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카나] 감기
2018. 9. 30. 21:01




보송하게 말린 푸른색 시트, 세탁소에 보냈다 찾아온 온갖 바다생물 인형들, 먼지 하나 없이 침대 위에 놓인 아쿠아리움의 기념품들. 하카제 카오루는 만족한 얼굴로 방을 빙 둘러보았다. 푸른색으로 넘실대는 바다에서 제 취향이라곤 빛을 차단하는 어둑한 암막 커튼뿐이었다. 커튼 위에 달린 돌고래나 열대어 모빌 덕에 그마저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그게 다였다. 두 사람이 쓰지만 온통 한 사람의 취향으로 가득 찬 방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후, 거실로 나오자 옅게 켜놓은 등 아래로 멀쩡하게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배를 뒤집고 떠 있는 녀석들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꼼꼼히 체크하며 하카제는 거실에 붙은 시계를 확인했다. 곧 신카이 카나타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물고기 밥은 잊어버리면 안 돼요. 알았죠? 카오루?"



사진집 촬영으로 약 일주일, 집을 비우면서 신카이 카나타는 끝까지 그 말만 반복했다. 떨어지는 동안 보고 싶을 거라든가 만나고 싶을 거라든가 외로울 거라든가, 그런 연인다운 이야기는 다 빼놓고 죄다 물고기에 관한 주의 사항만. 말로는 부족했는지 매직으로 꾹꾹 눌러쓴 메모까지 현관문 앞에 붙여두었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슬슬 짜증 나 날을 세워 대꾸했더니 입을 슬쩍 내밀며 "그런 소리 해놓고 저번에 흰동가리를 죽였잖아요."라 항의해왔다. 제가 죽인 물고기가 한 두 마리가 아니었기에 흰동가리가 어떤 종류인지 떠오르지 않았지만, 대충 "이번에는 안 그럴게."라 잔소리를 차단했다.



"해양 생물부의 수치에요."



꼭 누구 씨가 하던 말을 똑같이 뱉으며 케리어를 끌고 나가는 이마에 꾹 입술을 묻었다. 알았어, 아프지 말고 잘 다녀와. 겨울 냄새가 나는 밖으로 어렵사리 그를 내보내며 속삭였다. 저 없는 동안 집 잘 지키고 있어야 해요? 그리 묻는 말에 괜히 코가 찡해졌다.
서로 다른 유닛으로 아이돌 활동을 하다 보니 늘 시간은 엇갈렸다. 하카제 카오루에겐 하카제 카오루의 시간이 있었고 신카이 카나타의 시간 역시 따로 있었다. 처음엔 서로 따로 살다가 이래서는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는 것도 어려울 거 같은 예감에 부랴부랴 집을 구해 합쳤다. "그런다고 없는 시간이 생기냐?!" 동거한다는 말에 오오가미 코가가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래도 한 달에 한 번도 못 보는 것보다야 잠든 신카이 카나타의 얼굴을 몇 분이라도 보는 게 좋았으니 별수 없었다. 그 몇 분이 너무 소중하니까 정말 별수 없었다.



"그래도 역시 이렇게 장기간 못 보면 힘들단 말이지."



하나를 갖게 되면 다른 것도 갖고 싶어지듯, 그 몇 분도 같이 지내다 보니 부족해졌다. 저쪽은 어떨지 몰라도 일단 이쪽은 그랬다. 하아, 어디에도 닿지 못할 한숨을 뱉으며 하카제는 쭈욱 팔을 위로 뻗곤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몇 달 전에 있었던 유성대의 전국 투어 이후로 신카이 카나타가 장기간 집을 비우는 건 오랜만이었다. 투어 시기에는 하카제 역시 언데드의 새 싱글 준비로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한 터라 괜찮았는데, 이렇게 여유로운 휴일 시기에 그와 함께하지 못하는 건 좀 괴로웠다. 그래도 오늘이면 그것도 끝, 그가 드디어 돌아오는 날이었다. 몇 시간 전에 보낸 [저 이제 가요!]라 보낸 메시지를 다시 또 확인하며 하카제는 가스 불 앞에 섰다. 팬에 버터를 올린 후, 그가 도착할 시간에 굽기 위해 미리 손질한 농어를 올렸다. 타닥타닥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농어를 앞에 두고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아까로부터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이게 맞나?"



