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오 테츠로!!"
직원에게 안내받은 문을 열기가 무섭게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가 빽 공간을 울렸다. 얼마나 마셨는지 잔뜩 흐트러진 스가와라 코우시가 웃으며 손을 휘휘 저어 보이고 있었다. 인사를 하는 건가? 아니면 춤을 추는 건가? 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인 행동에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작은 숨을 뱉었다.
"얼마나 마셨어?"
"모르겠는데."
모르긴. 눈앞에 빈 술잔과 병들을 보니 가벼운 음주는 절대로 아니었다. 쿠로오는 서둘러 스가와라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으며 그가 손에 쥔 잔을 가볍게 들어 뺐었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너 술 이렇게 안 마시잖아."
이유는 알고 있었다. 스가와라 코우시가 이 정도로 술을 마시는 이유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었다. 알면서도 그게 아니길, 차라리 다른 이유이길 바라며 쿠로오는 모르는 척 물었다.
"다이치 여자친구 생겼데."
아, 역시. 입안이 썼다. 스가와라 코우시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면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게도 만드는 존재는 사와무라 다이치가 유일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를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만드는 존재도 그가 유일했다. 예상했던 대답이라 그리 놀랍지도 않았기에 쿠로오는 혀를 차며 테이블 위로 쓰러지는 머리가 다치지 않게 손을 뻗어 베개를 대신해 주었다. 손바닥 위로 묵직한 무게가 닿았다. 가는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쿠로오의 손 위에서 흔들렸다.
"...너무하지?"
"뭐가?"
"내가 벌써 5년이나 이렇게 좋아하고 있는데 또 미팅에 나가서 홀랑 여자친구를 만들다니.."
투정을 부리는 목소리가 마치 아이와도 같았다. 5년이라니, 벌써 그렇게 되었나? 이제 대학 졸업을 앞두는 시기이니 따지고 보면 그 정도 된 것 같았다. 그러게. 너무하네. 쿠로오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텅텅 빈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가와라 코우시가 사와무라 다이치를 좋아한 게 벌써 5년이라니. 그 말은 자신이 스가와라 코우시를 좋아한 지도 벌써 5년이 흘렀다는 소리와 같았다. 잡히지 않은 시간은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빠르게도 흘렀다. 미련한 남자와 미련한 자신을 보며 쿠로오는 픽 웃었다. 이 빗나가는 감정들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미 바로잡기에는 너무도 늦은 사랑의 화살표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턱을 괴었다.
쿠로오 테츠로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 3가지를 고르자면 첫 번째는 사와무라 다이치와 친구가 된 것이고, 두 번째는 사와무라 다이치에게 스가와라 코우시를 소개받은 것이고, 세 번째는 스가와라 코우시와 친구가 된 것이었다. 이 중에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면 쿠로오는 세 번째를 바꾸고 싶었다. 스가와라 코우시와 친구로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건 스가가 사와무라와 친구로 지내고 싶지 않은 그 마음과 정확히 일치하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일치했기에 전하지 못하는 감정과도 같았다. 그래도 스가와라 코우시는 상황이 좀 나은 편이었다. 이런 자신이 위로할 수 있으니까. 시린 겨울에 또다시 홀로 실연한 스가와라 코우시를 보며 쿠로오는 실연당한 자신을 달랬다. 자신이 아니면 이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을 달랠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살살 반대편 손을 뻗어 흘러내리는 스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이 손끝에서 조금의 다정함이라도 네가 느껴주면 좋으려만. 야속한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얼마나 그렇게 감고 있었을까. 파르르 속눈썹이 떨리며 술에 젖은 눈동자가 다시 쿠로오 앞에 드러났다.
"술, 더 마시고 싶어."
"안돼. 많이 마셨어."
"먹고 죽을래."
"먹고 죽을 만큼 낼 돈도 없잖아."
현실적인 쿠로오의 말에 발딱 고개를 든 스가가 인상을 찌푸렸다. 손바닥 위의 찰나의 온기가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아쉬운 마음을 애써 감추는 쿠로오를 노려보며 스가가 따져왔다. 친구를 위해서 술도 못사줘? 라고.
"네가 마시고 죽을 만큼 살 돈은 없고, 집에 갈 택시비는 있으니까 나가자."
"추워서 나가기 싫어."
"집에 가면 따뜻해."
"아냐, 집이 더 추워."
혼자 남아서 다이치 생각하면 더 춥단 말이야. 징징거리는 목소리에 쿠로오는 살짝 입술을 물었다. 그럼 사와무라 생각을 안 하면 되잖아.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는데 그걸 제안할 수 없는 자신이 미련했다. 그럼 스가와라 코우시 생각을 안하면 되잖아. 추운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다시 테이블 위로 누우려는 그를 손바닥으로 막아냈다. 이렇게 버젓이 영업하는 곳에 그를 두고 갈 수는 없었기에 쿠로오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스가와라의 코트와 짐을 챙겼다. 뚱한 얼굴로 나가지 않겠다고 칭얼거리는 아이 같은 남자에게 코트를 입혔다. 목 끝까지 단추를 채웠다. 이 겨울이 그를 괴롭히지 않도록 틈 없이. 이 날씨에 목도리는 또 어디다 두고 왔는지 보이질 않아 자신의 것을 둘러주었다. 이 바람이 그의 뺨을 햘퀴지 못하도록 단단히.
