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슬픔의 시간이 끝나고 찾아온 일상에는 부자연스러운 부산스러움만이 가득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집으로 도착하는 물건들을 이리저리 살피는 부모님의 틈에서 오이카와는 심드렁한 얼굴로 심부름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대부분 이걸 창고로 옮겨, 이건 버려도 괜찮아와 같은 아주 의미 없는 일뿐이었다.
"남의 물건인데 이렇게 멋대로 버려도 되는 거야?"
"뭐, 이제 주인이 없으니까."
낡은 냄새가 폴폴 흘러나오는 책더미를 품에 안으며 던진 오이카와의 질문에 어머니는 너무도 간단하게 대답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이 짐들은 한 달 전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의 물건들이었다. 세월을 고스란히 담아낸 물건들은 하나같이 오래되고 낡아 창고에 두어도 쓸모가 없을 정도라 대부분은 모두 <버려도 괜찮아>라는 말을 듣고 있었다. 노끈으로 묶인 책더미를 들고 오이카와는 질질 슬리퍼를 끌어 집 앞의 담벼락에 주르륵 내려놓았다. 차곡차곡 줄을 맞춰 내려놓은 짐들은 대부분은 오래되어 보이는 책 가지들과 낡은 옷들이었다. 한쪽에는 이가 나간 컵이나 빛이 바랜 그릇들도 놓여 있었다. 이렇게 함부로 버려도 되는 것일까 싶었지만 막상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쓰지 않을 물건이었다. 그리고 이제 주인도 없었다. 물건을 버리는 데에 드는 용기를 아낌없이 쏟아 부으며 오이카와는 툭툭 손을 털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섰다.
"네 할아버지는 혼자 사시면서 뭐 이렇게 짐이 많으셨다니?"
"글쎄, 시골집이 워낙 컸잖아."
어린 시절 잠깐 방문했던 그 집을 떠올리며 오이카와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렸을 때는 방학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그 집으로 달려가 할머니가 잘라주는 수박을 베어 물고 할아버지와 함께 정원에 꽃을 심었던 날들이 있었다. 가끔은 할아버지가 태워주는 자전거의 뒷자리를 차지하곤 멀리 다른 동네까지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그 큰 집은 크기와 달리 언제나 조용하고 공허해서 오이카와는 갈 때마다 일부로 더 큰 소리로 조부모님을 찾곤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상하게도 쓸쓸함이 늘 감돌던 곳이었다.
"후, 너무 많아서 못하겠다. 있다가 네 아빠 돌아오면 다시 정리하자. 점심 준비 할 테니까 한가하면 그냥 쓸만한 것만 분류 좀 해놓아 줘."
탁탁 앞치마를 털며 사진 앨범을 정리하던 어머니가 결국 기브업 선언을 했다. 나 있다가 친구들이랑 영화 보러 가기로 했는데? 잔뜩 불만을 품은 목소리를 내자 "그전에는 끝내줄게!"라는 믿을 수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과연 정말 끝낼 수는 있는 걸까. 털썩 현관의 마루에 앉아 오이카와는 다시금 분류작업에 몰두했다. 종이박스 나무박스 뒤섞여 엉망으로 놓인 짐들을 하나하나 분류하고 옮기며 주말 아침 노동의 땀을 맛보았다. 방금까지 멋대로 버려도 괜찮으냐는 자신의 질문은 사라지고 얼른 이 모든 것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충동만이 일었다. 얼마나 그렇게 거칠게 물건들을 정리했을까- 잠깐 숨 좀 돌릴 겸 손을 멈춘 오이카와의 눈으로 어머니가 정리하다가 만 앨범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졸업 앨범들과 그저 그런 사진 앨범들이었다.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잠시 이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 냉큼 상자 속에서 그것들을 휘적휘적 넘겨 보았다. 졸업앨범은 몇 장을 넘겨도 할아버지가 몇 반인지 알 수가 없어서 모르는 흑백의 얼굴들만 한참을 보아야했다. 휘릭휘릭 넘기다 금세 포기한 오이카와는 그 뒤에 있던 사진 앨범을 열었다. 노랗게 빛이 바랜 어린 시절부터 소년 그리고 청년의 시절까지 할아버지의 사진이 고스란히 달라붙어 있었다.
-"너는 네 할아버지를 똑 닮았어."
