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겐] 장마
2018. 7. 1. 20:38


며칠째 비가 내렸다. 온 공기가 물기를 머금고 끈적하게 달라붙는 시기, 유메노 겐타로가 가장 달가워하지 않는 시기였다. 지어진 지 40년도 더 지난 목제 건물은 비가 오면 뚝뚝 물이 샜다. 밤이 되면 요란한 소리가 천장을 울려댔다. 그나마 "비가 심해서 도저히 원고를 받으러 가지 못할 거 같습니다!"라 걸려오는 담당 편집자의 연락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마감 직전이라 붙잡고 있던 원고를 밀어내고 유메노는 책상 위에 뺨을 눕혔다. 끈적함이 들러붙었다.



"무료하네요."



시간이 늘어나니 갑자기 할 일이 사라졌다. 이런 날씨에는 빨래도 할 수 없었다. 장을 보러 가는 것도 무리였다. 가장 좋은 건 일에 매달리는 거지만, 이왕 미뤄진 마감에 게으름을 부리고 싶었다. 톡톡, 만년필을 굴렸다. 온 집안을 부술 기세로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가만히 시간을 죽였다.



"겐-타-로!"



하지만 그 적막도 잠시. 엄청난 기세의 목소리가 비를 뚫고 날아들었다. 벌떡 얼굴을 들었다가 설마 싶어 다시 누웠다. 잘못 들었겠지. 그리 생각하며 다시 만년필을 굴리는데 착각이 아니라는 듯 이번엔 더 또렷하게 제 이름이 들려왔다.



"...소생이 헛것을 듣는 건가.."



그러지 않고서야 아리스가와 다이스의 목소리가 지금 들릴 리가 없는데. 하지만 다시 한번 또렷하게 아리스가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 번째가 되어서야 유메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둘러 문을 열었다.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열어? 다 젖었잖아."



뻔뻔한 얼굴이 뻔뻔한 말부터 던졌다. 네가 젖은 건 우산이 없어서라고 따져주려다 말그대로 어디 빠졌다 온 사람처럼 푹 젖은 모습에 유메노는 말을 삼켰다.



"..무슨 일입니까?"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자신이 아는 아리스가와 다이스라면 보통 이 시간대는 파칭코에 있었다. 그게 아니면 돌아다니면서 알게 된 사람들 틈에 끼어서 공짜 술을 얻어 마시느라 정신이 없거나. 뭐 둘 중 하나였다. 장마라고 그를 막지는 못할 텐데. 유메노는 팔짱을 끼곤 아리스가와를 살폈다.



"아, 그게. 돈이 다 떨어졌지 뭐야! 하하!"



그가 언제나처럼 멍청한 소리를 산뜻하게도 뱉었다.



"어제까지는 중앙구 누님 도움으로 호텔에 있었는데 쫓겨나서 말이야~"
"...쫓겨났나요?"
"어! 쫓겨났어! 갑자기!"



그가 황당하다는 듯 토로했다. 하지만 유메노 겐타로는 알 거 같았다. 아리스가와 다이스는 가진 거라곤 주머니에 든 동전 몇 푼이 전부인 남자였다. 운이 좋으면 가끔 큰돈을 손에 쥐는 거 같았지만, 그걸 은행에 들고 가는 대신 마작이나 경마 따위에 날려 썼다. 그래도 그가 이 신랄하고 정신없는 거리에서 죽어나지 않고 살아가는 건, 분명 저 잘난 얼굴 떄문이라고 유메노는 늘 생각했다.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보통 험하게 사는 게 아니라 그런지 몸도 꽤 좋았다. 스무 살 치고 덩치도 좋은 편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를 주워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중앙구의 여자들에게 아리스가와 다이스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이 멍청이는 여자들과 보내는 달콤한 밤보다는 구정물 속에서 피어나는 스릴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한심한 남자였다.



"...그래서요?"



이번에도 그랬겠지. 호텔 방에 쫓아 들어가 몇 번은 주워준 주인을 즐겁게 해주다가 돈 좀 받으면 홀랑 그걸 들고 또 그 스릴을 찾아 어슬렁거리고. 그러다 돌아가지 않고 몇 날을 벌겋게 오른 눈으로 지내다 돈이 떨어져서야 여자의 존재를 떠올리고. 하하하,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다가가 아무렇지 않게 슬쩍 엉덩이를 붙이려 들지만 맘 상한 그녀는 미련 없이 그를 다시 거리에 버렸을 터였다.



