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유키] finale
2019. 2. 24. 22:06
계절은 쉼 없이 바뀐다. 꽃이 떨어져 나간 나무들을 스메라기 텐마는 멍하니 눈에 담았다. 푸른 잎 사이로 태양 빛이 흘러나오는 걸 보니 곧 여름이 올 모양이었다. 여름, 천천히 입안으로 단어를 굴렸다. 전에는 이 단어 하나에 가슴이 뛰고 손가락이 저릿한 적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무료하고 또 적막했다. 불꽃놀이니 축제니 페스티벌이니 가장 활동적이고 신이 날 계절인데 스메라기 안에서는 마치 겨울의 느낌과 닮아있었다. 언제부터였더라.



"피곤해 보이네요, 텐마군."



차가운 감상에 빠진 게 다르게 보였는지 운전대를 잡은 매니저 이가와가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아침부터 인터뷰에 라디오에 쉴 틈이 없었으니 조금 피곤한 것도 같았다. 이 뒤에는 바로 광고 촬영이 있었다. 핫한 스타라면 누구나 한 번은 한다는 통신사 광고였다. 이 광고를 따내기 위해 이가와는 물론 자신의 사무실까지 거의 비상 대기조처럼 굴었다. 그렇게 어렵게 따낸 자리, 이런 감상에 취해 있을 틈이 없는데 훅 밀고 들어오는 여름의 풍경이 눈앞을 어지럽게 했다.



"몇 시부터 촬영이라고 했지?"
"촬영은 4시간 뒤고, 2시간 전에 스탠바이 예정입니다. 아, 그 전에 사무실에 들렀다 갈게요."
"사무실은 왜?"
"중요한 일이니 현장 가기 전에 얼굴 좀 보고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대표님이. 이가와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의 안내대로 차는 어느새 익숙한 길을 달려 작은 빌딩 앞에 멈춰 섰다. 에비하라 프로덕션이라 간판이 붙은 흰 건물은 5년 전부터 몸을 담은 기획사로 소속 연예인은 적었지만 대우나 관리는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의 아들로 더 알려졌던 스메라기 텐마를 온전한 스메라기 텐마로 만들기 위한 첫 선택이 바로 이 사무소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늘을 반대 속에서 벗어나 자리 잡은 곳. 프리 선언을 했을 때,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쉽게 다가오지 않던 오퍼들 속에서 에비하라 유스케 대표는 산뜻하게도 다가왔다.



"작은 소속사라 우리는 모든 인력을 텐마군에게 쏟을 수 있어요. 청춘스타는 20대에나 팔릴 이미지죠. 언제까지 순정만화 청춘 영화의 주인공으로 살 건가요?"



에비하라 대표가 던진 말은 스메라기 입장에서도 늘 고민으로 남았던 문제였다. 젊고 밝은 이미지를 내세우다 보니 들어오는 일들은 거기서 거기였고 그렇게 이미지가 고정되는 것에 늘 괴로웠다. 나중에는 선택권도 없이 다 비슷한 시나리오와 대본만 들어왔다. 그러던 중에 그의 제안은 꽤 고마운 것이라 거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계약을, 약속을 지켰다.  
이제 막 발을 뗀 신생 프로덕션치고는 파격적인 계약금을 제시해 스메라기 텐마라는 이름을 높여줬고 모든 인력이 자신을 위해 움직였다. 당시에 소속 연예인이라곤 저밖에 없어 그럴 상황이긴 했으나, 누군가의 아들이자 배우인 스메라기 텐마가 아니라 그냥 스메라기 텐마를 위해 움직여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거기다 오래 함께한 이가와까지 좋은 연봉으로 함께 데려와 줬으니 완벽한 대우였다.
그렇게 홀로서기를 시작해 벌써 5년, 건물은 여전히 작았으나 자신이 벌어온 돈으로 깔끔하게 인테리어 된 로비로 들어서며 스메라기는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등 뒤로 이제는 꽤 많아진 소속 연예인들의 프로필 사진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가운데에 위치한 제 얼굴을 바라보다 울리는 알림음에 좁은 상자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근데 뭐 큰 광고가 한두 번도 아니고, 갑자기 왜 얼굴 보이고 가라는 거야?"



