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겐] 소설가 유메노 겐타로의 고백
2018. 8. 5. 19:15




아침이 밝았다. 매번 퇴근하는 길이 눈부셨다. 벌써 몇 년째 야간 경비 근무를 하고 있음에도 이 아침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피곤하다 생각하며 아리스가와 다이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숙사에 돌아가 자는 게 제 몸이나 정신에 좋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자고 일하는 날을 반복하다 보니 괜한 오기가 생겼다. 날이 추웠다. 주머니를 뒤적여보니 카페에서 죽칠 정도에 돈이 마련되었다. 따뜻한 코코아 한 잔, 그리고 작은 케이크 조각을 사 3시간 정도 버틸 정도였다. 기본 커피를 시키면 100엔이나 아낄 수 있는 돈이었지만, 커피는 써서 싫었다. 돈도 없는 주제에 부리는 완고한 제 고집에 아리스가와는 슬쩍 웃은 후 걸음을 옮겼다.

이제 막 시작된 아침의 길거리는 까마귀들로 북적였다. 커다란 녀석들이 골목마다 기웃대며 반짝이는 것과 쓰레기를 찾아 두리번댔다. 노려보는 듯한 새까만 눈이 무서워 아리스가와는 벽 쪽으로 붙어 걸었다. 반짝이는 건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무법자와 같은 놈들은 툭하면 시비를 걸어와 이 시부야의 골칫덩어리였다. 최대한 피해야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와 싸우는 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으니까.



"앗-"



하지만 너무 까마귀에만 신경 쓴 탓일까,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혔다. 돌아보자 막 오픈을 준비하던 서점 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급히 사과를 해왔다. 아니아니, 앞을 안 보고 걸은 건 이쪽이고. 아리스가와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함께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몇 번이고 그렇게 대답해준 후 고개를 들었다. 벌써 손님이 듬성듬성 자릴 잡은 작은 서점 입구에 커다란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유메노 겐타로 첫 에세이 출간!]



익숙한 이름이었다. 익숙하지 않으면 이상한 이름이기도 했다. 아리스가와는 홀린듯 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포스터에서 소개한 책은 찾지 않아도 메인 스페이스를 채우고 있었다. 오늘의 신간 코너에 버젓하게 두 줄로 수북이 쌓여 아리스가와를 반겼다. 전에는 분명, 그의 이름을 찾으려면 꽤 고생했던 거 같은데. 직원에게 물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취급하지 않고 있습니다."라는 소리를 들어 번번이 손에 쥐는 걸 실패하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버젓하게 메인을 차지하는 작가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대로인데. 여전히 돈도 없고 갈 곳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아리스가와는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하며 조심스럽게 책을 들었다. 책은 작은 문고판이었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오염될 거 같은 흰 표지에 답지 않게 연분홍의 띠지가 둘러있었다. <소설가 유메노 겐타로의 첫 연애 에세이> 그 문구를 보는 순간, 아리스가와는 텁 입을 틀어막았다. 연애? 연애~? 제가 알기론 유메노 겐타로는 시대극 소설을 주로 써내렸다. 에세이는 물론이고 연애 소설도 그의 장르는 아니었다. 그런데 연애라니. 누구랑? 아리스가와는 허겁지겁 책을 펼쳐 들었다.

[그날은 추운 겨울이었다. 사실 오래되어서 진짜 겨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첫 만남은 평범했다. 친구의 소개였다. 미팅 같은 건 아니고, 무언가의 프로젝트로 만남이 잡혀 있는 자리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00% 자신과 맞는 상대에 관해 이야기했었는데, 그때 처음 만난 내 첫 연애 상대는 100%는커녕 0%에 가까운 인상을 받았다. 치렁치렁한 머리. 날라리 같이 머리에 무언가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다행히 피어싱은 없었다. 그리곤 온갖 먼지가 묻은 카키색 점퍼를 입고 있었는데, 아마 그 덕에 겨울로 기억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후에 가서야 그가 그 옷을 입고 다니는 게 잘 오염되지 않아 입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코가 꿰인 후라 늦었지만, 어쨌든. 그는 첫 만남에 그런 옷을 입고 나타났고 유메노 겐타로에게 있어서 0%의 인물이었다.]



