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카나] 생일
2018. 11. 3. 23:40







지잉, 지잉. 진동음이 진동했다. 무시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울리기 시작한 진동은 잠깐 멈추고 다시 시작되었다. 하는 수 없이 하카제는 슬쩍 눈을 올려 떴다. 매니저라 적힌 이름이 화면에서 반짝이다 다시 사라졌다. 수십 통이 찍힌 부재중 화면을 들여보다 이내 그 위에 뜬 시간으로 시선을 돌렸다. 11시 39분. 여기 도착한 게 오전 7시 정도였으니 겨우 4시간 눈을 붙인 셈이었다. 그래도 최근 2시간 겨우 잤던 거에 비하면 오래 잔 건가. 하카제는 쭈욱 손을 뻗으며 몸을 일으켰다. 눈을 감을 때만 해도 채워져 있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어딜 갔지. 마른 손으로 온기를 찾아 더듬었지만, 비운 지 오래인지 시트가 차가웠다. 그 빈자리에 다시 몸을 뉘며 하카제는 의미 없이 부재중 통화와 함께 남겨진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하카제, 메시지 확인하면 당장 연락해.]
[오늘 오전에 인터뷰 있다고 이야기했잖아.]
[생일이고 뭐고 이렇게 멋대로 굴면 어쩌자는 거야.]
[하카제 카오루님, 제발 전화를 받아주시옵소서.]
[왜 집에도 없어. 너 어디야. 전화 좀 받아!]
[날 말려 죽이려고 이러지??]



한 자 한 자 눌러 적으며 비명을 질렀을 매니저를 생각하니 미안함이 먼저 앞섰지만, 오늘만큼은 꼭 스케줄을 비워달라는 자신의 부탁을 잊어버리고 인터뷰를 잡은 건 그였다. 석 달 전부터 생일은 무조건 오프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미안... 내가 까먹고 잡지 인터뷰를 잡았는데..."라는 말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던 것도 그였다. 그러니 이런 심술 정도야. 어차피 매니저를 제외하곤 연락올 것도 없었기에 하카제는 미련 없이 종료버튼을 꾸욱 누른 후, 다시 몸을 일으켰다. 침대 아래에 가지런히 놓인 룸슈즈에 발을 구겨 넣고 나오자 분주한 소리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흘러들었다.



"카나타군?"



2층에 난간에 붙어 아래를 보며 이름을 부르자 소리가 멈췄다. 대신 익숙한 머리통 하나가 쏙 나타나 위를 올려보았다.



"카오루, 일어났나요?"
"응, 뭐해?"
"식사 준비요. 이제 막 끝났으니까 내려올래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여름에 한 번 보고 못 봤으니 계절 하나를 뛰어넘은 셈이었다. 처음엔 떨어져 지내는 게 불안하고 걱정스럽고 또 힘들었는데, 10년을 이렇게 지내다 보니 이 만남의 형태도 꽤 익숙해졌다. 가끔은 이 떨어진 거리가 쓸쓸하기도 했고 외롭기도 했지만, 신카이 카나타가 안고 살아야 하는 불편에 피하면 자신이 안게 된 것은 뭣도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그가 덜 외롭길 바라 고르고 골랐던 푸른 벽지를 문지르며 하카제는 1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식탁은 이미 접시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침부터 먹기엔 부담스러울 정도의 산해진미가 펼쳐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구워진 랍스타까지 올려놓는 신카이를 바라보며 하카제는 웃음을 터트렸다. 생일상치고 거해도 너무 거했다.



"이거 카나타군이 다 한 거야?"
"저도 했고 카오루의 집에서도 보내주셨어요. 그리고 이노씨도 도와줬답니다."



신카이 카나타가 부르는 이노씨는 이노우에 타카키로 자신의 부탁으로 그를 돌봐주고 있는 아버지의 전 비서였다. 아버지의 오랜 동반자로 5년 전 은퇴해 시골에 내려간 그에게 "가끔 심심하면 와서 같이 낚시나 해주세요."라 부탁했는데 낚시만으론 모자랐는지 그는 손주처럼 신카이를 아껴주었다. 그도 모자라 직업병을 버리지 못해 이 집을 정리해주거나 무슨 일이 있으면 저에게 전화하는 등, 신카이 카나타의 비서처럼 굴었다. 누군가 곁에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신카이도 그는 마음에 들었는지 불평을 하거나 "혼자가 좋아요."라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인인 저보다 더 이 집을 오가는 그에게 약간은 불공평함을 느꼈지만, 언제나 고마워하고 있었다.