대표실이 위치한 층을 누르며 묻자 이가와가 바닥만 바라보며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그, 얼마 전에 마치양이 그만뒀잖아요. 오늘 새 인원 보충하신다고.."
"아, 그럼 그렇다고 이야길 하지."



3년을 함께했던 스타일리스트가 유학을 이유로 그만둔 게 3주 전이였다. 그녀의 백업을 찾는 동안은 전담이 아닌 출장 형식으로 다른 스타일리스트나 숍에 들러 체크를 받았다. 적당히 괜찮은, 이라는 표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대표는 몇 번이나 직접 면접도 본 모양이었지만,  영 마음에 차진 않은 모양인지 새 인원이 충당되는 게 꽤 늦어졌다. 드디어 그의 눈에 누군가 들었다니, 약간은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궤도를 찾아 올라왔다. 자신이나 이가와나 패션 쪽은 영 아니었고 매번 모르는 얼굴과 인사를 나누고 몸을 맡기는 게 지긋지긋한 참이었다.



"어, 텐마군. 왔어?"



불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반긴 건 언제나 그렇듯 에비하라 대표였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앞에 앉은 사람을 향해 손을 뻗으며 미소를 지었다.



"시간 없으니까 바로 소개할게. 오늘부터 텐마군의 스메라기 팀에 들어갈 새 스타일리스트, 루리카와 유키군이야. 인사해!"



에비하라 유스케의 산뜻한 미소가 마치 악마의 것과 닮아 보였다. 천천히 몸을 돌린 상대는 마치 8년 전까지 있었던 일들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루리카와 유키입니다. 오늘부터 스메라기군의 스타일리스트로 일하게 되었어요."



스메라기는 입술 안을 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비명을 내지를거 같았으니까. 겨우 올려놓은 기분은 아까보다 더 바닥으로 아니 그보다 더 습한 곳으로 내리 떨어졌다. 이가와가 우물거리던 게 이 이유였다. 루리카와 유키, 8년을 잊고 지내려고 부단히도 노력한 이름이 다시 제게 튀어나왔다. 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볕에도 애써 눌러 감추고 무시했던 얼굴이 지금 제 앞에 서 있었다.



"음, 인사는?"



입을 다문 자신을 향해 대표가 물어왔다. 인사, 인사라. 우리가 반갑게 인사나 나눌 사이였나. 스메라기는 겨우 물고 있던 입술을 놓았다. 혀끝으로 잇자국이 느껴졌다.



"대표님,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나랑? 루리카와군이 아니라?"
"네. 대표님과요."
"아, 그래. 그럼... 자리 좀 비켜줄래요?"



그의 부탁에 루리카와가 끄덕였다.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는지. 가방을 챙겨 이가와와 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애써 무시하곤 스메라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조용히 스쳤다.



"다시 구해요. 스타일리스트."
"어? 왜????"
"싫으니까요."



억지스러운 소리였다.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이유에 에비하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감정적으로 굴면 될 일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고집을 부렸다.



"싫으니까? 왜 싫은데? 혹시 둘이 아는 사이였어? 내가 모르는-"
"아뇨. 모르는 사람이에요. 아까 봤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왜?"
"그냥 싫어서요."
"세상에 그냥 싫은 게 어디 있어?"
"얼굴이 싫어요. 입고 있는 옷도 싫고 그냥 싫어요. 그냥 싫을 수도 있죠."



말도 안되는 대답에 그가 입술만 벙긋했다.



