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아카] Guilty
2015. 2. 11. 20:29



감정은 항상 정처 없이. 그리고 갑자기. 그렇게 생겨 먹은 모양이었다.

쏴아, 손바닥 위로 차가운 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의미없이 박박 손을 닦으며 아카아시는 멍하니 수도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여름의 하늘이 드높게도 펼쳐져 있었다. 태양의 빛이 아찔하게 눈을 파고들었다.



"아카아시!"



찬물에 손을 담그듯 정신도 담가놓고 있던 아카아시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오전 시합이 끝나고 겨우 찾아온 휴식시간임에도 공을 차고 나타난 보쿠토 코타로가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여름과 어울리는 미소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서 풀 내음이 났다. 그의 운동복은 흙과 풀물로 정신이 없었다. 참 활기찬 복장이었다.



"우리 다음 타임! 카라스노랑 시합이야."
"아.."
"얼른 와."



툭툭 머리를 기분 좋게 두드리는 그의 행동에 아카아시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수돗가의 꼭지를 잠갔다. 여름 합숙은 언제나 빠듯하고 정신이 없었다. 자라나는 몸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연습 메뉴는 끝이 없었고 오로지 정신력으로 버티는 하루들이었다. 젖은 손을 서둘러 자신의 티셔츠에 닦은 아카아시는 벗어 놓았던 자신의 서포터를 챙겼다. 체육관으로 들어서는 보쿠토의 뒷모습을 따라 발걸음을 움직였다. 이 살벌한 합숙 중에도 보쿠토 코타로는 조금도 지쳐 보이지 않았다. 



"체력을 길러야지.."



무시무시한 선배를 따라가기엔 자신의 체력은 바닥에 가까웠다. 꿀맛인지도 모를 정도로 금세 끝나버린 휴식시간을 뒤로하려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합숙 기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체력도 정신력도 뚝뚝 떨어져 밑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연습과 경기 스케쥴도 한몫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컸다. 예를 들면-



"아카아시."



저 남자. 쿠로오 테츠로.
자신을 부르는 또 다른 목소리에 아카아시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이제 막 연습 시합이 끝났는지 완벽하게 땀에 젖은 사내가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경기 끝났어요?"
"응. 이겼지. 너희는?"
"저희는 지금부터 카라스노랑요."
"아, 고생하겠네."
"네. 쿠로오상도 고생하셨어요."



딱딱한 말투였다. 그도 그럴게 이렇게 오픈된 공간에서 그와 단둘이 대화를 하는 것은 조금 불편했다. 그런 아카아시의 생각을 읽었는지 열기로 뜨거워진 손이 대뜸 손목을 잡아왔다. 성큼 그가 건물 사이의 틈으로 끌었다. 시멘트벽들이 만들어 낸 그림자들이 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덤으로 빛까지도. 어둑어둑한 틈 사이에서 아카아시는 붙잡힌 자신의 손목을 내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사내를 보았다.



"저 시합 있어요."
"나 고생했는데."
"알아요."
"충전할래."
"저는 충전기가 아닌-"



데요. 돌려 거절하려던 말은 갑작스레 찾아온 그의 입술 덕에 공중에서 녹아 사라졌다. 훅-하고 코안으로 그의 나쁘지 않은 땀 냄새가 파고들었다. 툭, 등 뒤로 찬 시멘트의 기운을 받으며 아카아시는 서둘러 젖은 그의 티셔츠를 붙잡아 올라서며 목에 팔을 둘렀다. 그의 손이 다급하게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맞닿은 거리를 더 좁혀왔다. 부드러우면서도 거칠고 거칠면서도 질척한 입맞춤이 한 치의 틈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달라붙어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고개를 틀 때마다 코가 부딪혔다. 입술이 떨어졌다 맞물렸다. 그의 손이 다급하게 자신의 티셔츠를 잡아 올리는 순간 아카아시는 살짝 그의 아랫입술을 물며 떨어졌다. 거칠게 터져 나오는 숨을 고르지 못하며 그를 바라보자 비릿하게 웃은 그가 잡고 있던 티셔츠를 꽉 쥐며 입을 열었다.



"보쿠토가 어마어마하게도 남겨 놨네."



단단하게 짜증이 서린 목소리에 아카아시는 서둘러 그의 손에서 티셔츠 자락을 빼 잡아 옷을 정리했다. 보쿠토 코타로가 남겨놓은 적나라한 흔적들이 어제의 밤을 대신 이야기 하는 것만 같아 창피하면서도 미안했고 부끄러우면서도 초조했다. 그 엉망인 감정들이 열로 변해 귀로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푹 고개를 숙여버린 아카아시의 붉은 귀로 손을 뻗은 쿠로오는 살살 그것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속삭였다. 다행히 목소리는 금세 평온을 찾아 보통과 다름이 없었다. 



"오늘은 내 차례."
"무리에요."
"왜? 약속했잖아. 합숙 중에 하루는 시간 내주겠다고."
"보쿠토상이랑 같은 방이라고 말했잖아요. 못 빠져나와요."



손에 들린 서포터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어쩐지 미안해서 목소리가 자꾸만 작아졌다. 그와 약속을 하고 어기고 미루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애초에 하는 게 아닌데도 그 의미 없는 약속마저 없으면 이 관계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어리석게도 다시 반복하고 만다. 완벽하게 짜증이 서린 얼굴로 아카아시를 내려보던 쿠로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그를 올려보며 아카아시는 "미안해요."라고 솔직하게 사과를 했다. 아냐, 미안해하지 마. 그러지 마. 그는 고개를 저으며 사과를 받지 않았다. 



"앞으로 미안할 일 많을 텐데."