"정신 차려."
흔들흔들 고개를 움직이는 그에게 경고하듯 엄하게 말하며 쿠로오는 서둘러 팔을 당겨 일으켜 세웠다. 고개만큼이나 가누지 못하는 몸을 부축한다는 핑계로 제 품에 당겨 안으며 숨을 참았다. 아 젠장, 좋아서 욕이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이런 순간이 아니면 안아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시간도 멈추고 숨도 멈추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까득 이를 악물며 참아낸 쿠로오는 서둘러 스가를 떼어냈다.
"두 발로 서. 얼른."
"..왜에. 업어줘."
"안돼. 너 술 먹고 애처럼 구는 버릇 고쳐."
자신의 앞에서만 이러는 것이라면 두 팔 벌려 환영이었고 다행이었지만 술이라는 것이 원해서만 마시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놈들 앞에서 이렇게 추태 아닌 추태를 부릴 모습을 상상하니 슬슬 짜증이 치밀어 충고했으나 살살 웃으며 한다는 소리가-
"싫어!"
라는 반항의 목소리라 기가 찼다.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며 쿠로오는 서둘러 문을 열고 밖에 벗어 둔 구두를 가져와 던지듯 내려놓았다. 어차피 때릴 곳도 없었다. 던져진 구두에 마구잡이로 발을 구겨 넣은 스가와라가 가방에서 제 지갑을 찾아 내밀었다. 하지만 쿠로오는 그것을 손으로 밀어 다시 가방에 넣어주었다.
"됐어. 내가 계산할게."
"왜. 그러라고 너 부른 거 아니야."
"몇 번째인지 모를 너의 실연을 축하하는 내 마음이야."
못된 소리! 울상으로 변하는 그 얼굴이 빽 외쳤다. 그래 그렇게 내 말에 상처받고, 아파서 좀 잊어라 잊어. 쿠로오는 그 마음을 담아 엉망으로 스가의 머리카락을 흩트린 후 계산대로 향했다. 너의 실연과, 나의 실연을 축하하며. 축사와 같은 멘트를 떠올리며 쿠로오는 계산대 앞에 섰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실연의 날이 더 많았다. 스가가 저 작은 입으로 사와무라 다이치라는 이름을 담는 그 순간순간이 쿠로오에게는 실연과 닮아 있었으니까. 이제는 그 익숙한 실연들을 떠올리며 쿠로오는 지갑을 꺼냈다.
"하아."
가게 직원이 내민 계산서와 동시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어마어마하게 마신 스가와라 코우시로 인한 한숨은 아니었다. 이 겨울의 바람 만큼이나 갈피를 못 잡는 자신의 마음에 대한 한숨이었다. 이 떠도는 실연에 대한 한숨이었다. 계산을 끝내고 가게를 나오자 스가와라 코우시가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서 있었다. 찬 바람에 술이라도 깬 걸까 싶어 다가가니 홱 고개를 든다. 속상하게도 그는 울고 있었다.
"왜 울어."
"몰라, 서러워."
"..."
"서러워서 눈물이 막 나."
그래도 참을 생각은 있는지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버텨본다. 하지만 그 눈물은 그 의지를 배반하고 뺨을 타고 흘렀다.
"나 갈래."
"기다려, 데려다줄 테니까-"
"싫어! 혼자 갈 거야."
왜 술만 먹으면 저렇게 부리지도 않는 고집을 피우는 것일까. 돌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스가를 따라 쿠로오 역시 급히 발을 옮겼다. 따라오지 마! 웃기지도 않은 경고를 해온다. 그 무섭지도 않은 목소리를 깡그리 무시하며 쿠로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걸었다.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는 작은 등을 눈에 담으며 가만히.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구겨 신은 구두 탓인지 아니면 잔뜩 마신 술의 탓인지 스가의 몸이 기우뚱 무너져 내렸다.
"스가!"
쿠로오가 서둘러 그 몸을 잡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먼저 스가의 몸이 바닥에 닿았다. 요란하게 넘어지는 그의 모습에 조금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서둘러 달려간 쿠로오는 급히 스가의 손목을 잡아 일으켜 앉혔다. 제대로 넘어졌는지 무릎 부분이 아예 나가 찢어진 바지 사이로 상처가 드러났다.
"아파.."
"그래, 아프겠지."
왜 사람 말을 안 들어서 이 꼴을 당하느냐고 화를 내고 싶었는데 우는 얼굴을 보니 또 그럴 수가 없었다. 말을 잃어버린 자신이 멍청하다고 느끼며 쿠로오는 스가의 흙이 묻은 손을 잡아 살살 털어냈다. 다행히 피를 본 곳은 무릎이 전부인 모양이었다.
