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카나] 어둠의 해연
2018. 7. 10. 20:27







언제나 반짝이는 것에 눈이 갔다. 햇살, 조각난 수면 위, 모래알, 조개, 뭐 그런 것들. 무심코 향하는 시선은 아마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이 아닐까 하고 신카이 카나타는 늘 생각했다. 스스로 채우지 못해 텅 빈 공백을 억지로라도 채우고 싶어서 반짝임에 눈을 주고 마는 게 아닐까 하고. 어둠에 잠식된 자신을 끌어내고 싶어서 어떻게든 닿을 곳을 찾는 게 아닐까 하고.

"이번 개관 15주년 행사는-"

매주 월요일 아침, 전체 조회 있었다. 정직원을 상대로 진행되는 조회지만, 그날 출근하는 아르바이트생과 계약직도 참석해야 했다. 신카이는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지루한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 틈에서 멍하니 마이크를 쥔 기획팀장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각 부서의 팀장들이 나와 대충의 전달 사항만 이야기하고 끝냈을 조회 시간이 오늘은 길었다. 기획팀장은 마이크를 놓을 줄 몰랐다. 바로 이번 주가 이 씨블루 아쿠아리움의 개관 15주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몇 달부터 사내 게시판에는 온갖 행사 일정이 달라붙어 있었다. 카페 테리어의 메뉴도 변경되었고 굿즈숍도 몇 달 전부터 15주년 한정 버전의 물건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14주년도 13주년도 있었고 더 나아가 16주년도 있을 예정이니 15주년이 그리 특별한 날은 아니었지만, 올해는 달랐다.

"행사에 15주년을 맞이해 우리 씨블루 아쿠아리움의 새 얼굴이 된 대표이사님께서 참석하시니 경비부터 시작해 모든 직원은 배정받은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높으신 분의 행차가 그것도 새로운 얼굴의 행차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렇다 보니 본사 소속인 정직원들은 모두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기획팀장의 말에 옆에 선 미노루가 손바닥 아래에서 슬쩍 하품을 던졌다. 어느 누가 오든 자신이나 그녀와 같은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에게는 별 감흥도 없고 다른 세계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보다 신카이는 다른 게 더 신경 쓰였다. 열정적으로 행사에 대해 설명하는 기획팀장의 발아래 붙어있는 것. 얼핏 보면 그림자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마치 연기 혹은 아지랑이처럼 공기 중에 섞여 흔들렸다. 끽끽끽, 마치 제 존재를 알리고 싶은 듯 소리까지 내면서. 칠판을 손톱으로 혹은 분필로 긁는 듯한 소음이 울렸지만,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신카이는 손바닥에 차는 땀을 슬쩍 안고 있던 인형탈에 닦아내며 애써 시선을 팀장의 얼굴로 끌어냈다. 아는 척 해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었고.

"이상으로, 조회를 끝내겠습니다."

길고 긴 시간이 끝났다. 슬쩍 이마에 붙은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팀장이 단상에서 내려왔다. 삼삼오오 자신의 위치로 향하는 사람들 틈에서 신카이는 움직이지 못하고 여전히 단상에 들러붙은 연기를 바라보았다.

"카나타군, 갈까?"

하지만 그도 잠시, 제 지느러미를 당기는 미노루 아야의 손짓에 고개를 돌렸다.
월요일 아침임에도 아쿠아리움의 개관 시간은 활기찼다. 바쁘게 복도를 오가는 스태프들을 지나치며 신카이는 뒤뚱뒤뚱 걸음을 옮겼다. 매일 아침 개관에 맞춰 열리는 오픈 이벤트의 주인공은 신카이 카나타였다. 정확하겐 자신이 맡은 이 아쿠아리움의 마스코트 돌핀 블루였다. 아침 9시, 15년 동안 울린 개관 오프닝 송과 함께 제일 첫 번째로 입장권을 끊은 손님과 정문을 개방해왔다. 푸른색 돌고래의 모습을 한 마스코트 돌핀 블루는 그때 손님과 함께 문을 열고 기념 촬영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평일에도 개관 시간만큼은 늘 사람이 북적였다. 뭐, 이 이벤트를 제외한다고 해도 주말에 쉬지 못하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월요일엔 늘 바빴지만.

"그럼 오늘도 화이팅!"

정문으로 향하는 출구의 문을 열며 미노루가 기운차게 외쳤다. 신카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푸른 돌고래의 탈을 썼다. 팔 대신 지느러미를 휘적이며 걷자 저 멀리서 작은 환호성이 터졌다. 정문 앞에 옹기종기 모인 관광객들과 손님들이 손을 흔들거나 카메라를 들이밀며 돌핀 블루를 환영하고 있었다. 동시에 스피커를 타고 행진곡에 가까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개관 오프닝 송이였다.

"돌핀 블루!!"

