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폭설 뉴스가 방송을 타고 흘렀다. 갑자기 쏟아지는 눈 때문에 꼼짝도 못 하는 신세가 된 스가는 아침 일찍 집 앞에서 사온 커피를 입에 가져가며 잡지를 넘겼다. 꼬불꼬불한 글자들의 문장에서 스가가 보고 있는 것은 간단한 단어들뿐이었다. 정확하게는 별 의미 없는 광고와 그림을 보는 중이었다. 반대편에 앉은 다이치는 심각한 얼굴로 너덜너덜한 이탈리아 가이드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이미 그의 체크리스트들은 모두 다 돌았을 텐데도 열심히 다음 일정을 만드려는 듯이 보였다. 아마 그가 귀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이 눈이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스가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소파에 더 몸을 앉히고 의미 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대화는 조금도 오가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어색한 사이는 아니었다. 오래 된 친구 사이란 그런 모양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다이치의 집요한 시선이 자꾸만 머리에 닿았다. 아까부터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는지 흘끔흘끔 보는 시선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 스가는 작게 숨을 쉬며 잡지에서 시선을 떼었다.
"뭐, 할 말 있어?"
일단 질문은 했지만 사실 필요한 물음은 아니었다. 딱 보아도 엄청나게 묻고 싶은 것이 많다는 얼굴이었으니까. 말을 고르는지 죄 없는 가이드 북의 페이지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던 다이치는 한참 후에야 결심한듯 단호하게 눈빛을 내며 입을 열었다.
"있지- 스가."
"응?"
"어떤 점에서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널 좋아한다고 생각해?"
뭐? 스가는 저도 모르게 조금 짜증을 섞어 반문했다. 3주 동안 사와무라 다이치와 지내면서 들었던 질문 중에서 가장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몇 번이고 물었던 "일본하고 이탈리아랑 시차가 얼마나 나지?" 라는 지긋지긋한 질문보다도 더.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3주 동안 너희를 지켜보면서 느낀 거고 처음 사귄다고 했을 때도 느낀 건데 우시지마는 너에게 전혀 표현을 안 하는 것 같아서 그래. 너랑 오랜 친구로서 그 정도는 조금 궁금해 해도 되잖아. 심지어 넌 걔 때문에 일도 그만두고 이탈리아에 와 있는데."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다이치는 자신이 우시지마 와카토시에게 조금의 애정도 받지 못하고 지내는 것이 아닐까-하고 걱정한 모양이었다. 정말로 쓸모없는 걱정에 스가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제도 봐. 경기 초대해놓고 너는 완전 뒷전이고 꺅꺅거리는 소녀팬들에게 사인 해주느라 정신없었잖아."
"팬들이잖아."
"거기다 오늘 휴일인데 혼자 나가버렸고. 데이트 안하냐?"
"휴일이지만 우시지마는 훈련이 있잖아. 그리고 네가 있는데 널 두고 어떻게 데이트를 해?"
말도 안되는 억지였다. 따져 묻는 말에 스가 역시 지지 않으며 받아쳤다. 그런 스가가 답답한지 결국 들고 있던 가이드 북을 내려놓은 다이치가 잔뜩 걱정을 품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어왔다.
"걔가 너 사랑한다고는 말해?"
"...뭐?!"
"아니, 그러니까 그런 말도 잘 안 할 것 같잖아.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그런데 넌 도대체 뭐로 그렇게 걔에 대해 확신해?"
마치 자신이 사랑도 받지 못하는 주제에 달라붙어 있는 미련한 애정 결핍증 환자라도 되는 듯이 묻는 다이치의 질문에 스가 역시도 무릎에 펼쳐 놓았던 잡지를 덮었다. "향수병에 걸린 애인을 위해 가장 친한 친구를 이탈리아로 초대해서 방까지 내줬는데 그런 의심을 하는 거야?"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높여 물었더니 "물질적인 것 말고!" 라며 잘라 대답한다. 아니, 그건 물질적인 게 아니라 날 생각하는 정신적인 감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저 멍청이는 계산적으로 평가했는지 무척이나 단호한 말투였다.
