끽끽 배구화 소리가 울리는 코트를 바라보며 스가는 무릎을 세워 허벅지에 받친 종이에 의미 없는 단어들과 글을 나열했다. 이런 식으로 적으면 후에 정리하기 불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새인가 손에 붙은 습관이기도 했다. 강력한 스파이크의 울림과 함께 세트 종료의 휘슬 소리가 울렸다. 얼마 되지도 않은 관중들의 박수소리가 조용한 체육관을 울렸다.
"어때? 잘 써져?"
다정한 목소리에 스가가 고개를 들었다. 웃으며 벽을 짚고 선 사내가 "응?" 하고 다시 물어왔다. 막 경기를 끝낸 모습이라 떨어지는 땀을 막기 위해 그가 걸치고 있던 수건으로 얼굴을 훔쳤다. 그 모습을 올려보며 스가는 말 대신 받치고 있던 종이를 뒤집어 보여줬다. 엉망인 그 내용에 사내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걸로 정말 괜찮은 거야?"
"가서 정리하고 손 봐야죠."
"대학 생활 너무 편하게 한다. 너."
아키테루의 참견에 스가는 인상을 슬쩍 구겼다. 그러자 그가 보기 좋은 미소를 그리며 엄지손가락을 뻗어왔다. 그리곤 꾹꾹 스가의 미간을 펴 주었다.
"과제 도와줬으니 밥 사줄 거야?"
"학생에게 얻어먹으면 좋으세요?"
"응."
천진난만하게 웃는 그 얼굴에 스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바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금 여유가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며 뒤돌아서는 사내를 보며 스가는 서둘러 자신의 짐을 챙겼다.
츠키시마 아키테루는 자신의 고교 후배 츠키시마 케이의 형이었다. 사실- 츠키시마에게 형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꽤 최근의 일이었다. 졸업한 지 벌써 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유지가 되는 카라스노의 단체 채팅방에서 스가가 과제 한탄을 한 것이 이 일의 시작이었다.
[신방과 이번 과제가 스포츠 기사 쓰기라는데 팀을 취재하래. 누구 배구 하는사~람~]
의미 없는 정확하게 말하면 땡깡에 가까운 그 메시지에 대답한 것은 평소에 제일 말이 없는 후배 츠키시마였다.
[저희 형이 실업 배구팀에 있어요. 여쭤봐 드릴까요?]
츠키시마에게 형이 있다고? 아니 그보다 배구를 하고 있다고? 꽤 놀라운 이야기였다. 어쨌거나 막막한 과제를 도와줄 수 있다는 그 말에 스가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을 소개해준다는 그 당일에 츠키시마는 마치 신신당부 하듯이 경고했다.
"딱히 대단한 팀도 아니고 대단한 선수도 아니니까 기대하지 마세요. 절대로."
"선배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멋진 선수도 아니고 멋진 사람도 아니에요."
살짝 부끄러운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말이 어쩐지 스가에게는 다르게 느껴졌다. 자신이 실망할까 봐 서둘러 형을 변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소개받은 형 츠키시마 아키테루는 기본적으로 인상이 참 좋은 남자였다. 이제 막 완벽한 어른의 형태를 띄운 그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로 "케이의 고교 선배? 그럼 너도 배구 했어?" 라며 괜히 아픈곳을 찔러왔다. 했죠, 했는데 후보였어요. 완전 못했어요. 스가는 괜히 심술이 나서 그렇게 뱉었다. 배구를 좋아했냐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네라고 답할 수 있었지만 잘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은. 좋아하는 일을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는 어떻게 될 수 없었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애초에 아무것도 없는 스가와라 코우시는 어떻게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3학년때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나서는 가끔은 배구를 선택한 것이 후회될 정도로 괴로웠다. 특히 센터 시험을 앞두고는 공부가 아닌 배구를 선택한 것은 두고두고 그러했다. 코트 위에 몇 번이나 섰더라, 그래도 1,2학년때는 꽤 섰었는데. 가장 화려했던 시기인 3학년 때에는 코트 위에 자신의 자리가 없었다. 그래도 욕심이 나서, 코트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괜한 오기를 부리기도 했었다. 완벽한 후배 앞에서 좋은 선배인 척 굴었지만 사실은 몇 번이나 코트에 서고 싶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 과거의 뒤틀린 자신을 떠오르게 하는 그 질문에 완벽하게 츠키시마 아키테루의 첫인상은 스가에게서 아웃에 가까웠다. 물론 그 질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텐데도.
