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겐] 불완전 관계
2018. 7. 3. 23:00

"헤에, 잘 어울리잖아!!"

아메무라 라무다가 휘파람과 함께 칭찬을 날렸다.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유메노 겐타로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늘 전통 복장을 하고 다니다 답지 않게 슈트를 입었더니, 이게 어울리는 건지 아닌 건지도 잘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메무라는 미리 가져온 슈트케이스에서 온갖 넥타이를 꺼내 들이밀었다. 그의 취향대로 화려한 무늬가 많아 유메노는 조금 곤란해졌다.

"라무다. 소생에겐 너무 화려한 거 같은데."
"슈트가 칙칙하니까 이런 거로 포인트를 주는 거지."
"파티라고 해서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3년 동안 쓴 책이 발매와 함께 좋은 평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 나카지마상을 수상했다. 소설가 나카지마 고타로의 이름을 딴 상으로 대중성보다는 문학성에 집중한 상이었다. 서점 대상은 물론 신인 작가에게 주는 상도 받아본 적 없는 유메노 겐타로에게 있어서 그 상의 이름은 뭐랄까, 누군가의 표현을 빌려 쓰자면 복권에 당첨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받기를 꿈꾸지만 누구나 받을 수 없는 게 상. 그런 상이 제 작품 앞에 붙었다. 그리고 내일 저녁은 그를 기념하기 위한 파티가 잡혀있었다. 출판사에서 답지않게 호텔 연회홀까지 빌려 호화로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익숙하지 않은 자리라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몰라 아메무라 라무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기다렸다는 듯 "좋은 옷이 있어!"라 외친 그는 정말로 좋은 옷을 내어주었다.

"그런데 왜 이런 옷을 가지고 있는 건가요?"

아메무라의 옷이라기엔 자신에게 너무도 잘 맞았다. 유메노는 그와 저의 신장 차를 떠올리며 물었다.

"전 애인이 사준 거."

그가 툭, 어마어마한 소릴 뱉었다. 아 실례, 유메노는 빠르게 사과했다.

"에에, 사과할 필요 없어. 미련도 아쉬움도 없다고? 애인 사이즈도 구별 못 하는데 내가 뭔 미련을 가지겠어? 안 그래?"

S와 M을 헷갈리면 모를까, 이런 길이는 솔직히 착각하기 어렵지 않아? 아메무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비싼 거라 버리진 않고 옷장에 걸어만 뒀는데 이렇게 쓸 일이 있어 다행이네. 타이가 별로면 리본은 어때?"
"더 싫습니다."

까만 리본 끈을 꺼내 흔드는 아메무라를 빠르게 말렸다. 젊은이들만 모이는 자리라면 상관없었지만, 그렇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담당 편집자도 최대한 단정하게 입고 오라 주의를 준 참이었다. 저번에 수상한 모 작가는 빨간 땡땡이 슈트를 입고 나타나 다들 기함했다는 말을 덧붙이며. 아메무라가 내민 타이나 리본이 그 수준의 충격을 줄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메노는 고갤 저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여러 개의 타이 중에서 가장 무난한 와인색 타이를 골랐다.

"칙칙해!"

아메무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우는 소릴 내며 소파로 엎어졌다. 아이가 어리광을 부리듯 "다른 거 해~ 겐타로~~"라 징징대는 그를 무시하곤 천천히 부드러운 타이를 메었다. 자주 메지 않아서 그런지 영 엉성했다.

"어, 뭐야! 무슨 일이야? 그 복장은?!"

엉성하게 묶은 타이를 다시 풀러 재도전하려는 찰나, 벌컥 문이 열리며 아리스가와 다이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메무라의 작업실이 제 집도 아닌데 벨도 누르지 않은 채였다. 작업실 주소를 알려주는 게 아니었어. 같은 생각을 하는지 아메무라가 턱을 괴곤 중얼댔다.

"어디 가는데 그렇게 빼입는 거야?"