어릴 때부터 할머니도 아버지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실제로 현재의 자신과 비슷한 소년 시절의 할아버지 얼굴은 저와 닮다 못해 똑같은 수준이었다. 마치 자신이 모르는 자신의 옛 사진을 발견한 것처럼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군데군데 비워진 사진 앨범을 뒤적이며 이질적인 기분을 맛보던 오이카와는 앨범 가장 아래 놓인 커다란 틴 케이스를 발견했다. 낡아서 녹이 슨 그 상자를 들어 흔들자 무언가가 들어있는지 바스락바스락 흔들리는 소리가 울렸다. 꽉 잠긴 그 상자의 틈에 억지로 손톱을 넣어 열었다. 텅-하고 공기가 뚫리는 소리와 함께 겨우 뚜껑이 분리되었다. 마치 감추고 싶은 무언가를 깊게 감춰놓은 것처럼 닫혀있던 상자 안에는 엄청난 양의 편지 봉투들과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색이 다 날아간 사진 속에는 하얀 셔츠를 입은 소년 하나가 풀밭에서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누구지?"
할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오이카와가 아는 얼굴도 아니었다. 곧 바스러질 것만 같은 사진 속 소년을 들여보던 오이카와는 조심스럽게 봉투 하나를 열어 내용물을 끄집어 내렸다. 낡은 종이냄새를 풍기는 원고지 위에 유려하게 적혀 내려간 편지가 손 위에서 조심스레 펼쳐졌다.
[전하지 못하는 편지를 적는 것도 벌써 몇 번째인지 잘 모르겠어. 얼마 전에 네 약혼 이야기를 들었어. 건너로 그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로 우리가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다. 적어도 너에게 직접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걸까? 나는? 너에게 그렇게 잔인한 짓을 시키고 싶었던 걸까?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어. 그저 네가 그 여자와 행복하길 바랄 뿐이야.
그날, 그렇게 비가 오던 날. 우리 집 앞에 찾아와 울던 너를 안아주지도 못하고 차에 태워 보냈던 나를 혐오해. 멀리멀리 도망쳐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던 네 손을 잡아주지 못했던 나를 증오해. 하지만 그 마음도 지금의 이 마음도 나는 결코 너에게 한마디도 전하지 못하겠지. 그래, 네 말대로 나는 이다지도 비겁한 사람이야. 스가와라. 스가와라. 내가 더 이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를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곱디고운 여자의 손을 잡고 떠나는 너의 등을 보며 네 이름을 삼켜내도 부디 나를 용서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그저 너의 행복을 바랄 뿐이야.]
담담한 필체와는 달리 애틋한 감정을 품은 그 편지를 읽으며 오이카와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탕탕탕 주방에서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오이카와는 다시금 편지로 눈을 돌리며 그 아래에 내려놓았던 상자 속 사진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편지봉투에 적힌 받는 사람의 이름을 보았다. 그와 같은 이름이 이 상자 속에 넘쳐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의 어마어마한 비밀을 몰래 본 것만 같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윙윙 돌아가는 에어컨 소리를 들으며 오이카와는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그 상자를 챙겨 들고 서둘러 2층의 제 방으로 뛰어 올라섰다. "얘! 정리는?!" 주방에서 터져 나온 어머니의 잔소리도 나 몰라라 하며.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아 잠그고 오이카와는 상자를 탈탈 털어 봉투들을 쏟아냈다. 보내지 못했던 편지가 얼마나 많은지 팔랑팔랑 러그 위로 떨어져 흐트러졌다. 오이카와는 멋대로 하나를 집어 다시 펼쳐 들었다. 여전히 담담하고 담백한 글자들이 원고지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울며 찾아와 너를 놓아주라는 어머님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어. 너희 어머니는 언제부터 우리의 관계를 알고 있었을까. 장성한 사내 둘이서 이게 무슨 짓이냐며 주먹으로 나를 치시는데 그 손에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이 가득 담긴 질책이라 나는 차마 피하지 못했다. 세상의 눈이 얼마나 무서운데 이리 사느냐는 그 말에 나에 대한 애정도 엿보여서 피할 수 없었어. 제발 너를 놓아주고 나를 놓으라는 그녀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인 나를 용서해 줘. 헤어지자는 내 말에 땅으로 내려앉는 너의 무릎을 털어주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 줘. 돌아서는 내 등에 대고 목이 터져라 부르던 내 이름에 대답하지 못한 나를 용서해 줘. 그 울음 가득한 절규를 달래주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 줘. 이 말을 꼭 하고 싶어서 이렇게 편지를 쓴다. 나는 겁쟁이라 네가 불행해질까 너무도 겁이 났어. 내가 너를 불행하게 만들고 손가락질 받게 하는 것이 너무도 겁이 났어. 그러니 이런 못난 나를 네가 이해해줘.]
