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겐] golden card
2018. 10. 9. 19:57





사람은 자신의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 


어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신의 분수'가 어떤 걸까. 어린 유메노 겐타로에겐 조금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그녀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고 언제나 끄덕였다.
어릴 적, 아버지는 우산 장수였다. 나무를 깎아 대를 만들고 색색으로 염색한 천과 종이들을 덧대 아름다운 우산을 만들었다. 햇볕 아래에서 빛나는 우산은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유메노는 몰래 장난감 삼아 우산을 들고 길을 걷곤 했다. 아버지는 더 많은, 더 아름다운 우산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싶다고 했다. 밤낮을 잊고 늘 가게에 틀어박혀 있었다. 어둠에 흔들리는 구부정한 등을 보며 어머니는 말했다. 사람은 자신의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해, 라고. 아버지의 우산은 늘 화려하게 가게 앞에 전시되어 있었지만 눈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사는 이도 없었다. 아버지의 꿈은 아버지가 품을 수 없는 크기구나. 어린 유메노는 색이 바랜 우산들을 보며 어머니의 입버릇을 어렴풋이 이해했다.
처음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어디선가 낡은 가방을 하나 구해왔다. 낡고 누군가의 이름표가 붙었던 자리를 제외하곤 색도 옅어진 가방이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옆집 누구는, 앞집 누구는 멋진 가방을 샀던데.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유메노는 불평하지 않았다. 이게 딱 내 분수에 맞아. 대신 그렇게 생각했다. 유메노 겐타로, 이름표를 바느질해 붙여주는 어머니의 곁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서운하지도 슬프지도 속상하지도 않았다.
학교생활은 꽤 엉망이었다. 친구도 없었고, 학교에 신청해 받은 교과서는 표지가 너덜너덜했다. 아이들은 가난의 냄새를 지독하게 잘 맡았고 그런 냄새를 풍기는 아이와는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말 걸어 주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그래도 속상하지 않았다. 어머니처럼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아버지처럼 분수에 맞지 않게 굴고 싶을 때가 불쑥 있었다. 아이들이 어떤 게임기를 가져와 자랑할 때나, 만화책을 서로 돌려가며 볼 때나, 뭐 그럴 때. 당시 어머니에게 받는 용돈이라곤 100엔 동전 하나뿐이었다. 그걸 모아 노트나 연필 지우개 따위를 사야 했기에 다른 것에 쓸 여유가 없었다. 100엔을 모아 언제 게임기를 사고 언제 만화책을 사겠어. 분수에 안 맞는 꿈은 그만 꿔야지. 그렇게 다독였으나 그래도 마음은 늘 쑤셨다. 그러다 언제였더라, 작은 카드 게임이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100엔이면 문방구에서 카드 5개를 살 수 있었다. 아이들의 손에 쥐인 수십 개의 카드가 너무도 부러웠다. 그래서 용기내에 카드를 샀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심장이 두근두근 떨렸다. 100엔으로 뽑은 카드 다섯 장에는 아이들이 노래 부르던 황금 카드도 섞여 있었다.



"가난한 겐타로 주제에 황금 카드라니!"



이 카드 하나면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다음날 학교에 가자마자 카드를 내보였다. 이거 봐, 나도 카드 있어. 너희가 원하던 그 황금 카드야. 하지만 그 카드는 순식간에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반에서 가장 힘이 센 녀석이 킬킬대며 "이제 이 카드는 내꺼야!"라고 외쳤다. 아니야, 내꺼야. 내가 뽑은 내 황금 카드야. 내꺼라고. 유메노는 다시 자신의 카드를 찾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카드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의 구타와 웃음소리만 들려왔다. 가난한 겐타로, 더러운 겐타로.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으며 욱신대는 몸의 고통을 참아내며 생각했다. 아, 황금 카드는 내 분수에 맞지 않았구나, 하고.
그 후론 카드놀이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100엔은 다시 착실히 모였다. 새 지우개나 노트를 빼앗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리고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다른 동네에서 열리는 마을장에 우산을 팔러 가던 길, 빗길에서 미끄러진 차에 그대로 덮쳐졌다. 아버지의 꿈이었던 아름다운 우산은 빗물과 핏물로 엉망이 된 채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가게를 팔고 우산을 모두 태우며 말했다.