"오래 기다렸어?"
체육관 앞에서 얼마나 있었을까 간편한 저지 차림으로 나타난 그가 서둘러 달려왔다. 스가가 손목에 찬 시계를 돌려 보여주었다. 시합이 끝나고 벌써 30분이나 지난 시간이었다.
"우와, 미안. 그래서 삐졌어?"
"제가 앱니까? 이런 걸로 삐지게?"
"뚱한데 뭘. 그럼 오늘은 그냥 내가 밥을 사줘야겠네. 우리 미래의 기자님 수고하셨으니까."
"으.. 그 호칭 그만두세요."
"왜, 기자가 되고 싶어서 선택한 공부 아니야?"
아니었다. 적당하게 성적에 맞춰 과를 골랐고 전망이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로 간단하게 고른 진로였다. 미래도 꿈도 지금의 스가에게는 그런 식이었다. 흐르는 대로 적당히. 무언가 되겠지 라는 마인드. 그래서 사실 이 과제 자체에도 그다지 대단한 열정도 없었다. 처음에는 대충 이야기를 듣고 대충 기사를 써낼 생각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우리 팀 연습 보러와, 시합 보러와! 라고 제안하는 아키테루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끌려다니는 중이었다. 하지만 스가는 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입을 꾹 다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만히 말을 기다리던 아키테루는 포기했는지 "뭐 먹을래?" 라며 가볍게 대화의 흐름을 바꾸었다.
근처에 뭐가 맛있고 어디가 괜찮은 집인지 나열하며 그와 나란히 걷는 길, 스가는 문득 시선을 돌려 자신의 눈높이에 온 그의 팔뚝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운동을 했는지 단단한 모양이었다. 거기다 벌어진 어깨나 살짝 스가보다 높은 신장은 누가 보아도 운동선수의 것이었다. 저 피지컬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밤낮으로 게으름을 잊고 살았겠지. 운동이며 식단까지 꼼꼼하게 관리 하겠지. 성실한 남자니까 분명 그럴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스가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불렀다.
"아키테루상."
"으응?"
"아키테루상은 왜 그렇게 열심히 해요?"
"뭐?"
그도 그럴게- 프로팀도 아니었다. 작은 회사의 실업팀이었다. 이 동네에서나 유명하지 배구 팬이라도 이 팀의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더 수두룩하게 많을 것이었다. 오늘도 경기라면서 응원석은 거진 텅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왜 당신은 항상 그렇게 웃고 있을까, 그런데도 왜 당신은 항상 그렇게 코트 위에 서는 걸까. 이 일에 의미는 있느냐고, 보람은 있느냐고 스가는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이 말을 표현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입술만 달싹였다.
"으음. 묻고 싶은 게 근본적인 이유야? 그럼 그냥... 배구가 좋으니까?"
"단지 그 이유에요? 좋으니까?"
"응. 좋아하니까. 그냥저냥한 팀이고 그냥저냥한 성적이지만 코트에 있으면 즐거워. 그게 다야."
"그러면.. 괴롭지 않으세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과거, 19살의 스가와라 코우시는 괴로웠다. 좋아서 버텼지만 코트에 설 수 없어서 괴로웠고 우승을 하지 못해서 괴로웠다. 아무렇지 않은 척 참았지만 그 뒤에서 울던 날이 샐 수도 없이 많았다. 좋아하는 일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버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간단한 대답이라니. 조금 믿을 수가 없었다. 스가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아키테루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숙이더니 입술을 삐죽이며 웃었다. 너무하네, 라는 표정이었다.
