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카나] 첫 이별
2018. 10. 7. 21:20



7년 정도 연애를 하다 보면, 꽤 사소한 일로도 다투게 된다.



"카나타군! 이거 뭐야? 저번 주에도 샀잖아."



새벽까지 회식이 있었다. 첫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게 아침 6시 정도였다. 신카이는 날아오는 잔소리에 귀를 틀어막으며 슬쩍 탁자 위의 시계를 살폈다. 아침 10시. 씻고 바로 잤다고 하더라도 겨우 4시간이 흐른 정도였다. 분명 자신이 늦게 들어온 걸 봐놓고 굳이 깨우는 연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카이 카타나군?"
"...있다가요."



있다가, 있다가 이야기해도 되잖아요. 흐르는 말투로 겨우 덧붙이며 다시 눈을 감았다. 보통 이 정도면 물러서 주는데,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게 있는지 하카제 카오루가 결국 이불을 걷었다. 일어나, 카나타군. 딱딱하게 떨어지는 말에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침대 시트 위로 작은 택배 상자가 툭, 던져지듯 떨어졌다.



"이거 뭐야?"
"보면 알잖아요..."
"치약 10개? 그것도 어린이용? 이거 때문에 산 거 맞지?"



그가 신경질적으로 상자 안에 들어있던 치약을 꺼내며 그 안에 그려진 돌고래를 툭툭 가리켰다. 네, 맞아요. 그게 아니면 어린이용 치약을 살 필요가 있을 리가. 대충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누우려고 했다.



"카나타군, 욕실에 치약이 지금 몇 개인 줄 알아? 이런 식으로 카나타군이 산 물건이 집에 넘쳐나잖아."



하지만 봐주지 않겠다는 듯 하카제가 팔을 잡아 다시 일으켰다. 아아, 입으로 절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술까지 마셔서 머리가 아팠다. 속도 안 좋았다. 그냥 넘어가 주면 안되나. 치약 열 개가 뭐. 그냥 살 수도 있지. 돌고래가 귀여우니까 샀을 뿐인데. 그게 이렇게 아침부터 짜증을 내고 받아야 할 정도의 문제인가. 신카이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마 안 했어요. 개당 300엔이니까-"

"가격을 이야기하는게 아니잖아. 카나타군. 카나타군이 해양 생물 좋아하는 거 알아, 아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보이는 것마다 자꾸 사는 버릇은 좀 고치자고 했잖아. 집에 먼지 쌓인 물건이 몇 개인 줄은 알아? 카나타군 정리도 안 하잖아."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해주잖아요."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왜 사용하지도 않는 물건들을 자꾸-"
"제집인데 뭐 어때요! 카오루의 집도 아닌데!"




아쿠아리움에서 일하는 건 즐거웠다. 아이들을 상대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무엇보다 좋아하는 해양 생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건 신카이에게 있어서 축복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연인인 하카제 카오루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우선 그의 집에서 거리가 멀다는 게 그가 내세우는 최대의 단점이었고, 방송 활동을 하느라 휴일이 들쑥날쑥한 그와 달리 자신의 스케줄은 딱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함께 보낼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점도 한몫했다. 거기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전체 회식. 첫차가 다닐 때까지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그 자리를 하카제는 무척 싫어했다. 그러니 오늘의 이 짜증도 저 300엔짜리 치약 10개보다는 아마 아침에 돌아온 저에게 화가 나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하면 되지. 치사하게 고작 3000엔 소비를 들먹이며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참견하는 건 신카이 입장에선 참을 수 없었다.