치렁치렁한 머리를 흩날리며 그가 다가와 물었다. 요리조리 남의 몸을 돌리고 주물러대며 "좋은 옷이네!"라 칭찬도 던졌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강아지 같은 꼴에 유메노는 터져 나올 거 같은 웃음을 간신히 참아냈다.


"나카지마상 수상해서 파티가 있데."

손에 쥔 타이들을 포기하고 정리해 넣으며 아메무라가 대신 설명했다. 엑? 그게 뭔데? 아리스가와가 저를 보고 물었다.

"소설가에게 주는 상!"
"겐타로, 상 받았어?"
"...뭐야? 겐타로 다이스에게 말 안 했어? 둘이 사귄다며?!"

두 쌍의 눈동자가 모두 저를 향했다. 그중에서 서운함을 가득 담은 눈동자에 유메노는 곤란해졌다.
아메무라의 말대로 아리스가와 다이스와는 현재 교제 중이었다. 진지한 감정으로라 말할 수 있는 관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가 고백했고 자신이 받아주었으니 그런 관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공유하지는 않았다. 유메노 겐타로는 아리스가와 다이스가 도박 외에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잘 알지 못했고 아리스가와 다이스는 유메노 겐타로가 어떤 이야기로 밥을 벌어 먹고사는지 몰랐다. 서로 부모님이 어떤 사람인지, 어디서 어떻게 나고 자랐는지, 취미가 무엇인지, 주변 인간관계가 어떻게 되어있는지도 몰랐다. 고작 아는 건 이름, 연락처, 잠버릇, 약간의 습관, 담배 취향 같은 것들. 서로 알려 들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유메노 겐타로의 수상 소식을 알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못했다고 표현해야 맞는 걸까. 어쨌든. 어차피 아리스가와 다이스는 그 상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를 거며 어떤 책으로 받았는지도 관심이 없을 거고 또 상관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입을 다물고 넘겼는데, 저리 섭섭한 얼굴을 하니 이쪽이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파티면 뭐야, 맛있는 거 먹을 거 아니야! 그런데 왜 이야길 안 해?!"

아하, 그쪽? 역시나. 약간 찔렸던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 유메노 겐타로가 대단한 소식을 다문 것보다 파티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게 섭섭한 모양이었다. 아리스가와 다웠다.

"이야기하면요? 오려고요?"
"그럼 가야지! 겐타로의 수상도 축하하고 맛있는 거도 먹고!"
"축하는 덤이겠죠?"
"어디서 하는데?"

혹시 칼질도 하는 거야? 그가 눈을 반짝이며 고기를 써는 흉내를 냈다. 그가 그리는 건 아마 두툼한 스테이크 정도 되는 모양이었다. 하겠죠. 확실하진 않았지만, 아마 보통 그런 흐름이었기에 대충 대답했다.

"그럼 나도 갈래."

나도 가고 싶어. 꼬리도 없는 주제에 꼬리를 휘휘 휘저으며 그가 신이 나 외쳤다. 하아, 골칫덩어리.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표정에는 티 내지 않았다.

"나도 가서 스테이크 먹고 와인 마실래."

잔뜩 기대감에 부푼 그가 손을 뻗어왔다. 그리곤 목에 걸린 타이를 잡았다. 뭘 하려고? 방어 자세를 위해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다리에 힘을 넣었으나 예상과 달리 그는 몇 번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완벽하게 타이를 정리했다. 자신이 몇 번이고 실패했던 걸 보기 좋게 고쳐주었다. 도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워온 걸까. 유메노는 찜찜한 기분으로 제 타이를 내려보았다. 아리스가와 다이스가 평소에 하고 다니는 꼴을 생각하면 넥타이나 격식 그리고 슈트와는 무척 거리가 멀었기에 의아하기만 했다.

"가도 괜찮지?"

