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몸은 으슬으슬했고 열로 정신은 몽롱했다. 자꾸만 눈도 감겼다. 배도 뜨거웠다. 누군가에게 맞은 것처럼 몸도 아팠다. 실제로 맞아본 적은 없지만, 아마 이런 형태일 거 같았다.
"추워요."
신카이는 꾹 눈을 감으며 중얼댔다. 약을 먹으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곧 편해질 거 같은데, 어째서인지 집안에서는 약 같은 건 함부로 먹어선 안 된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주사도 맞아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아프면 그냥 모든 게 끝나길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아파, 말을 입에 담으면 고통이 빠져나갈까. 전과 같으면 빠져나간 이 고통을 받아줄 이가 곁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었다. 신카이는 슬쩍 다시 눈을 떴다. 늘 시끄럽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옆자리의 옆자리도 비어 있었다. 친하지 않지만, 그래도 가끔 눈인사했던 그 앞자리도 조금 무섭게 생겼지만 투박하게 걱정해주던 그 앞자리의 옆자리도 모두. 신카이 역시 피하고 숨고 싶었지만, 이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저를 흰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더 당당하게 얼굴을 들고 지내고 싶었다. 도망쳐버리면 그동안 노력한 '신카이 카나타'의 모습이 모두 부정당하는 거 같아서 싫었다.
하지만 그렇게 강한 척 하는 것도 멀쩡할 때의 이야기지. 제 뒷머리로 콕콕 다가와 박히는 찬 눈과 말들을 견디기엔 지금 자신은 너무도 약했다. 서러움도 북받쳤다.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왜 약도 못 먹게 하는 거야? 그냥 노래만 했는데.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왜 처형당해야 하는 건데? 왜 감기는 이럴 때 걸린 거야. 왜 아파도 참아야 해? 왜? 화풀이, 분풀이와 같은 질문을 빙글빙글 머리로 그려보다 신카이는 책상을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넣었다. 이어서 발바닥에도. 꾸욱 힘을 넣어 몸을 일으켰다. 휘청, 어지러운 열 때문인지 아니면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인지 꼴사납게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다시 힘을 주고 교실을 벗어났다. 누군가 킥킥 웃는 소리가 도망치는 제 뒤에 꼬리처럼 달라붙었다.
"...레이... 와타루... 슈... 낫짱..."
애도 아니고 훌쩍이는 건 싫은데. 아파서 그런지 이상하게 서러웠다. 무너진 무대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언제까지고 함께 쭈욱 무대에 서자는 약속은 어린아이들이 손가락을 걸고 나누는 정도의 간단함이었을까. 뚝뚝 눈물이 흘렀다. 맞거나 찔린 것도 아닌데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신카이는 서둘러 교복 소매를 당겼다. 눈물을 훔쳤다. 다 감기 탓이었다. 약한 것도 누군가를 탓한 것도 모두 이 감기 때문이었다. 사쿠마 레이도 히비키 와타루도 이츠키 슈도 마지막으로 사카사키 나츠메도 모두 지금이 가장 힘들 텐데, 자신이 힘들다는 이유로 사라져 버린 그들을 미워하고 탓하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곳에 가고 싶어요.."
몸은 추운데 동시에 뜨거웠다. 펄펄 오르는 머리를 그대로 물속에 쳐박고 싶었다. 신카이는 신고 있는 신발을 질질 끌었다. 분수대까지는 너무 멀게 느껴져 무작정 계단을 밟았다. 옥상까지 올라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시원해라."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나풀댔다. 뺨을 간질이는 것을 정리하며 발을 뻗었다. 옥상에는 올라올 일이 그리 많지 않았던 탓인지, 아는 공간인데도 이상하게 어색했다. 전에는 모두 함께 여기서 시답지 않은 소릴 떠들며 웃고, 무언가를 나누어 먹고 그랬던 거 같은데. 그랬던 기억이 이젠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구별하기 어려웠다.
"울기 싫어."
눈썹에 힘을 주었다. 훌쩍이는 코에도 힘을 주었다. 입술도 꾹 물었다. 비명이라도 왁 질러버리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 다시 힘을 풀었다. 그리고 입을 여는 순간
"어라?"
등 뒤로 다시 문이 열렸다. 불청객. 소리도 한 번 지르지 못했는데 방해받았다. 다시 훅 치고 올라오는 서러움에 신카이는 이를 악물었다.
"수업 중인데? 땡땡이야?"
불청객이 싱글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러는 그쪽은요? 따져 묻고 싶었지만, 타인과 이야기를 나눌 만큼 현재 자신에게 여유는 없었다. 신카이는 슬쩍 원망을 담아 그를 노려본 후, 걸음을 옮겼다. 대충 눈에 보이는 벤치를 차지하고 앉았다.
"사쿠마씨 친구 맞지?"
