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지루해."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말에 옆자리에 앉아있던 세나 이즈미가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예의도 모르냐. 그가 예의 있게도 입술을 가리고 속삭였다. 예의라. 하카제는 비집고 나오는 하품을 주체하지 못하고 뱉어내며 웃었다. 예의는 갖춰야 할 사람들이나 갖추는 거지. 자신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신랑도 아직 도착 안 했다며. 식도 시작 전인데 지루해서 도저히 못 있겠다."
"그래서? 가려고? 참아."
"한 대만 피고 올게."
시계를 보며 고개를 젓는 세나를 두고 하카제는 몸을 일으켰다. 빛을 받아 번쩍이는 샹들리에, 이름도 모를 클래식 음악, 테이블마다 차지한 화려한 꽃과 샴페인들. 수지타산을 위해 서류에 사인하듯 치루는 결혼식에 퍽 정성을 들인 모습에 절로 비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이 한 두 번도 아닌데 지긋지긋했다. 어차피 언론에 뿌려진 만남도 거짓, 잡고 있는 손도 거짓, 주례사의 말에 끄덕이는 사랑의 맹세도 거짓인데 이렇게 공을 들일 필요가 있을까. 하카제는 식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거 처럼 화려한 복장을 한 사람들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같이 참석한 세나 이즈미에겐 담배만 태우고 오겠다 했으나, 사실 하카제의 안 \쪽 포켓엔 담배가 없었다. 아침에 식장에 오면서 있던 걸 모조리 다 태우고 왔으니 당연했다. 흡연 구역이 아닌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기며 하카제는 슬쩍 신부 대기실을 살폈다. 오늘 가장 아름다워야 할 여자는 어색한 미소만 두르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누나는 괜찮아."
5년 전, 저 자리에는 자신의 누나가 있었다. 그녀는 행복해야 할 순간에 웃지 못하고 어색하게 그리 말했다. 이 바닥에서 돈과 돈으로 맺어지는 인연은 바닥에 침을 뱉는 거 만큼 간단하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제 누나가 그 자리에 앉게 되니 가슴이 답답했다. 싫으면 당장 그만둬. 그 말이 목을 꽉 채웠는데 결국 하카제는 한 음절도 뱉지 못했다. 그녀도 자신도 누리고 있는 걸 버리고 살아갈 용기 따위는 없으니까.
뭐, 다행히 새 식구는 좋은 사람이었다. 무뚝뚝하긴 했으나 누나에게 잘하는 듯 보였고, 작은 항공사를 소유하고 있던 그의 집안은 아버지의 리조트 호텔 사업에 꽤 좋은 파트너가 되었다. 거기다 아버지의 입장에선 딱 그 정도 집안이 체스 말처럼 다루기도 편한 적당한 상대였고. 덕분에 큰 문제 없이 시간이 흘렀다. 지금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조카도 생겼다. 식장에서 우울해 보였던 누나는 아이를 품에 안고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며 지냈다.
"그래... 뭐 우린 해피엔딩이라 다행이지만.."
이쪽은 어떠려나. 하카제는 신부 대기실에서 눈길을 떼곤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오늘의 다른 주인공은 하카제도 꽤 잘 아는 얼굴이었다. 몇 번 사교판에서 보았던 얼굴로 첫인상은 참 뺀질하게 생겼네, 였던가. 넉살 좋게 웃으며 악수를 내밀던 그를 내려보며 그런 평가를 내렸던 거 같은데.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는 상황을 잘 몰라요. 하카제씨가 알려주신다면 기쁠 거 같네요." 겉치레의 말을 웃으면서 술술 던졌던 것도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다른 이들과 인사를 하던 그를 흘기며 세나 이즈미는 "엮이지 마라. 미국에서 온갖 약에 쩔어 지내다가 끌려 들어왔다더라. 우리 아버지가 돈 없는 새끼랑은 눈 마주쳐도 눈이 맛 간 놈하곤 마주치지 말랬어."라 일러주었다. 어차피 그가 충고하지 않아도 저가 그와 어울릴 일은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 후 몇 번인가 썩 질 좋지 못한 파티에서 날아온 초대장 속 주최 이름으로 몇 번 보았던 게 끝. 후에는 뜯지도 않고 치웠기에 완전히 기억 속에서 잊혀 있었다. 그런데 흘러 흘러 식장에서 보게 될 줄이야. 워낙 얼굴들이 도장을 찍으러 오는 자리이다 보니 등 떠밀려 온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저런 인간의 출발에 발걸음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뭐, 하지 않을 거지만."
띵, 듣기 좋은 알람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지하 주차장이 드러났다. 로비에서 도어맨에게 키를 넘겨주지 않은 제 판단을 스스로 칭찬하며 하카제는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고 했다.
"하... 진짜 왜 이래? 미쳤어?"