"물론 유메노 선생님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몸이시니 이 미천한 몸, 바로 라무다에게 찾아갔지만 거기서 퇴짜를 맞았지 뭡니까!"



비위라도 맞춰보려는지 그가 말을 높이며 소란을 부렸다. 이것도 뻔했다. 라무다는 절대로 저렇게 씻지도 않고 비에 쫄딱 젖은 남자를 집에 들여주지 않았을 거였다. 그의 미적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꼴이니까.



"그래서 마지막이 소생인가요?"
"...부디 부탁드립니다. 유메노 선생님!!"
"..."
"비가 그치면 바로 나가겠습니다! 이 비만... 피하게.. 도와주라..응?"



온갖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그가 축축하고 큰 손으로 제 손을 잡아 왔다. 차게 식은 그 손을 바라보며 유메노는 입술을 꾹 물었다. 단호해져야 합니다. 유메노 겐타로. 그렇게 머릿속으로 달래면서도 왜



"들어와요."



항상 자신은 실수하고 마는 걸까. 그를 주워가는 여자들처럼.

심란한 제 심정은 조금도 모르면서 아리스가와가 신이나 젖은 발로 다다미를 밟아대며 집을 침범했다. 그는 익숙하게 방해되지 않는 구석에 짐가방을 던져두곤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졌다. 찰박, 무거운 무게 소리를 내며 옷가지가 마구 다다미 위로 떨어졌다. 유메노는 애써 눈을 돌리며 벽만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욕조 좀 쓴다!" 그가 우당탕 욕실로 사라졌다. 쏴아, 물이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유메노는 한숨을 내쉬었다.



"책임지지 못하는 거에 마음을 쓰면 안 된다."



저를 키워준 노부부가 그랬다. 비 오는 날, 상자에 버려진 개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저를 찾아와 그랬다. 노부부와의 생활은 모든 게 부족했다. 두 어른이 먹고 사는 거로도 빠듯한데 저를 주워다 키웠으니 당연했다. 거기에 입을 하나 더 늘리는 건 책임감도 없고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어린 유메노 겐타로는 저를 올려보는 까만 눈동자를 외면했다. 이대로 돌아서면 개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그때 생명에 눈을 돌린 벌을 지금 받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유메노는 젖은 옷가지를 주워다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여름철 다다미는 끈적하지 않아 좋았지만, 저런 걸 방치해놓으면 진드기며 벌레가 살기 좋았다.



"으아, 시원하다!"



샤워를 끝냈는지 덜렁 수건만 두르고 아리스가와가 욕실에서 튀어나왔다. 뿌옇게 몰아치는 수증기를 손으로 치워내며 유메노는 인상을 찌푸렸다.



"전에 두고 간 속옷 있지?"



다 닦지도 않은 발로 또 다다미를 밟아댔다. 무어라 이야기하려 했지만 포기했다. 그는 말해도 듣지 않았다.



"있다. 있다. 버리지 않았네?"



멋대로 남의 옷장을 뒤적이더니 언젠가 그가 던져두고 간 속옷을 찾아냈다. 멋이라곤 하나 없는 드로즈였다. 아마 편의점에서 샀을 게 뻔한, 밋밋한 디자인. 그걸 멋대로 남의 세탁 바구니에 던져놓고 나가버려 빨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두고 간 옷가지들도 모두 유메노 겐타로의 옷장에 있었다. 왜 버리지 못했는지 알기나 하는지, 생각 없는 얼굴로 아리스가와가 척척 제 옷을 찾아 걸쳤다.



"겐타로, 나 배고파."
"아, 그렇겠죠. 그런데 양심이 있습니까? 다이스?"
"내가 양심이 어딨어. 그런 거 진즉 팔아 치운지 오래인데!"



뻔뻔하게도 웃으며 그가 외쳤다. 한숨만 나오는 그 말을 들으며 유메노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저녁에 먹고 남은 된장국이 있었다. 된장에 미역만 들어간 아주 소소한 된장국이었지만, 그라면 불평 없이 한 그릇이고 두 그릇이고 비울 걸 유메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냄비 채로 밥을 만 아리스가와는 불평도 불만도 없이 깨끗하게 비워냈다.



"고기 같은 것도 좀 먹어. 내가 반찬 투정하는 게 아니라 다 겐타로 걱정해서 하는 이야기야."