"...이거... 나잖아?"



아리스가와는 슬쩍 자신의 꼴을 내려보았다. 유메노 겐타로가 지적했던 그때의 그 점퍼는 이미 어딘가 처박혀 태워졌는지 누군가 입고 다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와 비슷한 색상에 비슷한 디자인의 점퍼가 제 몸에 둘려 있었다.

[그 0%의 인물로 말할 거 같으면 나보다는 4살이 어렸고 도박 중독이 시달리고 있는지 하루에 꼭 한 번 이상은 파칭코를 들락거렸다. 함께 연못을 보고 감상을 나누거나 등을 마주 대고 소설을 읽는 구닥다리 행위를 권하기에는 너무도 다른 세계에 살고있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는 인간관계는 순수함으로 무장되지만, 내 정도의 나이가 되면 이해와 타산이 필요해진다. 그 계산에 따르면 상대는 내게는 절대 도움이 되지 않을 인물로 노트에 이름을 적어 X자를 긋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상사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내 경우도 그랬다. 그 사람은 어느 날 멋대로 현관문을 두드렸다.]



겐타로! 집에 있냐?! 나 하루만 재워줘! 아마 그랬던 거 같은데. 제 기억이 맞다면 그날은 도쿄에 기록적인 폭설이 내린 날이었다. 24시간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버티다 새벽에 두어 시간 쫓겨나 떨기엔 너무도 추운 날씨였다. 그래서 무작정 아는 얼굴을 떠올리다 그를 찾았다. 혼자 산다고 스치듯 말했던 게 떠올라서. 정말이지 무작정.



[그날은 기록적인 폭설이 내린 밤이었다. 머리와 코트에 눈과 겨울 냄새를 묻히고 나타난 그 사람은 곧 길바닥에서 죽을 거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정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아는 얼굴을 한겨울에 돌려보낼 만큼 매정한 사람도 되지 못했다. 덜덜 떠는 강아지를 눈앞에 둔 거 같아 마음이 약해졌다. 하는 수 없이 그를 들이고 손에 따뜻한 수프를 쥐여주었다.]



수프라니. 저가 기억하기론 차였다. 아니 수프였나. 건더기가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아리스가와는 미간을 찌푸리며 페이지를 넘겼다.




[하루만이 오늘도, 내일도가 되었다. 눈치를 보는지 그 사람은 이불을 정리하거나 방을 구석구석 청소했다. 슬쩍 말을 걸려고 치면 이를 드러내 웃으며 오늘 하루는 어땠냐 같은 시답지 않은 화제를 꺼내댔다. 나가라는 말이 죽어도 듣기 싫은 모양인지라 우스웠다. 귀찮은 혹이 달린 거 같아 당장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 꼴이 가여워 두었다. 그게 내 첫 실수였다.]



실수? 실수우? 어마어마한 표현에 저도 모르게 책을 꾹 쥐였다. 저야말로 그날 그의 집에 찾아갔던 게 실수였다.