오늘의 첫 손님은 여대생 두 명이었다. 돌핀블루의 팬인지 그녀들은 색만 다른 마스코트가 그려진 티셔츠에 가방에는 돌핀 블루의 인형이나 배지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이번 15주년 기념 한정 것도 있었고 굿즈숍에서 이미 판매가 끝난 오랜 물건도 섞여 있었다. 무뚝뚝한 얼굴을 탈 안에서 감춰내며 신카이는 그녀들의 가방을 보곤 지느러미를 손뼉 치듯 흔들었다. 꺄아, 환호성을 지르는 그녀들을 미노루가 메인 분수대 앞으로 안내했다. 그 누구도 없는 아쿠아리움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돌핀 들루, 가운데에 와줘! 팔짱 껴도 괜찮아?"

그녀들의 말에 신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느러미를 내밀자 어색하게 팔짱의 형태로 달라붙었다. 치즈! 사진 담당 스태프가 열정적으로 두 컷을 찍었다. 기념사진이 끝난 후에는 드디어 오픈이었다. 스태프에게 열쇠를 받은 그녀들이 여전히 환호를 내지르며 커다란 철문 앞에 섰다.

"그럼 돌핀 블루와 함께 씨블루 아쿠아리움 오픈하겠습니다!"

마이크를 든 이벤트 스태프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함께 미노루가 푸른 리본이 달린 커다란 열쇠를 건넸다. 어차피 정문은 관리팀이 자동으로 열고닫지만, 쇼를 위해선 필요한 순서였다. 신카이 역시 그사이에 끼었다. 떨려~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구멍에 맞춘 키를 넣고 돌렸다. 그리고 덜컹 소리와 함께 커다란 철문이 오픈되었다. 커다란 분수, 양옆에 놓인 화단을 지나쳐 아쿠아리움 본관으로 향하는 사람들과 지느러미 하이파이브를 해주었다. 그렇게 활기찬 아침 근무를 시작하고 있으니, 조회 시간에 보았던 검은 연기 따위는 금세 머릿속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보고 있어도 모르는 척 늘 밀어내는 습관 덕일지도 몰랐다.
아침 오프닝 행사가 끝나면 바로이어서는 '돌핀 블루와의 만남'이 있었다. 거창한 이름이지만 단순하게 관람객과 사진을 찍어주는 시간이었다. 돌핀 블루를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정해져 있어서 그 시간대가 되면 포토 라인에는 언제나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미노루의 에스코트를 따라 향한 포토 라인에는 화려하게 꽃과 물고기 그림들과 함께 '개관 15주년, 모두와 함께하는 씨블루 아쿠아리움!'이라는 판넬이 장식되어 있었다. 화이팅, 작게 외치는 미노루의 응원을 들으며 신카이는 천천히 그 판넬 앞에 섰다. 기다리던 사람들의 환호와 함께 이윽고 기다리고 있던 첫 번째 대기자가 다가왔다.
손을 흔들어주고 파닥이는 지느러미로 하이파이브를 하고. 다행히 팔이 없는 캐릭터라 아이들을 안아 드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게 돌핀 블루의 몇 가지 장점 중의 하나였다. 조금 나이가 있는 아이들은 다가와 머쓱하게 웃으며 지느러미를 꾹 쥐었고 여고생들은 대부분 우르르 올라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가끔은 폭 끌어안아 주는 관객도 있었고 짓궂게 돌핀 블루의 뺨에 입술을 묻는 사람도 있었다. 또 가끔은 지금처럼
"으아아앙! 무서워!"
부모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 나와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고. 겁에 질려 우는 아이와 달리 부모나 지켜보는 사람은 이 해프닝이 귀여운지 모두가 웃고 있었다. 신카이는 최선을 다해 아이의 겁을 달래주려 이리저리 꼬리도 흔들어보고 지느러미로 인사도 건네보았지만, 보통 이렇게 덜컥 겁을 먹은 아이는 자지러지게 더 소릴 높이다 부모 품에 안겨 물러가곤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이제 돌핀 블루는 가야 할 시간이에요~ 모두 손을 흔들어 주세요."

약 한 시간 가량의 포토 타임이 끝나자 갈증이 일엇다. 쉬지 않고 움직였으니 당연했다. 이미 안은 속옷까지 푹 젖은 거 같았다. 날은 아직 본격적인 여름 길에 들지 않았지만, 인형 옷은 언제나 한여름의 낮과 같았다. 꿉꿉하게 차오른 공기 안에서 숨이 더워지는 걸 느끼며 신카이는 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다음 돌핀 블루와의 만남 시간까지는 2시간이 남아있었고, 그 시간은 휴식시간이자 점심시간이었다.

"오늘 식당 메뉴 중국 냉면이래."