그래도 조금은 아쉬웠는지 그런 소릴 못되게 지껄였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진즉 팔아 치웠다더니 그래도 아직은 조금의 양심이 남은 모양이었다. 그는 쭈뼛 냄비와 먹은 수저를 챙겨 좁은 싱크대 앞에 섰다. 너른 등이 뽀득뽀득 소리를 내며 집중하는 모습을 유메노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래 봤자 몇 번이었다. 아리스가와 다이스를 집에 들인 건 정말로 몇 번이었다. 그런데 그가 없었던 오랜 시간들보다 그가 지내고 간 그 몇 번이 더 강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유메노는 제 몸에 들끓는 지독한 감정을 토해내고 싶어 슬쩍 입을 열었지만, 당연하게도 무엇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비가 그치면 갈 거야. 그전까지는 열심히 부려먹어도 괜찮아! 분리수거도 제대로 할게."



저번에 왔을 때, 분리수거를 시켰더니 엉망으로 던져두고 나가서 까마귀들이 다 헤집은 일이 있었다. 그걸 이제 와 반성이라도 하는지 그가 젖은 손을 티셔츠에 대충 닦아내며 선심 쓴다는 듯 외쳤다. 하아, 마음대로 하세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죽여내며 유메노는 돌아섰다.
펜이 잡힐 리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리스가와 다이스와 마주하고 앉을 수는 없었기에 유메노는 책상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만년필을 쥐었다. 잡는 척을 하고 버텼다. 아리스가와는 멋대로 이불을 가져다 펴놓고는 벌렁 누워 책장에서 만화책을 꺼내다 읽기 시작했다. 전에 머물렀을 때, 함께 간 편의점에서 "이거도 사주면 안 돼?"라고 졸라 하는 수 없이 사주었던 물건으로 아마 이미 지난 내용에 몇 번이고 읽었을 책이었다. 그런데도 새로운 이야기의 소설보다는 익숙한 만화책이 좋은지 그는 펄럭펄럭 페이지를 넘기면 낄낄댔다.
그렇게 각자의 저녁을 보낸 후에 잠자리에 들기 전, 유메노는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섰다. 좁아터진 욕실이 엉망이었다. 물건을 쓰고 제자리에 두는 게 어려운 일일까. 바닥을 구르고 있는 비누의 자리를 찾아주고는 뜨거운 물에 몸을 던졌다. 물소리 탓인지 온 집안을 울리던 빗소리가 조금은 죽은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씻고, 욕실까지 싹 정리한 후에 나오자 만화책 읽기를 그만두었는지 누워있는 다이스가 슬쩍 고개만 들어 입을 열었다.



"밖에서도 그렇고 집에서도 그런 복장이면 불편하지 않아?"



제 유카타 차림이 어때서. 실내용이었고,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본인 앞가림이나 하죠? 다이스?"



하핫, 웃으며 그렇게 쏘아주었더니 그가 무어라 불만을 터트리려다 참았다. 그리곤 홱 등을 돌려 누웠다. 혼자 사는 집이라 여름용도 겨울용도 이불은 딱 한 채 뿐이었다. 제 자리를 비워 주었는지 빈 그의 옆자리를 바라보며 유메노는 몰래 두 손을 모았다. 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 빌었다.
그리고 신은 저를 버리진 않은 모양인지, 잠은 생각보다 빠르게 그리고 푹 잤다. 하지만 변덕을 부린 모양인지 꽤 오랜 비를 예고했던 것과 달리 부스스 일어난 아침, 더는 천장을 때리는 요란한 소리는 세상에 없었다. 맑게 펼쳐진 창가의 하늘을 보며 유메노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툭 튀어나온 욕설을 삼키지 않고 손바닥 아래 감춰 뱉었다. 옆을 돌아보자 제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하게 잠든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갈 곳이 없는 개를 주워 선의를 베풀고 예뻐해 주고 다정하게 대해주고 주인이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럴 자격은 저에게 주워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곤히 잠든 얼굴 위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깨워서 쫓아내야 하는데 손은 계속해서 머뭇댔다.



"하아.."



실은 상자 속에 버려진 개는 그가 아니라 자신이 아닐까. 그가 떠나고 남겨지는 건 언제나 유메노 겐타로, 자신이었으니까. 방의 불을 얼른 끄고 싶었다. 그리고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꿈을 꾸고 싶었다. 상자속 기분은 질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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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프마이 너무 좋고 팩좽 너무 좋고 시부야 너무 좋고 폿세 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