"그러게 요즘에 누가 이런 우산을 산다고!! 이 우산이 다 뭐라고! 분수도 모르는 양반!!"


슬픔과 절망이 어머니의 얼굴에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 사고 이후 유메노는 앞만 보았다. 공부했고 "무료 급식이 필요한 학생이 있으면-"이라 담임이 운을 띄우면 번쩍 손을 들었다. 아이들하곤 대화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 사정에 가라오케든 볼링이든 제 용돈으로는 불가능했다. 이따금 찾아오는 외로움은 글로 남겼다. 종이에 잔뜩 적어내리고 나면 기분이 좀 나아졌다. 저렴한 일탈이었다.



"겐타로 성적이라면 어느 대학도 붙을 수 있을 거야. 혹시 원하는 학교 있니?"



19살이 되기 무섭게 담임이 말했다. 대학이라. 공부를 한 건 딱히 성공이나 나은 미래를 바라서는 아니었다. 할 게 그거뿐이라 했을 뿐이었다. 글을 쓰는 것처럼 돈이 들지 않는 취미였으니까. 대학이라. 대학이라. 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 담임은 장학금 제도도 잘 되어있는 학교가 많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할 줄 아는 건 공부와 글뿐이었으니 차라리 대학에 가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아버지를 닮아 손재주가 있는 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어머니를 따라 남의 집 도우미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대학? 아이고, 무서운 소리 하지 마라. 우리가 돈이 어딨니."
"하지만 선생님 말씀으로는 장학금이 나온다고 했어요."
"장학금 외에 비용은 어쩌려고. 네가 가져온 이 대학 모두 다 여기서 먼 곳이잖아. 네 뒷바라지 이만큼 해주는 것도 버거워."
"...."
"겐타로, 우리 분수에 맞게 살자."



깜빡이는 형광등 아래로 어머니가 말했다. 그녀의 주름은 기억보다 더 짙어 있었다. 그녀의 몸은 기억보다 더 말라 있었다. 거기서 유메노 겐타로는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몇 달 뒤, 학교에 갔다 돌아오니 엉망인 얼굴의 어머니가 있었다.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에 왜 멍이 든 얼굴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타난 건지 궁금했지만, 그녀가 입을 열지 않았기에 유메노도 억지로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유를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뱉는 단어들로 대충 알 수 있었다. 유메노 겐타로. 엄마. 남자. 도우미 주제에. 가정. 조합하자면 간단했다. 일하던 집 주인인 남자와 어머니가 눈이 맞았고, 남자는 버젓하게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걸 부인에게 들켜 그 꼴이 되도록 맞고 쫓겨났다. 사랑이었든 뭐였든 가진 거라곤 아들 하나뿐인 가난한 어머니는 분수도 모르고 가정 있는 남자를 탐했고 돌아온 건 온갖 소문들과 시퍼런 멍, 고칠 수 없는 다리였다.
왜 그랬을까. 유메노 겐타로는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더럽고 끈적한 아이들의 눈빛 속에서 몇 번이고 묻고 싶었다. 자신과 아버지에겐 그렇게 분수를 알라고 해놓고 왜 어머니는 그러지 못했느냐 묻고 싶었다. 썩은 우유를 뒤집어쓰고 사라진 낡은 실내화를 맨발로 찾아 걸으며 몇 번이고 물었으나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했다.
성치 못한 다리로 어머니는 더 일할 수가 없었다. 늘 방에서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태웠다. 그리곤 가끔 모르는 남자들을 집으로 불렀다. 그 꼴이 보기 싫어 집 밖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길에서 흘리는 시간이 아까워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아침과 저녁, 조간과 석간을 돌리면 기숙사에서 지낼 수 있었다. 돈도 꽤 많이 나왔고 기숙사에선 밥도 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속이고 일을 시작했다. 조간을 돌리고 난 후, 잠들지도 못하고 등교했다. 학교에서 돌아와선 씻지도 못하고 석간을 돌렸다. 그렇게 몇 달을 지냈다. 통장도 없어 기숙사에 놓인 서랍장에 돈을 모았다. 이 돈이면 대학을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꿈도 살짝 꾸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그 꿈은 어디론가 깊게 사라졌다.



