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카나] 새끼손가락
2018. 5. 13. 22:46



사쿠마 레이는 항상 귀찮은 일을 몰고 다니는 사내였다. 라이브 무대에 설 때마다 온갖 패거리를 몰고 들이닥쳤고, 오기인 주제에 멋대로 학교에서 말을 걸어와 조용히 살고 싶은 하카제 카오루의 바램도 무참히 밟아댔다. 자신에게 소중한 텃밭이 있다면 사쿠마 레이는 그곳에 늘 뭐가 묻은 신발로 밟고 들어오는 불청객이었다. 그래서 라이브 클럽에 쳐들어와 손님을 끌어주는 건 고마웠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신의 인생에까지 침범하지 않기를 바랐다. 주스에 물을 타고 뭣도 모르는 잔챙이들에게 그걸 팔며 용돈 벌이를 하는 거로도 즐거웠고 시간은 잘 흘러갔으니까.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신은 대부분 바람을 들어주지 않는다. 심술이 많은 양반이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하카제는 영업이 끝난 라이브 클럽에 나타난 사쿠마 레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커다란 짐을 든 그는 얼마 전 처형당한 꼴 치고는 꽤 멀쩡했다. 오히려 홀가분해 보이는 얼굴이라 한동안 마음을 졸였던 제 모습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려운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하는 거지. 사쿠마씨가 아니라. 사쿠마씨가 물고 오는 건 늘 귀찮아. 여긴 사쿠마씨의 아지트가 아니라고? 그리고 학교에서 말 거는 거 그만둬 줄래? 여자에게 둘러싸여도 부족한 시간, 다른 놈들 시선까지 받으며 지내고 싶진 않은데~?"

웃으며 그동안 쌓인 불만을 툭툭 던져냈지만, 그는 전혀 귀담아듣는 거 같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잠깐 자리를 비우게 되었는데, 내 친구가 좀 걱정이라. 그를 좀 부탁하고 싶은데. 별로 어렵진 않을 거야. 착한 애니까."
"우와, 내 이야기 무시한 거야? 그보다 나는 유치원 선생님이 아니라고? 그리고 사쿠마씨 친구라면-"

오기인이잖아. 그 말은 굳이 입으로 뱉지 않았다. 그들을 '친구'로 묶어도 좋을지 몰랐지만, 하카제가 보기엔 그 다섯 명을 묶을 수 있는 적당한 단어는 그뿐이었다. 서로 대단히 살가운 행동을 하거나 다정한 관계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자신은 모를 유대감 같은 거는 느껴졌으니까. 꼭 뱉지 않아도 정답을 맞힌 모양인지 사쿠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절대로 싫어. 하카제는 빠르게 거절했다.
바로 얼마 전이었다. 오기인의 모든 처형이 끝났다.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악인이 된 다섯 명이 모두의 앞에서 무너졌다. 말 그대로 무너진 이도 있었고 사라진 이도 있었고 제각각 결말을 맞이했다. 웃기지도 않는 이 일에 누군가가 '역사'라 대단한 단어를 붙였다. 일부러 그 현장에 있지 않았어도 '역사'라는 이름 아래 온갖 이야기들이 학교 안을 채웠다. 분위기가 달라졌고, 흐름이 바뀌었다. 누군가에겐 동경의 대상, 누군가에겐 이상향과 같았던 이들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사쿠마 레이도 그중 하나였다. 뭐, 눈앞의 사내는 처박혔다는 표현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평온해 보였지만.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오기인하고는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무너진 바람에 이 라이브 하우스도 텅텅 비어 짜증이 나 죽겠는데, 학교에서까지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건 사양이었다.

"그.. 그 누구야, 사쿠마씨 따르는 개 있잖아. 그 멍멍이나 또 누구지? 그 외국인! 걔에게 부탁해."