우시지마 와카토시가 무뚝뚝하고 성격이 그리 살갑지 않다는 것은 스가 역시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에게 자신을 위해 노력하라거나 변하라고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에 스가는 그 성격이 매정하다거나 불편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다이치가 보기에는 그것이 연인 관계에서 무척이나 부족하고 안타까워 보이는 모양이었다. 뭐, 그 시선을 받은 것이 사실 한 두 번도 아녔고 심지어 틀렸다고 할 수 없는 이야기이긴 했다. 그가 무뚝뚝하고 말이 적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만약 다이치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자신이 우시지마 와카토시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매달리는 상황이었다면 3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연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은 분명하게 우시지마 와카토시에게 애정을 받고 있었다. 그 점에 대해서라면 스가는 3일 밤낮을 눈을 뜨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어학교의 학기가 끝나고 잔뜩 술을 먹고 돌아온 밤, 와인과 안주를 너무 과하게 들이켰는지 속이 뒤집혔다. 결국 스가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거칠게 구두를 벗어 던지고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붙잡고 요란하게 구역질을 해댔는데 그 소리에 깬 우시지마는 조금의 불평도 없이 등을 두드려주고 쓸어주었다. 누군가가 속을 게워내면 그것을 지켜보는 입장으로서 같이 역해지고 괴로워지기 마련인데도. 물론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미용실에 갈 시간조차 없이 바빠 우시지마의 머리카락이 눈을 찌를 만큼 자랐는데 괜찮으니 잘라달라는 말에 도전한 스가가 댕강-하고 그의 앞머리를 모두 날려버린 날이 있었다. 순식간에 눈썹 위로 짧아진 앞머리에 하얗게 질린 스가와 달리 우시지마는 꽤 평온한 얼굴이었다. 팬들의 반응은 무척 나빴고 심지어 경기 끝나고 인터뷰에서 "어느 미용실에 가면 그런 머리 스타일을 해주나요? 마음에 들어요?" 라는 질문까지 받았는데 우시지마는 딱딱하지만 분명하게 웃으며 "마음에 들어요."라고 말해 주었다. 거기다 가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꽃을 사 오기도 했다. 이유는 단 하나, 오는 길에 네가 생각나서. 덤덤한 말투였지만 스가는 그게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로맨틱한 점이라고 생각했다. 또, 우시지마를 따라 이탈리아에 온 지 1년인 넘었음에도 여전히 스가에게는 이 거리의 풍경은 늘 새로워 자꾸만 한눈을 팔곤 했다. 특히 휘황찬란한 쇼핑센터에 들어가면 여기저기 눈이 돌아가 정신을 놓기 일쑤였는데 그러다 번뜩 다시 정신을 차리면 언제나 곁에는 우시지마가 있었다. 한눈을 파는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는 그를 발견하면 스가는 절로 안심이 되곤 했었다. 가끔은 시즌 중에 너무 바빠서 세탁소조차 갈 시간이 없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우시지마는 부탁하면서 말 앞에는 "미안한데 스가와라-" 끝에는 "부탁할게"라는 정중한 표현을 썼다. 잘나가는 선수의 애인으로서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한 블록 떨어진 세탁소 심부름이야 그리 대단하고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에도 항상 그런 말을 썼다. 한 번은 스가가 너무도 불편해서 "그 말투 그만두면 안돼?" 라고 말하자 던져진 대답은 꽤 놀라운 것이었다. "넌 내 개인 비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사 도우미도 아니잖아. 나는 너를 애인으로서 존중하고 싶으니까 너에게 정중하게 부탁할 거야." 무뚝뚝하지만 자신을 존중하겠다는 그 말이 스가는 무척이나 기뻤었다. 그 외에도 더 있었다. 무척이나 많았다. 경기장에 찾아가면 수많은 관중들 틈에서도 자신을 반드시 찾아냈다. 가끔은 여자 이름이 적힌 명함을 가지고 나타나 마치 질투해 달라는 듯이 내밀기도 했다. 그래, 한번 연락해봐. 금발의 이탈리아 미녀도 만나보고 그래. 스가의 퉁명스럽고 못된 대꾸에 금방 그 명함들은 우시지마 손에서 찢겨 사라지곤 했다. 저번 크리스마스 때에는 자신이 문화 센터에서 배운 우스운 뜨개질 실력으로 만든 엉망인 스웨터를 입고 파티에 가 자랑스럽게 기자들 앞에 서기까지 했었다. 더 말하자면 정말로 삼일 밤낮을 지새울 정도로 많았다.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다 나열하기 힘들 만큼 많았다.