[칫솔이 두 개가 되었다. 밥 그릇도 두 개가 되었다. 수저도 젓가락도 한 세트씩 늘었다. 멋대로 늘어놓는 짐들을 치우지 못하고 두었다. 슬롯이나 돌리고 마작이나 할 줄 안다고 생각했던 상대는 생각보다 빠릿빠릿했다. 손재주도 좋아서 엉성하게 달아놓은 커튼도 고쳐 달아주고 전등갓도 제대로 고정해주었다. 책장이 무너졌을 때는 온갖 잔소리를 해대며 책장을 고쳐주기도 했다. 그렇게 집에 상대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사라질 무렵, 가끔 길게 집을 비우는 부재에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식물도 키우지 않았던 사람이라 집에 생명을 가진 무언가가 있다는 것에 급하게 물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심지어 대화도 하고 온기도 나눌 수 있는 존재이니 더 악질적이었다. 세상을 꽁꽁 얼어버린 날에는 상대는 집에 붙어 지냈지만, 그렇지 않은 날에는 늘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 눈을 붙일 때 즈음 들어왔다. 어디서 뭘 하다 이제 왔느냐 묻고 싶었지만, 하릴없이 기다리기만 한 사람처럼 보일까 창피해 그저 벙싯 웃으며 잘 다녀왔냐 묻곤 했다. 달고 들어온 겨울을 털어내며 오늘은 많이 땄다느니 잃었다느니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퍽 안심하는 스스로가 부끄러운 날들이 계속되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 계절이 흐르듯 시간이 흐르니 들쑥날쑥한 부재에도 적응이 되었다. 쌀은 늘 2인분을 담가 밥을 지었다. 비면 비는 거고 말면 또 다음날 내가 먹었다. 애써 준비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주인을 찾지 못하고 방치되면 남겨지는 쓸쓸함을 감당하기 싫어서 그랬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참 우습게도 상대가 좋아하는 음식을 냉장고에 채워두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련한 짓이었지만, 그때는 그렇게 멋대로 손이 갔다. 그 정성도 모르고 상대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거네?" 라고 웃으며 허겁지겁 먹어 치우곤 했는데, 그 꼴을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뿌듯함이 차올랐다. 짐승을 길들이는 사육사 같은 감정이랄까. 뭐 포장과 변명을 하자면 그런 기분이었다.]


[4월 1일은 내 생일이다. 이런 날 태어나서 대부분 생일이라 말해도 농담으로 받아들여 축하를 받지 못한 지 꽤 지났다. 거기다 어른이 되고부터는 생일을 화려하게 챙기고 꼬박꼬박 기다리는 게 어쩐지 아이 같고 유치하게 느껴져 그만두다 보니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아침부터 케이크가 상에 올라왔다. 편의점에서 파는 208엔짜리 조각 케이크였다. 초도 꽂혀 있지 않았다. 세수도 못 한 내 앞에 그걸 내밀며 축하한다 건네는 그 인사에 나는 두번째 실수를 했다. 그를 좋아하고 있다고 인정해버렸다.]



"생일 축하해! 겐타로!! 오늘 맞지?! 책 띠지에서 봤다고?!!"



이런 건 가장 먼저 축하해주는 게 좋으니까. 그런 말을 했었다. 막 눈을 뜬 그를 잡아다 억지로 식탁에 앉힌 후, 아침에 편의점에서 사 온 케이크를 들이밀었다. 홀 케이크를 살 돈은 없어서 그게 최선이었다. 공장에서 찍어내 만들었을, 그냥 그런 조각 케이크였다. 유메노 겐타로의 말대로 초도 꽂지 못한 케이크였다. 그때는 표정 하나 없이 고맙다는 인사로 끝낸 주제에, 안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아리스가와는 꾹 입술을 물었다. 그 순간이,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 인정한 순간이 될 줄 알았다면 좀 더 큰 케이크를 샀을 텐데. 좀 더 멋진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게 풍선 같은 거도 불어 놓거나 그런 이벤트라도 준비했을 텐데. 아리스가와는 몇 년도 지난 일을 떠올리며 후회했다.



[참 이상하게도 인정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는데, 인정한 후부터는 마음의 속도가 빨라진다. 드디어! 라고 생각하는지 빠르게. 거기다 내 경우는 봄이었다. 곧 여름이었다. 꽃 피는 봄에 축제가 연이은 여름. 모두 사랑의 이름을 붙이는 계절이었다. 나는 조급해졌고 안달이 나 있었다. 처음엔 존재 자체가 불편했던 상대였지만, 어느새 나가겠다 선언할까 혹은 떠나버릴까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돈을 내밀었다. 마감 기간엔 집을 돌보지 못하니 대신 돌봐달라는 조건으로. 한마디로 그를 고용했다. 상대는 당황해서 집세 대신 일을 돕고 있으니 이런 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억지로 손에 쥐여주니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주었다. 그게 내 세 번째 실수였다.]


