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오루."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에 앞서 걷던 그의 등이 돌았다. 왜? 웃으며 그렇게 묻는 얼굴이 살짝 얄미워서 스가는 나란히 내려놓은 손가락을 괜스레 문질렀다. 어쩐지 이런 말 정말 부끄러운데 그래도-
"오늘 우리 집 갈래?"
연인이니까 이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당당하게 물었다. 조금은 얼굴을 붉히고 목을 긁적인다거나 시선을 피한다거나 그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길 바랬는데 눈앞의 사내는 너무도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조금도 다른 생각은 없는 모양새였다.
-
"와 장난 아니다."
그래 진짜 장난 아니다. 스가와라는 자신의 방에 놓인 작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영화를 보며 속으로 그렇게 뱉었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초대해 자신의 방에 들이기까지 했는데 영화라니. 진짜 장난 아니었다.
흔히 그런 소리를 한다. 요즘 아이들 참 빠르다고. 웃음 속에 감춘 아이들의 비밀 이야기 속에서도 사귀는 애인과 어디까지 했다는 이야기는 그리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하루면 손을 잡고, 빠르면 일주일 안에도 입은 맞춘다. 한 달 안에 끝장을 보는 아이들도 수두룩했다. 그런데 너는 왜 내 손도 잡아주지 않는 걸까? 스가와라는 가만히 오이카와 곁에 앉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영상을 노려보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그렇게 매력이 없는 걸까. 손을 댈 생각이 안들만큼? 자꾸만 미어나오는 씁쓸함에 괜히 죄 없는 머리만 꼬았다.
"재미없어?"
"아니, 재미있어."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는지 아삭, 깎아 내온 사과를 입에 물며 태평하게도 물어온다. 자신이 원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한가롭게 과일이나 먹으며 영화를 보고 싶었던 게 절대로 아니었는데. 제 마음도 몰라주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무척이나 야속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영화만 보고 바이바이 손을 흔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스가와라는 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덥지 않아?"
"응? 아니?"
"난 좀 더운데."
어색해 보일까 시선을 들지도 못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긴장으로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입고 있던 가쿠란 자켓을 벗었다. 보란 듯이 셔츠 단추 두어 개도 풀었다. 얼른 봐, 나 지금 벗는다니까? 단추도 풀었어! 그런 마음으로 슬쩍 고개를 들었는데-
"설마, 저기서 주인공이 죽는 건 아니겠지?"
이쪽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있었다. 죽든 말든! 지금 내가 다 죽게 생겼는데..! 당황한 마음으로 스가는 손바닥으로 부채를 만들어 팔랑거리며 서둘려 셔츠 깃을 더 젖혀 보았다. 덥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도 봤다. 목소리가 조금 끈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오이카와의 손은 스가의 드러난 목덜미도, 팔랑거리는 손도 아닌 사과로 향했다. 망할 사과. 저 사과를 내오는 게 아니었는데.
"사과 좀 먹을래?"
"뭐?"
사과? 지금 내가 사과를 먹게 생겼어? 당장에라도 그렇게 외치고 싶었는데 불쑥 집어 내미는 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살짝 토라진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 입으로 씹어 삼켰다. 아삭아삭 맛은 있는데 이 맛이 단지 쓴지 스가는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꿀꺽 모조리 씹어낸 사과를 넘기며 언젠가 반 아이들이 돌려 보던 도색 잡지를 떠올렸다. 그 안에는 자신과 같은 남자 대신 몸매 좋은 아가씨들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지금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그게 다 누군가를 위한 서비스이며 유혹일 테니 써먹기에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썩 괜찮아 보여 기억나지도 않은 페이지들을 서둘러 머릿속에 그렸다. 팔랑팔랑 슬쩍 보았던 페이지들이 쉴 새 없이 스가의 머리 안에서 넘어갔다. 빨간 힐을 신고 서 있던 여자, 침대에 누워 뇌쇄적으로 눈빛을 쏘던 여자, 스타킹을 신고 있던 여자 등등등. 그리고 얼마나 그렇게 머릿속에서 페이지를 넘겼을까-
"토오루-"
나쁘지 않은 장면이 떠올랐다.
"왜?"
"나 사과 더 집어줘."
나른하게 뱉는 스가의 목소리에 여전히 시선을 화면에 고정한 오이카와가 웃으며 사과를 집어 건넸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스가는 천천히 입을 벌리고 그것을 물었다. 아삭, 반쪽을 씹어 넘겼다. 덕분에 잘려나간 사과에서 즙이 나와 입술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어 나머지 조각을 입술을 이용해 물었다. 물론 들고 있던 오이카와의 손가락까지 살짝. 이렇게 하는 게 맞겠지? 자신이 찾은 페이지에서 늘씬한 아가씨는 아이스크림을 그렇게 먹고 있었지만 지금은 사과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신호가 제대로 닿았는지 오이카와의 시선이 박혀왔다. 빤히 바라보는 눈을 마주하며 스가는 열심히 자신의 마음을 보냈다. 나 준비됐어. 쓰러트려. 넘어트려. 오이카와 토오루. 얼른!