그래도 오고 가며 쌓은 정이 있어서 매몰차게 굴지 못하고 다른 제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사쿠마 레이는 고민도 하지 않고 멋대로 짐의 이름을 뱉었다. 뒤늦게 귀를 막았지만, 이번에도 그에게 먹히지 않았다. 잘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고 사쿠마 레이는 훌쩍 라이브 하우스를 떠났다. 그가 아주 해외로 나갔다는 건 며칠 뒤에나 알게 되었다.
사쿠마 레이가 당분간 해외에 나가 있어야 할 정도로 학교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오기인중에 둘이나 잠적하듯 사라졌고 그중 하나는 무려 자신에게 칼을 찌른 자들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손가락을 접어 하나둘 지우고 나니 세워진 건 가장 끝, 새끼 손가락뿐이었다. 신카이 카나타, 뭐 그런 이름이었다. 일단 부탁은 받았으니 대충 살펴볼까 싶었다가 자신이 뭐라고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 지 알 수 없어 무시했다. 어차피 사쿠마 레이와는 이런 부탁을 주고받을 정도로 그리 대단한 친분이 있는 관계도 아니었다. 이런 귀찮은 일까지 대신할 만큼의 관계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랬는데

"그거, 당신 건가요?"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역시 신은 심술이 많은 게 분명했다.
하카제 카오루는 모래 위에서 흠뻑 젖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방금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심지어 양말에 구두까지 신고 있었다. 허옇게 질린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물놀이를 즐기다 온 건지, 아니면 죽으려다 실패한 것인지 헷갈렸다. 뭐 후자였다면 이렇게 태평하게 저에게 말을 걸진 않겠지만, 어쨌거나 꼭 죽었다 살아온 얼굴을 하곤 그가 물었다. 신카이 카나타. 그와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었지만, 오기인인 그를 학교 내에서 모르는 이는 없었다. 세상사 관심 없는 하카제 카오루도 그의 얼굴은 알았다. 이름도 알았다. 그가 자신이 접었던 손가락 중 유일하게 세워졌던 마지막 새끼손가락이었다. 사쿠마 레이가 부탁했으나, 무시했던 그 손가락.

"...어, 탈래?"

말을 걸었으니 일단 대답을 해야겠거니 싶어 하카제는 안고 있던 서프 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 어색하게 굴지 않기 위해서 웃으며. 하지만 빤히 바라만 볼 뿐 관심이 있는 건 아닌지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 침묵 때문인지 아니면 꽉 끼는 서퍼복 때문인지 참 불편했다.

"바다, 차가워요."

그렇겠지. 계절의 대부분 바닷물은 찬 편이었다. 하지만 겨울 서핑도 즐기는 하카제에겐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툭 던진 그 말에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보드 위에서 손가락만 튕겼다. 알려줘서 고맙다고 해야하나. 알고 있다고 일러줘야  하나.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뚝뚝 물을 흘리고 있는 소년이 울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지금 얼굴을, 뺨을 타고 흐르는 게 바닷물이 아니라 눈물이 아닐까 하는. 그도그럴게 신카이 카나타의 얼굴은 참 엉망이었다. 표정이 하나도 없는 게 참 엉망으로 느껴졌다.

"괜찮아?"

하카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보드를 내려놓고 대충 근처에 두었던 짐가방에서 타올을 꺼내 왔다. 신카이 카나타의 입술 색이 보통 어떤 색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절대로 이런 푸른색은 아닐 거 같았다. 급히 타올을 둘러주자 그가 빤히 저를 바라보았다.

"아. 추워 보여서."
"..."
"기분 안 좋아? 뭐.. 이야기라도 들어줘야 하는 상황인가? 하하.. 나 고민 상담으론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상대인데."