[상대와 연애를 하고 싶을 때는 연인 관계가 되어야지 고용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때의 나는 몰랐다. 상대는 돈을 받는 입장이 되니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내 심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가 멋대로 굴어도 나는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는데도 그랬다. 행동이 조심스러워지고 말투도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거기서 바로 잡았어야 했는데, 말했다시피 이 시기의 나는 불안함이 극에 달한 상태라 상대가 나를 살펴주는 게 그저 좋았다. 그래서 여기서 네 번째 실수를 하고 마는데, 상대에게 고백했다.]




"다이스, 당신이 좋은 거 같습니다."



식사 자리였다. 아마 메뉴는 삼치구이. 상점가에서 아침 일찍 사 온 것이었다. 거기에 조개를 넣은 된장국. 인스턴트에 조갯살을 넣어 끓인 것. 모두 대충 요리책을 보고 대충 조합해 차린 식사였다. 책에 쓰인 대로 그에게 돈을 받아 집안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슬롯 돌리는 시간을 줄이고 집을 살폈다. 한사코 받지 않겠다 우겼지만, 막무가내인 유메노 겐타로를 막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마감 기간이 되면 그는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다. 곧 쓰러질 거 같은 그를 살피는 건 꽤 고된 일이었기에, 뭐 그거 비용이라 생각하지! 라 마음먹고 돈을 받았다. 밥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마감에 닥쳐 짜증 내는 그의 성질을 받아주고 이불을 펴고. 이러다 나중에 직업란에 주부라고 적는 게 아닐까, 뭐 이력서를 쓸 날은 없을 거 같지만! 같은 생각을 하며 키득이던 아침, 유메노 겐타로가 그렇게 고백해왔다. 그래서 뭐라고 했더라.



[상대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마감하다 미친 거 아니지? 라고.]



아리스가와는 탁, 발을 굴렀다. 맞아, 그런 소릴 했었지. 싸늘한 얼굴로 아니라고 부정하는 그 말에 금방 입을 다물긴 했지만, 처음엔 정말 농담인 줄 알고 그런 소릴 했었다. 아리스가와 역시 그때까진 연애는 해 본 적이 없었다. 뭐 누군가를 만나거나 밤을 보낸 적은 있었지만, 좋아한다 고백하거나 들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 식사 자리가 무척 어색하고 신선했다. 먼저 폭탄을 던진 주제에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유메노 겐타로는 더더욱.



[대답은 예스. 시원했다.]



그래서 받아드렸다. 돈도 주고 잘 곳도 주었는데 사랑도 주겠다니, 아리스가와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첫 연애였다. 그래서 서툴렀다. 손을 잡는 것도 어색했다. 키스를 하는 건 더더욱 그랬다. 이게 키스인가? 하는 감각이었다. 좋았는데 누군가 표현하듯 벨이 울린다거나 달콤한 맛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도 좋았다. 대단하게 무언가를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사람이 제대로 날 의식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마다 행복했다. 그냥 유메노 겐타로가 아니라 연인 유메노 겐타로로 의식해주는 게 기뻤다.
데이트는 사실 그리 많이 하지 못했다. 내가 너무 바빴다. 당시에 주간 연재에 월간 연재가 함께 있을 시기였다. 시간을 깎아서 일에만 매달려야만 마감이 가능했기에 데이트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다. 겨우 겹쳐놓은 마감을 끝내놓은 다음에야 근사한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산책을 하는 게 전부였다. 좋아한다고 말해놓고 방치라니. 이기적이어도 이렇게 이기적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 사이 그 사람은 꽤 많이 참아줬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일에 붙어있는 연인을 가만히 기다려 줬으니까. 거기다 마감 기간에 예민한 나를 옆에서 다 받아주기까지 했으니까. 그즈음엔 연인이라는 자각때문인지 밖으로 나가는 일도 별로 없었다. 옆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날 살피거나 돌보곤 했다. 인스턴트 카레따위를 데워서 내밀어주거나 나를 대신해 편의점에 가 서류를 보내주거나 고지서를 정리해주곤 했다. 그렇게 몇 달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하루가 반복되면 어떨까.
아마 가을 즈음이었던 거로 기억한다. 당시 연재하던 잡지의 창간 기념을 축하하는 글을 쓰느라 정신없던 시기였다. TV에선 단풍 소식을 알리며 언제 어디서 축제가 열리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매일같이 알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단풍이 보고 싶은지 슬쩍 이야기를 꺼내 왔지만, 나중에라는 말로 돌렸다. 붉고 노란 잎들에 정신을 빼고 있을 틈이 없었을 때라 나는 책상에만 박혀 있었다. 그런 내게 그 사람은 슬쩍 다가와 물었다. 경마장에 다녀오고 싶다는 거였다. 그동안 연애하면서 그가 나를 위해 얼마나 참아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계속 참는 게  그 사람을 위해서는 좋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레 묻는 꼴이 가여워 끄덕였다.]


