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카나] 터닝포인트
2018. 6. 11. 00:25

"마감 정산 부탁할게. 미안해! 두 사람에게만 맡겨서."



괜찮습니다! 씩씩한 대답은 옆에서 나왔다. 정말 미안하다는 듯 두 손까지 모아 사과하는 점장에게 신카이 카나타는 조용히 웃어만 보였다. 8년이나 사귄 애인의 생일이라니, 이런 날은 빠르게 보내주는 게 배려였다. 평소보다 조금 더 화려하게 옷을 차려입은 점장이 요란한 구두 소리를 내며 가게를 빠져나가기 무섭게 옆에서 들려온 씩씩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노래 바꾸자!"



그리곤 빠르게 레지 카운터 아래로 몸을 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사를 알 수 없는 온갖 팝 음악이 사라지고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역시, 노동요는 언데드지."



허리를 들어 올리며 츠키노 마키가 씨익 웃어 보였다.

옷과 가구 거기에 식물까지 판매하는 편집 셀렉샵인 <오디너리>의 음악은 대부분 잔잔한 인디팝이나 재즈 선율이 차지했는데, 츠키노가 틀어놓은 곡은 락에 가까운 아이돌 음악이었다. 언데드, 최근 가장 핫한 아이돌로 눈앞에서 마대 자루를 마이크 삼아 립싱크를 시작한 츠키노는 물론 신카이 역시 그들의 팬이었다. 노동요, 귀엽기도 하고 우스운 단어에 웃으며 서둘러 마감 정산을 위해 레지 앞에 섰다. 2층짜리 단독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오디너리>는 1년에 얼굴을 두어 번 볼까 말까한 사장을 대신해 모든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점장 안도 레이카를 중심으로 정직원인 매니저 두 명과 아르바이트생 다섯 명이 돌아가며 업무를 보고 있었고, 신카이는 벌써 4년째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현재 일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생 중에선 가장 오래된 터라 올해 초, 점장에게 매니저가 되어보지 않겠느냐 고마운 제안도 받았지만 웃으며 거절. 덕분에 아직 아르바이트생 명찰을 달고 있지만, 매장 돌아가는 상황이나 업무는 거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점장이나 매니저들이 없는 마감일에는 대신 나와 종종 대타로 업무를 처리하기도 했다. 마감 업무라고 해보았자, 미리 저녁 근무자들이 청소해놓은 매장을 체크하고 정산 업무와 문을 잠그는 것 정도라 그리 어렵지 않았고 인력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 막 일한 지 6개월이 된 츠키노는 마감 업무가 가장 편하다며 부러 저녁 타임을 고집하곤 했다. 하지만 아마도



"잠들 수 없는 밤에 빠져들어가~~"



가장 큰 이유는 이 커다란 매장에 언데드 노래를 크게 틀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좋아서가 아닐까, 신카이는 노래하는 츠키노를 보며 생각했다.



"melody in the dark는 언제 들어도 명곡인 거 같아. 카나타군도 그렇게 생각하지?"

"네. 좋아해요."



즉답이었다. 빠른 자신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녀는 활짝 웃었다. 4년이나 일하다 보니 이 가게에서 오고 가며 만난 사람들의 수가 꽤 되었다. 이왕이면 오래 일해주는 편이 이름을 외우고 함께 일하는 데 편하다 보니 있는 없는 용기를 내서 선배답게 말을 먼저 걸려 노력하는 편인데, 츠키노의 경우는 언데드로 그렇게 첫 스타트를 끊었다. 우연히 그녀의 가방에 달린 언데드 로고 배지를 보고 "언데드 좋아하나요?"라 조심스레 물었고 첫 근무에 지쳐있던 그녀는 이 질문에 얼굴색이 변했다.



"혹시 선배도 언데드 좋아하세요?!"