무시해주면 좋을 텐데. 다른 사람들이 그러듯. 하지만 뻔뻔하게도 그는 자신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러고 보니 종종 사쿠마와 함께 있을 때 보았던 얼굴이었다. 가벼워 보이는 얼굴. 헤프게 흘리는 미소. 이름이 뭐였더라. 분명 사쿠마에게 그 이름을 듣고 그 가벼운 모습에 어울린다 생각했던 거 같은데.
"나 기억 안 나? 사쿠마씨랑 친한데. 가끔 라이브에서 봤잖아."
"...기억 나요. 얼굴만."
"에~ 섭섭하네. 우리 통성명도 했는데. 신카이 카나타군."
"..."
"하카제 카오루야."
아, 그래. 그런 이름이었다. 깃털처럼 바람처럼 가벼운 이름. 두 번이나 알려줬으니 기억 좀 해, 그가 툭 말했다. 뭐 세 번은 없을 텐데요. 신카이 역시 툭 던졌다.
"그나저나 혼자서 뭐해? 수업은?"
"...제가 묻고 싶은데요."
"아, 나는 보드 닦으러 왔거든. 저거."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 커다란 서핑용 보드가 여러 개 세워져 있었다. 저런 거, 이렇게 막 학교에 두어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잠깐 하다 여기저기 자신이 널어놓은 수조들을 떠올리며 신카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카나타군은?"
"...이름 부르지 말아 줄래요?"
스스럼없이. 그런 거 허락한 적 없는데. 잘라 말하자 그가 "미안, 미안!"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사과했다.
"저는 감기요. 머리가 아파서 쉬러 왔어요."
무시하면 그만이었지만, 사쿠마의 친구라는 게 걸려 일단 대충 대답했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으려나. 이제 슬슬 혼자 뒀으면 좋겠는데.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가볍게 쥐며 빌었다. 바람 덕에 머리의 열이 더 뜨겁게 느껴져 어지러웠다.
"약은? 먹었어?"
"..아뇨."
"엄청 안 좋아 보이는데? 약 받아다 줄까."
"괜찮아요."
어차피 먹으면 혼나고. 그 말을 삼키며 신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럼 키스해줄까?"
하지만 뒤이어 던진 그의 말에는 놀라 고개도 젓지 못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람? 미간을 구기며 그를 노려보았다. 가볍다, 가볍다 생각은 했지만 이토록 가벼울 줄이야. 사쿠마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사람과 지내는 걸까.
"하하, 왜 감기는 키스하면 낫는다잖아!"
거짓말. 순 거짓말. 그런 거로 낫는다면 이렇게 아플 필요도 없이 당장 누구라도 붙잡고 입술부터 부딪쳤을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왜 저 말에 기대고 싶은 걸까. 나약해져서 그런 걸까? 아니면 누군가의 온기가 필요해서? 신카이는 가만히 하카제를 바라보았다.
"해요."
슬픔도 고통도 다 어디론가 옮겨버리고 싶었다. 엑, 진짜? 먼저 제안한 주제에 그가 질색하며 물었다.
"아무래도 좋거든요."
차오른 열은 언제나 곧은 판단과는 먼 것을 택하고 만다. 하지만 제 대답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약간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그리곤
"아무래도 좋은 키스는 안해."
치사하게 굴었다. 뭐야, 감기 낫게 해주는 거 아니었어? 그를 붙잡고 조르려다 그만두었다. 뚝, 허벅지를 쥔 손에 눈물이 떨어졌다. 이 아픔과 고통에도 기댈 수 있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어라? 잠깐, 우는 거야? 왜?! 설마 키스 안 한다고 해서 그래?!"
"그럴 리가 있겠어요?!"
말도 안 되는 그의 말에 빽 소릴 질렀다. 그리고 당황한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하카제 카오루와 눈이 얽히는 순간, 이상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되고 황당한 그와의 대화에 어딘가 차올랐던 열이 쑤욱 빠져나간 거 같았다. 울다 웃다, 갑작스러운 자신의 감정 기복에 놀랐는지 그는 살짝 당황한듯싶더니 이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레몬 사탕. 감기에 레몬 좋다더라. 왜 아프면 레몬티 같은 거 따뜻하게 먹잖아."
나름 논리적으로 설명했지만, 전혀 논리적이지 못한 답이었다. 하지만 신카이는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뜨뜻한 손바닥 위로 작은 사탕이 놓였다. 그럼 갈게, 나중에 또 봐. 그가 몸을 돌렸다. 빙글 돌아가는 등을 바라보며 신카이는 무어라 전하려 입을 열었으나 소리를 내진 않았다. 대신 사탕을 까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약 대신 혀에 감기는 동그란 것은 시고 또 셨다. 그 안에서 가까스로 작은 달콤함을 찾아내며 신카이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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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카제 카오루는 알까. 자신이 서핑 보드 안닦고 돌아갔다는 거슬..? ㅎ
전력주제 : 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