"말 그렇게 할 거야?"
"뭐가요, 사실이잖아요. 카오루 돈으로 카오루 집에 널려 놓는 것도 아닌데!"
"카나타군!"
"저번 주에 불가사리 젤리 20봉지 샀을 때는 뭐라고 안 했으면서 왜 지금은 뭐라고 해요? 치약이 문제가 아니라 제가 술 먹고 늦게 들어온 게 싫은 거잖아요. 그러면 솔직하게 그렇다고 말하면 되는데 왜 다른 거로 절 괴롭혀요?"
"...내가 카나타군을 괴롭힌다고? 그럼 달마다 매번 밤새도록 술 먹고 휘청거리는 걸 내가 계속 이해해줘야 해? 거기다 오늘 우리 오늘 석 달 만에 오프 맞은 날인 거 알아?"
"회식인데 저보고 어쩌라고요! 그것도 사회생활인데! 매니저고 스타일리스트고 다들 비위 맞춰주는 언데드의 하카제 카오루랑 저는 다르다고요?!"
"말 좀...!!"
"왜요, 제가 틀린 말 했어요? 벌써 저 4년이나 일했어요. 거기서! 이게 그냥 제 삶이고 하루인데, 카오루는 마음에 안 드는 거잖아요. 매주 매일 늦는 것도 아니고, 한 달에 딱 한 번인데!"
"4년 동안 카나타군이 다른 사람에게 업혀 온 게 몇 번인 줄은 알아? 돌아와서 화장실에 틀어박혀서 토했던 건? 연락 안 돼서 나 돌아버리게 만든 건? 오늘도 그래. 내가 연락하면 데리러 간다고 했는데 2시부터 전화 꺼놨잖아.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은 알아?!"
"제가 애도 아닌데 왜...!!"
"애, 어른의 문제가 아니잖아. 카나타군. 나 카나타군의 연인이잖아. 내가 그 점에 대해서 다 이해해야 한다는 거야?!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잠은 이미 날아간 지 오래였다. 숙취로 골골거리던 머리도 훅 치고 올라온 열에 절여졌다. 이기적이라니? 그러는 카오루는? 이쪽도 할 이야기야 많았다.



"그러는 카오루도-"



작년 생일을 까먹었다. 기대했는데 해외에서 화보 촬영하느라 까먹었다. 작년 크리스마스도 비슷했다. 아침 7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새벽에 멋대로 쳐들어온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싫다는 사람 물고 빠느라 잠도 못 자게 만든 건? 물론 카오루의 손길이나 온기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당장 출근하는 이쪽 사정도 좀 생각해줬으면 했다. 그리고 또-



"그만하자. 이런 문제로 싸우는 거... 질린다."



하지만 줄줄 뱉기도 전에 하카제 카오루가 말을 끊어냈다. 뭐야? 자기 할 말만 다 하고? 펑 터져버린 머릿속을 어쩌지 못하고 신카이는 거칠게 택배 상자를 밀어냈다. 침대 밖으로 떨어진 치약들이 후두둑 소릴 내며 바닥을 굴렀다.



"질려요? 제가 질려요? 카오루?"
"..."
"그럼 헤어지면 되겠네요!"
"카나타."
"말도 안 듣고 카오루 질리게 만드는 저랑 왜 만나요? 이렇게 감정 소모하면서 만날 이유 있어요? 우리?"
"....내가 그렇게 쉽게 헤어지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이 문제로 싸웠던 거 잊었어?"
"제가 질린다면서요!! 그럼 헤어지자고요!!"



빽 외친 목소리가 방을 쿵쿵 울렸다. 어디선가 진동이 울렸다. 소리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배게 근처에 둔 휴대폰이 깜빡였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 걱정되니까 일어나면 연락해.] 동료의 안부 문자였다. 하지만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가만히 그걸 지켜보던 하카제가 작게 혀를 찼다.



"그래. 헤어지자."



그리곤 조용히 말했다. 헤어지자. 생각보다 간단한 이별이었다. 만약 그와 헤어진다면 울고불고 엉망인 얼굴이 될 거로 생각했는데 역시 현실은 그리 드라마틱하진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세수도 못 한 꼴로 싸우다 서로 언성을 높이고 틈을 좁히지 못하고 결국 헤어지자니. 7년의 결말치고는 너무도 간단했다. 하지만 그걸 다시 이어 붙이거나 고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신카이는 쥐고 있던 이불을 끌어 다시 덮었고 하카제는 방을 나섰다. 꾹 눈을 감고 숫자를 세었다. 30을 세기도 전에 현관문이 열렸다 닫혔다. 째깍째깍 초침 소리만 조용한 방을 울렸다. 거짓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 자존심이 뭐라고 뛰어나가지 못하고 버텼다. 이번엔 제가 잘못한 건 없어요. 세우지 않아도 될 자존심이었다.