정리하는 스태프들을 두고 포토 라인을 벗어나며 미노루가 속삭였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카메라 셔터를 음악 삼아 걸으며 신카이는 끄덕였다. 냉면이라니, 나쁘지 않은 메뉴였다. 직원용 복도로 들어서기 무섭게 인형탈을 벗었다. 개인 물품과 휴대폰을 챙겨오겠다는 미노루와 복도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후, 서둘러 탈의실로 향했다. 두 시간동안 이 인형 옷과 작별할 순간이었다.
아무도 없는 남자 탈의실에서 옷을 벗어 구석에 잘 두고 마른 수건으로 대충 땀을 닦아낸 후 복도로 나왔다. 미노루는 아직인지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교대 시간도 아니고 정확하겐 모두의 점심시간도 아니니 비어 있는 것이 맞았다. 쥐죽은 듯 조용한 복도를 바라보던 신카이는 이내 구석에 피어난 검은 연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조회 시간의 단상에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그보다는 작고 더 짙었다. 그게 자신을 발견하고 다가올까 싶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무시해도 될 정도의 크기이긴 했지만, 벌써 하루에 두 개째였다. 그건 이상했다. 이 아쿠아리움에서 일 한지 3년째, 저런 것을 마주하는 경우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자주 만난 적은 없었다. 더 이런 일이 늘어나면 어쩌지. 저도 모르게 초조해진 마음에 손톱을 물었다. 약간 식은땀이 느껴졌다. 다행히 이런 저를 구하듯 타이밍 좋게 미노루가 반대편 복도 끝에서 나타났다.

"잠깐... 매점에 들렀다 가도 괜찮을까요?"

식당에 가려면 저 연기가 있는 복도를 지나야 했다. 그건 죽어도 싫었기에 서둘러 미노루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 연기도, 연기가 뿜어대는 이상한 냄새나 소리도 느끼지 못할 그녀는 고맙게도 묻거나 따지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카이는 도망치듯 그녀를 데리고 연기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에서 자꾸만 초조한 소리가 울렸다.



***



신카이 카나타의 첫 기억의 시작은 늘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없었다. 어머니는 다정하고 고운 분이셨다. 세세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녀와 자신이 있던 풍경은 작고 또 작은 방이었다. 그 안에서 그녀는 항상 사랑스러운 눈으로 저를 안아주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시작은 그렇게 언제나 반짝반짝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다음 기억부터는 늘 어둠이었다. 구석구석 늘 어둠이 묻어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그것들은 늘 신카이에게 엉겨 붙곤 했다. 발을 감아 넘어트리기도 하고 어떨 때는 목을 조르기도 했다. 컥컥거리며 벗어나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엉엉 울음을 터트리면 어머니는 언제나 곤란한 얼굴로 안아주며 말했다.


"카나타, 아무것도 보지마. 그리고 아무것도 말해선 안 돼."


그녀의 말대로 가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척을 하면 연기들은 자기들끼리 뭉쳐 사라지거나 혹은 가만히 떠돌다 흔적을 지우곤 했다. 그래서 신카이는 모르는 척을 했다. 보이지 않는 척을 했다. 가끔은 정말로 커다랗고 거대해서 피할 수 없는 순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견뎠다.
그리고선, 어머니의 손을 잡고 본가에 들어갔다. 신카이라고 쓰인 이름이 커다란 가옥 앞에 붙어져 있었다. 손을 붙잡은 어머니의 손은 더는 따뜻하지 않았고, 늘 웃어주던 얼굴은 어느새인가 창백하고 말라 있었다. 보지 말라고, 보이지 않는 척을 하라고 일러주던 그녀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것을 말하라 했고 신카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을 사랑했던 어머니는 자신에게 보지 말라, 말하지 말라 했으니까. 그 집으로 저를 들이민 여자는 더는 어머니가 아니었으니까.

"하아...."