하지만 스가가 가장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따로 있었다. 주말에만 열리는 큰 마켓에 가끔 함께 장을 보러 갈 때면 엄청난 인파에 우시지마를 놓치는 날이 더러 있었다. 여전히 이 이탈리아라는 나라는 스가에게 어려웠고 낯선 곳이었고 들려오는 언어는 가끔 거칠고 무섭기도 했다. 그 틈에 홀로 남겨지면 불안하고 짜증이 치밀어 스가는 무신경한 우시지마를 잔뜩 씹어대며 걸었다. 이렇게 무신경하다니 믿을 수 없어. 이게 도대체 몇 번 째야? 내가 길 모른다고 몇 번을 더 설명 해야 해? 미아 되기 싫으니까 곁에 있으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속으로 한참을 그렇게 투덜 되며 걷다 보면 금세 커다란 이탈리아 사내들 틈에서 뒤지지 않는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가만히 스가가 자신을 찾아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인파를 헤치고 그에게 다가가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우시지마는 스가가 이 낯선 도시에서 홀로 적응하기를 기다렸다. 그 손을 잡으며 스가는 마치 자신이 물가에 나온 어린애 혹은 날갯짓을 시작하는 아기 새와 같은 기분을 느꼈지만 그것은 나쁘지 않았다. 우시지마는 온전히 자신을 하나의 사람으로 대해주고 있었고 스스로 혼자 설 기회들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스가는 자신을 그렇게 지켜보는 우시지마를 발견할 때마다 무척이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 하루들을 보내고 있는데 싸인 좀 받겠다고 달려드는 여성 팬들에게 질투할 틈은 스가에게는 없었다. 사랑한다는 직접적인 말을 듣지 않아도 스가는 이미 여러 번의 그와 똑같은 말들을 받았었다. 그런데 확신하느냐니. 다이치의 질문은 조금 우스웠다.
"꼭 사랑한다는 감정이 말로만 표현되는 게 아니잖아."
이 모든 이야기를 다이치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눈 시린 커플들의 자랑이 될 것만 같아 스가는 참아내며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조금도 이 관계에 깔린 감정들을 이해할 수 없을 그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럼 뭐가 있는데? 너희 둘 사이엔?"
"많아. 엄청."
다시금 무릎 위 잡지를 펼쳐 들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무뚝뚝하지만 스가는 우시지마가 내놓은 애정을 그의 방식대로 받고 있었고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욱 달콤하고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니 일부로 소리를 내어 확인받고 확신할 필요가 없었다. 여전히 다이치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으나 아무렴 좋았다.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이 로맨틱한 점은 자신만 알고 싶은 것이었다. 스가는 머리로 닿는 의문 가득한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며 다시 팔랑팔랑 페이지를 넘겼다. 얼른 저 눈을 뚫고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스가는 몰래 우시지마의 애정을 홀로 가슴에 숨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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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 마무리! 슬슬 나가야 해서 더 무언가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무척 부족해따.
말로 하지 않는 표현에도 스가가 충분히 애정을 느끼는 우시스가가 보고 싶었는데 망했어여..ㅇ<-<
그리고 스가맘 돋는 다이치도 보고 싶었는데.... 머리 이야기는 어제 트위터에서 혼자 썰 풀던거...
이게 무슨 짬뽕이야... !!!!!!!
심지어 우시지마는 나오지도 않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