[집안의 난리로 결국 오늘 혼례 이야기가 오가는 아가씨를 만나러 찻집에 들렀어. 쑥스러운 얼굴로 나를 가만히 기다리는 그 여자의 얼굴을 보니 그 언젠가 네 얼굴이 떠오르더라. 우리가 살던 그 동네에 시냇물이 흐르던 풀숲을 기억해? 너는 항상 그 물에 다리를 담그고 나를 기다렸지. 멀리서 내가 풀을 밟고 오는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모르는 척 푹 고개를 숙이고선. 그 부끄러운 너의 모습을 난 참 좋아했어. 스가와라-하고 네 이름을 부르면 마치 꽃과 같이 웃으며 나를 올려보았던 너를 난 참 좋아했어.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그런 너를 닮았더라. 그 여자는. 네가 내 어두컴컴한 세계에 홀로 펴 있던 꽃과 같다면 그녀는 완벽한 꽃밭과 같은 사람이야. 사랑스럽고 착하고 다정하지. 그런 여자를 앞에 두고 나는 너를 떠올리고 너를 상상하고 너를 그려. 이 죄악은 언제 갚을 수 있을까. 나는 그녀와 결혼을 할까 해. 이미 저지른 죄를 갚기에는 늦었으니 나는 완벽하게 죄인이 되기로 결심했어.]
[너에게 아들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너를 닮았을까? 부디 너를 닮았으면 좋겠는데. 내 결혼 생활은 아주 순조로워. 우리가 살았던 그 동네와 비슷한 곳에 집을 지었어. 그녀의 부모님의 아시는 분 도움으로 아주 그럴듯하게. 빛이 바로 들어오는 곳이라 정원에 꽃을 심기가 좋아. 그녀가 자신이 관리하겠다며 나섰지만 멋대로 내가 그 밭에 수국을 심었어. 우리가 17살이 되던 해에 비가 내리던 그 수국의 거리에서 처음으로 입을 맞췄던 순간이 나에게는 어제와도 같이 선명해. 너에게 꽃을 닮았다고 했던 말을 기억해? 너는 그 여름의 수국을 닮았어. 해가 들어차고 비가 내리고 계절이 바뀌면 이 밭에 네가 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임신했다고 알려왔다. 볼을 붉히며 기쁜 소식이라 일러주는데 나는 한참을 미안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어. 그녀를 안으면서 너를 떠올렸으니 저 배에 들은 것은 나의 이 간사함과 이기심이겠지. 잠든 그녀를 옆에 두고 이 편지를 쓰면서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어. 너를 스스로 포기한 나에게 내려지는 벌이라 생각하며 버티고 있어. 이 아이를 내가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태어나는 이 생명을 내가 사랑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우연히 아주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버스에서 너를 보았어. 내가 탈 버스가 아니었지만, 만약 같은 버스였다고 하더라도 나는 숨을 쉬는 것도 잊어 버스에 오르지는 않았을 거야. 너는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정장을 입고 네 아들로 보이는 소년의 손을 잡고 있었어. 멀리서 보아도 네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 네 손을 잡고 이야기를 하고 웃는 그 아이가 나는 너무도 부러웠다. 너의 피를 이어받고 네 이름을 이어받고 자랄 그 아이가 너무도 부러웠어. 부모와 아이라는 관계는 어떠한 일로도 끊어지지 않을 테니 차라리 너의 아이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하 우스운 소리지? 떠난 버스를 바라보며 급히 행선지를 적어 내린 글자들을 확인했어. 내가 사는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네가 살고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뛴다.]
[다신 편지를 쓰지 않겠다 선언해놓고 펜을 든다. 꿈에 네가 나왔어. 웃고 울고 울다 웃는 너를 보니 걱정이 되어서 이 새벽- 잠이 찾아오지 않는다. 혹여 네게 무슨 일이 있을까 두렵다.]