유메노 겐타로와 사귀게 되면서 당시 함께 알고 지내던 아메무라에게 답지 않게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거야?"라고 물었다. 아리스가와 다이스는 지금까지 연애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이었다. 어떻게 시작하고 진행해야 하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코인을 넣고 레버를 돌리거나 버튼을 누르는 일과는 다르니 누군가의 조언과 상담이 필요했다.



"에, 연애? 그냥 뭐 눈치싸움이지. 서로가 원하는 걸 들어주고 원하는 걸 얻어내는 관계?"



아메무라는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유메노 겐타로가 원하는 걸 찾으려 들었다. 아리스가와가 추측하기론 유메노 겐타로는 외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파칭코나 마작이나 경마나 뭐 그런 용무일 게 뻔해 보여서 그랬는지, 나갔다 온다는 말에 늘 눈썹을 찌푸리곤 했다. 그래서 그와 사귄 이후 손가락이 몸이 근질댔지만, 꾹 참았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니 그것도 꽤 일이라 힘겨웠다. 심심했다. 유메노 겐타로는 언제나 일에만 붙어 있었고 그가 주는 돈은 어느새인가 불어 잔뜩 쌓였지만, 쓸 곳이 없었다. 누군가 들으면 한심하다 혀를 찰지도 모르지만, 뭐 그 당시 제 하루는 그랬다. 그래서 슬쩍 물었다. 나갔다 와도 되냐고. 유메노 겐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이 어렵지 다음은 쉬웠다. 유메노 겐타로는 여전히 바빴고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몸을 겹치는 건 그리 시간이 필요한 행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늘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다녀오겠다 말했다. 그래도 전과 달리 12시 전에는 꼬박꼬박 집으로 들어갔다. 유메노 겐타로는 느지막하게 돌아오는 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크게 불만을 터트리진 않았기에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그 사람의 귀가가 늦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이 어렵다고 다음은 쉬운 모양이었다. 혼자 늘 집 어딘가에서 시간을 죽이는 그가 안쓰러워 허락했지만, 점점 외로워지기 시작했다. 일하다 돌아보면 늘어지게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 졌다. 하지만 그걸 바라는 건 어쩐지 이기적인 거 같았다. 그런 마음이 내 안에서 언제나 싸워댔다. 대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아직은 우리 사이에 조심스러움이 버티고 잇던 시기라 말을 꺼내는 것도 어려웠다.]


[겨울.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겨울,  우리는 또 눈이 내리던 날 마주하고 싸웠다. 나는 외롭다고 소리 질렀고 그 역시 외롭다고 말했다. 서로가 연인 관계인데 외로움을 느끼는 게 정상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어디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 주길 바란다 했고 그는 그게 이기적이라 지적했다. 그래서 나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소생이 돈도 주잖아요. 그런데 왜 그것도 못 해주는데요?"



그렇게 말했었다. 이 말은 꽤 상처라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잊히지 않았다. 정확히 유메노 겐타로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곤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울고 싶은 건 이쪽인데 더 울 거 같은 얼굴로 팔을 잡아 왔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다이스. 그가 빌었지만 그가 던진 그 말이 너무도 상처라 아리스가와는 받아줄 수가 없었다. 연인이라고 했잖아.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돈을 주니까 무언가를 해달라니.



