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카나] 밤마다
2018. 4. 1. 20:03




"짜증 나."



꾹꾹 참고 참았던 말을 입 밖으로 뱉었다. 이러면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전혀 아니었다. 씻고 나와 아직 마르지 못한 머리를 탈탈 털어내며 하카제는 데스크 구석으로 손을 뻗었다. 히라가나로 <금연>이라 적힌 쪽지가 들러붙은 담뱃갑을 한 번 쥐었다가, 내려놓았다. 전에는 귀엽게만 보였던 동글동글한 글씨가 이제는 꼬불꼬불 못생겨 보였다. 당장이라도 떼어내고 모르는 척 무시하고 한 대를 입술에 물고 싶었지만, 손은 쪽지 위에서 머물뿐 힘을 주진 못했다.



"젠장."



슬쩍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욕설을 모르는 척하며 하카제는 방금까지 보고 있던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실시간으로 사진을 찍어 올릴 수 있는 SNS에는 익숙한 얼굴이 가득 떠 있었다. <즐거운 주말이다! 수족관 나우!>라는 코멘트와 함께 모리사와 치아키가 찍어 올린 셀카였다. 얼핏 보기엔 별문제 없는 사진이었으나 하카제는 슬쩍 두 손가락으로 사진을 확대했다. 수족관을 배경으로 찍은 모리사와의 사진 안에는 다른 얼굴도 함께 찍혀 있었다. 누군가가 사진을 찍든 말든 오로지 관심은 보고 있는 수조에만 향한 옆 모습, 수족관의 조명 아래 어둑하게 펼쳐진 푸른 머리, 지금까지 질리도록 보고 또 보았음에도 어딘가 어색하고 생소한 신카이 카나타. 자신의 옛 연인이 거기 있었다.



"..."



하트를 누를까 말까. 지금까지 모리사와 치아키가 올린 사진에는 모두 하트를 눌러주었다. 의미 없는 행위였지만, 일단은 누군가와 연을 이어가는 방법의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이 사진만큼은 의미 없는 하트도 주고 싶지 않았다. 팔차 좋네, 신카이 카나타. 하카제는 확대한 덕에 늘어지고 깨져버린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잘근잘근 손톱을 씹었다. 둘이서만 갔을까. 슬쩍 치미는 궁금증에 사진을 놓아주고 다른 곳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모리사와 치아키가 팔로우한 목록에서 익숙한 아이디를 찾아 눌렀다. Ninza_sinobu, yuru_green, blackmen05. 파도에 올라타듯 누르지 않아도 이제 스펠링까지 싹 외워버린 아이디들을 부러 찾아 들어가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수족관엔 모두 함께 갔는지 다른 이들의 계정에도 소소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스토커 같아."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천하의 하카제 카오루가 남의 SNS 계정이나 살피며 헤어진 옛 연인의 흔적을 찾고 있다니. 주간지에 팔면 대문짝만하게는 아니더라도 아마 구석 어딘가에 실려 웃음거리가 될 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미련이라는 건 늘 이런 형태였다. 싫어도 들러붙었고, 떼어내려고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벌써 신카이 카나타와 헤어진 지 1년이 넘었는데도 그 형태는 변함이 없었다.



"축하해요. 잘됐네요. 그럼 우린 이제 헤어지는 건가요?"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치워버리곤 하카제는 바로 옆에 놓인 커다란 침대에 몸을 던졌다. 꾹 눈을 감으며 이별의 시작을 떠올렸다. 고저 없이 흔들림 없이 그렇게 묻던 신카이 카나타는 지독하게도 흐려지거나 번지거나 망가짐 없이 이렇게 불쑥 떠올랐다. 함께 했던 시간 동안 웃고 울던 모습은 이제 바래져서 잘 떠오르지도 않는데, 마지막 그 순간만큼은 누가 사진으로라도 찍어 두었는지 선명하기만 했다.
유메노사키에 다니면서 아이돌 활동을 할 때도 교내 이벤트라던가 라이브로 정신없이 바빴지만, 졸업하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리더인 사쿠마 레이와 함께 먼저 졸업하면서 동시에 데뷔했다. 정식 그룹은 아니고 유닛 형태로. 학생 시절에는 학교를 통해 제의가 들어오는 일중에서 여러 유닛이 나눠 골라 했기 때문에 그래도 꽤 여유가 있었는데, 정식으로 데뷔를 한 후부터는 들어오는 일 모두 언데드를 향한 것들이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런 자신과 달리 신카이 카나타의 경우는 모리사와 치아키만 홀로 배우도 데뷔했을 뿐, 유성대 활동은 후배들이 졸업하면 함께 하기로 한 터라 시간이 남았다. 교복을 입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한 시간과 비교하면 많은 게 바뀌었고 공유하는 것도 적어졌지만, 그래도 문제는 없었다. 아무리 바빠도 애인과 함께할 시간 정도는 만들면 만들 수 있었고, 하카제는 신카이 카나타와 함께 하는 시간에 '피곤' 같은 단어를 절대로 붙이지 않았으니까. 3일에 한 번에서 일주일에 한 번, 그 뒤론 한 달에 한 번 겨우 얼굴을 볼까 말까한 날들이 계속되었지만 그래도 문제없었다.