이름을 알고 있는 정도면 좋아하는 편에 속하는 게 아닐까. 그녀의 반짝임에 그리 가볍게 생각하며 끄덕였는데, 덥석 두 손을 잡은 그녀는 자신을 완벽한 동지라 생각했는지 퇴근길을 붙잡고 약 2시간 동안 언데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떠들고 나서야 "아 선배는 막 그렇게까진 팬은 아니죠..? 미안해요. 저 오프라인에서 팬을 본 건 처음이라 흥분했어요."라 사과했고 그런 그녀에게 미안해 "아뇨, 이야기를 듣다 보니 조금 관심이 생겼어요. 노래 좀 추천해주세요."라 제안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CD와 라이브 DVD를 빌려준 그녀 덕분에 아직 동지라기엔 부족하지만 어느 정도 좋아한다고 표현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그 이후론 이렇게 함께 마감이라도 하게 되는 날이면 기존에 정해져 있는 매장 음악을 끄고 언데드 음악을 틀었다. 콘서트장도 노래방도 아닌데 츠키노는 마치 그런 공간에 있는 사람처럼 노래를 불러댔고, 신카이 역시 발로 박자를 맞추며 즐겼다. 오늘도 그런 날. 츠키노의 라이브는 3곡째를 넘어가고 있었고, 자신이 누르는 숫자들도 끝이 보여가고 있었다.



"카나타군, 나 마포 빨아 올게! 먼저 짐 챙기고 있어도 괜찮아! 가는 길에 맥주 짠하고 가자!"



가까워진 이후로는 말도 편하게 놓았다. 도쿄에 올라와 이렇다 할 친구가 없었는데, 츠키노는 기꺼이 아직 모자란 동지인 자신을 친구로 삼아준 모양이었다. 맥주를 외치는 그녀의 호탕함에 끄덕이곤 다시 패드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완료 버튼만 누르면 오늘의 업무도 끝이었다.



"영업 끝났나요?"



불청객만 아니었다면.

소리 없이 열린 문 앞에는 이 늦은 밤에 어울리지 않게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서 있었다. 이상한 비니 모자를 푹 눌러쓰고 칙칙해 보이는 검은 라이더 자켓에 진을 갖춰 입은 그는 조금 곤란한 목소리로 "티셔츠 하나만 사면 되는데 안될까요?"라 물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내리자, 그가 걸친 티셔츠에 갈색 물이 흉하게 들어있었다. 커피라도 쏟은 모양이었다.



"마감 시간이라서요.."



안타까웠지만, 그건 그의 사정이었다. 아직 정산 완료 버튼을 누르기 전이었지만, 공지된 마감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신카이는 규정대로 답변했다. 그냥 티셔츠 한 장만요. 간절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냥 하나만 결제해주고 갈아입게만 해줘요."



그냥 입으면 안 되나. 비니가 조금 에러이긴 했으나, 척 보아도 몸매도 비율도 좋아 보이는 사람이 걸치고 있으니 얼룩인지 의도된 효과인지도 몰라볼 거 같았다. 하지만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거기까지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흘러나오는 익숙한 멜로디에 손가락을 가만히 튕기며 신카이는 결국 끄덕였다. 어차피 안된다고 해도 그는 또 부탁해올 거 같았고, 그게 더 귀찮을 거 같았다.



"고마워요."



남자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서둘러 말한 뒤, 이어서 티셔츠는? 이라 물었다. 툭 짧아진 말에 눈썹이 절로 찌푸려지지 않는 건 서비스업에서 몇 년 일했다고 붙은 능력 중 하나였다. 신카이는 애써 웃으며 2층으로 그를 안내했다. 한쪽은 여성, 한쪽은 남성복으로 꾸려진 2층은 여러 브랜드와 디자이너들의 옷들이 나름의 법칙을 가지고 진열되어 있었다. 옷을 보기 무섭게 남자는 고민도 없이 가격표도 보지 않고 티셔츠를 골라 잡았다. 그리곤 태그를 뜯어 내밀었다.



"계산 먼저 해주세요. 갈아입고 있을 테니까."



보통 이런 손님은 없는데. 그가 내민 태그를 바라보며 신카이는 고민했다. 도둑이라거나 나쁜 짓을 할 거 같진 않았지만, 이 밤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돌아다니는 건 퍽 수상했다. 거기다 잘 입었다고 해도 여름에 가까운 이 시기에 라이더 자켓도 이상했다. 태그를 받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으니 남자가 멋대로 남의 손을 가져가 그 안에 억지로 쥐여주더니 다음으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올렸다.



"이제 됐죠?"



안심하라는 말투. 할 수 없이 신카이는 끄덕이곤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츠키노는 아직인지 매장엔 그녀의 노랫소리 없이 오로지 언데드의 노래만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찍는 게 편하겠죠..?"