[싫다고 괜찮다고 우기는 그를 붙잡기 위해 돈을 내민 건 나였다. 그에게 가장 부족한 걸 억지로 채워놓고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너도 이만큼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어마어마한 소릴 하고 말았다. 상처 입은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바로 빌었지만 그 사람에게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짐을 싸는 그를 말리며 울었다. 무릎도 꿇었다. 잘못했다고 빌고 또 밀었지만, 그는 말했다.]



"평소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잖아? 겐타로는. 나를... 그래서 지금 그런 소리가 툭 나온 거잖아?"



우는 그를 단호하게 밀어내며 물었다. 아니라고 그가 부정했지만, 별로 마음을 달래는 데는 효과가 없었다. 그래도 1년 넘게 살았던 거 같은데 제 물건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몇 가지의 옷, 몇 개의 만화책, 칫솔과 면도기가 끝이었다. 고작 이거뿐이라니. 이게 유메노 겐타로와 자신 사이의 정도를 보여주는 거 같아서 슬펐던 거 같다.



[연애를 하면 서로가 우선이어야 배려가 되고 관계가 유지되는데 당시 나는 처음이라 그걸 몰랐다. 날 봐주고 날 이해해주고 내 곁에 있어 주기만을 바랐다. 서로의 온도가 맞지 않아 엉망이었다. 서로 화를 내고 악을 외치는 순간이 오기 전에 적당하게 맞춰야 했는데 펄펄 끓을 때까지 가스 불에 올려놓고 만 셈이었다. 냄비는 타고 물은 넘치고 모두 증발해서 사라졌다.]


[그 사람은 꽤 강단 있고 단호한 구석이 있었다. 나에게는 늘 느슨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헤어지고 나서 연락도 받지 않고 찾아와주지 않는 그 사람을 보며 다시금 느꼈다. 어떻게든 나는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관계가 계속되면 또 이런 일이 일어날 거야. 그는 타이르듯 그리 말했다. 내가 도박을 그만둔다고 해도, 너는 나보나 네 일이 먼저고 또 내가 혼자 남겨지겠지. 뭐 누군가는 '네 인생을 살면 되잖아!'라고 따질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 인생은 스릴과 도박인데 널 위해서 포기했단 말이야. 일단 시간을 좀 갖자. 나도 그 외의 것을 찾아볼게. 너나 쓰리 세븐에 목메지 않는 그런 거. 그 말에 엉엉 울었다. 나 이외에 무언가를 찾는다니. 싫다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이기적이라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다.]


[우린 확실히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타인이 보기엔 혀를 찰지도 모르는 한심한 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놓지를 못했다. 그가 보고 싶을 때마다 울었다. 야속하게도 그는 물건 하나 두고 가지 않아서 내가 그를 추억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몇 해가 흘렀다. 우리가 헤어진 지 벌써 몇 년째더라. 차라리 마음껏 사랑했더라면, 후회 없이 함께 시간을 보냈더라면 아마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뒤는 러브레터와 가까웠다. 유메노 겐타로가 쓴 러브레터. 그리움과 미움 그리고 사랑과 사죄가 계속되어 펼쳐져 있었다. 부치지 못한 편지라는 챕터에 어울리는 글들이었다. 혼자 밥을 먹다가 문득 생각나 울었다거나, 잠이 오지 않아 저를 떠올렸다거나 그런 이야기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텐데, 불만이 있었으면 그때 바로 이야기했을 텐데, 돈으로 그를 붙잡아 놓지 않았을 텐데, 먼저 사랑을 고백했을 텐데. 온갖 후회의 말들이 뒤섞인 편지와 만약 그랬더라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정하는 편지를 아리스가와는 계속 읽어내려갔다.



[작가 후기.