하카제 카오루와는 학생 때 만나 졸업과 함께 연인이 되었다. 집안 문제로 이도 저도 못 하는 제 손을 그가 잡아 주었고 도망치듯 집을 떠나 계속 함께 지냈다. 하지만 하카제의 집에서 하카제만 보고 하카제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하루는 외로웠다. 그래서 그에게 "일을 하고 싶어요."라 말했고, 흔쾌하게 그의 도움으로 지금 아쿠아리움에서 일하게 되었다. 거리가 멀어 처음에는 하카제가 혹은 그의 매니저가 차로 데려다주고 데리러 왔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신세를 질 수 없었기에 그의 집을 나와 작은 방을 구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 카나타군 일하는 거 허락 안 했을거야. 부동산에서 받아온 서류를 내밀었을 때, 그가 말했다. 안돼, 내가 이사할래. 그런 억지도 부렸다.



"저도 이제 어른이잖아요. 카오루. 이제 카오루의 둥지에서 보내줄 때라고요?"



웃으며 그렇게 말했을 때, 하카제는 바보처럼 울었다. 몰라, 나 그런 거 몰라. 저를 꼭 끌어안고 아이처럼 투정 부렸다.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영영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그가 해외 투어로 몇 주나 시간을 비우는 것보다는 나은 상황이라 생각했는데 하카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매일 놀러 오면 되잖아요. 나 보러 오면 되죠. 제집에 카오루가 와 있으면 기쁠 거 같아요. 그런 말로 달래고 달래 겨우 방을 구했다. 이렇게 멀리, 이렇게 작은 집에서 어떻게 살게 두냐고 징징거리는 걸 무시하고 새 시작에 발을 뻗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하카제 카오루는 대부분을 그의 집이 아닌 이쪽에서 보냈다. 전과 방 크기가 달라진 것 빼고 그의 물건이 좀 적다는 걸 빼면 별다를 거 없는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뭐랄까 누군가에게 계속 의지만 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서 그런지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대신 싸움이 조금 늘었다. 맞지 않는 생활 패턴, 서로가 모르기 시작한 서로의 상황들, 전에는 없었던 연락 문제 등등. 한 번은 그런 일이 있었다. 아쿠아리움에서 친해진 동료를 집에 초대했던 날. 동물학을 전공한다는 그는 해양 생물에 빠삭한 사람이었고 신카이는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그래서 처음으로 집에 사람을 초대했다. 맥주캔 몇 개와 과자가 전부였지만, 함께 돌고래나 상어에 대해 떠드는 시간은 유익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 연락도 없이 하카제 카오루가 찾아왔고 딱히 죄를 지은 상황도 아닌데 그 일에 대해 신카이는 해명해야 했다. 그때, 처음으로 크게 싸웠다. 제집에 제가 친구를 부른 게 뭐가 문제죠? 라 물었고 하카제는 늦은 밤까지 자기가 모르는 누군가를 집에 들인 게 싫다고 했다. 그 말에 신카이는 왜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왔냐 따져 물었고, 하카제는 우리가 연락하고 방문해야 하는 사이야? 그래야 하는 이유가 뭔데?라 따졌다. 아마 그때 처음으로 크게 싸웠던 거 같았다. 하지만 금방 화해했다. 서로 그렇게 열을 낼 필요도 아닌 문제에 열을 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늘 함께라 서로가 서로의 모든 걸 알고 지냈던 상황에서 달라진 현재에 적응하는데 나타난 약간의 부작용, 같은 뭐 그런 거라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한번 싸우기 시작하니 끝이 없이 싸웠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고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서로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자기는 몇 시간씩 메시지를 확인 안 하는 주제에 이쪽이 바로 전화를 받지 않으면 불만스러워하는 문제로 싸운 적도 있었고, 또 회식 후에 동료 등에 업혀 나타났다가 처음으로 울며 싸운 적도 있었다. 회식과 술자리 문제로 예민하게 굴기 시작한 것도 그날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아아 하카제 카오루가 스캔들 났을 때. 그때는 진짜 엄청나게 싸웠다. 신인 아이돌과 함께 찍힌 사진으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하카제는 "모르는 애고 같이 어딜 간 적도 없고 이런 사진이 찍힌 이유조차 모른다니까?"라 말했고 신카이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증거가 있는데 믿을 수가 있나. 나중에서야 우연히 두 사람이 스케줄이 겹쳐 같은 장소에 있던 걸 파파라치가 각도를 절묘하게 맞춰 데이트하는 거처럼 찍은 사진임이 밝혀지고 오해가 풀렸다. 그때 처음으로 헤어지자는 소릴 했었다. 그때는 근데 진짜 그가 자신을 배신했다 생각했으니 그게 최선이었다.



