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 그리고 그 위의 반짝이는 사내. 그가 흘리는 땀, 흐트러지는 호흡 그럼에도 집중력을 잃지 않는 눈빛. 스가는 그 완벽한 풍경을 눈에 담으며 문득 궁금해졌다.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배구를 빼면 뭐가 남지?
-"미안해. 출장 다녀와서 너도 힘들 텐데."
"아니야, 괜찮아. 이미 와 있어."
가라앉은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에 스가는 핸드폰을 다른 쪽으로 바꿔 받으며 서둘러 가방에서 키를 찾았다. 지갑과 노트 그리고 비타민 통이 굴러다니는 자그마한 쓰레기통과 같은 그 안에서 어렵지 않게 손가락 끝으로 키를 찾아 끄집어냈다. 열쇠에 걸린 요란한 키링이 복도를 밝히는 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런저런 장난감으로 이루어진, 절대로 자신의 취향이 아닌 그것을 무덤덤하게 돌려 잡아 손안으로 감추며 스가는 익숙한 문고리에 키를 꽂아 넣었다.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고 돌아가는 키에 한숨이 나왔다. 또 문을 안 잠갔다. 거칠게 키를 뽑아내고 문을 열자 정오가 훌쩍 넘은 시간임에도 커튼이 쳐져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못하는 어둑한 방이 드러났다. 마치 밤과 같았다.
-"그리고 미리 사과하자면 어제 내가 달래본다고 만나면서 술 좀 사줬거든."
"...술 못 마시게 도와달라니까."
-"그래서 미리 사과한다고. 미안."
"아냐, 괜찮아. 어차피... 토오루가 억지 부렸을 테니까."
스가는 정말로 미안함이 담긴 이와이즈미말에 보이지 않겠지만 고개까지 저어가며 괜찮다 대답했다. 멋대로 오이카와의 모든 신용카드와 은행 캐쉬카드를 잘라버린 지 이 주일째. 평소에 현금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스타일도 아니니 금세 그 카드라도 복구하러 밖으로 나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큰 착각이었다. 스가는 피곤해서 자꾸만 감기는 눈을 세 손가락을 이용해 꾹 눌렀다. 정리되지 않은 식탁 위에 양주병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얼마나 마셨는지 이미 텅텅 비어버린 그것을 보니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일단.. 집부터 정리해야겠다. 내가 못 온 사이에 엉망이네."
출장으로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집안이 난장판에 가까웠다. 수고해, 미안해.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말끝을 흐리는 이와이즈미와의 통화를 끝내고 스가는 우선 발치에 걸리는 옷가지들을 집어 한쪽에 멀쩡하게 놓여 있는 세탁 바구니에 담았다. 또 그 안에서 드라이를 보내야 하는 셔츠나 고급 소재의 바지를 골라냈다. 아직 술이 담겨 있는 글라스는 미련 없이 싱크에 밀어 넣고 빈 병을 모두 봉투에 담았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거실의 커튼을 거두었다. 그제야 흩날리는 먼지와 함께 빛이 집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언제 죽었는지도 모를 화분들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스가를 반겼다. 치운다 치운다 생각을 해놓고 방치해둔 것이었다. 오늘은 반드시 버려야지. 스가는 멍하니 베란다에 굽혀 앉아 말라 비틀어진 입을 조심스레 쓸어 보았다. 바스락 무너지는 것이 꼭 누군가와 같아 마음이 시렸다. 한참을 그렇게 떠나버린 것을 지켜보던 스가는 겨우 몸을 일으켜 침실로 향했다. 벌컥 문을 열자 커다란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사내의 등이 드러났다. 집안과 다름없이 어두컴컴한 침실을 익숙하게 걸어 들어간 스가는 멋대로 커튼을 거둬냈다. 일부로 소리까지 나도록 거칠게.
"... 눈부셔."
잔뜩 잠긴 낮은 음성이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이 날씨에 몸 관리는 전혀 신경을 안 쓰는지 그저 운동복 바지 하나 걸치고 있는 꼴이 화가 났다.
"일어나. 토오루."
"...."
"일어나라고 했어. 벌써 오후 2시야. 너 오늘 팀 훈련이었다며."
"언제 왔어? 영영 안 올 줄 알았더니."
"출장 간다고 말했잖아."
"거짓말."
매트리스를 딛고 비척이며 몸을 일으킨 오이카와가 가라앉은 눈으로 스가를 보며 말했다. 거짓말이라니. 도대체 왜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고 떠드는지 알 수 없었지만 크게 말다툼을 하고 싶지는 않아 입을 다물었다. 아니 어차피 제대로 된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그는 아마 듣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스가는 해명과 변명 대신에 잔소리를 늘어놨다.
"술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옷 걸치고 나와. 밥 먹자."