"어? 너 겐타로 아냐?"



교복은 언제나 공원 화장실에서 갈아입었다. 그날도 그랬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들킬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드물다는 것은 아예 없다는 말과는 다르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저를 발견한 것은 기숙사 옆 방을 쓰는 남자였다. 서른 정도 된 남자로 늘 담배를 입에 물고 다녀 다들 '니코틴'이라 부르는 남자였다.



"뭐야? 너 고등학생이었냐?"



그가 낄낄대며 아래위로 저를 훑었다. 늘 저런 식으로 사람을 보곤 했는데, 그날따라 더 기분이 나빴다.



"교복 잘 어울리네. 근데 사장이 알면 안 되지 않냐? 우리 미성년자 고용 금지잖아. 사장이 알면 너도 잘리고 사장도 문 닫고 우리 다 길바닥 나앉겠네."



남자는 마치 큰일이 났다는 것처럼 떠들었다. 사장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부인도 좋은 사람이었다. 기숙사에 지내는 모두도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 친하거나 살갑게 지내는 편은 아니었으나 숨 막히는 학교에 비하면 기숙사는 좋은 곳이었다. 그런 걸 떠올리고 나니 덜컥 겁이 났다.



"말하지 말아 주세요. 곧 있으면 졸업하니까.."
"너 하는 거 봐서."



남자는 누런 이를 내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그 대답에 안도했다. 이대로 조용히 넘어가는 줄 알았다.



"어휴, 겐타로. 이렇게 비실비실해서. 너 신문 제대로 돌리고 있는 거 맞아?"



늘 기분 나쁘게 훑기만 하던 남자는 약점을 쥐었다는 자신감 때문일까, 그날 이후로 성큼 거리를 좁혔다. 말을 붙이고 걱정하는 척 팔을 문지르고 다정한 말과 함께 귀를 만졌다.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상하게 보는 이가 없었다. 그냥 장난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제가 예민하게 구는 건가. 비밀을 지켜준 남자에게? 오히려 신경을 써주는 건지도 모르는데? 유메노 겐타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래, 그런 거야.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그러자 남자는 더 대담해졌다.



"오, 왔냐?"



남자는 이따금 심부름을 시켰다. 술, 담배, 외설 잡지 같은 물건들이었다. 기숙사 바로 앞에 있는 편의점이라 따로 검사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날도 남자는 담배 두 갑, 맥주 세 캔을 부탁했다.



"너도 마실래?"
"아뇨."



봉지를 던져주고 언제나처럼 나가려고 했다. 그런 제 손을 잡으며 남자가 억지로 침대에 앉혔다.



"왜, 너 여기서 성인이잖아?"
"..."
"슬슬 이런 것도 배워야지. 안 그래? 어디 가서 잘못 배우면 큰일 난다고."



맥주 마시는 행위에 배운다라는 표현을 쓰는 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약점을 쥔 남자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에 유메노는 입을 다물었다. 자자, 마셔봐. 남자는 잔에 노란 액체를 가득 따라주었다. 겨우 한 모금 넘겼지만, 더 넘기고 싶지 않은 맛이었다. 별로예요. 딱 잘라 말하자 그가 웃으며 "에이, 한 모금으론 모르지. 더 마셔봐."라 재촉했다.



"싫어요. 돌아갈래요."



당장 내일 오전에도 신문을 돌려야 했다. 학교도 가야 했다. 이렇게 멍청한 짓으로 시간을 보낼 바에 글자라도 하나 더 읽고 쓰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담아 몸을 일으켰으나 뒤에서 잡아 오는 힘에 그대로 끌려 들어갔다. 남자의 단단한 허벅지가 닿았다. 뒤에서 허릴 끌어안는 힘에 놀라 바둥댔지만,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이 형님이 알려준다니까 왜 빼고 그래?"
"싫.. 다고 했잖아요."
"가만히 있어 봐, 어?"



