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추억편 스포 주의
아플 정도로 쏟아 내리던 빛이 사라졌다. 수고하셨습니다, 하카제 카오루는 들러붙은 피로를 애써 감추며 고갤 숙여 인사했다. 해가 꼭대기에 올라와 있을 때 시작된 촬영은 깜깜한 어둠이 내리고서야 모두 끝이 났다. 분주하게 현장을 정리하는 스태프를 두고 차로 향하며 하카제는 주변을 살폈다.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매니저가 한달음에 달려와 물병을 내밀었다.
“수고했어.”
“이거로 일정 다 끝난 거지?”
“어.”
일주일도 되지 않는 스위스에서의 촬영. 곧 나올 개인 사진집을 위한 스케줄로 한 달 사이에 벌써 3번이나 유럽 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리 잡힌 국내 스케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진행하는 강행군이었지만, 해외 촬영을 요구한 건 하카제쪽이었기에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불만이 없기도 했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빡빡한 스케줄에 치이느라 유럽에 올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무리해서 온 스위스, 촬영도 최대한 빠르게 끝내고 시간을 벌고 싶었으나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다.
“귀국이 언제라고?”
“내일 8시. 미안, 더 조정해보려고 했는데 돌아가자마자 광고 촬영이 있어서 조절이 어렵더라고.”
“..하루.”
스위스에서 남은 시간을 넉넉하게 계산해봤지만, 고작 하루. 하아. 입김을 타고 흐르는 연기가 제 속을 닮았다 생각하며 하카제는 서둘러 차에 올랐다. 얼마 남지 않은 자유시간에 제 기분이 상했다 느끼는지 “어디 펍이라도 찾아볼까?”라 달래왔지만, 고개를 저었다. 술보다는 시간이 고팠다. 촬영을 빠르게 끝내고 삼 일은 벌어 볼 생각이었는데. 모든 일이 제 마음처럼 흘러주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속은 상했다.
“그냥 방에 있을 거니까, 내가 연락할 때까지 찾지 마.”
듬성 듬성 가로등이 내린 도로를 달려 호텔에 도착하게 무섭게 하카제는 급히 차에서 내리며 요구했다. 딱 자른 요구에 처음엔 “무슨 수상한 짓을 하려고!”라 발끈했던 매니저도 매번 해외 스케줄마다 반복되는 요구에 익숙해졌는지 이젠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밤 보내! 등 뒤로 달라 붙는 인사에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슬쩍 담아보며 룸으로 향했다. 아침에 얼렁뚱땅 벗어 놓고 나간 가운이나 던져놓은 슬리퍼 따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새것으로 교체되어 정리되어 있었다. 메이크업도 지우지 못한 얼굴을 거울로 요리조리 뜯어보다 덜렁 침대에 누웠다. 조용히 흘러가는 시계 바늘 소리와 함께 입안이 자꾸 말라갔다. 초조함. 생방송을 앞두고도 잘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굳이 이름까지 붙여가며 하카제는 굳게 닫힌 방문을 가만히 보았다.
“...이야기는 했는데.”
스위스에 오기 전, 피렌체에 있는 세나 이즈미에게 슬쩍 말을 흘렸다. 일주일 동안 스위스에 갈 예정이야. 그 말에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말이 돌아왔으나 세나의 반응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 말이 그와 함께 있는 츠키나가 레오에게 들어가 다른 누군가에게로 흐르길 바랄 뿐이었다. 물론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제가 어디서 뭘 하는지 정도야 쉽게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벌써 만나지 못한 게 석 달째. 신카이 카나타를 보지 못한 게 벌써 석 달째였다.
“해외에 가기로 했어요.”
졸업을 앞두고 신카이 카나타는 마치 내일의 날씨를 떠들듯 평온하게 말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만 알았다. 아, 그래. 대충 대답하고는 한참 뒤에야 “뭐?”라고 되물었으니까.
“집안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요.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이니까요.”
뽀득뽀득, 소리가 나도록 수조를 닦아내며 신카이가 조용히 말했다. 그의 집안에 대해선 하카제 카오루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일로 그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쉽게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것 역시도.
“저기, 카나타군. 집안 문제로 힘들어지면 도망쳐 오라고 했던 말 기억해?”
그래서 했던 말이었다. 19살 소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해결 가능한 문제였으면 진즉 이쪽이 먼저 해치웠지. 하지만 이 땅에 오래 전부터 또아리를 틀고 줄기를 내린 어둑한 믿음은 그리 쉽게 불타 사라질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도망쳐 오라고 했다.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어도 꽁꽁 숨겨줄 수는 있으니까.
“기억해요.”