[길을 잃은 척 네가 사는 동네를 걸었어. 혹여 우연이라도 너를 마주칠까 겁을 먹어 걸음걸이가 아주 부자연스러웠지. 예전에 항상 길을 잃는 것은 네 몫이었는데 이제 내가 그러는 척 걷고 있다니 참 우스워. 기억나? 별이 들이찬 밤하늘 아래서 네가 나를 찾아왔던 날. 길을 잃었다며 잔뜩 움츠린 어깨로 거짓을 고하던 날. 붉어진 얼굴이 그 거짓을 확증시키고 있어서 나는 몰래 웃었어. 이 밤에 내가 보고 싶어 한달음에 여기까지 왔을 네가 사랑스러워서 나는 몰래 웃었어. 그때의 너처럼 조금 용기를 내어 너에게 찾아가고 싶다. 길을 잃었다고 거짓을 고하고 싶다. 너는 아마 그때의 나처럼 마주 안아주지는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네 얼굴을 마주하고 싶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 날의 밤처럼 별이 수놓아진 저녁에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고 현관에서 목적을 잃은 거짓말을 했다. 길을 잃었어-라고. 나를 기다린 가족에게 말이야.]
[네 아내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 가서 너의 그 등을 위로하고 쓸어주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지.]
[정원에 꽃이 피었다. 죽지도 않고 이번에도 수국이 흐트러지게 피었어. 비가 내리는 날이면 물방울을 머금고 흔들리는 게 마치 너와 같아서 나는 몇 시간이고 창가에 붙어 앉아 너를 떠올려. 내 손은 이제 더뎌지고 내 발걸음은 이제 너의 거리까지 찾아가는 데 오래 걸리지만 산책을 핑계로 멀리멀리 나갔다 오곤 해. 대신 이제는 내 아내의 손을 잡고 걸어. 얼마 전에 그녀와 크게 싸웠어. 울면서 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고 토해내는데 그 작은 몸을 보니 눈물이 나왔어. 이 끔찍하게 길었던 세월 동안 그녀는 내 거짓된 말과 거짓된 마음을 다 알고도 곁에 있어 주었는데 여전히 나는 내 자리를 찾지 못하고 유령처럼 공기를 떠돌고 있다니. 어리석지? 그래. 그래서 이제 이 보내지 못하는 이 편지는 그만두려고 해.]
[가출했다던 너를 찾아 오늘 이 마을의 언덕과 산과 풀 숲을 모두 찾아 헤맸어. 너희 어머님이 오셔서 무사히 널 찾아달라 부탁하는데 머리가 하얗게 비어가는 느낌이더라. 혹여 네가 어딘가에서 끔찍하게 눈을 감고 있다던가 흔적도 없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아스라이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서 너무도 무서웠어. 그렇게 너를 찾아 헤매고 또 헤매서 우리가 자주 숨어들었던 산속 버려진 신사의 계단 앞에서 널 발견했을 때 내가 얼마나 환희했는지 넌 모를거야. 덩굴이 감겨들어 엉망인 그 계단에서 잠든 네 이마에 입을 맞추고 돌아서며 너희 부모님께 네 위치를 알려드렸어. 고맙다고 내 손을 잡는 네 어머님을 보내고 나서 나는 참 많이도 울었다. 사라지고 싶을 정도로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내가 오길 기다리며 거기 있었을 너를 배신해서 미안해. 하지만 스가와라, 나는 아직 너무도 어리고 세상을 모르고 가진 것이 없어 부족하다. 걱정스러워 하는 내 부모님의 눈을 속이며 내 삶을 벗어나 네 손을 잡고 도망가기엔 내가 아직 너무 어리다. 너는 그 어두컴컴한 숲에서 나를 기다리며 잠이 들 정도로 용감한 아이인데 나는 이다지도 어리다. 깨우면 너가 또 왈칵 울까 무서워 너만 두고 온 나는 너무도 어리다. 이런 나에게 더는 미련 갖지 말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아니, 행복해야 해. 슬프고 아프고 불행한 것은 모두 내 몫이야. 스가와라. 너를 배신한 내가 다 안고 갈 테니 너는 내 몫까지 행복만 알아야 해.]