무언가가 단단한 게 몸에 문질러졌다. 남자의 더러운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허리를 안은 팔이, 다리 사이를 기어 다니는 손가락이 구역질이 나올 만큼 역겨웠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뭘 잘못한 거지?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겐타로, 겐타로. 남자가 더운 숨을 뿜어대며 이름을 불러댔다.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남자의 머리카락을 콱 쥐였다.



"악!!"



남자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그 틈을 타 문고리를 잡으려 했지만, 그가 더 빨랐다. 바닥으로 넘어진 몸 위로 남자가 올라탔다. 그리고 무어라 욕설을 뱉었다. 주먹이 날아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남자가 벗어던졌다. 몽롱한 정신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번들거리는 남자의 눈보다 제 옆에 놓인 유리 컵이었다. 아직 노란 액체가 보글대며 남아있는.
도대체 뭘 잘못했을까.
유메노 겐타로는 다시 자신에게 질문하며 잔을 쥐었다. 남자의 얼굴로 내려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번엔 그도 저를 붙잡지 못했다. 방 밖으로 나와 달리자 막 계단을 오르던 다른 사람과 마주쳤다. 이 기숙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청년으로 근처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소개했던 게 그 순간에도 떠올랐다. 도와주세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멀리서 "너 죽여버릴 거야!"라 음성이 달라붙었다.



"얼른 가."



청년은 자신이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주었다. 그리곤 바지 뒷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도 쥐여주었다. 쿵쿵 등 뒤로 울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유메노 겐타로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랐으나 무작정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 꼴을 보면 어머니가 비웃을 거 같았다. 분수도 모르고 집을 나서더니, 그럴 줄 알았다. 그런 말로 제 상처를 후벼팔 거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하지, 그 질문은 이내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로 바뀌었다. 도쿄, 도쿄로 가자. 대학에 가고 싶었잖아. 거기 가자.
엉망인 꼴로 도착한 도쿄에서 언젠가 어머니에게 내밀었던 대학의 책자 속 가장 가고 싶었던 학교를 찾아갔다. 불이 듬성듬성 켜진 새벽의 캠퍼스에서 엉엉 울었다. 맞은 데가 그제야 아팠다. 청년이 준 월급봉투를 쥐고 울고 또 울었다. 이제 어떻게야 하지. 모아둔 돈은 모두 기숙사에 있었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학교도 돌아갈 수 없었다. 집에도 돌아갈 수 없었다. 분수도 모르고 꿈을 꿔서 이렇게 된 건가. 그냥 그 정도 생각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거잖아. 그 정도도 꿈꾸지 못하면 도대체 뭐로 살아가라고. 목 놓아서 울었다.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은 열아홉 유메노 겐타로에게 공포였다.
결론적으론 그 공포가 저를 살렸다. 제 울음소리에 경비가 나타났고 그대로 경찰에 인도되어 끝에는 저와 같이 집을 나온 아이들이 모이는 시설에 넘어갔다. 거기선 배우고 싶은 걸 모두 배울 수 있었다. 학교엔 다니지 못했지만, 시간마다 봉사활동을 하는 대학생들이 와 공부를 가르쳤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시설을 나왔다. 시설 관리 선생님의 추천으로 출판사에서 우편물을 분리하는 일을 시작했다. 돈은 별로 되지 않았으나 사내 기숙사가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아낀 돈을 모아 시부야에 낡은 빌라로 독립했다. 일하고 돌아와 남는 시간에는 글을 썼다. 그날 하루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간단히 남겼다. 몇 줄이 될 때도 있었고 몇 페이지가 될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집에 놀러 온 동료에게 일기를 들켰고 그는 "겐타로, 너 글 잘 쓴다. 이 정도면 우리 회사에 투고해보지 그래?"라 제안받았다. 꽤 긴 고민 끝에 작은 단편 소설을 출판사에 투고했고 그대로 소설가가 되었다.