여자애들 징징거림이라면 괜찮지만. 농담처럼 붙였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자 이제 이걸 어쩐담. 싸그리 무시한 사쿠마 레이의 부탁을 들어준 셈이 되어버렸는데 여기서 더 관여를 해야 하나 아니면 하던 대로 무시를 해야 하나. 물도 묻히지 못한 서퍼복의 지퍼를 내리며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이 배려와 수고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젖은 구두도 돌아섰다.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신카이 카나타는 훌쩍 그렇게 돌아섰다. 그가 밟는 모래마다 물 자국이 박히는 걸 바라보며 하카제는 다시 지퍼를 올렸다.
저쪽에서 나름의 호의를 거절했으니 이대로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하카제는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한 번 눈에 들어온 머리통은 어째서인지 그다음부터는 더 잘 눈에 띄었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늘 분수대에 처박혀 있었고, 하카제가 사용하는 교실의 창에선 그 분수대가 기가 막힐 정도로 잘 보였다.
그는 수업도 듣지 않는 모양인지 시간 대부분을 분수대에서 보냈다. 뭘 하는지 혼자 있을 때도 있었고, 온갖 젖은 인형들과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 찾아오는 이라곤 말리러 온 선생이나 혹은 무어라 한마디를 던지러 온 놈들뿐이었다. 과거에는 무대에 선 그에게 말 한마디 더 걸어보려고 얼쩡거리던 놈들이 이제는 바닥에 눌어붙은 껌이나, 혹은 쏟아진 오물을 보듯 그를 보며 한 두 마디씩 던졌다. 숨길 생각도 안 하고 던지는 말들은 바람을 타고 열어둔 창으로 들이닥쳤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는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지나가는 차의 바퀴 소리와 같은 거니까. 하지만 교실에서 낄낄 터지는 웃음소리는 무시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뭐가 즐거운지 밖의 소란을 들으며 웃는 놈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하카제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일부러 그 옆을 지나가며 발끝으로 책상을 쳤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놈의 필기구와 마시던 탄산음료가 바닥으로 낙하했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그의 신발을 적시고 가방을 적시고 바닥을 적셨다.


"뭐야?! 어떤.."


인상을 구기곤 소릴 높인 놈이 자신의 얼굴을 올려보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아, 미안 미안! 웃으며 전혀 미안함이 없는 목소리로 대충 무시한 뒤 교실을 나섰다. 분수대로 가는 길, 누군가 먹다 던진 캔이 뒹굴고 있었다. 자판기 바로 옆 휴지통이 있는데 기본 에티켓도 모르는 놈들이 너무도 많았다. 학생회는 오기인을 처형하기 전에 이런 쓰레기 같은 놈들부터 처리해야 했다. 저도 모르게 치미는 짜증에 아까 책상을 찼던 것처럼 하카제는 다시 그 캔을 찼다. 어릴 때 공차던 기억을 떠올려 시원하게 걷어차자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캔은 정확게 원하는 곳에 떨어졌다.


"악!"


꽤 힘이 실린 캔을 머리통으로 받아낸 놈이 우스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곤 아까 놈처럼 눈을 부라리며 저를 보았다가 이내 입을 다물곤 물러났다. 순식간에 소란이 끝난 틈에서 사라지지 않은 건 여전히 분수대에 잠겨있는 신카이 카나타였다. 그는 좀 놀란 얼굴로 다가오는 저를 저번처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거기서 뭐 해?"

근처에 떨어진 캔을 주워 이번엔 제대로 휴지통에 던져 넣으며 물었다.

"숨어 있어요."

겨울 얼굴만 내민 그의 말에 하카제는 눈썹을 찌푸렸다. 다 보이는데? 그렇게 묻자 그가 몸을 일으켰다. 전처럼 요란한 물방울이 그의 몸에 들러 붙어있다 떨어졌다.

"다른데 숨으면 억지로 다가오지만, 여기 있으면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아요."
"멍청하게 신발이나 속옷을 적시고 싶은 병신은 없을 테니까."

그 멍청한 병신에 자신이 속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반응이 없었다. 하카제는 작게 한숨을 쉰 후 교실에서 챙겨 나온 타올을 내밀었다. 그에게 두 번째로 내민 타올이었다. 심지어 첫 번째는 아직 돌려받지도 못했다. 아마 이 타올도 그럴 거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비싸지도 않은 거라 상관없었다.

"그냥 쉬는 게 어때?"

그 사쿠마 레이도 모습을 감췄는데 굳이 이렇게 학교에 나타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괴롭힘 받는 게 좋은, 뭐 그런 취향을 가졌다면 할 말이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보기엔 그런 건 아닌듯했다.

"어디서요?"