서로 바쁘다 보니 주방엔 기본적인 기구들은 채워져 있어도 냉장고는 늘 비어 있었다. 빵 하나라도 입에 물고 나가면 다행인 날들이니 무언가를 채워놓아도 늘 쓰레기통 행이었다. 함께 보내는 날은 주로 외식, 혹은 포장 그것도 아니면 배달. 그러나 오랜만이라는 단어가 붙는 오늘은 좀 다른 게 먹고 싶었다. 보고 싶었던 얼굴을 앞에 두고 조금 근사한 것. 거기다 내일은 자신도 신카이도 모두 휴일이었다. 오랜만에 함께 보낼 수 있는 밤을 그냥 보내기는 아쉬워 뭐라도 하고 싶었다. 집을 청소하고 그가 마음에 들어 하던 시트로 침구를 바꾸고 좋아하는 요리를 하고. 실제론 집을 청소한 건 주마다 한 번씩 들리는 청소 업체가 한 일이었고 세탁한 시트나 인형도 모두 세탁 업체, 지금 굽고 있는 농어 역시 손질은 마트에서 레시피는 서핑하다 만난 낚시광 지인에게 배운 대로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분위기를 잡고 싶었다.



"감자와 아스파라거스 토마토를 함께 구우면 맛있다라, 카타나군 아스파라거스 먹나?"



뭔가 그런 초록색 식물을 먹는 건 별로 본 적이 없는데. 그래도 데코레이션을 위해선 필요할 거 같으니 장을 봐온 봉투에서 야채를 꺼냈다. 한 끼 식사를 위한 양치고는 꽤 많았지만, 소량으로 팔지 않아 방법이 없었다. 딱 사용할 만큼만 손질해 팬 위로 올렸다. 치지직, 맛있게 구워지는 소리에 절로 콧소리가 나왔다. 불 조절까지 완벽하게 해내며 그릇에 담아내자 어디 내놓기엔 아쉽지만, 그래도 둘이 먹기엔 나쁘지 않은 농어 스테이크가 완성되었다. 널브러진 재료를 모르는 척하며 하카제는 스테이크를 식탁에 옮겼다. 와인잔도 그 옆에 예쁘게 놓았다. 이제 주인공만 나타나 맛있게 먹어주면 끝. 그리고 타이밍 좋게도-



"카오루~ 저 왔어요."



신카이 카나타가 때에 맞춰 정확히 도착했다. 벨을 누르는 대신 직접 열쇠를 열고 나타난 그는 둘둘 커다란 코트와 목도리에 파묻혀 있었다. 모리사와의 작품인가. 빨간 코끝을 내밀고 나타난 그에게 다가가 하카제는 안아주기 전, 먼저 목도리부터 풀어주었다. 코만큼이나 붉은 얼굴이 저를 향해 웃고 있었다.



"카오루, 카오루. 잘 지냈나요? 물고기들도 건강한가요?"
"응. 잘 지냈고, 건강해."
"다행이네요. 착한 아이에게 줄 선물도 사 왔어요."
"알았어. 우선 코트 벗자."
"스위스는 눈이 엄청나요! 다 하얗고 반짝반짝했어요. 이거 촬영했던 산이 들어간 스노우 볼인데요-"



목도리를 도대체 몇 개나 두른 거지. 하나둘 벗기는 제 손길에 반항하지 않고 냅두며 신카이 카나타가 현관 앞에서 케리어부터 펼쳤다. 잠깐, 잠깐. 왜 이렇게 급해? 일단 먹고 쉬고 보여줘도 되는 건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신이 난 그를 말리지 못하고 하카제는 물끄러미 붉은 뺨을 바라보았다.