24살, 연락이 끊긴 어머니는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알 턱이 없었고 온갖 거짓말로 제 끈적한 과거를 감춰야 했지만 홀로 먹고사는 데에는 크게 문제가 없으니 삶에 만족했다. 사는 빌라는 아슬아슬하게 80년대 후반에 지어진 곳으로 90년에 진입하지 못했으나 못 살 정도는 아니었다. 책은 그럭저럭 팔렸다. 대단히 이름을 알리진 못했지만, 인터넷에 검색하면 작게 프로필 정도는 적혀 나왔다. 어느 작가처럼 무슨 상을 받고 몇만 부를 찍어내진 못했지만, 그래도 분수에 맞는 결과라 여겼다. 그래서 유메노 겐타로는 생각했다. 이렇게 살다가 비슷한 누군가를 만나고 단조롭게 살다가 눈을 감겠지, 하고.



"어이, 겐타로? 듣고 있어?"



그 조건에 아리스가와 다이스란 남자는 딱 맞는 남자였다. 돈이 없는 것도 비슷했고 하루 살아 하루 버티는 점도 비슷했다. 98엔짜리 컵라면을 나눠 먹어도 불만이 없었고 가끔 뚝 나가버리는 전등도 익숙한 남자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더 거칠고 위험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제 분수에 맞는 사람이라고 유메노 겐타로는 생각했다. 그러니 함께 단조롭게 살다가 어쩌면 헤어질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닌 거고. 뭐 그렇게 지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헤어지지 않고 계속 함께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잠깐 집에 다녀온다고요?"
"응. 아버지가 쓰러졌다니까 가야지. ...뭐 큰일은 아닐 거야. 그래도 집안 문제 때문에 당분간 못 올 거 같으니까."
"..그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한다고요?"
"메이카와 언론 대표."



달그락, 잔에 담긴 얼음이 살짝 흐트러지며 소릴 냈다. 여름도 아닌데 손에 땀이 찼다. 아리스가와, 아리스가와. 평범한 이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처음에. 하지만 거리에서 만났다. 쓰레기더미에 누워있던 그를 자신이 버려진 고양이 줍듯 주웠다. 그래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낡은 점퍼를 입고 있었고 3일을 굶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무 생각도 못 했다.
메이카와 언론이면 방송국에 신문사를 비롯해 출판사까지 가진 거대 기업이었다. 하루에 10시간씩 서서 컴컴한 창고에서 우편물 분리를 하던 출판사도 메이카와 출판사였고 열아홉, 자신이 죽어 나갔던 그 기숙사 역시 메이카와 신문사 영업소의 기숙사였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어릴 때 다이스는 어땠나요? 분명 멋진 옷을 입고 맛있는 걸 잔뜩 먹었겠죠? 제가 열아홉에는요? 제가 어머니에게 벗어나 신문을 돌릴 때, 당신은 고귀하게 식탁에 앉아 그 신문을 펼쳤을까요. 제가 스무 살 때는요? 지문이 무뎌질 정도로 우편물을 정리하는 동안 당신은 멋진 책들이 가득한 곳에서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을까요. 못된 생각이 들었다.



"...혹시... 놀랐어? 미안. 나 집에서 나온 지 꽤 되었고, 집에서도 망나니라고 내놓은 자식이라서... 그래서 굳이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숨겨서 미안해."



그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제 안색을 살피는 얼굴에 유메노 겐타로는 입술을 물었다.



"다이스."
"응?"
"헤어지죠."
"응. 어? 뭐????"



아리스가와 다이스는 그 언젠가 뽑았던 황금 카드와 같았다. 그를 손에 쥐어도 어느 새에 사라질 게 뻔했다. 남는 건 고통이겠지. 유메노 겐타로는 스스로의 분수를 잘 알았다. 삐걱거리는 빌라, 근근하게 팔리는 책, 잘 모르는 소설가의 이름. 그게 딱 적당했다. 아리스가와 다이스는 거기에 들어와선 안 되었다. 그를 탐내면 붉게 물들었던 우산처럼 퍼렇게 멍든 어머니의 얼굴처럼 그리고 정신없이 도망쳐야 했던 열아홉의 자신처럼 불행해질 게 뻔했다. 지금이 좋았다. 여기서 더 불행해지고 싶지 않았다. 더 나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제 분수에 맞게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우리 헤어지죠."



유메노 겐타로는 분수를 알았다. 그래서 슬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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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뽑은 황금 카드는 그냥 황금 카드가 아니라는 걸 겐타로가 얼른 알아야 하는데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