문학 하는 이와 연애하지 말라는 소리가 있다. 헤어지고 나면 추억이 소재가 되어버린다고. 실제로 그 모양새가 되어버렸지만, 변명하자면 처음에는 이런 책을 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써왔던 편지가 원고에 섞여 우연히 이 책을 담당하게 된 담당자의 눈에 들게 되어, 책으로 내자는 제안을 받았다. 창피하고 부끄러웠기에 싫다고 했지만 그가 말하길 "어쩌면 그분이 이 책을 읽고 돌아와 줄지도 모르잖아요?"라 내 가슴에 헛된 바람을 불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미련이 그 말을 놓지 못했다. 그 사람은 글자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귈 때는 억지로라도 내 책을 읽어주었지만, 헤어진 지금은 아마 눈길도 주지 않을 거 같은데. 그래도 그 헛된 바람이 뭐라고 자꾸 소용돌이쳤다. 그래서 내 미련과 헛된 바람을 담아 이 책을 세상에 내놨다. 출판사에서는 멋진 표지에 양장본으로 내자 제안했지만, 그래서야 절대로 그 사람 손에 쥐어지는 일이 없을 거 같아 문고본을 고집했다. 500엔 정도면, 나에게 써주지 않을까 싶어서.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편지가 더 쌓이면, 잊고 있던 추억이 또 떠오르면 2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디 그가 어디선가 우연히라도 내 이름에 발을 멈춰 주어 이 책을 읽어준다면, 그래서 모자라고 이기적이었던 나를 용서해준다면 2권을 쓸 일도 없어지겠지.]



"...약았네."



협박하는 거야 뭐야. 아리스가와는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중얼댔다.



[소생은 아직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게 이 책의 마지막이었다. 순식간에 읽어 내려간 책을 내려놓으며 아리스가와는 유메노 겐타로의 집을 떠올렸다. 낡고 작던 아파트. 계단을 밟을 때마다 쾅쾅 철제 소리가 울리던 그곳. 신문이나 우유 배달원의 서두름에 늘 아침 일찍 눈을 뜰 수밖에 없었던 방. 먼지가 낀 창으로 쏟아지던 새벽 아래 눈을 감고 잠들어 있던 모습. 그곳에서 함께 빗소리를 음악 삼아 입을 맞추던 날, 커다란 벌레에 질겁한 그를 대신해 고무장갑을 끼고 벌레를 잡았던 날, 태워버린 냄비를 보고 혀를 차던 그에게 무릎을 꿇고 빌었던 날, 함께 씻고 나와 등을 마주하고 맥주를 마시던 날, 우산을 잊고 나간 그를 마중하러 나가던 날, 함께 대청소를 하다 그의 옛 앨범을 발견한 날, 그에게 처음으로 작은 꽃다발을 선물한 날, 잠이 오지 않아 돌아누웠을 때 눈이 마주쳤던 날, 그를 품에 안고 따뜻함을 느끼던 날. 그런 날들을 그곳에서 보냈었다. 도박과 유메노 겐타로, 그 두 개가 아닌 다른 중요한 것을 찾아보겠다 말했지만, 아리스가와는 여전히 여기저기 옮겨 살고 있었고 여전히 레버를 당겼으며 여전히 가끔 유메노 겐타로의 말간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남긴 후회와 미련처럼 저도 같은 걸 품고 살았다. 이런 못난 남자에게 반해버린 그를 동정하고 사랑하면서.



"좀 더 멋진 사람을 사랑하지 그랬어."



후회도 미련도 주지 않을 정도로. 유메노 겐타로를 바라보고 유메노 겐타로를 생각하며 유메노 겐타로를 위해 사는. 현실도 이상도 없이 길을 누비며 사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 참 웃기지도 않은 자존심을 내세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돈도 없었다. 갈 곳도 없었다. 유메노 겐타로는 그런 저를 주워다 희생하고 보살핀 사람이었다. 그가 욕심을 내었다고, 조금 화를 냈다고 속 좁게 삐져서는. 실제로 그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아리스가와는 과거의 저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살짝 시큰해지는 눈을 감았다 뜨며 입술을 물었다. 아직 유메노 겐타로는 그곳에 있다고 했다. 자신이 떠난 후에도 계속. 몇 번이고 발걸음을 했다가 돌아섰던 그 아파트를 떠올리며 아리스가와는 책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리고 코코아와 케이크 대신 책을 샀다. 그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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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두 사람은 한 백 번 헤어지고 백 번 다시 만날 거 같다는 그런 이미지가 있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