"이 고깃국은 그럼 이노씨가 했겠네."



제 자리에만 놓인 국을 보며 묻자 놀란 얼굴을 하곤 "어떻게 알았어요?!"라 묻는다. 아마 신카이 카나타가 끓였으면 생선이나 조개가 들어가 있었을 테니까. 해산물이 싫은 건 아니지만 모든 식탁이 바다로 이루어진 건 아무래도 조금 힘겨웠다. 이 정도의 타협을 요구할 인물이라곤 뻔했기에 정답은 어렵지 않았다.



"이 케이크는 카오루네 집에서 보내주셨어요. 어제 보내주셔서 냉동실에 넣어놨더니 좀 얼었어요."



척 보아도 꽝꽝 얼어버린 생크림 케이크가 식탁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잘라보려고 노력했는지 칼자국이 나 있었지만, 실패한 모양이었다. 하얗게 언 딸기 근처에 <해피 버스데이>라고 적힌 초코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보냈을 리는 없고 아마 집안에서 누군가가 대충 예약해 보낸 모양이었다.



"이걸 왜 냉동실에 넣어놨어."
"카오루가 올 수 있을지 아닐지 몰라서요. 다른 건 제가 다 먹을 수 있지만, 케이크는 카오루 거니까 냉동하면 더 오래 있을 수 있잖아요."



갈게, 갈 테니까 기다려. 그렇게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듣는 쪽은 안 믿었던 모양이다. 뭐, 그렇게 말하고 못 왔던 게 한두 번도 아니니 훅 떨어진 자신의 신용도에는 할 말이 없었다. 오늘 중에는 녹겠죠? 태평하게 묻는 말에 끄덕이곤 우선은 수저를 들었다. 새빨간 해물탕, 색색의 초밥, 치즈가 올라간 랍스타구이, 조개구이, 버터 새우구이, 봉골레 파스타. 어느 것 하나 아침 식사로는 과하지 않은 음식이 없었지만 하카제는 문제없이 제 그릇에 날랐다. 취향은 고깃국이었으나 국은 뜨는 둥 마는 둥, 아침부터 열심히 준비했을 신카이 카나타의 정성이 고마워 해산물부터 입으로 감췄다. 그러고 보니 작년 생일에는 아침에 바닷가에 나가 조개를 구워 먹었다. 잠도 덜 깬 상태로 둘이 나란히 담요를 두르고. 다른 이가 준비한 이벤트라면 당장 박찼을 자리였지만, 신이 나서 집게를 뒤적이는 신카이 카나타를 보니 아침 댓바람부터 누리는 캠핑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생일에는 아침 일찍 배를 탄 적도 있었다. 오징어잡이의 참 맛을 알려주겠다나 뭐라나. 뭐 그래도 역시 최고는 고등학교 때 받았던 참치 해체쇼가 아니었을까. 태어나서 그런 선물은 처음이었다. 그런 선물들에 비하면 올해 생일은 꽤 약소하고 조촐한 편이었다.



"맛있나요?"
"응."
"다행이다."



벌써 산더미처럼 새우 껍질을 쌓아놓은 신카이가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그래, 저렇게 웃는데 아침부터 빈속에 버터 새우구이 들어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카제는 야무지게 손가락에 힘을 넣어 새우의 목을 땄다.

그렇게 화려한 식사를 마친 후, 뒷정리하겠다 나섰지만 제 허리에서 앞치마를 빼앗아간 신카이가 "마지막까지 서비스하게 해주세요!"라 우기며 쫓아냈다. 서비스라면 다른 서비스가 좋은데. 짓궃은 농담에는 반응이 없었다. 전에는 얼굴을 붉히기도 했는데, 10년을 사귀니 이제 효과도 없는 모양이었다. 너무한 카나타군. 전혀 미움을 담지 않은 말로 툴툴거리며 거실로 나오자 현관 근처에 놓여있는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10년 동안 늘 현관을 지키고 있는 가방에는 신카이 카나타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만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현금, 비상약, 세안 도구 따위. 좋아하는 리스트는 해마다 바뀌어서 새해가 오면 늘 같이 정리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당장 들고 떠날 수 있는 가방, 다행히 아직까지는 사용된 적이 없는 가방이었다.