기분 나쁜 악몽이었다. 신카이는 저를 다그치며 비명을 지르던 어머니를 끝으로 눈을 떴다. 쨍하게 켜진 조명을 올려 보며 빠르게 숨을 내쉬었다. 작은 방에는 온 불이 다 켜져 있었다. 거실, 주방, 화장실, 침실 모두. 낮이고 밤인지 구분이 되지 않은 환한 방에서 신카이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7시였다. 창밖을 보니 푸르스름한 게 아침이었다. 평소엔 잘 꾸지도 않는 옛날 일들이 찾아오다니, 근래 주변에서 자꾸 어둠을 봐서일까. 어쨌든 오늘 하루는 재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쓰게 하면서 서둘러 일어섰다. 평소보다 더 늦잠을 잤다. 15주년 기념행사가 있는 날이라 출근 시간도 앞당겨져 있는데 과거에 눌려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서둘러 머릿속에서 여자의 얼굴을 지워내며 바닥에 발을 디뎠다.
살고있는 곳은 씨블루 아쿠아리움에서 전철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의 작은 빌라였다. 씨블루 아쿠아리움 부지에 놀이동산과 호텔이 들어서면서 정직원들을 위한 기숙사 역시 들어섰지만, 비정규직에겐 제공되지 않는 숙소였다. 신카이는 벌써 주 6일, 하루 빠듯하게 3년이나 씨블루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숙소는 받지 못해 어렵게 근처 빌라를 빌렸다. 작년에 인사팀에서 정규직 전환을 고려해주겠다 했지만, 제대로 학교를 다닌 적도 없는 자신이 그런 기회를 받을 수 있을 리 만무했고 예상대로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하지만 차라리 나았다. 정규직이면 근무 시간이 짧았다. 지금은 길게 일하고 또 일한 시간만큼 시급대로 돈은 들어오기 때문에 생활비나 집세를 내는 것도 힘들지 않았다. 교통비도 지원되었고, 밥도 늘 사내 식당에서 먹으니 식비도 그리 들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혼자 지낸다는 것 정도일까. 이 빌라에 들어와 단 한 번도 끄지 못한 전등 스위치를 바라보며 신카이는 칫솔을 입에 물었다.
아침을 준비하는 건 간단했다. 일어나고 씻고 먹고 옷을 입고. 가끔 일어나고 씻고 옷을 입고 먹고로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대부분은 이렇게 아침을 맞이했다. 현관에 늘 올려두는 열쇠와 직원증을 챙기곤 운동화에 발을 구겨 넣었다. 집안의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지만, 신카이는 스위치를 누르지 않고 집을 나섰다.
아침 준비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순서가 정해져 있는 출근 시간을 보내고 아쿠아리움에 도착하자 15주년 행사 준비로 모두가 정신이 없었다. 언제부터 나와 있는 건지 벌써 지쳐 보이는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신카이는 탈의실로 향했다. 비슷한 출근 시간을 공지 받은 다른 아르바이트생들도 모두 옷을 갈아입느라 정신이 없었다.


"신카이군, 왔어?"


막 돌핀 블루의 몸통에 몸을 구겨 넣을 즈음 노크 소리와 함께 인사 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은 셔츠 차림으로 사무실에서 지내던 그도 오늘은 현장 스태프들이 입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대답 대신 인사하자 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바쁜 거 알지? 교대로 해줄 무카이군도 불렀으니까 쉬는 시간이랑 점심시간은 걱정하지 말고. 오늘 오프닝 행사는 대표 이사님이 하실 거야. 카메라들도 많이 왔으니까 긴장하지 말고. 뭐, 신카이군 늘 잘해주니까 걱정은 안 해도 괜찮겠지?"


속사포 같이 터져 나온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15주년 당일이니 그림상이라도 손님과 오프닝을 치르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 취소하고 새로 온 대표 이사가 담당하는 모양이었다.


"와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네. 무슨 수족관 대표 이사 새로 온다고 이 난리야?"


인사 팀장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돌핀 블루를 담당하고 있는 무카이 나츠키가 나타났다. 그는 가방을 대충 구석으로 던져 벗으며 평소와 다른 아쿠아리움 분위기에 혀를 찼다.


"밖에 카메라 장난 아니에요. 방송국 차량도 엄청 많더라고요. 우리 씨블루가 이 정도였는지 전혀 몰랐어요."

"씨블루가 이 정도라기 보다... 정확하겐 이번 대표 이사가 주목받고 있는 거겠지."


유니폼을 갈아입은 스태프 하나가 무카이의 말을 고쳐주었다. 본디 씨블루 아쿠아리움은 경영이 그리 좋지 못했다. 오픈하고 얼마 동안은 꽤 인기가 많은 명소였지만, 다른 아쿠아리움들이 생겨나고 최대 규모라는 이름도 떨어져 나가면서 대부분 현장 학습을 오는 학생들의 단체 방문을 제외하면 그다지 손님이 많지 않았다고 했다. 망하기 일보 직전의 씨블루 아쿠아리움을 약 5년 전, 하카제 그룹에서 인수했다. 당시 호텔 경영을 하던 그룹이 엔터테인먼트 업계로 진출을 도모하며 시도한 첫 발자국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의 토지를 사들여 '하바 랜드'를 오픈했다. 전국에서 가장 큰 놀이동산과 함께 꿈과 희망, 그리고 동화 컨셉을 내세운 호텔을 새웠고 그 덕에 씨블루 아쿠아리움은 하바 랜드의 성공과 함께 다시 부활했다. 돌핀 블루 역시 그때 하바 랜드의 마스코트와 함께 탄생했다고, 일을 시작할 때 인사 팀장에게 <씨블루 아쿠아리움의 이해>라는 책자를 보며 들었다.