"... 카나타군? 괜찮아? 기운이 없네."



그리고도 꽤 많았다. 나중에는 누가 누구의 맥주를 마셨네, 푸딩을 먹었네 같은 사소한 거로도 싸웠으니까. 신카이는 멍하니 수조를 헤엄치는 펭귄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걱정스럽게 묻는 동료의 물음에 괜찮아요, 그냥 피곤하네요. 대충 둘러댔지만, 끝없이 그와 자신의 관계에서 안 좋았던 날들만 떠올리니 우울했다. 분명 좋았던 날이 더 많았는데, 왜 그런 건 하나도 떠오르지 않을까. 왜 서로 화를 내던 것만 떠오를까.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기분으로 일을 하려니 당연히 일도 엉망이었다. 퇴근에 가까워서는 돌고래들에게 먹이를 주다 미끄러져 물에 빠지기까지 했다.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었지, 혼자 있었으면 그대로 익사했을지도 몰랐다.



"최악의 하루네요."



씻고 옷도 갈아입었지만 온몸에서 물비린내가 나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발이 질척하게 물에 담겨 있는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게 첫 이별이구나. 첫 연애였으니 당연했다. 그것도 7년이나. 누구나 7년이나 있던 사람을 지워내면 이런 기분이 들겠지? 다음에 알아봐야겠다. 그런 허튼 생각을 하며 애써 웃었다.
하지만 웃는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기분은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헤어지자고 말한 쪽은 이쪽인데 끝없이 추락했다. 이렇게 우울하고 슬픈 적은 오랜만이라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신카이는 알지 못했다. 전에는 힘들면 늘 하카제가 곁에 있었다. 바보 같은 소리도 다 들어주고 제 기분을 풀어 주겠다고 드라이브를 하거나 맛있는 걸 사다 주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원인이라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텅 빈 집도 이상했다. 자신의 집이었지만, 대부분 하카제도 함께였어서 그런지 혼자 남겨진 순간들이 모두 적막하고 고요했다. 문을 열면 그가 있거나, 혹은 잠든 자신을 찾아와 입을 맞추던 날들을 누리다가 눈을 떠도 감아도 그를 느낄 수 없어지니, 정말 이상했다.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런 알지 못하는 감정만 남았다.
그 알지 못하는 감정이 이별의 감정이라는 걸, 신카이는 꽤 늦게 깨달았다. 추락하고 내려앉고 우울하고 슬프고 무기력한 이 모든 게 다 이별 때문이라는 걸 늦게 알았다. 정말로 이별했구나. 싸우고 토라져도 늘 다시 돌아왔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이번엔 달랐다. 헤어지잔 말에 "그런 소리 하지 마." 대신 "그래, 헤어지자."가 붙었다. 그건 정말로 이별이었다. 그날, 이불을 박차고 뛰어나가 그의 허리를 끌어 안아야 했다.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빌었어야 했다. 이제는 자신이 울어도 하카제 카오루는 와주지 않는다. 눈물을 닦아주거나 달래주지도 않는다. 물에 빠져도 넘어져도 상사에게 혼나도 위로해주거나 같이 화내주지도 않는다. 그걸 견딜 수 있을까. 신카이는 멍하니 깜깜한 방에서 눈만 깜빡였다. 존재를 잊어버린 치약 10개는 여전히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헤어진 이후론 도우미 아주머니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녀는 원래 하카제의 집을 관리해주는 사람으로 하카제의 부탁으로 이 집까지 챙겨준 거였다. 헤어졌으니 그녀도 자신을 떠난 거다.



"제가 심했어요...."



카오루의 집이 아니라니,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닌데. 이 집을 구할 때 도와준 사람도 하카제였다. 청소도 요리도 못하는 저를 대신해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부탁한 것도 그였다. 첫 독립 선물이라며 이 침대를 사준 것도 하카제였다. 욕실에는 여전히 그가 자주 쓰는 향수가 놓여 있었고 칫솔도 두 개였다. 그런데 여기가 그의 집이 아니라니. 정말 심한 소리였다. 거기다 생각해보면 충분히 화낼 생황이었다. 쓰지도 않는 치약 10개? 그런 낭비도 없다. 거기다 겨우 석 달 만에 맞춘 오프인데 술 먹고 아침에야 들어온 연인이 예뻐 보일 리가 없었다. 그의 눈에 예뻐 보이지 않는다니. 가장 최악이잖아. 신카이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사과해야해요... 카오루에게..."