"살아있는 신, 기도, 기적. 뭐 그런 거 입에 담아보면 다 그럴듯하게 들려. 만화나 소설이었으면 재밌었을지도 몰라. 그래도 그게 네 이야기일 필요는 없잖아. 그런걸 네 이야기로 만들지 마."



졸업식, 후배들에게 받은 꽃다발을 한 아름 안은 신카이 카나타는 웃고 있었다. 언젠가 반짝이는 조명을 등지고 "언젠가 다시."라 인사했던 그 순간처럼. 졸업이라는 단어가 끝이 아니라는 걸 열아홉 하카제 카오루는 잘 알고 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엔 누구나 SNS 계정 하나는 가지고 있었고 휴대폰에는 연락처가 빼곡했다. 울며 헤어져도 내일이면 다시 볼 얼굴들, 내일이 아니더라도 업계에서 지겹게도 마주할 얼굴들이었다. 그래서 졸업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하카제 카오루에겐 없었다. 딱 한 사람, 신카이 카나타가 두른 무게감을 제외하면.
다시, 또. 신카이 카나타는 그렇게 인사했지만 그를 교문 밖으로 보내는 순간 그 다시라는 순간이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를 붙잡았다. 지금까지 피하듯 입에 담아본 적 없는 그의 문제들을 대놓고 언급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네가 안고 있는 문제가 뭔지 다 알아. 그러니까 도망치지 마. 부탁? 아니면 명령? 아니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빌었다고 표현해야 맞았다. 입에서 나온 단어들에 신카이 카나타는 웃음을 감췄다. 그가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말을 찾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붙잡힌 손에 힘을 주었다. 작은 끄덕임으로 하카제는 그가 안고 살아온 짐, 운명이라는 것에게서 지켜내겠다 결심했다.
하지만 열아홉의 하카제 카오루가 할 수 있는 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신카이가는 오래된 가문이었고 그 가문을 뒷받침하는 거물은 무척이나 많았다. 신카이를 데리고 도망친다고 해도 얼마 버티지 못할 거 같았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 순간 생각나는 애석하게도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그 남자에게 도와달란 소리를 하게 되다니, 칼이 들어와도 싫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막상 닥치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당장 화를 낼 거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아버지는 무뚝뚝한 얼굴로 조건을 걸었다. 첫째, 아이돌 활동은 첫 계약까지만 이행할 것. 둘째, 집안 행사에 얼굴은 내비칠 것. 셋째, 아이돌 활동이 끝나면 그대로 경영으로 들어올 것. 예전이라면 헛구역질이라도 했을 조건이었지만, 신카이 카나타를 지키는 데에 저 정도 조건이면 오히려 싼 게 아닌가 싶었다. 하카제 카오루는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선택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마련해준 곳은 나가사키에 위치한 이층집으로 어머니가 있었을 때, 별장으로 사용하려 짓다가 버려진 곳이었다. 오래 관리되지 않은 건물을 싹 정리한 후, 신카이 카나타를 데려갔다. 그곳은 작은 성이었다. 허락 없이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성. 그 성으로 들어서며 신카이 카나타는 모든 걸 버렸다. 친구도 버렸고 소중했던 동료도 버렸으며 가문도 버렸다. 저는 이제 카오루밖에 없네요. 텅 빈 집으로 들어서며 던진 그의 말은 무거운 족쇄처럼 감겨들었으나 아프진 않았다.



"카오루, 산책하러 갈래요?"



멍하니 옛 생각을 하던 저를 신카이가 불러들였다. 언제 끝났는지 앞치마를 풀어낸 그가 제 곁에 와 있었다.



"그래, 가자. 옷 가지고 올게."



그날, 조금은 우울해 보였던 어린 신카이 카나타를 애써 지워내며 하카제는 몸을 돌렸다. 드레스룸이라고 거창하게 불리기에 부족한 방엔 자신이 보낸 그리고 선물한 신카이의 옷으로 가득이었다. 뜯지도 않은 상자, 달린 택을 애써 무시하며 하카제는 적당한 외투를 골라 나왔다. 그리곤 벌써 신발을 신고 있는 등에 덮어주었다. 말없이 외투에 팔을 끼워 넣으며 신카이가 먼저 현관을 나섰다.