[내 세상에는 오로지 너와 같은 푸르른 색만 가득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 세상이 무슨 색인지 알 수가 없다. 결혼을 앞두고 혼란스러운 나의 마음 때문일까? 아니면 너와 끝내지 못한 이 감정의 미련 때문일까. 회색의 세상 속에서 가끔 너를 떠올릴 때만 밝게 빛나는 듯이 보여와. 꿈에서도 그리고 깨어나서도 나는 이렇게 아직도 너를 찾곤 해. 사람이 참 이토록 미련할 수도 있구나.]
[먼발치에서 네가 그녀의 손을 잡고 다소곳한 얼굴로 혼례를 올리는 것을 훔쳐보며 나는 몇 번이고 나의 발로 땅을 짓이겼어. 그래, 아주 우스운 분풀이지. 아주 아름다운 미인이더라. 분명 나와 달리 너를 행복하게 해주겠지. 미안. 네 행복을 함께 해주지 못해서.]
[편지 쓰는 것을 그만두겠다고 몇 번이나 선언해놓고 나는 다시 펜을 든다. 이제 눈이 침침해서 사실 내가 제대로 글자를 쓰고 있는 걸지도 잘 모르겠어. 얼마 전에 손주가 집에 다녀갔어. 그 아이는 어린 시절 나를 똑 닮았는데 여름에 이 집에 올 때마다 한참을 수국 앞에서 서 있어. 내가 피우고 거두고 피우고 거두길 반복하는 그 꽃들이 아름답다 말해주는데 뿌듯해. 너는 잘 지낼까? 지금이라도 가서 용서를 구하면 너는 나를 받아 줄까? 미안, 또 이렇게 허튼소리를 적어버렸다.]
"오이카와 내려와서 밥 먹자!!!"
퍼뜩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인지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담담하게 적혀 내려간 편지 위로 누군가가 흘리지 못했던 눈물들이 떨어져 망칠까 서둘러 양손으로 닦아냈다. 어마어마한 파도에 휩쓸린 기분이었다. 한장 한장 봉투를 열어 편지를 확인할 때마다 오이카와는 자신이 마치 엄청난 죄를 짓는듯한 기분에 쌓여 정신이 없었다. 아직 열지 못한 봉투가 너무도 많았지만 오이카와는 차마 그 나머지를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한평생을 단 한 사람만 사랑하셨다. 자신이 만든 이 가족이 아닌 그의 추억 속의 머나먼 누군가를. 전하지 못하는 편지는 이렇게 어디론가 버려지는 걸까. 담벼락에 내놓은 이가 나간 컵과 같이 버려지는 걸까. 그러기엔-
"불공평하잖아."
눈물에 억눌린 목소리가 멋대로 불만을 품었다. 이대로 이 편지가 사라지기엔 너무도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도 알아야 했다. 할아버지가 얼마나 그를 보내고 죄악감으로 살아왔는지, 그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오이카와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서둘러 그 편지들을 모두 다시 상자에 담았다. 그리고 누구도 보지 못하도록 제 침대 아래에 깊숙하게 밀어 감추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거친 숨이 목을 타고 흘렀다.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어쩐지 할아버지의 애달픔이 자신의 안에서 꽃을 피우는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오이카와는 일찍이 집을 나섰다. 커다란 가방 안에는 덩그러니 쑤셔박힌 상자만이 덜컹거리며 소리를 내었다. 반쯤 잠이 덜 깬 아버지가 나와 "아침부터 어딜 가?"라며 물어왔지만 오이카와는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전하지 못한 편지를 전해주러 가요-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편지의 주인에게 가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편지 봉투 몇 개에는 할아버지가 정말로 보낼 결심이라도 했었는지 옛 시골집의 주소와 함께 그가 살던 주소까지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우표는 붙이지 못하셨지만. 그렇게 시작한 일요일 오전의 전차는 나른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몇 개의 역을 지나 갈아타고 기차역에서 티켓을 끊었다.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용돈으로 도시락을 사서 출출함을 달랬다. 몇 개의 터널을 지나고 산과 들의 풍경을 지나치며 오이카와는 자신이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두려워지기도 했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살았던 그 사람에게 자신이 나타나 수면으로 던져지는 돌이 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 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알아주기를 바랐다. 할아버지가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를. 그는 아마도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버림받았다 생각하며 지냈을 테니 적어도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이 갈 곳 없는 편지들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수 십 년을 상자 안에 갇혀 있었던 절절한 고백이 안타까웠다. 끝내 마음을 전하지 못한 할아버지가 애달팠다.