누구라도 그런 꼴을 보면 질리지. 하지 말라는 행동에 말까지 다 쏟아 내놓고 자존심을 세우다니, 질리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아니아니, 질리면 안 되는데. 덜컥 겁나 눈물이 났다. 급하게 로퍼에 맨발을 쑤셔 넣었다. 당장 가서 사과하고 빌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해야지. 머릿속엔 그 생각밖에 없었다.
전철이 끊긴 시간, 택시를 붙잡아 탔다. 끅끅 울기 시작하는 모습에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한 건지 택시 기사는 빠르게 속력을 내주었다. 하카제 카오루의 집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항상 그가 자신을 보러 오니 올 일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공동 현관 비밀번호는 그대로였다. 저를 확인한 경비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려다 멈칫했다. 울고 있어서 그런가 싶었지만,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나니 답이 보였다. 잠옷에 로퍼를 구겨 신고 눈물이라니. 누가 봐도 이상한 꼴이었다. 하지만 당장 사과하고 싶은걸. 당장 화해하고 싶은걸. 신카이는 소매로 얼굴을 닦아내고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택시보다 빠르게 자신을 뱉어냈다. 익숙한 복도를 걸어 익숙한 문 앞에 섰다. 삑삑삑삑. 비밀번호를 눌렀다. 자신의 생일. 처음 설정할 때 "내 생일로 하면 카나타군이 잊어버릴 거 같으니까."라 말하며 그가 정한 것이었다. 그래놓고 작년 내 생일 잊어버렸잖아. 뒤늦게 몰려온 서운함을 꾹꾹 삼키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어머."



모르는 사람을 마주했다. 현관 앞에서 마주한 건 모르는 얼굴의 여자였다. 매니저도 아니었고 언데드의 스태프도 아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 왜 여기에 여자가 있는 거지? 신카이는 그녀 뒤에 선 하카제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그가 해명하길 바랐다. 하지만 오히려 이쪽에 되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왜 여기에 여자가 있어요?"
"..뭐?"
"...왜... 왜 우리 집에 여자가 있어요???"



한 번도 이런 적 없잖아. 겨우 닦았던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이렇게 울면 언제나 그가 다가와 닦아 주었는데, 하카제는 가만히 팔짱을 끼고 이쪽을 보기만 할 뿐 와주지 않았다.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얼른 내보내야지. 내보내고 울지 말라고 날 달래야지. 가만히 있는 그가 야속했다. 그래서 신카이는 신발을 벗지도 않고 들어가 여자의 팔을 잡았다.



"잠.. 잠깐!!"



그녀가 놀라 소릴 질렀지만, 막무가내로 끌어 현관 밖으로 내보냈다. 내 구두!! 빽 외치는 말에 현관에 놓여있던 검은 구두까지 안겨주곤 문을 닫았다. 씩씩, 숨이 몰아 터졌다. 서러움으로 시야가 번져 엉망이었다.



"왜.. 왜 우리 집에 여자가 있냐니까요? 카오루??"
"...여기가 왜 '우리'의 집이야? 여긴 내 집이지. 내 집에 누굴 들이든 그게 카나타군이랑 무슨 상관인데."
"왜 그런 못된 소리를 해요?"
"그러는 카나타군은? 카나타군은 왜 내게 못된 소리를 하는데?"



제집인데 뭐 어때요! 카오루의 집도 아닌데! 아마 그렇게 외쳤던 거 같은데. 헤어지던 날. 정말 못된 소리였다.



"미안해요. 카오루... 제가 잘못했어요."



서둘러 빌었다. 사과했다.



"아니야, 카나타군 잘못한 거 없어. 생각해봤는데, 맞아. 카나타군은 카나타군의 생활이 있는 건데... 내가 연인이란 이유로 그걸 다 관리하고 속박할 이유는 없는 거지. 그러니까 카나타군 잘못한 거 없어."
"카오루우...!!"
"우리 지금 헤어지는 게 맞아. 어차피 이 문제로 또 싸울 거야. 내가 그때 질린다고 말한 건... 카나타군이 아니라, 카나타군과 같은 문제로 싸우게 되는 이런 상황들이 질린다는 거야... 우린 또 싸울 거고 카나타군 나에게 또 헤어지자고 할 거고- 나는 그거 또 들을 자신이 없어."
"싫어요... 싫어요...!"