"작년에 HTV 개국하고 나서 완전 주가가 이만큼 뛰었잖아. 솔직히 호텔 장사는 이제 완전 서브지 서브. 워낙 이 사업 저 사업하다 보니 인물들도 엄청 갈아 치우고 갉아 댔던 모양인데, 이번에 하바 랜드 대표는 하카제 가문 직계 혈통이라니까 난리인 거지. 우리 아쿠아리움 주가도 엄청 올랐다."


그가 이렇게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건 주식 때문이었는지, 휴대폰을 내보이며 설명했다. 신카이는 그 화면에 떠 있는 그래프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주변에서 다들 놀란 반응을 하는 거 보니 좋은 이야기인듯 보였다.


"거기다! 29살이래."
"아, 갑자기 제 인생이 하찮아지기 시작했어요."


어린 대표 이사의 등장에 아직 창창한 나이의 무카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29살이라. 신카이는 가만히 자신의 나이를 떠올렸다. 같은 나이였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서 29살에 이런 대표직에 앉고 나는 돌고래 탈이나 쓰고 있고."


세상 참 불공평하네요. 툴툴대는 무카이의 말에 신카이는 가만히 웃었다. 그리곤 곧 오픈이 시작됨을 알리는 음악에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불공평한 인생이었다. 새로 온다는 대표 이사가 어떤 인생을 살았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보다는 나았을 테니까. 하지만 부럽거나 질투가 나진 않았다. 애초에 그런 인생은 자신의 몫이 아니었고, 신카이는 욕심이 없었다.


"빨리 가야 해!"


복도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었는지 미노루가 호들갑을 떨었다. 미안해요, 그녀를 기다리게 한 게 미안해 사과하자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머리에 돌고래 탈을 뒤집어쓰고 미노루를 따라나서는 길목마다 오픈을 알리는 음악이 재촉하듯 흘러나왔다.


"새 대표 이사가 온다고 난리도 아니야."


마지막까지 쓸고 닦는 직원들을 보며 그녀가 속삭였다.


"들었어? 새로 오는 대표 이사가 29살이래. 거기다 엄청 잘생겼다고 아까 푸드팀 직원들이 호들갑이더라."
"그런가요?"
"하카제 회장의 손주래. 그래서 정직원들이 바짝 쫄아 있더라고. 젊은 이사가 왔으니 하바 랜드 이름이나 바꿨으면 좋겠다. 촌스럽지 않아? 씨블루는 괜찮지만 하바 랜드나 하바 리조트는 너무 촌스러워."


자기 명찰 위에 적힌 <HAVA LAND / SEA BLUE>의 글자 중 정확하게 HAVA 부분을 잡고 흔들며 미노루가 키득댔다. 그사이 건물을 나와 정문을 향하고 있었다. 우미노의 말대로 이미 정문 앞은 온갖 기자들과 카메라들로 가득 차 있었다. 15주년 행사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답지 않게 분수 앞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고 하늘에는 커다란 풍선이 현수막을 달고 떠 있었다. 아마 밤이었다면 불꽃이라도 터트리지 않았을까. 매일 밤, 하바 랜드에서 터져 나오는 불꽃들을 떠올리며 신카이는 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어서, 어서!"


아직 오픈 시간은 조금 여유가 있었는데 제 굼뜬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손짓했다.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본사에서 왔거나 혹은 하바 랜드 소속으로 보였다. 반듯하게 정장을 입은 사람들 틈에서 홀로 뒤뚱대며 가운데 서려니 조금 창피했다. 멍청하게 생긴 돌고래로 볼 게 뻔한데도 어쩐지 자신의 얼굴이 카메라에 찍히는 거 같아 긴장되었다. 그런 자신을 눈치챘는지 저 멀리서 기획팀장이 크게 입을 움직였다. 평소대로 해! 소리는 내지 않고 벙긋벙긋.


"그럼 지금부터 15주년을 맞이한 씨블루 아쿠아리움의 오프닝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아나운스도 달라졌다.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보니 몇 번 TV에서 본 적 있는 얼굴이 마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모 방송국의 여자 아나운서였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인가, 왜 이 난리냐며 툴툴대던 무카이의 말을 떠올리며 신카이는 머릿속에 물음표를 그렸다.


"오픈에 앞서 이번 15주년과 함께 하바 랜드 역시 5년을 맞이했는데요, 일본 최고의 레저 문화를 책임지고 있는 하바 랜드의 새 얼굴이 된 대표 이사님을 모시겠습니다."


장황한 설명. 하지만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번쩍이는 플래시 앞에서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나운서의 소개와 함께 누군가가 안내 요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카펫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매일 사람들을 안아주고 반기며 사진을 찍는 게 일인 자신은 이 플래시들이 너무 불편하고 어색한데, 이제 막 대표 이사에 올랐다는 젊은 남자는 전혀 불편하지 않은 모양인지 매끄럽게 웃으며 걸음을 뻗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붓하게 모래알 색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번쩍이는 플래시 앞에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아침부터 들려온 소문대로 그는 꽤 미남이었다. 그리고


"우욱..."