한참을 달리고 달려 내린 기차역에 선 순간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익숙한 풍경에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이 동네는 자신에게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낡은 자전거를 타고 산책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오이카와는 땀으로 흘러내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넘기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기억 속에서 멀어졌던 풍경들은 성큼 되찾아 오이카와 앞으로 펼쳐졌다. 이 길은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길이야. 제 자그마한 손을 붙잡고 걸으며 그리 말씀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달리고 나면 다시 돌아 집으로 돌아가시곤 했었다. 아마도 그 어느 정도가 할아버지가 지킬 수 있는 선이었을 테지. 간신히. 그리고 간절하게 지켜온. 오이카와는 스스로 걸어 할아버지가 그어놓은 선을 넘어섰다. 터벅터벅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 길에는 어딘가에서 울리는 작은 새의 울음소리가 환영 인사처럼 들려왔다. 또록또록 울리는 그 울음을 노랫가락 삼아 흥얼거리며 오이카와는 주소에 적혀있는 집 앞에 다다랐다. 아주 낡아 보이는 목제의 건물은 할아버지의 시골집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크고 오래되어 보였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집에서는 공허함이나 쓸쓸함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미묘한 차이를 만끽하며 오이카와는 덩굴이 자라 올라온 담벼락에 적힌 명패를 확인했다. <스가와라>. 그리고 작은 담벼락 너머의 풍경을 살폈다. 울창하게 나무와 풀들이 심어져 있었고 대문은 없었다. 기웃기웃 인기척이 있나 살피며 오이카와는 결심한 듯 조심스레 소리를 내었다.
"계세요?!"
꽤 크게 목소리를 내었는데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한 번 더 계세요? 라고 목소리를 높이 내었으나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오이카와는 슬쩍 목을 빼내 안을 들여본 뒤 조심스레 담벼락 너머로 들어섰다. 양 길옆으로 작게 뻗어진 나무와 꽃을 지나 현관의 벨을 누르기 위해 막 문앞에서 손을 뻗는 순간 아주 작지만 미세하게 바닥이 어긋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는지 낡은 집안에서 나는 조용한 소리였다. 누군가가 있나? 오이카와는 슬쩍 발걸음을 돌려 집 앞마당의 잔디 위로 발을 뻗었다. 그 작은 마당에는 빽빽하게 풀과 꽃들이 가득 차 하나의 숲과 같은 풍경을 이뤄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키우던 그 정원보다 더 크고 아름다웠다. 할아버지가 그를 꽃과 같다 여겼던 것은 아마 그가 이리 꽃을 좋아해서가 아닐까? 멋대로 그리 추측하며 걸음을 옮기던 오이카와는 한 번 더 "계세요?" 하고 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확하게 대답이 들려왔다. 대답이라기보다는 반응이. 덜컹,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닫혀있던 창문이 열리며 시야 사이로 불쑥 소년의 얼굴이 나타났다.
"누구세요?"
놀란 얼굴로 창을 활짝 열어 묻는 소년의 얼굴에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입에서 맴돌던 말을 목 안으로 삼켜냈다.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몰라하는 오이카와를 가만히 지켜보던 소년은 아무렇지 않게 맨발로 성큼 잔디 위로 내려와 섰다.
"무슨 일이에요?"
대답 해야 하는데, 누굴 좀 만나러 왔다고. 하지만 놀라 멈춘 입술은 그저 달싹일 뿐 좀처럼 열리지가 않았다. 이거, 불법 침입으로 잡혀가는 거 아닐까? 그런 걱정이 머리를 채웠지만 살짝 의심스러운 얼굴로 저를 살피는 소년의 얼굴에 오이카와는 어떠한 말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소년은 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간절하게 상자에 숨겨놓았던 사진 속 그 소년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소년보다는 더 밝은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조심스레 다시 "누구세요?"라고 묻는 얼굴은 사진과 달리 아스라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저.. 스.. 스가와라상을 찾아 왔는데..."
"내가 스가와라인데?"