하지만 그걸 고민할 틈도 없이 그가 뒤에서 들러붙으며 물어왔다. 아메무라가 있는데 뭐하는 짓인지. 유메노는 매정하게 그를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거짓말."
"거짓말 아닙니다. 안돼요. 이번에는."

유메노 겐타로가 주인공인 파티였다.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자신만 주시하고 있을 게 뻔한데 그곳에 아리스가와 다이스가 나타난다?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눈치 없이 파티장을 휘젓고 다니는 똥개의 존재를 모두가 궁금해할 게 뻔했다. 다들 달려들어 저 남자는 누구냐 묻겠지. 거짓말은 취미이자 특기였지만, 그에 대한 거짓말은 아직 준비하지 못한 채였다. 그리고 사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아 왜! 왜 안 되는데?!"

하지만 그런 제 맘을 모를 아리스가와는 애도 아니면서 억지를 부렸다. 내가 스테이크를 먹어봤자 얼마나 먹는다고! 딱 두 접시만 비우자! 그리고 얌전히 빠질게! 되지도 않을 소릴 지껄였다. 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으로 유메노는 그를 무시했다. 이런 경우는 그가 알아서 포기하고 잊게 만드는 게 좋았다. 하지만

"에, 그야 당연하지. 다이스가 쪽팔려서 그런 거 아냐!"

아메무라는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는지 큰소리로 외쳤다.

"유메노 선생님의 수상 파티인데 거기에 다이스 같은 애가 돌아다니면 얼마나 창피하겠어! 다이스 눈치도 없이 거기 가서도 막 겐타로~하고 아는 척하면서 들러붙을 거잖아? 나라도 절대로 싫네요."

아니, 그렇게까지 표현할 필요는 없는데. 그를 단념시켜주는 건 고마웠지만 말이 나가도 너무 나갔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기까진 유메노도 생각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아닙니다, 그렇게 변명하려 입을 열었지만

"하, 내가 창피해? 그래, 알았어. 창피한 애인은 입 다물고 사라져줄게."

스릴과 모험만 머릿속에 꽉 찬 단순한 남자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쾅, 아메무라의 문이 들어올 때와 달리 요란하게도 닫혔다. 한동안 유메노는 무어라 반응도 못 하고 닫힌 문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뒤늦게 라무다, 얄미운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왜? 난 틀린 말 안 했어." 그가 악마처럼 키득이며 웃었다.
요란하게 사라진 아리스가와는 그날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방안을 서성이며 기다리던 유메노도 새벽 3시가 되니 화가 밀려들었다.


"소생의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언제 창피하다고 했나? 그렇게 붙인 건 아메무라 라무다지 자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 이야기는 듣지 않고 뛰쳐나가 돌아오지 않는다니. 어이 없는 반항이었다. 거기다 거리에서 살면서 별 이야기는 다 들었을 거면서 고작 그런 말에 이렇게 쩨쩨하게 구는 것도 황당했다. 이렇게 쪼잔해서 랩은 어떻게 하고 무대에는 어떻게 서는 거지? 그보다 오히려 섭섭하고 짜증 내야 할 쪽은 이쪽이 아닌가. 상을 받았단 이야길 들어놓고 스테이크와 와인을 찾는 그의 무신경함! 자신은 그걸 지적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 주었다. 그런데 저쪽은 이렇게 시위를 하다니.


"...하, 이게 아니지."