"음- 괴롭지. 이왕 선수 생활을 하니 좀 더 큰 무대에도 나가보고 싶고 욕심도 나. 그런데 뭐 이미 난 늦었지. 나이도 있고, 그렇다고 실력있는 프로 선수처럼 능력이 되는 것도 아니고."
"...."
"케이에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고등학교때 나 배구부에서 서브에도 들어가지 못했어. 응원석에 서서 같은 동료들을 응원했지. 그때는 그게 무척이나 창피하고 쪽팔려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케이에게 항상 거짓말을 했었지."
"무슨 거짓말이요?"
"주전이라고, 에이스라고. 중학교 때는 그랬거든. 그냥 내 못난 자존심이었어. 머리가 커지고 더 큰 세상에 나오니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걸 스스로 인정하는 게 무서웠던 거 같아."
그의 목소리가 씁슬하게 울렸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거든."
"...."
"고작 19살 소년이 감당하기에 응원석이나 손에 든 깔때기가 무거웠을지 몰라도 지금 생각하면 그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은 더 힘들고 감당하기 힘든 일이 많으니까. 예를 들어 급여가 밀린다거나?"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스가와라군이 나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그래도 이 일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아. 지금은 19살의 나를 칭찬해주고 싶어. 그렇게라도 배구라는 세계에 버텨준 것을. 포기하지 않은 것을. 그때의 내가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거든. 그래서 솔직히 이름없는 팀이라도 감사해. 그때에 비하면 나 완전 성공한 거잖아. 코트 위에서 뛰고 있으니까."
"그런가요?"
"응, 그런 거지. 누구에게나 이야기는 있고 그 이야기가 이루는 인생이 있어. 내 인생은 이거야. 번쩍번쩍 멋지고 레드 카펫이 깔린 멋진 길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그걸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거야."
"..."
"그러니까, 스가와라군도 조금은 자신에게 열중하는 게 어때? 미래의 스가와라 코우시를 위해서."
아, 정곡을 찔렸다. 결국 자신은 이런 위로가 받고 싶었던 걸까? 갈피를 잡지 못하는 불안한 미래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손에 무언가 비치기를 채워지기를 바랬던걸까. 아키테루의 말에 스가는 어쩐지 웃을 수 없었다. 당황한 얼굴로 그저 가만히 입술을 물었다.
"잘하지 못해도, 괜찮아. 모두에게나 산다는 것은 처음이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잘 할 수 없는거야."
"..."
"그래도 스가와라군 잘 버텨왔으니까, 이제 조금만 본인에게 열중하고 열심히 해봐. 그럼 분명 언젠가 스가와라군도 알 수 있을꺼야. 자신이 좋아하는 일."
살짝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을 장난스레 흩트려 놓았다. 동시에 시원한 바람이 뺨을 쓸었다. 자, 그럼 뭐 먹을까? 그리 물으며 돌아서는 사내의 등이 유난히도 단단하고 커 보였다. 스가는 서둘러 츠키시마에게 메일이 하고 싶었다. 틀러 츠키시마, 너희 형 진짜 멋진 사람이야. 어쩐지 목이 뜨끈해지는 것 같아 서둘러 손바닥으로 눌러 감쌌다. 그리곤 발을 재촉해 나란히 그의 곁에 섰다. 방금 아주 조심스럽지만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 같았다. 츠키시마 아키테루 같은 어른이 되는 것. 하지만 창피하니까 절대로 그에게 말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말한다면 분명 그는 웃으며-
"어?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야."
라고 말할 것이었다. 그리곤-
"그래도 스가와라군이 그렇게 말해준다니, 조금 기쁘다."
라고 웃어 보일 것이었다. 스가는 머릿속으로 가만히 그런 어른을 그리며 함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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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스가 파세요. 개이득 b
영화보러 나가야해서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