처음, 신카이 카나타를 홀로 두고 떠날 때, 하카제는 그나마 바로 앞에 바다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곳에 그와 함께 언제까지고 숨어 있고 싶었지만, 그건 멍청한 행동이었다. 자신이 밖에 나와야 제게 붙은 눈이나 관심이 떨어질 터였다. 그래서 하카제는 그를 아이돌 활동에 최선을 다했다. 그 덕인지 좋은 평가를 받았고, 재계약 때 아버지에게 허락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인기가 많아지고 언데드의 이름이 올라갈수록 바빠졌다. 그래서 전처럼 신카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 게 불가능해졌다. 일주일에 한 번이 한 달에 한 번이 되고 나중에는 몇 달에 한 번으로 바뀌었다. 미안함 속에서 하카제는 그나마 바다가 있어서라는 이유로 안도했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이 집에 올 때마다 그 안도와 위로는 불쑥 고개를 들고 제 속을 찔러댔다. 바다 말고는 뭣도 없는 이 집. 과연 자신의 선택이 옳은 걸까. 그를 잃기 싫었던 제 욕심이 아니었을까. 신카이 카나타에게서 모든 걸 뺏고 가둬버린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가득 솟아났다. 신카이 카나타는 이노우에나 자신을 제외하곤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며 마이크를 쥐거나 조명 아래에 서는 것도 불가능했다. 옷을 사주어도 입고 나갈 곳이 없었고 맛있는 걸 함께 먹을 사람도 없었다. 그뿐만인가. 바빠진 하카제 카오루는 전처럼 그의 곁에 매일 있어주지도 못했다.



"카나타군-"



그에게서 짐을 지우고 자유를 주고 싶었는데, 이건 또 다른 구속이 아닐까. 10년째,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하카제는 미안하다는 사과 대신 늘 조용히 그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이름을 불렀다. 벌써 모래를 밟기 시작한 신카이가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를 붙잡으며 돌아보았다. 자신과 함께한 시간을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그럼 저 떠날게요."라고 말할 것만 같아서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파도에 쓸려 사라질 모래성 같아서 담을 수가 없었다.



"같이 가자고."



목까지 찬 질척한 감정을 다시 눌러 죽이며 하카제는 걸음을 옮겼다. 가만히 기다려준 그를 따라 모래를 밟자 샌들 사이로 까슬함이 휘감겨 들었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탈탈 털어내자 신카이가 소리 내 웃었다. 여전히 아이 같은 웃음에 하카제도 같이 따라 웃었다.



"카오루, 눈이 반짝거려요."



바람에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신카이가 말했다. 이마에 닿는 손길이 차 하카제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붙잡았다.




"꼭, 울 거 같네요?"
".. 고마워서 그래."



아직 이렇게 내 손을 잡아주어서, 곁에 있어 주어서, 웃어 주어서.



"생일.. 축하해줘서 고마워. 그래서 그래."



여전히 그렇게 있어 주어서.



"올해는 아직 별거 안 했는데요? 이렇게 밥 하나로 울면 제가 너무 미안하잖아요."



내년엔 더 화려하게 준비해야겠어요. 다음을 말하는 그의 말에 결국 하카제는 눈을 감았다. 시야를 가득 채우던 눈물이 잘려나갔다. 아, 카오루. 운다. 키득이며 신카이가 손가락에 힘을 주어 닦아냈다. 그의 운명을 지워내고 자신과 쌓은 시간을 억지로 운명으로 만들었다. 그걸 알면서도 투정 하나 뱉지 않는 그가 너무 고마워서, 그리고 또 미안해서 하카제는 서둘러 신카이를 품에 안았다. 미안해, 절대로 뱉지 않을 사과는 또 목으로 감췄다. 대신 약아빠진 말만 뱉어냈다. 고마워, 카나타군.





-





아 무슨 소릴 하고 싶었던거지~~~~~~~~~~~

카오루 생일이라 뭐라도 하고 시펐던 마음...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