주차장을 크게 울리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평소라면 누가 주먹을 휘두르든 소리를 내지르든 무시했겠지만, 공간을 울린 목소리가 너무 익숙하다 보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훔쳐보는 취미는 없는데. 하카제는 변명 같이 중얼거리며 벽에 기대섰다. 그리고 고개만 살짝 돌려 코너 너머를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지금 즈음 새 출발을 준비해야 할 신랑이 그곳에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어디라고?!"
축복, 행복. 뭐 그런 복이 가득한 날과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로 그가 누군가에게 소릴 지르고 있었다. 멋들어지게 턱시도를 갖춰 입은 그의 앞에는 오늘과 어울리지 않는 복장의 남자가 서 있었다. 티셔츠에 청바지. 거기다 슬리퍼라. 척 보아도 초대받은 꼴은 아니었다.
"료타가...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얼굴은 보이지 않아 알 수 없었으나, 하나하나 힘겹게 뱉는 그의 음성에서 하카제는 물기를 느꼈다. 누군가 툭 치면 그대로 터질 거 같은 물방울 같은.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괜한, 그리고 골치아픈 일에 끼어든 거 같아 저도 모르게 이마에 주름을 그렸다.
"그래, 기다리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건데?!"
"....애인이 결혼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냥 기다리라고요?"
흡, 하카제는 숨을 들이켰다. 이게 무슨 소리야. 머리가 띵했다. 두 집 살림이니 첩이니 꽤 가벼운 이야기였지만, 상대가 남자라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저 새끼 게이였던가? 하카제는 머릿속에서 몇 없는 우메무라 료타의 정보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기억나는 건 세나 이즈미가 말한 한 줄 짜리 대사가 전부였다.
"있지, 카나타군. 누구에게 그런 소릴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런 걸 들었으면 그냥 가만히 있어야지. 여기 오면 어쩌자는 거야. 나 죽는 거 보려고 그랬어?"
"저는...!"
"카나타군 멍청한 거? 잘 알지. 우리가 몇 년 만났는데! 당연히 잘 알지! 그게 귀여워서 좋았던 적도 있는데... 이건 아니잖아! 어?! 여기가 무슨 자린 줄 알고 나타나?! 우리 아버지에게 걸리면 나 죽어! 그래도 좋아?!"
"하지만.. 료타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잖아요!"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데?! 그냥 알아먹고 떨어지면 안 돼!? 그렇게 머리가 없어?! 상황 돌아가는 거 보면 몰라??!"
오늘 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주차장까지 내려올 일은 극히 드물고 누군가가 내려온다고 하더라도 썩 중요하지 않을 인물이니 입단속을 시키면 그만이었겠지만, 이래서야 그야말로 "저 애인 있는데, 결혼합니다!"라고 광고하는 꼴이 아닌가. 쓰레기인 줄은 알았지만 분리수거는 가능할 줄 알았더니 그도 아닌 모양이었다. 저건 태울 수도 없고 어디다 쓰려나. 하카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제 안쪽 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아, 담배. 없지.
"...사...사랑한다고 했잖아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담배가 없어서였다. 절대로 울음을 터트리며 던진 남자의 대사가 짜증 나서가 아니었다.
"카나타군.... 있지, 나는... 지나가는 쥐새끼에게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
예의도 없는 새끼. 하카제는 뇌까렸다. 그리고 상황 끝. 남자는 더 우메무라를 붙잡지 않았고 놈은 돌아섰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주차장을 떠나 비상구로 사라지는 동안 남자는 미동도 없이 자리에 서 있었다. 짙은 주차장 바닥으로 물방울이 후둑 후둑 쏟아져 내렸다. 아이고. 하카제는 머릿속으로 우스운 탄식을 뱉으며 눈썹을 긁적였다. 아침 드라마도 끝났으니 이제 다시 차로 돌아가 유유히 빠져나가면 그만인데, 어째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하..."
한참을 서 있던 남자가 마른 숨을 토해내며 쪼그려 앉았다. 끅끅 소리까지 내는 걸 보니, 뒤늦게 쏟아진 추억에 짓눌려 분함과 아픔이라도 토해내는 거 같았다. 듣자 하니 꽤 오래 만난 사이인 거 같던데. 도대체 무슨 정신이면 저 쥐새끼 같은 놈과 오래 만날 수 있는 걸까. 가까이에만 있어도 오물 냄새가 나는 놈인데.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하카제는 다시금 가볍게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차로 향해야 하는데 멋대로 남자에게로 향했다.
"저기."
그리고 툭, 남자의 머리통 앞에 멈춰 입을 열었다.
"차 빼야 하는데."
제 차는 다른 구역에 서 있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여기서 남자가 울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거짓말을 뱉었다. 어릴 때도 길에 버려진 개나 고양이를 돌보겠다 들고 와 비서들 속을 뒤집어 놓았던 버릇을 여태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알아서.. 빼시면... 되잖아요.."