신카이는 서둘러 입술을 꽉 물었다. 사내는 그저 선 자체로도 태양처럼 번쩍였지만,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검은 연기는 그 빛을 다 삼켜버릴 것 같았다. 끝없이 뭉쳐있는 그 연기를 바라보며 신카이는 눈을 부릅떴다. 고약한 악취가 돌고래 탈을 뚫고 들어섰다. 하지만 이걸 보고 느끼는 건 저뿐인지 모두가 웃으며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 돌핀 블루! 만나서 반가워요."


꽤 가벼운 인사였다. 대표 이사라는 자리보다는 아이돌 같은 자리에 좀 더 어울릴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신카이는 더는 그에 대해서 떠올릴 수 없었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눈앞이 핑글 돌았다. 카나타군! 무너지는 자신을 보고 미노루가 이름을 외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신카이는 꽉 탈을 붙잡고 눈을 감았다. 끼긱대는 소리들이 너무 시끄러워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



누군가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우스갯소리로 "기절이요."라고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렸을 적에는 툭하면 쓰러졌다. 끼긱대는 연기의 소리나 그들이 뿜어내는 악취, 존재 자체가 늘 신카이의 정신을 집어삼켰다. 그래도 조금 머리가 커지고 나선 괜찮아졌다. 필사적으로 안 보이는 척을 하면 안 보이는 거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커다란 건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마주하니 그대로 압도되었고 어둠으로 떨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흰 천장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병실 침대인지 커튼이 쳐 있었다. 물고기들이 그려진 커튼을 보며 신카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병원이 아니었다. 이곳은 씨블루 아쿠아리움의 의무실이었다. 겨우 팔에 힘을 넣어 몸을 일으켰다. 옷은 누군가가 벗겨 냈는지 편한 차림이었다. 삐걱, 침대에서 울리는 소리와 동시에 커튼이 걷어졌다. 안도한 얼굴의 미노루가 서 있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하아, 진짜 엄청 놀랐어! 카나타군!!"


그녀가 울먹이며 화를 냈다.


"119부터 부르려고 했는데, 카나타군이 전에 그랬잖아. 만약에 갑자기 쓰러지거나 그러면 병원은 절대로 안 된다고. 그래서 내가 우겨서 의무실로 오긴 했는데... 괜찮은 거 맞지?"


아, 그랬었다. 그녀와 처음 페어로 만났을 때, 혹시 자신이 갑자기 쓰러지거나 기절하면 절대로 병원은 안된다고. 고맙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는 왜라고 묻지 않고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오프닝 행사는요?"
"...엉망이었지."


그녀는 눈썹을 망가트리며 침울하게 말했다. 잘릴지도 모르겠네요. 던진 말에 부정해주지 못했다.


"난리도 아니야.. 새 대표 이사님이 손 내미는 순간에 그대로 기절했잖아. 그거 다 찍혀서 기사도 어마무시하게 나갔고 위는 지금 비상이래. 무카이군이 일단 교대 없이 움직이고 있기는 한데... 분위기 완전 살얼음판이야. 온갖 기사가 터져서.."
"기사요?"
"그러니까-"


미노루가 자신의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중요한 행사에서 쓰러졌고 보는 눈도 많았으니 큰일이 될 거라는 예감은 했지만 그렇게 커진 건가 싶어 불안했다. 버튼을 몇 개 누르지 않고서도 그녀는 빠르게 원하는 기사를 찾아 내밀었다. 화면 한가득 탈을 붙잡고 쓰러진 돌핀 블루와 당황한 새 대표 이사의 얼굴이 떠 있었다. 제목은-


"정신이 들었나 보네?"


찬찬히 기사를 살피려는 순간,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아까 그 사내가 모습을 나타냈다. 신카이는 서둘러 공기를 들이켜고 숨을 참았다. 손가락으로 코까지 막았다. 여전히 그의 몸에는 연기들이 들러 붙어있었고, 자세히 보니 연기가 아닌 형체를 띄우고 진득하게 붙어 있는 것도 있었다. 이 지독한 악취는 그런 종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거 같았다.


"...뭐야? 그 꼴은???"


그가 기분 나쁘다는 듯 혀를 차며 물었다. 하지만 신카이도 나름 필사적이었다. 그의 앞에서 기절까지 했는데 구토까지 하면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하지만 더 숨은 참을 수가 없어 황급히 토해낸 후 다시 입술을 물었다. 머리에 혹시 문제라도 있어? 그가 비서로 보이는 남자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 카나타군이... 낯.. 낯을 좀 가려서요!!!"