이렇게 그의 탓을 하는 자신이야말로 쩨쩨한 사람이었다. 유메노는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애라고 해서 저까지 애처럼 굴 필요는 없었다. 훅 올라온 화를 쑥 내리며 유메노는 한동안 더 불을 끄지 않고 문을 바라보았다. 요란한 발소리가 울리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결국 아침이 올 때까지 아리스가와는 돌아오지 않았다. 유메노는 한참을 이불만 끌어안고 있다가 오랜만에 홀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밤을 샌 탓인지 얼굴이 엉망이었다. 아메무라는 분명 잘 어울린다고 했는데 다시 어제의 슈트를 입으니 어색하고 못생겨 보이기까지 했다. 피부는 또 왜 이렇게 칙칙한지. 유메노는 슬쩍 금이 간 낡은 거울 앞에서 얼굴을 문질러댔다. 까슬까슬한 손가락이 까슬까슬한 피부를 스치고 갔다. 출판사에서 기념 사진도 찍고 보도 자료도 낼 예정이니 미용실이라도 들리고 오라 이야길 했지만, 유메노는 저녁까지 집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문제의 타이를 목에 걸고 몇 번을 씨름하다 포기했다. 엉성하게 묶인 채로, 누군가 다가와 고쳐주기를 가만히 기다렸지만 그 누군가는 끝끝내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디 그래요, 한 번 해보세요."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그만 손해였다. 어디 가서 전처럼 빈대 붙어먹고 자고 할 수야 있겠지만, 너그럽고 관대하게 그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별로 없었다. 요코하마에 있을 군인이 떠오르긴 했지만, 글쎄 그도 썩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제집에서 먹고 자고 길들여진 사람이 야외생활과 어마무시한 요리에 다시 내던져지면 아마 오래 버티지 못할 게 뻔했다. 그래, 곧 돌아오겠지. 후우, 한숨을 내쉬고 세팅하지 못한 머리를 대충 넘기며 유메노는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택시를 탔다. 도시의 택시비는 비싸서 평소엔 절대로 이용하지 않지만, 오늘 비용은 모두 출판사에 청구할 수 있으니 문제없었다. 그리고 책 앞에 붙는 상의 이름으로 인세나 대우도 달라질 것이었다. 지갑 사정도 충분히 달라지겠지. 어쩌면 좀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욕조를 바꿀 수도 있었다. 아직도 가스를 켜 뜨거운 물을 쓰곤 했는데,. 작년 겨울에 아리스가와가 찬 물로 씻다 감기게 든 이후 가장 바꾸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되었다. 아니 또 왜 이리로 생각이 흐르지. 유메노는 차창을 보며 턱을 괴었다. 툭하면 아리스가와 다이스로 흐르는 제 머릿속이 황당했다.


"도착했습니다."


억지로 생각을 가둔 사이 택시가 호텔 앞에 멈춰 섰다. 으리으리한 외관에 유메노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이렇게까지 해주고 나중엔 또 얼마나 들들 볶으려고. 세상은 주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했다. 공짜란 없었다. 자신이 아리스가와 다이스에게 주는 걸 제외하고는.


"하아.."


왜 또 생각이 그리로 흐르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차비를 치르고 택시에서 내렸다. 문을 열어주는 도어맨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연회홀 - 유메노 겐타로 선생님 나카지마상 수상 축하 기념 파티>라는 안내 문구가 보였다. 부끄럽고 창피했다. 애써 못 본 척 굴며 연회홀로 향하자 입구엔 익숙한 얼굴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판사 문예팀 직원들과 담당자인 카사미아 사토루였다.


"선생님 오셨어요?"


카사미아가 허겁지겁 달려오며 인사를 건넸다. 항상 폴로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던 그만 보다 멀끔하게 슈트를 입은 걸 보니 신선했다. 그 역시 다르지 않은 판단을 했는지 "이렇게 보니 엄청 다른 사람 같습니다!"라며 허허 웃어댔다.


"사람은 많이 왔나요?"

"많이 왔죠. 아주 많이 왔습니다. 다들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말 하나에 부담감 수십 개가 턱턱 어깨로 쌓아 올려지는 거 같았다. 최연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상을 받은 작가치고는 젊고 어린 편에 속했다. 그리고 그걸 못마땅해하는 노인네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가시 박힌 말로 사람을 깎아 내리고 무너진 콧대를 아닌 척 빳빳하게 세우려는 사람들. 카사미아가 여는 문 너머엔 그런 얼굴이 여럿은 있었다.