그걸 모르진 않을텐데. 더 잘알고 있을텐데.
“그럼 내가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말은?”
그러니 절대로 그의 의견에 긍정적으로 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 왜 저런 소릴 하는 걸까. 하카제는 저도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기억해요.”
“그런데 왜 그런 소릴 하는 거야.”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에요.”
“그래, 그렇겠지. 맞아. 그런데 그걸 카나타군이 할 필요 없어. 무시해. 나에게 도망쳐 오면 되잖아.”
“카오루-“
“내가 카나타군을 허락하고 말고 할 주제가 못되는 건 아는데. 그래도 난 싫어. 내 동의가 필요한 일이 아닌 것도 아는데, 그래도 난 싫다고. 하지마. 더는 그 문제에 관여하지 마.”
또다시 누군가의 소원을 들어주고 그 바람을 듣는게, 이루어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신카이 카나타는 싫었다. 이 땅의 안정을 위해서 재물처럼 신의 노릇을 하는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고 눈앞이 돌았다. 거기서 벗어나와 이제야 웃으며 노래하고 지내면서, 다시 또 그 구렁텅이로 들어가겠다니. 절대로 안될 말이었다.
“깡...아니 미케지마와 같이 갈 거예요.”
“....”
“그가 포기하지 않는 이상, 저도 포기할 수가 없어요. 카오루. 같이 가야 해요.”
혼자 가라고 해. 그 말이 목까지 차올랐으나, 그 소리를 뱉는 순간 미움을 받을 거 같아서 간신히 참았다.
“마음대로 해. 언제나 그랬잖아. 이번에도 그럴 거면서 왜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건지 모르겠어.”
말은 참았으나 화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하카제는 소파에 길게 뻗어있던 다리를 굽혀 몸을 일으켰다.
“내 입에서 좋은 소리 듣고 편하게 떠나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게는 못 해줘. 내 마음이나 기분은 카나타군에게 상관도 없을 텐데 왜 내가 카나타군 생각까지 해줘야 해?”
단 한 번도 그에게 이렇게 매몰차게 군 적이 없어서 어려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쉬웠다. 그대로 부실을 떠나 졸업까지 그의 간절한 시선을 모르는 척 무시하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제 단호함에 그가 꺾여주길 바라며 버텼다. 하지만 신카이 카나타는 굽히지 않았다. 그의 고집에 대해선 오래 알고 있던 사실이라 서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졸업식. 무시하던 저를 붙잡고 신카이 카나타가 약속했다. 연락할게요, 만나러 올게요, 라고. 그런 말에 넘어가지 않으려 버텨온 거였는데, 어차피 고개를 젓나 끄덕이나 그가 떠나는 게 현실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편해야지. 그리고 그게 신카이 카나타였으면 했다. 하카제 카오루는 또 져주었다.
그렇게 떠난 신카이 카나타는 가끔 엽서를 보냈다. 잘 지내는지, 잘 먹는지 그런게 궁금한 사람에게 늘 물고기나 바다 이야기를 떠들곤 했지만 그게 오히려 잘지낸다는 말보다 더 와닿았다. 그러다 가끔은 불쑥 만나러 와주었다. 해외 스케줄이 있을 때마다 호텔방을 두드리거나 잔을 기울이던 테이블 반대편에 나타났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어디서 지내는지 묻고 싶었지만 저를 만나러 시간을 내고 찾아 오는 신카이 카나타를 상상하는게 좋아 묻지는 않았다. 일본에 언제 돌아올거냐고도 묻지 않았다. 다시 언제 또 볼 수 있냐고도 묻지 않았다. 그가 보내는 엽서나 가끔 보여주는 얼굴로도 일단은 호흡을 이어갈 수 는 있었고 여전히 하카제 카오루는 신카이 카나타가 제일 편하길 바랐으니까.
하루, 가끔은 반나절, 어떨 때는 한 시간. 그보다 더 못한 순간도 더러 있었다. 스쳐 지나가거나 차를 마실 틈도 없이 입술만 닿는다거나 그런 찰나들. 그래도 그 짧은 혹은 긴 시간을 얻기 위해 하카제는 대부분의 일정을 해외에서 처리하길 원했다. 잡지 화보도 외국 로케라고 하면 무조건 오케이. 오키나와에서 있을 광고 촬영도 억지로 예산을 불러 하와이로 옮긴 적도 있었다. 이번에도 굳이 유럽까지 올 필요도 없는 일이었으나 억지를 부렸다. 사진집을 사는 사람들은 하카제 카오루가 선 곳이 스위스인지 스웨덴인지 관심 없을 텐데 욕심을 부렸다.