안타깝게도 별로 통하지 않을 거 같은 이유를 대며 미노루가 변호했다. 필사적이었다. 어쨌거나 이런 사고를 친 이상 자신은 잘리게 될 게 뻔했고, 그녀는 그런 저가 안타까워 힘써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용기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입꼬리만 끌어 올려 웃은 후, "나가주실래요?"라 부탁했다. 퍽 다정한 말투였지만, 차가웠다. 미안해, 미노루는 눈으로 그렇게 사과하며 서둘러 의무실을 빠져나갔다.


"몸이 어디 안 좋아?"


그는 멋대로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물었다. 신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지병이라도 있어?"


이걸 지병이라 해도 될지 몰랐지만, 현대 의학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으니 역시나 고개를 저었다.


"그쪽이 쓰러진 일로 지금 온갖 언론에서 우리 하바 랜드가 두들겨 맞고 있거든. 주 6일에 풀근무 했다며. 거기다 3년 동안, 쭈욱. 정직원도 아닌 계약직을 돌리고 돌려 과로로 쓰러지게 했다고 아주 난리도 아니야."


아 그건 아닌데. 그 근무 스케줄은 신카이가 스스로 우겨 받아낸 거였다. 6일 동안 풀로 일하는 건 확실히 피곤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집에 틀어박혀 혼자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좋고 나은 일이었다. 인사 팀장은 처음에 그렇게 무리한 근무는 허락하지 못한다고 했으나 돌핀 블루가 특수성을 띠는 일이다 보니 하는 수 없이 허락해준 거였다.


"덕분에 우리 하바 랜드는 아르바이트생과 비정규직에게 아주 아주 매정하고 부도덕한 기업으로 찍혔지 뭐야. 심지어 모두의 사랑을 받는 돌핀 블루가 쓰러졌으니 난리도 아니지."


파하, 신카이는 다시 숨을 뱉은 뒤 들이켰다. 역시 입술도 꽉 물었다. 뭐야, 숨 참고 있어? 그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지만, 끄덕이지도 젓지도 못했다. 진실을 말하면 화를 낼 거 같았고 고개를 저으면 거짓말이었으니까.


"...그래서 카나타군을 비롯해 1년 이상 근속한 모든 인원을 정규직으로 올리기로 했어. 영웅이 된 걸 축하해."


그가 아까처럼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말했다. 투쟁하지 않았는데 투쟁한 영웅이 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주 5일, 교대로 스케줄 지켜가면서 8시간씩-"
"잠깐..!!"


결국 입술도 코도 놓았다. 하지만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구역질부터 밀려 올라왔다. 우욱, 뒤집힌 속을 붙잡기 위해 허릴 숙이자 남자가 놀라 몸을 일으켰다. 왜 이래! 그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신카이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왜 이러냐니, 당신에게 붙어 있는 그놈들 때문인데. 따지고 싶은 건 이쪽이지만, 따진다 하더라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남자를 뒤로 밀어내고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다가온 비서 덕에 숨통이 좀 트였다.


"아무래도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비서가 등을 두드려주며 타이르듯 말했지만, 신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벼..병원은 괜찮아요. 조금만 쉬면.."


괜찮다는 뜻을 피력하기 위해 애써 웃으며 설명했으나 남자, 정확하게는 그의 어깨에 둘린 놈들을 보고 있으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꼴깍, 침이 넘어가는 걸 느끼며 신카이는 이불 안에서 꾹 주먹을 쥐었다. 빨리 저 남자가 나가줬으면 좋겠다. 실례인 걸 알면서도 빌었다.


"환자 붙잡고 뭐 대화가 되겠어. 어쨌거나, 멀쩡한 걸 봤으니 갈게."


신이 드디어 자신의 바람을 들어줄 생각이라도 들었는지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끼익, 밀려난 의자 소리와 함께 그의 몸에서 검은 덩어리 하나가 소리 없이 떨어졌다. 네, 안녕히 가세요. 끼긱대며 남자에게 다시 들러붙기 위해 발버둥 치는 놈을 바라보며 신카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무섭게 침대에서 나왔다. 남자에게 따라붙지 못한 찌꺼기를 향해 발을 들었다. 찌직, 외마디 비명이 울렸다.
절로 터지는 한숨을 숨기지 않고 뱉은 후, 다시 침대를 차지했다. 그나저나 정규직 전환이라. 나쁜 이야기는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좋은 이야기도 아니었다. 워커 홀릭은 아니었으나 일하는 건 좋았다. 많은 사람 속에 섞여 있으면 안심되었고 무섭지도 않았다. 그걸 위해서라면 7일도 일할 수 있었는데, 그건 절대로 안 된다는 인사 팀장의 말에 6일로 조절한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하루를 더 빼간다니. 해도 너무 했다.


"하지만... 이게 문제가 아니죠..."


5일을 일하든 6일을 일하든 저 대표이사와 다시 마주치는 게 더 문제였다. 평소에 연도 닿지 않을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미노루가 보여준 대로 기사까지 떴으면 또 찾아오거나 하진 않을까. 신카이는 눈을 문지르며 서둘러 탁자에 가만히 올려진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몇 없는 주소록에서 익숙한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몇 번의 신호음 끝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낫짱, 오랜만이에요."
-"카나타형? 정말 오랜만이네."