"코우짱-"
"응?"
"칠칠하긴. 다 묻었어."
씩 웃으며 손가락이 뻗어왔다. 그 부드러운 손가락은 따스하게도 스가의 입술에 묻은 사과즙을 훔쳐내고는 떨어져 나갔다. 그리곤 다시 돌아가는 시선에 스가는 화라도 내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이 정도면 자신이 밥상을 차려놓은 셈인데 그걸 이렇게 발로 차 버리다니. 정말 그 정도로 자신에게 매력이 없는 것일까.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든 막 하고 싶은 충동이 조금도 들지 않는 것일까. 충격에 휩싸인 스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물었다. 매력 없는 애인이라니, 최악이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뭐가 그리 즐거운지 영화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오이카와에게서 돌아앉으며 스가는 소리 나지 않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이렇게 포기하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슬쩍 고개를 숙여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어 눈물이 다 나올 것 같았다.
"졸려?"
"아니..."
내가 졸려서 이러는 것 같아? 나 넘어트려 달라고 시위하는 거잖아! 빽 외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달싹이는 입술을 꾹 물며 스가는 거짓말을 뱉었다. 토닥토닥, 자도 괜찮아. 웃기지도 않은 다정함을 내뱉으며 오이카와가 스가를 달래왔다. 그러니까! 자고 싶은 게 아닌데. 절대로. 이대로 자버리면 자신의 이 단단한 각오가 모두 물거품과 다름이 없었다. 스가는 괜히 오이카와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꽉 팔을 끌어안았다. 이래도? 이래도 아무 생각 안 들어? 내가 막 이렇게 얼굴 비비는데? 팔도 이렇게 안았는데? 손도 안 잡은 연인 사이에 최고로 가까운 스킨쉽에 도전했지만 여전히 오이카와의 시선은 TV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자신보다 영화가 좋은 모양이었다.
결국,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보며 스가는 눈을 감았다. 우울한 감각과 자신의 터무니 없는 생각들이 뒤죽박죽 머릿속에서 섞여 엉망으로 엉켜버렸다. 집중하지 못하는 영화는 재미가 없었고, 기댄 오이카와의 어깨는 생각보다 편하고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설핏 잠에 빠졌다. 감은 눈 사이로 영화의 알 수 없는 대사들이 들이닥쳤다. 그 대사들은 웅웅 스가의 안을 떠돌아다니면서 멋대로 꿈이 되어 영상화가 되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를 화면들이 감겨진 머릿속 안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그 어지러움을 거두는 것은 따스한 손길이었다. 천천히 뻗어 온 온기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있었다.
"코우짱, 자?"
"..."
응, 나 자고 있는 것 같아. 눈이 무거워. 닿는 목소리를 받아내며 대답은 했는데 정작 입을 타고 나가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하아-"
깊은 한숨이 귓가에 닿았다. 그리고 살짝 머리를 기대고 있던 단단한 어깨가 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뚝, 고개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부드럽게 다가온 손이 머리 뒤, 정확하게는 목 뒤를 받혀왔다. 그리곤 불쑥 무릎 아래로 단단한 팔이 들어왔다. 어, 지금 이거? 안아 주는 건가? 몽롱한 정신으로 스가는 뒤척이며 오이카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흡, 하고 숨을 참는지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바닥에 닿아있던 엉덩이는 어느새 번쩍 들려 금세 푹신한 시트 위로 내려앉았다. 따뜻하게 목을 감싸던 손 대신 베개가 스가를 반겼다.
"코우짱-"
아, 지금 눈 떠야 하는데. 이거 지금 기회 같은데. 조급한 마음과 달리 잠으로 끌려가는 정신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살살 넘겨주는 머리카락의 흔들림을 느끼며 스가는 아득히 넘어가는 자신을 붙잡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자각 좀 해."
뭘?
"이렇게 무방비하게 굴면, 너 진짜 큰일 난다. 나한테."
그러니까 뭘?!
스가는 서둘러 끊어지기 직전의 자신을 붙잡았다. 그리고 눈을 뜨려는 순간, 쪽 하고 이마 위로 뜨뜻한 무언가가 닿았다 사라졌다.
"오이카와씨의 자제력을 칭찬해 줘."
그 말을 끝으로 시트가 출렁거렸다. 그가 일어서서 방을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스가는 감겨있던 눈을 떴다.
"이.. 망할!"
칭찬은 무슨!! 당장에라도 저 단단한 자제력을 잡아다 무릎으로 뽀각 조각 내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닿았던 오이카와의 입술이 너무도 좋아서 스가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사라진 그 온기를 가두기 위해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덮었다. 어쨌든, 아직 갈 길은 한참 남았지만 오늘은 이걸로 용서를 해줘야지. 그리고 언젠가는 꼭 그의 손에 넘어지리라. 아니, 안되면 자신이 넘어트려도 상관은 없었다. 스가는 머나먼 날을 그리며 꼭 이마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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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ㅈ ㅏ돋는 커퀴가 보고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