당장 다 정리해놓은 정산을 다시 계산하는 것보다야 내일 달아두는 게 편할 거 같아 우선 완료 버튼을 눌렀다. 티셔츠의 가격은 2만 4천엔. 다행히 남자의 지갑에는 현금이 있었다. 카드였으면 조금 귀찮을 뻔했는데 그나마 잘되었다. 서둘러 현금으로 계산을 끝낸 후, 신카이는 2층으로 향했다. 그리곤 덜그덕 소리가 울리는 탈의실 앞에서 남자의 지갑을 들고 기다렸다. 고작 티셔츠 하나 갈아입는데 뭐 그리 오래 걸리는지 커튼은 꽤 길게 닫혀 있었다. 실제론 그리 시간이 흐르지 않았을지도 모르나,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꽤 길게 느껴졌다. 톡톡, 허벅지에 놓인 손가락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의 박자를 맞췄다.



"허니 밀크는 취향대로, 각설탕을 굴려 넣어서. "



그러다 무심코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름대로 작게 불렀는데 들린 모양인지 커튼 너머에서 킥킥 소리가 울렸다. 창피해져 입술을 물었다.



"노래 잘하네요."



그런 자신을 달래려는지 남자가 말했다. 고작 한 소절 듣고 뭘 안다고. 신카이는 이번에야말로 눈썹을 찌푸렸다.



"이 노래 멜로디가 좀 약하긴 해도 나름 언데드에 맞게 흐름은 빠르잖아요? 그렇게 나긋하게 부르는 버전도 좋네."



얼른 갈아입고 나오기나 하지 말이 많았다. 대꾸하지 않고 버티고 있자 드디어 남자가 커튼을 걷고 나왔다. 입고 있던 블랙진에 슬쩍 넣어 입은 티셔츠는 2만 4천 엔이라는 가격대의 빛을 톡톡하게 보고 있었다. 고작 무채색의 로고 하나 박힌 티셔츠였지만, 그래 보였다. 그보다



"하카제...카오루...?"



신카이는 선글라스를 벗은 남자의 얼굴에 버티던 입술을 열었다. 얼룩진 티셔츠보다 더 에러 같았던 모자를 벗은 남자의 머리카락은 매장의 조명 때문인지 눈부시게 반짝였고, 선글라스 아래 감춰져 있던 얼굴은 언제나 자신이 TV에서 보던 그 얼굴이었다.



"이런 가게에서 우리 노래가 메들리로 나오는 거, 신선하네요. 전혀 안 어울리지만."



점장이 들으면 끄덕였을 소리를 툭 내뱉으며 그가 워커에 발을 집어넣었다.



"당장 저녁에 라디오 스케줄이 있는데 커피를 마시다 엎질러서요. 협찬받았던 티셔츠인데 그거 입고 돌아다니다 말 나오면 스타일리스트에게도 미안하고 업체에도 미안하고."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술술 설명했다.



"그래서 좀 급했어요.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아 이 모자는 버려줄래요? 매니저가 가리고 좀 다니라고 억지로..."



어색하게 웃으며 그가 비니를 내밀었다. 약간 욕설이 들린 거 같았지만, 신카이는 모르는 척 비니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대신이라기엔 이상한 표현이지만 지갑을 돌려주었다.



"어쨌든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네. 그럼 수고해요."



그가 선글라스를 다시 끼며 1층으로 향했다. 아, 츠키노 마키가 이걸 봐야 하는데. 매장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를 그녈 떠올리며 신카이는 하카제 카오루를 붙잡아 볼까 고민했다. 하지만 자신이 입을 열기 전에 그가 더 빨랐다.



"아 그리고 노래 잘한다는 말은 진짜. 잘한다기보다 듣기 좋다? 어쨌든, 잠깐 들어도 알겠더라."



굳이 남기지 않아도 될 칭찬을 고마워서인지 꾸역꾸역 남겨놓고 그가 떠났다. 문이 열리고 닫히고 몇 분 후에 "맥주~~" 노래를 부르며 츠키노가 들이닥쳤지만, 신카이는 꼼짝도 못 하고 2층에 서 있었다. 비니를 손에 꼭 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