침대 끝에 걸려 있던 티셔츠를 거칠게 던지며 스가가 날카롭게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밥이고 뭐고 저 멍청하고 한심한 꼴이 보기 싫어 당장 이 집을 나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저 인간이 저 침대에서 나오지 않을 테니 참아야 했다. 방에서 나와 입고 있던 자켓을 의자에 걸치며 스가는 서둘러 셔츠 단추를 풀러 걷어냈다. 물기 하나 없는 싱크대의 안에 아까 자신이 던져 놓았던 글라스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안에 남아 있는 황금빛 액체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진짜 술이 마시고 싶은 건 나라고. 나. 울고 싶은 기분으로 막 틀어낸 물소리 사이로 발을 끌며 나타난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와짱이 사다 준 술은?"
"치웠어."
"남은 건?"
"버렸어."
그 대답과 동시에 무언가가 날라와 싱크 선반을 맞췄다. 바로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 물건에 스가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이미 비어버린 맥주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나 맞을 뻔했어."
"안 맞았잖아."
"그게 중요한 거야?"
"왜 왔어?"
"토오루-"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왔냐고."
등으로 닿는 싸늘한 눈빛과 말투에 스가는 물을 잠갔다. 그리고는 움츠러든 몸으로 싱크대를 꽉 한번 쥐었다. 오이카와가 이런 식으로 나올 때마다 입술을 물어댔더니 조만간 입안으로 치아 자국이 날 것만 같았다. 스가는 겨우 숨을 뱉어내며 천천히 몸을 돌려 싱크에 기댔다. 무엇도 담지 못하는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도 닿았다.
"나에게 화풀이 하지마."
"..."
"이런다고 사고가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괴롭고 아프면 이럴 시간에 술도 끊고 운동도 하고 훈련에도 나가!!"
"나가서!! 무릎 병신 된 오이카와 토오루를 비웃는 놈들 앞에 서라는거야?"
"그래!!!"
짜증과 화가 섞인 목소리를 내며 스가가 외쳤다. 그래, 널 병신 같다고 욕하는 놈들 앞에 서서 당당하게 괜찮은 척 연기라도 하라고! 참았던 울분이 그렇게 쏟아져 나왔다. 오이카와에게서 배구를 빼면 무엇이 남지? 언젠가 자신이 떠올렸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무것도>였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고 그 당시 스가는 간단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눈앞의 배구를 잃은 오이카와에겐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남자를 보며 스가는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불행은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그날따라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았다. 겨우 눈을 붙인 새벽에 잠을 깨운 벨 소리가 무척이나 불안했다. 이와이즈미의 다급한 목소리가 쏟아내는 소식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착한 병원에서 스가는 만신창이가 된 오이카와 토오루를 만났다. 창 너머로 호흡기를 달고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만나야만 했었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이 상황이 다 무엇인지 정리도 못 하면서 스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오이카와의 상태만을 물었다. 밤 훈련을 끝내고 구단 연습장을 나오던 길 괴한들에게 맞았다는 이야기에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발견이 늦었다는 이야기에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그가 눈을 감고 있는 긴 시간 동안 스가는 자신의 시간을 모두 잃어버렸다. 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버텼다. 변기를 붙잡고 올라오지도 않을 것들을 억지로 게워내며 견뎠다. 온전하지 못해도 좋으니 오이카와 토오루가 그저 눈만 뜨기를 바랐다. 그리고 야속하게도 신은 그런 스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온전하지 못한 오이카와가 눈을 떴다. 겨우 눈을 뜬 그의 무릎은 망가져서 앞으로의 선수 생활이 불투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울지도 못하는 그를 대신해 스가는 자신의 티셔츠가 젖어가도록 울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아파하는 만큼 스가와라 코우시도 아팠다. 그래도 그를 놓지 않았다. 본인 의지로 재활에 몰두하면 어느 정도는 시합에 버틸 수 있을 거라는 의사의 말에 다행이라며 웃었다. 그렇게 자신은 오이카와 토오루를 조금도 포기하지 않았는데 오이카와 토오루는 너무도 쉽게 포기했다. 자신의 무릎, 자신의 인생, 자신의 배구를.
망가져 가는 그를 지켜보고 달래고 붙잡는 것을 처음에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에게 모진 소리를 하거나, 험한 행동을 하더라도 이게 그의 모습이 아니라고 견디며 자신을 위로하며 버텼다. 그래서, 그게 언제까진데? 언제까지 내가 너를 잡아줘야 하는데? 내가 언제까지 이런 너를 사랑해야 하는데? 스가는 그렇게 몇 번이고 묻고 싶었다.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 수도 없이 몸 안에서 쌓였다. 그 답을 영영 찾지 못하고, 오이카와 토오루가 영영 이렇게 어둠에 갇힐까 스가는 모든 것이 무섭고 불안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이 오이카와를 잡아먹을까 끝내 입에 담지 못한 채로 늘 삼켜냈다.
"아무도 널 비웃지 않아... 조금 다쳤을 뿐이잖아. 토오루.."