갑작스러운 전화에 서운함도 없이 반가운 목소리가 건너왔다. 사카사키 나츠메, 몇 없는 주소록을 차지한 몇 없는 친구였다.


"저, 낫짱... 저 오늘 어마어마한 원형(怨形)을 가진 사람을 만났어요."


그리고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몇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사람에게 들러붙는 악한 기운을 이쪽에서는 원형(怨形)이라 불렀다. 발생하는 원인은 제각각이지만, 보통은 원념을 담고 있었다. 우연적으로 시기나 미움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저주였다. 가벼울수록 작고 연기와 같이 희미했으며 강할수록 크고 액체처럼 찐득했다. 그것들은 사람에게 들러붙어 불운을 불러일으키고 불행을 뱉어냈다. 자신이 속한 신카이 집안은 오래부터 그 원형을 삼켜 녹아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로 사카사키 나츠메가 속한 사카사키 일족은 그 원형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이었다.


-"이름이 뭔데? 원형이 향한 곳이면 기록이 남아 있을 텐데."
"으음.."
신카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표 이사의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방금 읽은 기사에서 봤는데. 하카제.. 하카제-
"하카제 카오루요."


겨우 이름이 떠올랐다. 날개, 바람, 향. 좋은 한자를 다 가진 이름이라 떠올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카제 카오루라-"


사락사락, 수화기 너머에서 바쁘게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울렸다.


-"있네. 있지만 우리 쪽은 그렇게 크진 않아. 의뢰인은 계약상 발설할 수 없지만 있기는 하네. 어마어마한 원형을 지녔다고 했지? 그럼 우리 쪽만 아니라 다른 원형사가 여럿 붙었을 수도 있어."
"그렇군요..."
-"아, 하카제 그룹 사람이네? 보통 이런 위치는 들러 붙을 수밖에 없어. 끌어 내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넘치게 있을 테니까."


대수롭지 않게 던지는 사카사키의 말에 신카이는 눈썹을 찌푸렸다.


"어떻게 안 될까요?"


그가 원형에 잡아먹히든 말든 그다지 상관하고 싶지 않았으나 일터에서 그가 흘리고 다니는 것들과 마주하는 건 피하고 싶었다. 오전의 행사나 아까처럼 대놓고 마주하는 건 더더욱 피하고 싶었고.


-"으음, 우리 쪽에서 내린 원형이야 내가 다시 거두면 그만이지만, 다른 건 글쎄.. 다들 돈 받고 하는 일이니 쉽지 않을걸. 형도 뒷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잖아."
"그렇군요."
-"꼭 해결해야 할 일이면... 카나타형이 해도 되잖아."


조심스럽게 던지는 그의 제안에 신카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저에겐 그럴 힘이 없는걸요. 조용히 대답하자 한숨이 돌아왔다.


-"그거야 형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지. 어쨌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사카사키 이름으로 걸린 원형 해제뿐이야. 아예 싹 뜯어내고 싶으면 해연(解嚥)인 신카이쪽에 연락해야겠지. 하지만 별로 효과는 없을 거 같네."


딱 잘라 말하는 그의 말에 눈썹은 더 찌푸려지기만 할 뿐 풀릴 줄 몰랐다. 하지만 우긴다고 해서 달라질 일도 아니었기에 알았다는 말로 오랜만의 통화를 빠르게 끝냈다. 버리고 싶었지만, 버리지 못한 이름을 들고 가문을 나온지 벌써 10년도 넘었다. 이제 와서 누군가의 원형을 없애달라 연락할 수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의뢰비를 감당할 수도 없었고. 대단한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니 주변에서 눈치라도 줘 스스로 원형을 없애 준다면 고마울 텐데. 슬쩍 흘려볼까 싶었지만, 방금 자신을 미친 사람처럼 보던 눈이 잊히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더는 마주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해야겠네요."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의 방법이겠지. 이번엔 꾸역꾸역 숨을 집어삼키며 신카이는 이불을 끌어 덮었다. 그리고 그런 저를 위로하듯 메시지 음이 조용히 울렸다.


-시간 내서 만나러 갈게.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


귀찮게 군 것은 이쪽인데 되려 사과를 해오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사카사키의 메시지를 가만히 바라보며 신카이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저도 미안해요.] 조심스러움을 담아 답변한 후, 눈을 감았다. 누군가 열어두었는지 창문을 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식으로 행사에서 빠져나왔으니 서둘러 복귀해야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신카이는 눈을 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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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정리하는데 몇 달 전에 써놓고 방치한 얘를 발견해따..

아마 저주에 걸린 왕자님을 구해주는 카나타가 보고싶었던 모양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