당신에게? 아니면 보쿠토상에게? 알 수 없는 그 말의 의문을 아카아시는 입에 담지는 않았다. 어차피 정답은 둘 다 일 테니까. 이 아슬아슬하고 말도 안되는 관계를 유지하는 이상 자신은 계속 죄를 쌓아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켜내며 아카아시는 쿠로오의 시선에서 고개를 돌렸다. 벽과 벽 틈 사이로 아까의 수돗가가 덩그러니 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런 아카아시에게 손을 뻗은 쿠로오는 억지로 다시 고개를 잡아 돌렸다. "화났어?" 아뇨, 화는 쿠로오상이 내야죠. 아카아시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곧 있으면 팀원들이 자신을 찾을 것이 분명했다.



"저 가볼게요."
"그래. 가야지."



아쉬움이 철철 넘치는 목소리였다.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조금 더 연인처럼 지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바라면 안되는 것을 바라며 아카아시는 서둘러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다시 붙잡힌 손목 덕에 또 멈춰야 했다. 



"서포터 줘."
"왜요?"
"내가 채워주게."
"싫어요.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싫다며 서포터를 쥔 손을 뒤로 뺐지만 쭉 뻗어온 긴 팔은 가볍게도 그것을 잡아챘다. 이렇게 실랑이를 버리다가는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아카아시는 포기한 심정으로 순순히 다리를 뻗어 내밀었다. 



"참 잘했어요."



어린아이에게 하듯 칭찬의 말을 던지며 쿠로오 테츠로가 히죽 웃었다. 그리곤 무릎을 굽히고 앉아 조심스레 신발을 벗겨냈다. 신고 있던 양말까지 벗겨내곤 그가 서포터를 끼워 잡아 올렸다. 하지만 무릎을 덮기 전 멋대로 발목을 잡아당기며 그가 입을 맞췄다.



"쿠로오상!"



이를 세워 무릎 위를 물었다. 따끔한 통증에 아카아시는 발로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의 완력이 얼마나 강한지 쉽지 않았다. 야무지게 자신의 무릎에 잇자국을 낸 그는 기분 좋은 듯 웃으며 서포터로 그 자국을 덮어 없앴다.



"그런 꼴을 보면 나도 뭐든 하나 정도는 남기고 싶잖아."
"..."
"이 정도는 좀 봐줘라."



일부로 시무룩한 얼굴을 지어 보이는 약은 사내의 얼굴을 내려보며 아카아시는 화를 내려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대신 말 없이 나머지 한쪽의 서포터를 뺐어 서둘러 찼다. 신발을 구겨 신으며 "다음에요. 합숙 끝나고."라며 확실치 않은 약속을 뱉었다. 언제나 아카아시가 쿠로오 테츠로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런 식이었다. 불투명한 약속, 미래, 그리고 한정된 시간. 



"약속 한 거다?"



그런데도 그는 불만이 없었다. 아마 합숙이 끝나면 이렇게 종일 보쿠토와 붙어있지 않아도 되니 눈길을 피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기대감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며 아카아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등 뒤로 닿는 쿠로오의 시선을 따갑다고 느끼며 서둘러 체육관으로 향했다. 대충 구겨 신은 신발이 헐떡였다. 



"아카아시- 너 너무 늦어."



체육관 입구에 다다르자 기다리고 있던 건지 보쿠토가 웃으며 반겨온다. 죄송합니다. 어색하게 마주 웃으며 서둘러 신발을 벗어 아침에 벗어 놓았던 자신의 배구화를 찾았다. 그런 머리 위로 보쿠토의 손이 닿았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의 행동에 아카아시는 어딘가 심장 안에서 삐끗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아카아시."
"네?"



조용한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카아시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와 2년을 알고 지냈다. 그와 셀 수도 없는 밤을 함께 보냈다. 그에게 어마한 감정들을 받았다. 그러니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웃고 있지 않았다. 웃는 얼굴을 흉내 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웃음을 받아내려 하니 배구화를 쥔 손에서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땀은 아까의 쿠로오 테츠로가 흘리던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끈적하고 질척이는 기분 나쁜 것이었다. 



"쌍방의 관계에서 일방적인 관계로 변환될 때에 가장 잔인한 상황이 뭔 줄 알아?"



그답지 않은 어려운 문제였다. 아카아시는 허리를 천천히 펴 올리며 솔직히 대답했다. 모르겠는데요.



"상대가 무슨 짓을 해도 용서 하고 싶어지는 것."



손가락 끝이 살짝 떨렸다. 아마 숨이 턱, 하고 잠시 멈췄던 것도 같다.



"그럼에도 그를 사랑하고, 어쨌든 용서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



보쿠토 코타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머리를 쓰다듬었던 손이 천천히 내려와 뺨에 닿았다. 조금 전 쿠로오 테츠로의 손이 닿았던 그 위치였다. 



"불장난은 적당히."



그리 말하며 그는 손을 거두었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보쿠토의 시선을 받아 낼 자신이 없어 아카아시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게 미안해서인지, 아니면 무서워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이 순간을 피하고 싶었다. 아카아시는 분명하게 자신의 죄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그 서글픈 말에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그마한 사과의 말조차도. 돌아서는 그를 따라 함께 코트로 들어서는 길, 쿠로오 테츠로가 입을 맞춘 무릎이 저릿하게 아파져 오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손이 닿았던 뺨이 뜨거웠다.

감정은 항상 정처 없이 흐른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나고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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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토와 쿠로오의 사이에서 갈팡질팡 놓지도 못하고 나쁜짓하는 아카아시가 보고싶어서!!!!!!!!!!!!

쿠로아카 베이스로 썼은데 마지막에 보쿠토도 놓지를 못하겠구.. 그냥 그럼 보쿠아카쿠로로 합시다. 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