서둘러 하카제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안으면 항상 그가 마주 안아주곤 했는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감싸주지 않는 온기에 다급해져 신카이는 저도 모르게 발을 굴렀다. 카오루, 카오루.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미칠 거 같았다.



"안 그럴게요. 헤어지자고 안 할게요. 술도 끊고, 회식도 일찍 일찍 올게요. 카오루에게 그렇게 말도 안 할 거고 화도 안 낼게요. 네?"
"..."
"제발요. 카오루... 나 좀... 나 좀 안아줘요. 나 질렸다고 하지 말아요. 나 싫다고 하지 말아요."



엉엉, 아이도 아니면서 애처럼 울었다. 그가 밀어내기라도 할까 팔에 꽉 힘을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자신을 떼어내려 해서 신카이는 더 힘을 주었다.



"카나타군."
"...싫어요. 안 헤어질 거야.. 헤어지기 싫어요."
"알았으니까, 카나타군. 나 좀 봐. 그만 울고."
"...안 헤어진다고 말해요. 저랑 헤어지지 않겠다고 말해요."
"안 헤어져. 안 헤어질 거니까, 그만 놓고 나 좀 봐."



단호한 말에 그제야 팔에서 힘을 풀었다. 그의 얼굴이 눈물 위에서 번졌다. 내일 눈 붓겠다. 그가 이상한 걱정을 하며 손으로 꾹 눈을 눌러주었다. 눈두덩이 아래로 번져있던 것들이 다 잘려나갔다.



"나에게 짜증 내도 괜찮아. 화내도 괜찮아. 하지만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마."
"네.."
"술... 적당히 좀 마시고. 마시는 건 좋아, 좋은데 연락은 좀 해."



내가 이런 문제로 카나타군이랑 싸울 줄은 몰랐다고.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신카이는 끄덕였다.



"내가 바빠서 카나타군에게 신경 쓰지 못하는 주제에 카나타군에게 전처럼 나만 보고 나만 기다리라고는 말 못 한다는 거 알아.. 아는데.. 그래도 나랑 보낼 시간을 더 우선해줬으면 좋겠어."
"그럴게요."
"그리고 나도 미안해.. 잘못했어."
"아니에요."
"...이제 신발 좀 벗자."



발 다쳤겠다. 그가 허릴 숙여 친절하게 신발까지 벗겨주었다. 발목 까졌네. 작게 혀를 차며 걱정하는 말에 다시 눈물이 터졌다.
어떻게 하카제 카오루에게 헤어지자는 소리를 했을까. 스스로가 뱉은 말이지만 신카이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함께 처음 이 집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모든 게 행복했다.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나왔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좋았다. 그리고 그 감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그가 잡아주는 손이 좋았고 그가 불러주는 이름이 좋았다. 그걸 스스로 버리려고 했던 게 믿을 수가 없었다. 카오루, 미안해요. 어디선가 구급상자를 들고 와 밴드를 붙여주는 그를 내려보며 신카이는 다시 사과했다. 응, 나도 미안해. 그가 저를 올려보며 함께 사과했다. 그리웠던 미소를 가만히 내려보다 용기를 내 두 뺨을 잡았다. 그리곤 마치 처음 입을 맞췄던 그때처럼 떨리고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하카제 카오루에게 입을 맞췄다. 다시는 이 사람을 손에서 놓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다행히 하카제 카오루는 늘 그랬듯 팔을 뻗어주었다. 익숙한 그의 품으로 내려 안기며 신카이 카나타는 이별의 감정을 모두 날려 버렸다.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 감정을 모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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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자신이 끌어낸 여자가 하카제 카오루 개인 매니저라는 사실을 알고 창피해진 신카이 카나타... ㅎ

아 그리고 카오루가 작년 카나타의 생일을 잊어버린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상황이라 시차를 생각 못하고 날짜 착각을 했다는 이유가 있읍니다... 사과했는데 아마 죽을 때까지 그거로 꽁해있을 듯 ㅎㅎ


여하간 카오루가 너무 오냐오냐 봐줘서 막 자라버린 어른이 신카이 카나타가 보고 시퍼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