"유메노 선생님!"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말을 하든 오늘 주인공은 자신이었다. 여기저기서 저를 부르며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유메노는 나름 부드러운 미소를 그리며 아는 척을 했다. 사실 아는 얼굴은 몇 없었지만, 대충 흐름에 맞춰주었다. 카사미아를 제외하곤 그다지 친한 이도 없었는데 모두가 살갑게 굴었다. 과거 책 이야기까지 들고 와서 칭찬하는 이도 있었다. 상을 얻기 전에는 누구도 유메노 겐타로란 이름도 몰랐을 사람들이 여기저기 아는 척을 해오니 우습고 피곤해졌다. 이렇게 싹 얼굴들을 바꿔서야. 거짓말쟁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유메노는 표정을 굳히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모인 거짓말쟁이 중에서 자신이 가장 뛰어난 거짓말쟁이였으니까.


"그럼 잠시 시간을 빌려 유메노 겐타로 선생님의 소감을 듣겠습니다."


고마운 사람은 없었다. 고르자면 저를 달래고 또 달래 여기까지 끌고 와준 담당자인 카사미아 사토루 정도였다. 아, 아메무라에게도 고마웠다. 제가 허름해보이지 않게 슈트를 빌려주었으니까.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패스. 뭐 이 정도이려나? 하지만 제일의 거짓말쟁이답게 유메노 겐타로는 단상에 올라가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완벽한 소감을 떠들어댔다. 줄줄 고마운 사람의 이름도 불렀다. 모두가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보고 있었다. 끝내주네. 그런 생각을 하며 유메노 겐타로는 대충 소감을 던지곤 내려왔다.


"소감 너무 멋졌어요, 선생님."

"특히 카사미아군에 대한 이야기 너무 감동적이에요. 저도 선생님처럼 좋은 분을 담당으로 두고 싶네요."


입에 발린 소리들. 똑같이 같은 말로 받아주었다. 그렇게 더 몇 번의 의미없는 대화 속을 헤엄쳤을까. 공기가 필요했다. 아가미가 마르게 뻐끔대는 기분이었다. 주인공은 보통 언제까지 자릴 지켜야 할까. 신데렐라는 12시에 돌아가던데. 그런 생각을 하며 피곤 대신 머리를 쓸어 넘기는데, 입구 쪽에서 웅성거림이 느껴졌다. 파티 막바지이니 소란스러울 일도 없는데 웅성대는 소리는 점점 이쪽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곁에 선 카사미아에게 물으려 입을 열었지만, 그보다 빨리 사람들 틈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겐타로!"


아리스가와 다이스였다. 오늘 아침까지 기다리고 기다렸던 사내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유메노는 멍한 얼굴로 제 쪽으로 걸어오는 아리스가와 다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늘 걸치고 다니는 두터운 점퍼는 어디다 두었는지, 멀끔하게 슈트를 걸치고 있었다. 핏 좋게 달라 붙은 셔츠 위에는 심플한 블랙 타이가 고고하게 내려와 있었다. 그 기다란 선 중간에는 빛을 받아 반짝이는 핀이 자리 잡았다. 늘 신고 다니는 로퍼 대신 정장 구두까지. 치렁치렁한 머리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모습이었다. 거기다


"...도대체 이게..."
"선물."


내미는 이 꽃다발은 또 뭔데. 유메노는 불쑥 품으로 달려드는 꽃다발을 엉거주춤 받아들었다. 붉은 장미 덩어리에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축하해. 상 받은거."
"...고마워요."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려 있었다. 다들 갑자기 나타난 인물에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언제라도 달려들 준비를 한 사람들 속에서 유메노는 서둘러 카사미아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놀란 얼굴이었다. 아리스가와를 몇 번이나 보았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카사미아군."
"아, 아.. 네. 어.."