자신의 제안에 그는 물었다. 글쎄, 그건 알아서 찾아야지. 그리 대답해주니 뭘 기대했던 건지 그의 얼굴엔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무것도 모르네요. 그가 분수대에서 나오며 중얼댔다.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황당해서 따지려다 어쩐지 어린 시절에 길에서 본 강아지가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박스에 덜렁 들어있던 강아지. 갈 곳이 없던 강아지. 그는 차라리 여기가 편한게 아닐까. 쉴 곳이 갈 곳이 없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신카이는 저번처럼 말없이 돌아섰다. 젖은 신발이 다시 남기는 자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하카제는 쥐고 있던 수건을 들어 억지로 그의 어깨를 덮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그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쉴 곳 찾아줄게. 그리 말하자 그는 반항 없이 따라나섰다.
옥상은 교내 아르바이트나 연습실을 빌리지 못한 이들을 위해 항상 오픈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옥상에는 하카제의 아지트가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었는지 텅 비어있는 옥상에 들어서기 무섭게, 하카제는 문 옆에 붙어있는 사다리를 올랐다. 학교에서 가장 높은 곳, 물탱크를 올려놓은 공간은 자신의 서프 보드를 보관하는 용으로 쓰는 곳이었다.

"여긴 안 올라와. 경비 아저씨가 오시긴 하는데, 잔소리도 안 하시고."

벽에 붙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거나 식사를 하는 놈들은 있었으나 굳이 사다리를 타고 여기까지 올라오는 놈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서프 보드 역시 도난당한 적이 없었다. 신카이는 마음에 들었는지 털썩 젖은 엉덩이를 시멘트 바닥에 붙였다. 그의 시선 끝으로 바다가 보였다.
그날 이후, 신카이 카나타는 늘 거기에 있었다. 보드를 가져갈 일을 제외하면 들릴 필요가 없음에도 하카제는 매번 옥상을 찾았다. 어느새 서프 보드 옆에는 온갖 물건들이 놓였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어항과 그 안에 든 금붕어, 펼쳐 본 적도 없어 보이는 교과서나 이상한 인형들이 늘었다. 비가 오면 다 젖는다고 일렀지만, 그는 별로 듣는 거 같지 않았다.
그렇게 계절을 하나 보냈다. 날씨가 변하고 가끔은 비가 오고 가끔은 더웠다 가끔은 추워지는 날씨 속에서 별 대단한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지만 같이 같은 바다를 보거나 비를 피해 어항을 옮기거나 마른 시멘트 위에서 서핑 포즈를 취하거나 뭐 그런 시답지 않은 일을 했다. 매점에서 사 온 빵을 나눠 먹거나 하나밖에 없는 도시락을 쪼개 먹거나 그런 간지러운 짓도 했다. 신카이는 여전히 표정이 별로 없었고 웃지도 울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전처럼 분수대에 처박히거나 바다에 푹 담그고 오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는 햇살 아래 바싹 마른 몸으로 늘 옥상에 있었고 하카제는 자신의 작은 아지트에 놓인 그의 모습을 볼 때면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꽉 차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사쿠마 레이가 돌아왔다.

"잘 지낸 모양이지?"

불쑥 교실 문에서 들린 목소리에 하카제는 가방을 챙기던 손을 멈췄다. 외국물이 좋긴 좋은지, 훨씬 좋아 보이는 꼴의 사쿠마 레이가 거기 서 있었다. 그래 보여? 따져 물었더니 그가 웃으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책상으로 던졌다. 영어가 잔뜩 쓰여 있는 초콜릿 상자였다. 이야, 남자에게 받는 초콜릿은 관심 없는데. 빈정대며 떠들었지만,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정말 피곤한 여행이었어."
"뭘 하고 온 거야?"
"이것저것. 이번 일로 엉망이 된 자매교를 돌고 왔어. 패배자가 가도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아아, 그래. 뭐... 수고했어."

건성으로 대답하며 마지막으로 초콜릿을 가방에 쑤셔 넣고 챙겨 들었다. 나중에 봐. 반가운 재회를 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기에 그리 웃으며 바이바이 하려고 했다.

"신카이군이랑 잘 지내줘서 고마워."