"카나타군, 나 미국 가게 될 거 같아."



문제는 아마 이거였겠지.


하카제 카오루 앞으로 대본 하나가 날아왔다. 모두 영어로 된 스크립트라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커다랗게 찍힌 제목 로고 아래에 함께 적힌 감독의 이름은 슬쩍 보아도 익숙한 이름이라 하카제는 떡 입을 벌렸다. 유명 감독의 커다란 프로젝트에 아시아 젊은 배우가 필요하던 차에, 우연히 자신이 광고하고 있는 청바지 캠페인을 본 그가 만나고 싶다고 했다며 매니저가 말을 전했다. 일본에서만 진행된 캠페인 광고가 어떻게 그 유명 감독 눈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게 다시 오지 않을 엄청난 기회라는건 알 수 있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사장도 실장도 매니저도 모두 그렇게 말했다. 심지어 사쿠마 레이까지 "이건 좋은 기회군."이라 했으니까. 그래서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넷 화상으로 간단하게 관계자 오디션을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확정 캐스팅에 이름이 올랐다. 몇 분 뒤에는 온 인터넷에 기사가 났다. 메일로 날아온 스케줄은 영어 연수까지 포함되어 대략 1년 가까이나 되었다. 그 긴 스케줄과 미국에서 자신을 담당할 사무소에서 필요한 것과 함께 올 스태프나 가족이 있으면 연락 달라는 코멘트도 함께 적혀져 있었다.
아직 황금 티켓이 될지, 아니면 그저 종이로 남을지 모를 그 티켓을 손에 쥐고 하카제는 당장 신카이 카나타를 찾아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늘 그랬듯 그는 활짝 문을 열어주었고



"카나타군, 나 미국 가게 될 거 같아."



서프라이즈! 같은 느낌으로 활짝 웃으며 외친 자신의 말에



"축하해요. 잘됐네요. 그럼 우린 이제 헤어지는 건가요?"



라고 물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이렇게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될 동안 신카이 카나타에게 한 마디의 설명도 하지 못한 자신이 가장 잘못했다. 이런 이야기가 오간다 그에게 말이라도 해줬어야 했는데, 모든 게 다 결정 난 후에서야 통보하듯 던졌으니 충분히 질리고 화날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름 변명하자면 아직 확정도 나지 않은 일을 입 밖으로 꺼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고, 지금껏 늘 신카이는 자신을 이해해주고 곁에 있어 주었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하카제 카오루의 생각을 보기 좋게 비켜나간 신카이 카나타는 아주 간단하게 이별을 고했다.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흐르는 건데?"



심지어 자신은 신발도 벗지 못했다. 늘 허락받던 그의 공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현관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게 하카제로서는 참 힘들었지만, 그래도 대화를 나누고 싶어 물었다.



"기사 봤어요. 1년이나 미국에 있다면서요. 모르겠어요. 1년이나 카오루를 기다릴 자신이 없어요."
"... 같이 가면 되잖아. 매니저 형식으로라도 널 데려가겠다고 하면 저쪽에서도-"
"제가 왜요?"
"..."
"그건 카오루의 일이지 제 일이 아닌데요."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정말 모르겠다는 듯 묻는 그의 말에 하카제는 상처 입었다. 지금까지 신카이 카나타의 모든 일은 하카제 카오루의 일이었는데.



"사실... 생각했어요."
"뭘?"
"...헤어져야 한다고요. 이제 우린 열아홉 살이 아니잖아요."
"스무 살과 열아홉이 뭐가 다른데?"
"달라요. 이제 어른이잖아요."