당황한 그를 급히 불렀다. 두 사람의 심장이 널뛰는 것도 모르고 아리스가와는 웨이터가 들고 온 샴페인을 손에 들었다. 맥주캔만 몇 개씩 비우는 걸 보다가 샴페인을 쥔 걸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 오늘 늦게 끝날 거 같아서 제가 미리 방을 빌려 놨는데요-"
"카사미아가 왜 방을 빌려?"
"선생님 쉬고 가시라고...."


날카로운 아리스가와의 말에 잔뜩 겁에 질린 카사미아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호텔 키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그 키를 받아 유메노는 어색하지 않게, 사무적으로 인사를 건네며 악수하는 척 아리스가와 손에 쥐여주었다. 당장 사라지라는 의미였다. 오, 그럼 나 룸서비스 시킨다? 그가 웃으며 속삭였다. 당장 정강이를 차주고 싶은 걸 참으며 유메노는 끄덕였다.
룸서비스에 스테이크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다행히 아리스가와는 더는 버티지 않고 잔을 카사미아에게 넘긴 뒤, 홀을 빠져나갔다. 채 5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등이 축축하게 젖었다. 갑자기 끼어든 낯선 이의 존재에 훅 죽었던 홀의 분위기도 금세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사람들이 병아리처럼 다가와 짹짹대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여자들이었다.


"세상에 유메노 선생님 친군가요? 누구?"
"카사미아군하고도 아는 사이? 혹시 다른 출판사 담당잔가요?"
"저런 미남은 업계에서 본 적이 없는데."


전부터 얼굴만큼은 대단하다 생각했지만,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방금까지 자신에게 온갖 거짓말을 늘어놓던 이들이 진실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유메노는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애인입니다."


딸꾹.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카사미아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모두가 당황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지만, 유메노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또! 선생님 또 거짓말하신다!"


그런 저를 들여보던 누군가가 웃음을 터트리며 그리 외쳤다. 그제야 모두가 낄낄대며 "재미없는 농담 그만두세요~"같은 소릴 던졌다. 아 농담 아닌데. 진실을 알고 있는 카사미아만이 제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고로 저는 이만 가봐야겠군요."


애인이 기다려서요. 그리 덧붙이며 자릴 떴다. 꽃은 카사미아에게 넘겼다. 등 뒤로 다들 재밌는 농담이라며 낄낄대고 있었다. 거짓말은 진실로 받아들이면서 왜 자신의 진심은 닿지 않는 걸까. 참 신기했다. 홀을 나오기 무섭게 유메노는 웃고 있던 얼굴을 지워냈다. 미소가 사라지자 좀처럼 자지 못한 사내의 피곤한 낯이 그대로 드러났다. 일부러 알코올이 들어간 건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다리가 무거웠다. 질질 끌고 끌어 룸 키에 적혀있던 호수를 찾아 움직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호텔의 복도는 누구도 없었다. 조용한 카펫은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침묵 속을 걸어 유메노는 찾던 문 앞에 멈췄다. 그리곤 벨을 눌렀다.
조심성 없는 사내는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유메노는 그대로 아리스가와의 블랙 타이를 잡아당겼다. 훅 다가온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가 붙였다. 뜨거운 살덩이가 마구 입안을 쑤시고 들어왔다. 커다란 손이 허리와 엉덩이를 쥐어왔다. 쿵, 벽에 부딪혔다 떼었다, 테이블에 옆구리를 박았다 떨어졌다, 마지막에 목적지인 침대에 닿았다. 풀썩, 제 입안을 헤집으며 아리스가와가 침대로 누웠다. 익숙하게 그 위로 올라타며 유메노는 쪽쪽, 얽히고 얽히던 혀를 풀어내곤 입술만 빨았다.


"나 아직 화났는데?"


푸스스 웃으며 커다란 손이 자켓을 벗겨냈다.


"아 저도 화났습니다."


슬쩍 셔츠 단추까지 풀어내려는 그의 손목을 잡아 내리며 유메노도 지지 않고 말했다.