소년은 흰 바탕에 푸른 꽃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셔츠를 입고 있었다.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셔츠였다. 그런 허튼 생각을 하며 오이카와는 다음 말을 잇기 위해 혀를 굴렸으나 입을 타고 나오는 것은 끝없는 침묵뿐이었다. 말이 없는 오이카와를 보며 소년은 가까이 다가왔다. 정원에서 나는 것인지 소년에게서 나는 것인지 모를 꽃내음이 코를 파고들었다. 성큼 가까워진 거리에 오이카와는 슬쩍 목을 뒤로 빼내며 서둘러 외쳤다.
"편지..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아, 이게 아닌데. 그러니까 이 집에 살고있는 스가와라라는 할아버지를 찾아 왔다고 이야기 해야 하는데. 놀란 가슴이 진정이 되질 않는지 헛소리가 볼품없이 입술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그 우스운 말에 슬쩍 눈썹을 찌푸린 소년은 금세 눈을 반짝이며 "편지?"라고 반문했다. 그리곤 맨발임에도 아무렇지 않은 지 땋을 딛고 오이카와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는 봉투의 이름을 확인한 소년은 웃으며 "아, 이 이름은 우리 할아버지 이름이야." 라고 밝게 외쳤다.
"할아버지.. 아... 그래, 너희 할아버지는 어디 계시는데?"
"돌아가셨어."
"...."
"한 달 전에. 어릴 때부터 몸이 좀 안 좋으셨데.."
조금 쓸쓸한 목소리로 소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한 달 전이라... 오이카와는 봉투를 쥔 손에 급격하게 땀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다급하게 소년의 때 묻지 않은 하얀 팔을 잡아 쥐며 물었다.
"언제? 정확하게 언제?"
그럴 리가 없다고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주 조금의 기대감이 넘실거렸다. 소년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천천히 입술을 움직이며 오이카와가 듣고 싶었던 날짜를 뱉어 불렀다. 그 대답을 확인하는 순간 오이카와는 웃으며 쥐고 있던 봉투를 살짝 쥐어 주머니로 쑤셔 넣었다. 전하지 못한 편지는 할아버지가 아마도 직접 전해 주시려던 모양이었다. 닿지 못했던 이 고백들도 할아버지가 직접 전하기 위해 떠나신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 편지는 이제 전할 필요성이 사라진 물건이 되어버렸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차올라서 눈가가 따끔거렸다.
"혹시 우는 거야?"
웃음기 어린 그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서둘러 흐르는 눈물을 막기 위해 손등으로 눈가를 덮었다. 우는게 뭐 어때서? 이건 슬퍼서 우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기뻐서, 안도해서 우는 눈물이었다.
"괜찮아?"
고개를 숙이고 저를 올려보며 조심스럽게 묻는 소년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아 맞다. 나 지금 아이스티를 만들고 있었는데 마시고 갈래? 정원에서 딴 민트를 올릴 거야."
"..응."
"그리고 이왕 온 김에 심심하니까 나랑 저 앞 시냇가에 가서 놀자. 여긴 내 또래가 없어서 무척 심심하거든."
소년이 조심스럽게 오이카와의 손에서 제 팔을 빼내며 밝게 물었다. 아, 왜 이렇게 사교성이 좋아? 시골에서 자란 녀석이라 그런가? 절대 도시에서 통하지 않을 회유법을 구사하는 말에 오이카와는 홀린 듯이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좋아, 그럼- 나는 스가와라 코우시야.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야."
봉투에 적혀있던 같은 이름을 떠들며 스가와라 코우시가 웃었다. 덧붙여서 한자는 조금 달라! 라고 설명해왔다.
"난, 오이카와 토오루."
나 역시도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야. 마찬가지로 한자가 달라. 그리 속삭이며 오이카와는 울던 얼굴을 지우곤 바보 같이 웃었다. 저를 따라 웃으며 "우린 똑같네?" 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에게서 푸르른 꽃내음이 흘러나왔다. 할아버지가 보았던 푸르른 빛도 흘러나왔다. 눈앞의 소년을 할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가 남긴 편지와도 같다 느끼며 오이카와는 천천히 내밀어 진 손을 잡았다. 그리곤 오이카와는 천천히 들어섰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의 집으로.
-
스가른 전력 주제 / 눈물
더블 오이스가.
누가 진짜 오이카와 토오루고 스가와라 코우시일까~~~~~는 나도 모르겠다.
전력 .. 90분... ^_T
시간이 없어서 일단 올리고 수정은 찬찬히.
그리고 돌아오지 않아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