꾸역꾸역 울음을 삼키며 그가 따지듯 웅얼댔다.
"아니, 알아서 어떻게 빼? 내가 슈퍼맨이야 뭐야. 차를 공중에 띄우나?"
틀린 말도 아닌데 마치 틀린 말을 들었다는 듯 남자가 홱 고개를 들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얼굴이 저를 똑바로 올려보았다. 눈물로 엉망인 꼴이 참 가관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듣자하니... 나쁜 놈에게 걸린 거 같은데.. 여기서 질질 짜지 말고 털어내요."
저런 놈의 뭐가 아쉽다고 아까운 눈물을 흘리는지. 하카제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며 달랬다. 하지만 남자는 그걸 바라만 볼 뿐 받아가지는 않았다. 대신
"료타는... 나쁘지 않아요."
라 멍청한 소릴 뱉었다. 아까 그놈이 멍청하다 어쩌다 했던 소리가 진짜인 모양이었다.
"우메무라랑 얼마나 만났는지 모르겠지만, 저 새끼 그쪽이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놈 아닙니다. 미국에서 학교 다니다가 퇴학당한 건 아나? 약에 쩔어서 시설 몇 번 들락거린 것도 알고? 정신 병원에 집어넣으려던 거, 쟤 어머니가 울고불고 아버지에게 빌어서 일본으로 데리고 들어온 건? 그래놓고 여즉 버릇 못 버려서 소문 난장판인 건? 애인인 거 같은데.. 그 호칭으로 몇 명 더 있을지도 모르는 것도 알고? 저 새끼가 여는 파티, 더럽다고 아주 소문이 자자한데. 그런 놈이 뭐가 좋다고 아쉽다고 웁니까? 차라리 떨어져 나가서 고맙-"
그래서 알려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멍청하니 족집게 과외라도 해줄 셈이었다. 그런데 뺨으로 날아든 건 뭘까. 짝, 소리와 함께 매섭게 돌아간 고개에 하카제는 눈을 껌뻑였다. 뒤늦게 소리가 울린 뺨에 얼얼함이 퍼졌다. 뒤늦게 벙싯, 웃음이 튀어나왔다.
"지금 때... 때렸...?"
"는데요."
와, 하카제는 탄성을 뱉었다. 태어나서 남에게 뺨을 맞아본 건 처음이었다. 아버지에겐 몇 번 있었지만, 그건 아버지였기에 가능했다. 타인이 제 몸에 손을 댄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아, 짜증 나. 무시하면 될 일을 무시하지 못해서 이게 무슨 짓인지.
"료타가... 료타가 실제로... 그렇다고 해도-"
하지만 다시 눈물을 쏟아내며 꺽꺽 이야기를 토해내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솟구치던 화가 쑥 가라앉았다.
"당신이 제 사랑을 모욕할 권리는 없어요..."
그리곤 그는 다시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아직 제 손에 들려있었던 손수건까지 챙겨서. 킁, 야무지게 코까지 풀어내는 소리를 들으며 하카제는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자신이 타인의 사랑을 비웃거나 모욕할 권리는 없지. 멍청한 놈 붙잡아 과외 시켜줄 이유도 없고. 그런데 왜 아직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까. 아니, 왜 무릎을 굽혀 남자와 시선을 마주하려 드는 걸까.
"저기."
"..또 뭐요."
그가 손수건을 꾹 쥐며 노려보아왔다.
"잘 살아라, 그게 최고의 복수라는 말이 있잖아요. 제가 책을 안 읽어서 좀 구닥다리 대사이긴 한데. 어쨌든."
"그래서요..."
"내가 잘살게 해줄까요?"
"...?"
"복수하게 해줄까요?"
태우지도 못할 쓰레기. 저대로 하하 호호 웃고 지내는 거 어쩐지 열 받으니까. 저런 쓰레기도 애인이라고 변호하고 모욕하지 말라고 우는 당신이 조금, 아주 조금 신경 쓰이니까.
"어때요? 내가 도와줄 테니까-"
연애할래요? 분명 누군가가 들으면 미쳤다고 등을 후려칠 소리를 뱉으며 하카제는 웃었다. 남자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는 걸 보니, 그도 저를 미쳤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뭐, 실제론 더 미친놈하고 연애해봤으니 자신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카제는 최대한 스스로 자신 있는 얼굴을 내보이며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찌푸린 눈동자는 한참을 물속에서 흔들리더니 이내 물을 비워내곤 접었다. 그리곤 말했다. 위로 고마워요, 라고. 아, 농담으로 생각하는 건가? 하카제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위로 아닌데. 수작인데. 하지만 굳이 그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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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때린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같은 거 보고싶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복수를 위해서 둘이서 짜고친ㄴ 이상적인 쿵짝쿵짝 연애물이 보고싶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