마치 그와 자신이 나눈 모든 게 어린아이의 장난이었다고 떠드는 것 같은 말에 또 상처.
제 눈도 보지 못하고 그렇게 중얼대듯 말하는 신카이의 말에 하카제는 그날 몇 번이고 손바닥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다른 일이라면, 다른 일에서 이렇게 의견이 맞지 않으면 그를 어르고 달랬겠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 그럼 헤어져."
"..."
"잘 되었네. 안 그래도 미국에 가면 엄청 예쁜 미녀들도 많을 텐데, 이 좋은 기회를 어쩌나 싶었거든?!"



웃기지도 않은 소리였다. 미녀든 미남이든 그런 게 눈에 들어올 리가 없는데, 이런 식으로 그와 헤어지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화가 나서 허튼 투정만 떠들어댔다.



"카나타군 때문에 그런 좋은 기회를 날려버리기엔 아깝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잘됐네! 솔직히 내가 카나타군 같은 남자랑 사귀는 것도 좀 우스웠고? 이상하잖아? 맞아. 그랬-"
"카오루."
"..."
"피곤해요. 이야기 끝났으면... 그만 가줄래요?"



하지만 신카이 카나타는 그 투정조차도 들어주지 않았다. 웃기지도 않은 자존심과 어설픈 투정을 떠들어 대던 제 입을 막아버리곤 눈앞에서 문을 닫았다. 그게 우리의 이별이자 끝이었다.



"나쁜 놈."



한 번도 지칭해본 적 없는 단어들로 그를 떠올리며 하카제는 쓱 손바닥으로 눈 밑을 쓸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눈물을 지워내고 다시 손을 뻗어 휴대폰을 열었다. 자신의 SNS 계정에는 누가 보아도 화려한 미국 생활을 즐기는 모습들이 가득했다. 온갖 곳으로 떠난 로드트립 사진, 화려한 파티 사진, 촬영장에서 함께한 스태프 그리고 배우들과 함께한 사진. 틈틈이 보란 듯이 의미도 없는 순간들을 올려댔다. 가끔 물고기 사진이나 업로드하는 신카이 카나타가 봤으면 해서. 보고 지금 자신처럼 슬프거나 아프길 바라서.
하지만 의미 없는 행위였다. 이별이란 늘 던진 사람보다 맞은 사람이 아프고 오래가는 법이었다. 방아쇠는 신카이 카나타가 당겼고 쏘인 건 자신이었으니 그는 아마 이별의 감각도 잊어버리고 잘 먹고 잘 지낼 게 분명했다.
그렇게 한참을 사진들만 들여보다가 이번에는 앨범을 열었다. 위로 올리고 올려 가장 행복했던 날들을 살폈다. 대부분 사진은 푸른색을 띄고 있었다. 신카이 카나타가 없는 곳이 없었다. 웃는 얼굴이 이렇게도 많은데 왜 머릿속에 남은 모습은 그 딱딱한 얼굴뿐일까. 닿지도 않을 뺨에 엄지손가락을 문댔다. 기억나지도 않는 온기를 떠올리며 몇 번이고. 그러다 참지 못해 이번엔 메신저를 켰다. 반년도 전에 멈춰진 대화창을 보며 하카제는 키보드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보고 싶어.
만나고 싶어.
뭐해?
목소리 듣고 싶어.
내 생각은 해?
난 많이 해.
허튼소리 해서 미안해.
나 담배 피고 싶어. 화내.
네가 적어준 쪽지도 가져왔어.
나 생각해주는 거 너밖에 없어.
너밖에 없어.
용서해줘.
잘못했어.
헤어지자는 말 취소해.
다시 만나.
만나.
만나자 우리.
키스하고 싶어.
안고 싶어.
목소리 듣고 싶어.
기다려.

좋은 사람 만나.

나만큼 너 아껴주는 사람 만나.

아니.

다른 사람 만나지 마.
행복해? 난 아니.
연락 좀 해.
사랑해.



보내지 못할 말들이 몇 번이고 써졌다 지워졌다. 밤마다 반복되는 이 행위에 미련과 사랑 어떤 단어를 붙여야 할까를 고민하며 하카제는 결국 새로운 말풍선 하나 띄우지 못하고 휴대폰을 암전시켰다. 어느새 젖은 머리카락은 바싹 말라버렸다. 동시에 바싹 말라버린 눈가를 문지른 후, 하카제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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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할때는 카오루보다 카나타가 더 겁이 많을 거 같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