"하? 어이없다? 네가 화낼 게 뭐가 있어?! 이쪽은 진짜 엄청 화가 났다고!"
"왜 어제 안 돌아왔습니까? 그렇게 멋대로 굴 거면 아예 나가 살지 그래요?"
"뭐?! 잠깐,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오히려 화는 이쪽이 내야지! 겐타로, 너야말로-"
"소생이 얼마나 걱정한 줄 압니까!?"


목을 조르듯 그의 타이를 꽉 조이며 짜증을 풀었다. 컥컥, 그가 엄살을 부리며 급히 손목을 잡아 왔다.


"걱정했어?"


그리곤 눈썹을 휘며 물어왔다. 얄미운 얼굴. 보기 싫어서 손바닥으로 덮어버렸다. 그 아래에서 쪽쪽 입술이 장난을 쳐댔다.


"하지만 나 진짜 화났다고?"
"... 뭐가요? 제가 파티에 초대하지 않은 거요? 라무다가 쪽팔린다고 한 거요? 그건 라무다가 멋대로 지어낸 거지 제가 한 이야기도 아니잖아요. 그걸 멋대로 오해하고 나간건-"
"아니 그거 말고! 왜 상 받은 거 말 안 한 거야?!"


그가 손바닥을 떼어내며 물었다. 예상도 못 했던 질문에 유메노는 할 말이 사라졌다. 그거야..


"묻지 않았으니까요."
"하?"
"관심 없을 거로 생각해서요. 다이스는 이런 거 관심 없지 않습니까. 지루하다고 했잖아요."


처음 그를 집에 들였을 때, "이게 네가 쓰는 거냐?"라 시비를 걸며 그가 책장을 뒤적인 적이 있었다. 후룩후룩 몇 페이지를 읽나 싶더니 "고리타분해! 지루해!"라는 악평을 쏟아내고는 던져버렸다. 그 이후론 그가 책장에 가까이 가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일이나 소설에 대해서 따로 이야기할 일이 없었다.


"어. 맞아. 관심 없지. 뭔 놈의 상이나 책이나 그런 거 내가 알 게 뭐야."
"..."
"하지만 유메노 겐타로에겐 관심이 아주아주 많다고! 그러니까 이런 건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어!"


스테이크와 와인은 덤이고. 그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소생이 생각이 짧았어요. 미안해요. 멋대로 판단했네요."
"잠깐, 그렇다고 갑자기 사과하지마. 답지 않아서 이상하니까."


아리스가와가 낄낄대며 웃었다. 어쩐지 별거도 아닌 일로 서로 열을 낸 거 같아서 김이 빠졌다. 하아, 유메노는 드디어 안심이 뒤섞인 숨을 풀썩 아리스가와의 옆으로 몸을 쓰러트렸다.


"그래도 멋대로 이렇게 들이닥치는 건 사과하세요."
"아 왜! 멋있지 않아? 라무다가 한 벌 사줬다고. 물론 12개월 할부로!"


그건 사준 게 아니지. 그렇게 정정하려다 말았다. 거기다 그 12개월 할부는 누가 갚을지 뻔했다. 아마 아메무라도 이 쪽에게 받아낼 생각으로 사줬겠지. 악마 같은 사람. 하지만 조금은 고마웠다. 그 덕에 이렇게 색다른 모습을 손에 넣었으니까.


"사람들이 누구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또 무슨 거짓말을 했을까."


아리스가와가 엉성하게 메어져있던 와인빛 타이를 풀어내며 물었다.


"글쎄요, 맞춰보세요."


아마 아리스가와 다이스는 절대로 맞출 수 없는 답으로 문제를 내며 유메노는 다시 한번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사랑을 전하거나 엉망인 말을 던지고 싶어서 그에게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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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아직 완전한 관계가 되기 전에는 이런 오해들도 있고 자주 싸우지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스테이크와 와인은 핑계였다는 걸 유메노 겐타로는 아마 끝까지 모르겠지.
우리 다이스 룸서비스도 시키지 않고 기다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