그가 꺼낸 이름이 아니었다면. 하카제는 멈춰 서서 멋대로 자신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사쿠마를 바라보았다. 으음, 그의 부탁 때문에 신카이 카나타와 지낸 건 아니었다. 거기다 잘 지냈다는 표현을 붙일 정도로 살가운 관계도 아니었고. 어쩌다 보니 얽혔고 잠깐 도와줬을 뿐이었다. 길에 버려진 강아지를 집으로 데려가지 못한 어린아이를 대신하듯. 하지만 뭔가 그랬다. 우스운 자존심 같은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당신 부탁 때문에 친하게 지낸 거 아니야."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부끄럽고 이상했다. 뭐랄까, 하카제 카오루가 자진해서 정체도 잘 모르는 남자애랑 친하게 지내는 건 좀 이상하잖아?

"어. 이 빚은 나중에 갚아야 해."

그래서 그냥 그렇게 두기로 했다.

"어땠어? 착한 애지?"
"하?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완전 귀찮았거든? 사쿠마씨도 이상한 사람이지만 사쿠마씨 친구는 더 심해. 바다에 처박히질 않나, 분수에 들어가질 않나. 그런 기행은 진짜 사양하고 싶어."
"그런 일이 있었어?"
"그래. 날파리 같은 것들 꼬여서 그것도 다 치워주고. 그냥 학교에 안 나오면 편할 텐데 왜 나와서 사람을 귀찮게 하는지."
"맘 붙일 곳이 없는 애거든. 그래도 하카제군에겐 붙인 모양인데."
"엑, 그런 농담 싫으니까 그만둬. 부탁이야. 진짜. 귀여운 여자애라면 모를까 남자애가 엉겨 붙는 건 징그럽다고."
"그래?"
"진짜, 진짜. 사양하고 싶으니까 이제 사쿠마씨가 알아서 놀아주든지 데려가든지 해. 빚은 갚고."
"그래도 괜찮겠어?"

빤히 저를 바라보며 사쿠마 레이가 물었다. 괜찮고말고. 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 그의 시선이 어쩐지 꺼림칙해 대충 말하곤 발을 돌렸다. 가는 길에 옥상에 들릴 참이었다. 금붕어나 들여보고 있을 신카이에게 초콜릿이나 던져주며 사쿠마 레이가 돌아왔다 일러주기 위해. 그리고 집에 가서 씻고 자야지. 그래, 그럴 생각이었다.

"..."

열린 교실 문 앞에 신카이 카나타가 아니었다면 그럴 생각이었다. 신카이 카나타는 가만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처음 마주쳤던 바다가 떠올렸다. 그때, 그 바다에서 하카제는 신카이 카나타가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확실히 알 거 같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눈물 하나 흘리지 않고 울고 있었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입을 열고 소리를 내는 순간, 그가 물방울처럼 터져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런 아슬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하카제는 입을 열었다. 그를 부르고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제 예상대로 입술을 벌리기 무섭게 신카이 카나타가 돌아섰다. 물방울이 되어 터지진 않았으나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달렸다.

"지금 나 엿먹인 거지?"

하카제는 사쿠마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가 지은 미소가 답이 되었다. 하여간 이 학교는 꼬인 인간이 많았다. "이번 빚은 진짜야. 진짜 달아둘 거야." 이를 악물고 경고한 후, 하카제는 서둘러 달렸다. 늘 옥상에서 같이 물들었던 노을이 오늘은 자신의 얼굴에만 눈부시게 내려앉았다. 손으로 그걸 막아내며 그가 사라졌을 만한 곳으로 발을 옮겼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옥상으로 향하는 길, 하카제는 자신이 접지 못했던 마지막 새끼손가락을 접으며 돌아섰다. 그는 옥상에 없을 거 같았다. 젖을 일도 없고 누군가에게 모욕을 듣지 않아도 될, 유일한 숨을 장소는 하카제 카오루가 이제 엉망으로 만들었으니까. 숙인 고개 아래로 머리카락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그걸 거칠게 쓸어 넘기며 숨을 토해냈다. 신발이고 양말이고 속옷이고 다 적실 각오를 하며 하카제는 몸을 돌렸다. 부디 그가 자신이 젖도록 허락하길 바라며 달리고 또 달렸다. 병신이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는데, 되면 좀 어떤가 그런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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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손가락을 접었을 때, 하카제 카오루는 카나타가 자신의 가장 아픈 새끼손가락이 될 줄은 몰랐을 거시다.

퇴고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