“석 달이나 방치는 좀.. 무서운데.”
여전히 조용한 문을 바라보며 하카제는 눈을 문질렀다. 조금 피곤했으나, 더 버틸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동안 엽서는 두어통 받았지만, 얼굴을 보지 못했다. 뺀질나게 비행기를 타고 온갖 곳을 다 돌았는데.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은데 그게 여의치 않아 목이 탔다. 오늘도 못 보면 어쩌지. 불안하고 불행한 상상은 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컨트롤하며 지냈지만, 이렇게 타지에서 적막한 밤에 잠겨 있으면 스멀스멀 피어나곤 했다. 미케지마 마다라가 함께 있으니 괜찮겠지만, 그래도. 정말 그래도. 곁에 있는 게 하카제 카오루는 아니니까.
“역시 비행기 스케줄을...”
미루는 게 좋겠어. 하루라도 더. 그리 생각하며 매니저에게 연락하기 위해 막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시곗바늘 외에는 무엇도 소릴 내지 않던 공간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하카제 카오루는 자신이 룸서비스를 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튕기듯 침대에서 나와 서둘러 제대로 잠그지 않은 룸의 문을 열었다. 서늘한 공기와 함께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가 문가에 서 있었다.
“오랜만-“
이라 반갑게 인사하는 그의 찬 뺨을 붙잡았다. 안으로 들이기도 전에 입술부터 빼앗았다. 처음 어정쩡하게 다물고 있던 신카이 카나타는 이제 제법 입술을 벌리고 저를 맞이하는데 익숙해졌다. 손바닥에 안긴 뺨과 달리 그의 안은 습하고 따뜻햇다. 남김없이 그 온기를 탐하며 하카제는 신카이를 방으로 끌어들였다. 기다림의 끝을 알려주듯 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안오는 줄 알았어.”
떨어진 입술 사이로 투정을 부렸다. 미안해요. 달래듯 그가 허리를 끌어안으며 사과했다.
“독일에 있었어요. 아시아의 설화에 대해 연구하는 교수님을 뵈러 갔는데, 신도 몇이 붙어서요. 그래서 빙글빙글 도느라-”
“그런 소린 나에게 해줄 필요 없어.”
“그래요?”
“응.”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덜컥 겁이 나서 당장 모든 걸 멈추게 하고 싶을 거 같으니까. 그러니 자신이 알아서 좋을 건 없었다. 하카제는 아직 달라붙은 찬 기온을 신카이에게서 떨어트리며 침대로 이끌었다. 어디서 사 입었는지 모를 후즐근한 코트를 벗어 내며 신카이가 입을 열었다.
“12시까지 기차역으로 가봐야해요.”
“신데렐라도 왕자에게 그런 소린 안했던거 같은데.”
“그야, 전 신데렐라가 아니잖아요.”
푸흐흐 웃으며 농담을 받는 그의 코잔등에 살짝 입술을 붙였다 떼었다. 그리곤 꽉 끌어안았다. 자연스레 뒤로 넘어가는 그의 몸과 함께 침대에 누웠다. 품에 안은 몸이 전보다 좀 더 마른듯했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해가 뜨고 달이 뜨고 계절이 변화하는 동안 함께 변화할 그와 함께하지 못함이 언제나 서운했고 서러웠다. 신카이 카나타가 자랐는지 말랐는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매일 함께하고 싶었는데. 입으로 뱉을 수 없는 소원을 떠올리며 하카제 카오루는 그 언젠가 그와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소원을 들어줄게요.”
지금보다 작았던 신카이 카나타가 웃으며 물었다. 그때, 빌어볼 걸 그랬어. 어디도 가지 말고 계속 내 곁에 있어 달라고. 아마 다정한 신은 그 소원을 들어주었을 텐데.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소원이 아니라 억지였다. 신카이 카나타가 그 억지에 매여 곁에 남는 건 제가 바라는 것과는 모양이 많이 달랐다.
“카나타군.”
“네?”
“즐거운 이야기를 해줘. 뭘 보고 뭘 먹고 뭘 했는지 이야기를 들려줘.”
그 억지를 빌기 전에 하카제는 신카이 카나타의 행복을 확인하고 싶었다. 가만히 제 팔 안에 갇힌 머리통이 고민하듯 무게를 늘리더니 이내 웃으며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만난 사람들, 보고 먹은 것들, 느끼고 소유하게 된 감정들. 아마 소원을 빌었으면 누리지 못했을 그의 세상을 가만히 들으며 하카제 카오루는 새로이 제 신에게 빌었다. 부디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자신의 소원은 아무래도 좋으니 품 안의 이의 소원은 이루어지길. 그렇게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