"일어나. 업어줄게."
"싫어.."
"왜 아까는 업어 달라며."
"다이치가 아니면 싫어."
"다이치는 너 안 업어줘."
자신이 조금 잔인하다고 느끼면서 쿠로오는 거침없이 그렇게 말했다.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뚝뚝 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저 빌어먹을 눈물은 도대체 언제 멈추는지 누가 좀 알려주면 속이 편하겠다. 혀를 차며 서둘러 찬 손으로 스가의 눈물을 닦아내자 바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게 왜 나를 이렇게 못되게 만들어. 왜 그런 소리를 해서 날 또 이렇게 못되게 만들어. 쿠로오는 뱉지 못하는 화를 겨우 집어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
"싫어."
"바닥 차다. 스가와라 코우시. 입 돌아가세요."
"네가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지."
네가 입이 돌아가면 내가 얼마나 또 속상하겠어. 쿠로오는 닿지도 않는 제 마음을 중얼거리며 살짝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실례."라는 경고와 함께 그의 등과 무릎 아래로 팔을 넣어 안아 들었다. 당황해서 "내려줘!"라고 외치는 그 목소리를 밀어내며 근처의 벤치에 앉혀주었다. 바둥거리던 몸을 내려놓으니 그제야 잠잠해진다. 이대로 한동안 또 울며 청승을 떨겠구나. 쿠로오는 예상되는 스가와라 코우시의 패턴을 떠올리며 자신의 코트를 벗어 그 위로 덮어 주었다. 시린 바람이 온몸을 긁어 놓는듯했지만 스가가 감기에 걸리는 것보다야 나았다.
"구두 가져올게. 가만히 있어."
휑하니 아까의 자리에 놓여있는 구두를 가지러 몸을 돌렸다. 등 뒤로 끅끅 울음을 참아내는 애처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감정을, 마음을 그만두고 싶은 순간 그만둘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스가와라 코우시도 저도 그것을 하지 못해 이렇게 멍청했다. 덩그러니 놓인 구두를 들고 다시 그에게 향했다.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꽉 쥔 주먹 위로 눈물들이 쉴 새 없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만 울어, 너 내일 못생겨져."
놀리듯 달래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런 그의 뺨을 거칠게 슥슥 닦아낸 후 가만히 찬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구두가 벗겨진 발목을 조심스레 잡아 들었다. 이번에는 구겨 신지 않도록 뒤쪽을 당겨 아프지 않게 신겨주었다. 그리곤 자신의 가방을 뒤져 폼으로 들고 다니던 꽤 비싼 손수건을 꺼내 피가 밴 상처 위로 감아 묶어 주었다.
"쿠로오-"
"왜."
아슬하게 짧은 손수건이 풀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마무리 한 쿠로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건조하게 대답했다.
"나, 다이치랑 친구 하기 싫어."
울먹이며 말하는 목소리에 가슴이 아팠다.
"친구 하기 싫어..."
"그래, 알아."
왜냐면 나도 그래. 나도 스가와라 코우시랑 친구 하기 싫거든. 쿠로오는 차마 그 말을 뱉지 못하고 입안으로 삼켜냈다. 목이 썼다. 손을 뻗어 여전히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받아냈다. 이번에는 조금 부드럽게. 스가의 눈물로 제 목도리가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그런 건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사와무라 다이치를 위해 우는 이 눈물을 멈출 수만 있다면 목도리 즈음이야 한 개든 두 개든 버리면 그만이었다.
"나도 너랑-"
친구 하지 말 걸 그랬어. 너와 가까워지지 말걸 그랬어. 너를 이렇게 애처롭게 느끼지 말 걸 그랬어. 너를 이렇게 사랑스럽다고 생각하지 말 걸 그랬어. 그랬더라면, 그냥 작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면 엉망인 이기심으로 멋대로 네 감정 따위는 무시하고 내 마음을 급급하게 전했을 텐데.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왜 자신의 마음은 조금도 그에게 닿을 수 없는 걸까. 보이지 않는 벽이 사이를 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쿠로오는 천천히 스가와라 코우시의 찬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 벽을 뛰어넘어 이 마음을 전하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자신의 감정으로만 행동하기에는 스가와라 코우시가 너무도 소중했다. 그가 울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이렇게 아프지 않기를 바랬다.
그렇기에 쿠로오 테츠로는 오늘 다시 실연했다. 아마 내일도, 그 후에도, 머나먼 언젠가도 자신은 늘 실연의 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었다. 스가와라 코우시가 소중한 만큼 그 날들은 언제까지고 늘어만 갈 것이었다.
쿠로오는 천천히 잡은 손 위로 뺨을 대었다. 돌려 기댄 자신의 뺨 위로 뚝뚝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울지마." 닿지 않을 목소리를 한 번 더 내어 보았다. 간절한 바람은 날카로운 바람에 흩날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올해도 여전히 시린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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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른 전력 / 겨울
쌍방 실연. 호우.
여전히 지각이라 나도 확인 못하고 올리는 중... 조만간 수정 하게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