"이거 봐요! 이렇게 흔들면 반짝반짝 눈이 흩날려요. "
"음..."
"그리고 이건 현지 스태프가 맛있다고 해서 산 과자에요. 있다가 맥주에 먹어요. 또 사진도 엄청 찍었는데-"
"카나타군, 잠깐 이마 좀 줘봐."



쉴새 없이 떠드는 입을 막고 서둘러 손을 뻗었다. 이마에 닿은 손바닥이 뜨끈하다 못해 뜨거웠다.



"카나타군, 열 있는 거 같은데?"
"에에? 아닌데요? 저 따뜻하게 입었어요. 목도리도 세 개나 했어요. 가서 수영도 안 했어요."
"그건 당연히 그래야 하고. 우선 열 좀 체크하자."
"아, 맛있는 냄새."
"자, 잠깐!"



아무래도 열이 있는 거 같았다. 추운 날씨에 정해진 시간 동안 모든 촬영을 해야 하는 강행군에 무리한 모양이었다. 당장 씻기고 약 먹여 재워야 할 거 같은데, 키우는 물고기처럼 쏙 빠져나간 신카이 카나타가 멋대로 식탁을 차지하고 앉았다. 하아, 하카제는 한숨을 쉬며 그가 허물처럼 벗어놓은 코트와 장갑 그리고 양말을 주워다 안았다.



"카나타군, 우선 열부터-"
"이거 카오루가 했어요? 맛있겠다!"
"지금 내 말 무시하고 있지?"
"네? 아닌데요?"



아니긴. 무시하고 있잖아. 잔뜩 벌건 얼굴로 그가 눈만 깜빡였다. 모르는 척을 해대는 얄미운 얼굴을 바라보다 하카제는 우선 안고 있던 옷가지를 소파에 던져두었다. 어딘가에 체온계가 있을 텐데. 서랍장과 약상자를 서둘러 뒤졌다. 그러는 사이 벌써 입에 넣었는지 우물우물 그가 맛있다는 둥, 최고라는 둥 쉴 새 없이 조잘조잘 떠들었다.



"네네, 알겠습니다. 맛있어서 다행이시네요."



벌써 반이나 비운 그의 접시를 바라보며 하카제는 뒤에서 부드럽게 신카이의 얼굴을 쥐었다. 그리고 그가 반항할 틈도 없이 쏙 귀에 체온계를 넣어 버튼을 눌렀다. 삑, 소리와 함께



"38.5도...?!!?!"



열이였다. 그것도 꽤. 에, 아니에요! 제 목소리에 신카이 카나타가 부정해왔지만, 체온계의 숫자는 누구처럼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도대체 열이 이렇게 나는데 매니저는 뭘 했어? 나 봐봐. 어지럽거나 속 아프진 않아? 포크 내려놓고."
"...어지럽지도 속 아프지도 않아요. 기침도 안 해요. 계속 먹을래요. 먹고 있다가 와인도 마실래요."
"안돼. 아픈데 무슨 와인이야. 다음에 마셔."
"아, 싫어요."



와인잔을 쥐려는 그에서 서둘러 잔을 치우자 애도 아니면서 그가 칭얼댔다. 와인보단 해열제부터 먹여야 할 텐데. 약이 남아있나. 전에 사다둔 게 있었던 거 같기도 한데.



"카오루-"



약이 먹기 싫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선반에서 해열제를 찾아온 제 허리를 신카이 카나타가 꽉 끌어안았다. 뜨끈한 얼굴이 품으로 꾹 안겨 왔다. 답지 않은 애교에 하카제도 별수 없이 몸에서 힘을 풀었다. 



"일주일만에 만났잖아요. 내일 모래면 카오루 PV 촬영으로 며칠 안 온다고 했잖아요. 저는 그때 쉬면 괜찮아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오늘 아니면 카오루랑 이렇게 못 있는데-"



그러니까 오늘이 아니면 다시 또 며칠 떨어져 지내야 하니 무리가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쉬운 마음은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다른 이유도 아니고, 신카이 카나타가 아픈데 그걸 그냥 넘어가 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작은 이벤트고 뭐고 지금은 당장 그를 침대에 파묻고 눈을 감게 만들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안돼."



