝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 용기를 그 오이카와 토오루 때문에 낸 거네? 아주 작은 용기였지만 미즈키는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따뜻해졌다. 솔솔 풍겨오는 밀가루 굽는 냄새와 버터 냄새를 맡으며 그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미즈키는 어렵지 않게 그 옛날 노래를 함께 흥얼거릴 수 있었다. 언젠가 어느 인터뷰에서 오이카와 토오루가 가장 좋아한다는 곡이었으니까. "저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해요." 그가 노랠 멈추며 말했다. "왜요? 어디 가요?" 순수한 질문에 그가 활짝 웃었다.



"네, 친구랑 같이 오후에 공방에 가기로 했거든요. 할아버지께서 절 한번 만나고 싶어 하신다길래."
"아... 다케무라 할아버지요?"
"네. 그래서 오늘은 오전만 도와드릴 수 있어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이젠 저도 있는 걸요! 아 그렇다고 스가와라군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오해하지는 마요."



손사래를 치며 서둘러 덧붙이자 그가 오해하지 않는다며 조심스레 웃어 보였다. 참 잘 웃는 남자였다. 그 미소가 조금의 거짓도 담겨있지 않아서 미즈키는 어렵지 않게 그가 지금 얼마나 편안한지 행복한지를 알 수 있었다. 참 이상했다. 도쿄에 있을 때는 자신의 감정과 생활에만 집중하느라 남의 감정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서야 이런 게 눈에 다 들어오다니. 조금 자신이 제대로 된 어른과 같이 느껴졌다.
아침 일찍부터 조금씩 밀려드는 손님은 오후가 되니 조금 줄어들었다. 그리 큰 빵집도 아닌데 이렇게 원래 장사가 잘 되었나 싶을 정도로 바빴다가 갑자기 한가해지자 저도 모르게 절로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카운터에 늘어지는 자신을 돌아보며 "조금 자랑스럽죠? 부모님의 빵이 이렇게 사랑받는 걸 보면?" 하고 스가와라 코우시가 물어왔다. "네." 미즈키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저는 부모님을.. 그러니까-"



그가 이제 퇴근하려는지 앞치마를 푸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뵙지 못한지 조금 오래 지나서요. 그래서- 미즈키상하고 사장님 부부를 보면 조금 부러워요."



아, 이번엔 조금 슬프게 웃었다. 왜요? 누구나 할 수 있을 만한 질문을 미즈키는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이미 스스로 자신은 우연이지만 그의 사정을 알았고 이유도 알았으니까. 그를 곤란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거나 혹은 거짓말을 하거나 억지로 웃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고작 두 번 본 사람에게 이런 배려심을 느낄 정도로 자신은 대단한 이해심을 가진 여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예전 자신이 온 마음을 다해 좋아했던 상대가 지키고 싶다며 선택한 남자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싶었다. 무슨 자신이 엄청난 판도라의 상자가 된 기분을 느끼며 미즈키는 "에이 부러워하지 말아요. 우리 엄마는 나보다 스가와라군을 더 좋아하는데 뭘." 하고 장난스레 농담으로 받아쳤다. 그런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 끝나기가 무섭게 드륵- 하고 가게 문이 열렸다. 덜컹거리는 유리창의 흔들림과 함께 장신의 사내가 문턱을 건너며 머리를 숙여 들어왔다. 남색 두건을 두르고 어두운 민트색의 올인원 작업복을 입은 사내의 얼굴에 미즈키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끝났어?"
"응. 지금 막."
"그래, 그럼 가자."



오이카와 토오루.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자신이 코트 밖에서 그렇게 목 놓아 이름을 부르던 남자가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팬들을 향해 웃어주던 그 미소를 아니 정확하게는 팬인 자신도 받아보지 못했던 그 미소를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그대로 내보이며.



"그럼 미즈키상, 가볼게요."



네, 잘 가요. 좋은 데이트 해요. 스가와라의 인사에 미즈키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뱉지 못하고 멍하니 오이카와 토오루에게만 시선을 던졌다. 가볍게 스가와라의 어깨를 익숙하게 감싸며 가게를 나서던 그가 시선을 느꼈는지 홱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슬쩍 웃으며 한쪽 눈을 감았다. 동시에 천천히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입가에 가져가며 작은 소리를 내었다.



"쉿."



비밀을 지켜달라는 그의 말에 미즈키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네 그럼요. 당연하죠. 그런 의미를 가득가득 담아서. 닫히는 문 사이로 다정히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미즈키는 꽉 주먹을 쥐었다. 그리곤 머릿속의 판도라 상자를 지워버렸다. 그들은 질투도, 병도, 증오도 아니었다. 열어서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 담아 감춰야 하는 것은 분명히 그런 해악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 그럼 미즈키 상자라고 이름을 붙이자. 그렇게 결심하며 미즈키는 자신의 머릿속 상자를 단단히 잠갔다. 어쩐지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던 이 거리가 조금은 아주 조금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냥저냥 했던 자신의 날들이 조금 특별하게 변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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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과거의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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