"제가 억지 부린 적 없잖아요. 그냥 들어주세요."
"...그러니까 더 이상한 거지!! 날 이해 시킬만한 이유를 대야 나도 고민을 해보지, 얼굴이 싫고 입고 있는 옷이 싫다고...? 그런 이유가 어디있어."
"대표님-"
"지원서 넣은 사람 중에서 가장 괜찮아. 포트폴리오도 완벽했고 너랑 잘 맞을 거야. 스메라기 팀에 딱이라고!"
"...지, 지원서를 냈다고요?"
"그래. 어쨌든 내가 납득할 이유를 대지 않으면 나도 더 할 말 없어."



그가 단호하게 대화를 종료했다. 돌아서는 그를 붙잡고 당장이라도 "전에 사귀었던 사람이고 절 버리고 유학 간 놈이에요."라 고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뱉을 말이 아니었다. 하, 마른 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어느새 축축해진 손으로 스메라기는 제 눈가를 덮었다 문질러 내렸다. 문밖에 루리카와 유키가 있다는 사실에 숨이 막혀오는 거 같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던 주제에 이제와 처음 뵙겠습니다, 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에비하라가 저렇게 나오니 방법은 이제 하나였다. 루리카와 유키가 제 발로 떠나는 것. 한 번 해봤으니 두 번은 얼마나 간단하려나. 스메라기는 이를 악물고 대표실을 나왔다. 벽에 기대있던 루리카와 유키가 몸을 세웠다. 그의 손엔 자판기 커피가 들려 있었는데, 그게 참 미웠다. 누구는 속이 버썩 말랐는데 여유로운 커피 타임이라니. 참 미웠다.


"... 무슨 생각이야."



말은 딱딱하게 나갔고



"뭐가 말인가요?"



대답도 딱딱하게 나왔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 있는 거냐고. 누군가 들을까 억지로 억눌러 물었다. 이번에는 답이 없었다. 대신 그는 손에 쥔 종이컵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꼴이 보기 싫어 거칠게 잔을 빼앗았다. 거친 손길에 남은 커피가 넘쳐 손으로 쏟아졌지만, 뜨겁다거나 아프다거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구겨 쥐어 휴지통으로 던져버리자 지나가던 직원 하나가 빙그르 눈을 굴리다 서둘러 사무실로 숨어 들어갔다. 어디로 도망갈 수 없는 이가와만이 초조하게 주변을 살폈다.



"장난할 기분 아니야. 나."
"장난 아닌데요."
"아니라고?"
"네, 아니라고요. 하고 싶은 일이었고 좋은 기회라서 지원했을 뿐입니다. 그게 이렇게 거친 인사를 받을 만큼 문제가 되는 일인가요?"
"왜 문제가 없어? 유키, 네가-"
"그 일이 이 일과 무슨 관련이 있죠?"



말을 끊어먹고 그가 물었다.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는 정말로 모른다는 듯한 눈이었다. 무슨 관련이 있냐니.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니, 할 수 있었지. 참. 그래서 한 번 자신을 버리지 않았던가. 과거의 연인은. 그때도 이런 식이었다. 모든 게 갑작스러웠고 휘몰아쳤다.



"...왜, 왜 관련이 없어. 우리가-"
"사귀었던 거요."
"..."
"스메라기군, 정말 미안한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뭐?"
"사귀면 헤어져요. 결혼하지 않는 이상. 결혼해도 헤어지는 세상에.."
"..."
"헤어진 연인이라는 지난 관계 때문에 멍청하게 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제 커리어를 위해 능력을 보일 자리를 찾아 지원한 거고 그게 다예요. 다른 건 없어요."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면 그만 이동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가 손목에 감긴 시계를 바라보며 말을 돌렸다. 양쪽의 눈치만 살피던 이가와가 서둘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더니 주머니에서 꼬깃한 손수건 하나를 꺼내 건넸다. 하지만 넘쳐흐른 커피는 이미 마른 후라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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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 유키와 보낸 계절에서 졸업 못한 스메라기 텐마가 보고시퍼서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