터져 나왔던 화를 속으로 눌러 내리며 스가는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타일렀다. 스가는 오이카와를 슬프거나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남자를 몰아붙이거나 화가 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그만하고 밥 먹자. 우선 좀 씻어."
스가는 쭉 힘이 빠진 몸을 끌어 오이카와의 팔을 잡았다.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닿는 것조차 낯설어졌을까. 그토록 따뜻했던 그의 온기가 언제부터 이렇게 차가워졌을까. 스가는 어쩐지 이 방에 자신만이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두 사람인데 오이카와 토오루는 어디에도 없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그가 죽어버린 화분의 풀처럼 바스러지지 않도록 스가는 그의 팔을 꽉 잡았다.
"... 나 좀 그냥 둬. 코우시."
하지만 그 노력에도 오이카와는 스가의 손에서 팔을 빼내며 말했다.
"나 좀 그냥 냅둬."
"... 싫어."
"네가 이러는 거 지긋지긋해. 난 이제 틀렸어. 이 무릎으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
"의사 선생님도 말했잖아. 네가 노력 하면-"
"노력하면?! 노력하면 정말로 되는 거야? 그래?! 만약에 그랬는데 여전히 내가 낫지 않으면? 내가 코트에 설 수 없으면?! 내 다리가 병신인 채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토오루."
"내 무서움을 네가 알아?!?"
아, 이 말은 조금 상처였다. 왜 몰라 내가. 왜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해. 이렇게 곁에 있는데, 가까스로 널 붙잡고 있는데 그런 내가 왜 모를 거라 생각해.
"그만 가. 그리고 다신 오지 마."
"..토오루!"
"보고싶지않아. 이와짱도, 너도. 모두. 아무도."
억지로 손목을 움켜쥐며 현관으로 끌어내려는 오이카와의 행동에 스가가 서둘러 발에 힘을 주었다. 그럼에도 질질 끌리다시피 거실로 나온 스가는 오이카와가 자신의 가방에서 키를 찾아 던지는 것조차도 막을 수 없었다.
"나 너 이렇게 두고 못 가... 토오루. 제발!"
"그냥 날 좀 가만히 내버려둬. 부탁이야."
"가만히 두면?! 네가 망가지는 꼴을 그냥 지켜보라고? 나에게? 그렇게 잔인한 말이 어딨어!!"
"이미 망가졌는데 여기서 더 망가진다고 뭐가 바뀌는데?!!"
현관까지 끌고 나온 그가 거칠게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 반동에 밀린 몸이 힘없이 근처에 있던 장식장으로 무너졌다. 쿵, 집 안을 울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스가는 꽉 눈을 감았다. 머리 위로 떨어진 액자 모서리가 제대로 박혀왔는지 금세 뜨뜻한 무언가가 머리를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아픔보다 산산조각이 난 채로 바닥에 떨어진 액자 속의 사진이 아팠다.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아팠다. 그 위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서둘러 손을 닦아내며 스가가 고개를 들었다. 그 사진 속 두 사람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코우시... 피.."
"토오루.. 나 있잖아-"
"피... 피..! 잠깐, 기다려. 미안해. 젠장.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 있잖아-"
너무 힘들어. 너무 지쳤어. 너무 버거워. 이러는 네가. 이런 네가.
이미 연인 사이에서 그런 감정이 들기 시작하고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는 것은 끝이 가까운 게 아닐까? 스가는 몇 번이고 망가진 오이카와 토오루를 마주하며 이별을 대체하는 말들을 떠올렸다. 힘들다, 지쳤다, 버겁다, 아프다, 괴롭다. 그만하자는 그 말을 돌려 말하기 위해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하지만 언제나 이렇게 입을 타고 나가는 말은-
".. 괜찮아."
거짓말 뿐이었다. 어린아이처럼 왈칵 눈물을 터트리는 가여운 사내를 보며 스가는 말없이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스르륵 무너지는 그 몸을 품으로 꽉 안아주며 피가 묻지 않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나 괜찮아."
괜찮지 않아. 조금도 괜찮지 않아. 하지만 언젠가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자신에게서 배구가 없어지더라도 스가와라 코우시가 남아있다고 눈치채주기를 바랐다. 그럴 거라 믿었다. 그래서 오늘도 거짓말을 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한 이별의 말들을 삼키며 스가는 눈을 감았다.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스가와라는 마치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이 그리 위로했다. 누구를 위한 위로인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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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른 전력 주제 / 두 사람.
조금도 온전하지 못하지만 억지로 붙어 지내는 두 사람이 보고시퍼따. 졸면서 써서 이게 뭔지 나도 모르겠네...
아이언맨에게서 수트를 빼면 뭐가 남냐는 캡아의 질문에 천재 억만장자 한량아 자선가라고 대답하는 아이언맨을 생각하며 썼다.
오이카와에게서 배구를 빼면 남는 것은 얼굴. 얼굴.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