하카제는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단호히 말했다. 딱 자른 말에 그가 고개를 올려 저를 마주 봤다.



"왜요?"
"아프잖아. 카나타군 열나면 오래 가는 거 알면서. 일단 약 먹고 자자. 내일 상황 봐서 괜찮으면 같이 시간 보내면 되잖아."
"카오루 집 잘 지켰으니까 상 주고 싶은데도 안되나요?"
"응."



강수를 두는 말에도 아쉽지만 잘라 거절했다. 설마 이거까지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잔뜩 풀 죽어 숨어버린 얼굴이 안쓰러워 하카제는 서둘러 웃으며 달랬다. 내가 대신 꽉 안아줄게. 내일 종일 같이 침대에서 뒹굴뒹굴하자. 가서 스위스 어땠는지 이야기해줘. 듣고 싶어. 뭘 보고 왔는지, 뭘 느꼈는지 이야기해 줘. 억지로 그의 뺨을 잡고 속삭였다.



"와인 마시고 하면?"
"안돼. 약만 괜찮아."
"카오루는 치사해요."
"알아."
"한 마디를 안 지고.."



그래서 싫어? 장난스레 웃으며 그의 붉은 코를 쥐었다 놓았다.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슬쩍 웃으며 신카이 카나타가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죠. 휴. 카오루는 너무 말을 안 들어요.."



씩 웃으며 말하는 그의 입안에 서둘러 약을 넣었다. 뱉을 틈도 없이 물컵까지 입에 대어주니 꿀꺽, 단숨에 삼켜 넘겼다.



"누가 할 소릴."



그리 받아치며 하카제는 신카이를 일으켰다. 다행히 더는 버티지 않고 그가 순순히 몸을 맡겨주었다. 늘 차갑던 몸이 오늘은 뜨거웠다. 더운 것도 뜨거운 것도 질색이면서 목도리를 세 개나 감고 왔을 생각을 하니 괜히 속이 상했다. 툭 치면 툭 넘어갈 거 같은 몸을 침대에 앉혀두곤 서둘러 잠옷을 꺼내 입혔다. "카오루 야해요!" 먹히지도 않을 농담에 키득였다. "카오루는 안 벗나요?" 그 말에는 대답 대신 뺨에 입을 맞췄다.



"같이 눕자. 잘 때까지 옆에 있을게."
"제가 잠들어도 옆에 있어야 해요."



알았어. 그리 대답하며 팔을 뻗자 자연스럽게 푸른 머리가 품에 다가와 안겼다. 방은 포근했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날아올지 모를 찬 공기가 닿지 않게 이불을 끌어 꽉 목까지 덮어주었다. 아직 잠이 오지는 않는지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며 신카이가 입을 열었다. 스위스에서요- 그렇게 운을 떼는 목소리는 열만이 아니라 감기도 동반인지 살짝 잠겨 있었다. 조곤조곤, 그가 떠드는 일 이야기는 자신이 아는 현장 이야기임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아마 같은 소리를 100번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지루함은 느끼지 못할 거 같았다. 두 사람의 몫으로 구운 농어 스테이크는 절반이 남아 식어 가고 있었고 따버린 와인 역시 공기와 뒤섞이고 있었지만, 날아가 버린 분위기도 오랜만에 즐기려던 재회의 순간도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어차피 신카이 카나타와 함께 할 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오늘 하루 정도, 그의 열에 양보한다 한들 사라지는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뜨끈한 그를 안고 있는 이 시간도 꽤 괜찮았다. 그래서요, 카오루. 여전히 이야기를 이어가는 신카이의 이마에 입술을 묻으며 하카제는 대답했다. 응, 카나타군. 그래,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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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부리고 사는 카오카나 보고시퍼서.

촬영 일정을 늘리고 쉬엄쉬엄 하자는 매니저 말을 듣지 않은 신카이 카나타 결국 열이 나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