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 2천엔입니다."
친절한 점원의 인사에 하카제는 가만히 카운터에 올라간 가죽 라이더를 바라보았다. 평소에 자신이 버는 수입, 그리고 소비하는 범위를 계산하면 아무리 리얼 가죽이니 브랜드이니 해도 꽤 값이 나가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기세 좋게 카운터에 옷걸이를 내려놓은 것까지는 쉬웠는데 카드를 내미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손은 달랐다. 고민의 시간은 꽤 더디고 느리게 흘렸지만, 하카제는 빠르게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3개월이요, 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옷가게의 점원은 대부분 친절했다.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직업이니 당연했다. 지금 입으신 옷 잘 어울리시네요, 어디서 사셨어요? 지금 셔츠와 딱 어울려요, 이 색도 잘 받으실 거 같아요, 등등. 그런 말은 어차피 서비스에 지나지 않으니 속지 않았다. 하카제 카오루는 그런 달콤한 속삭임에 이미 충분히 단련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데이트 나가시나 봐요? 그거 입고 나가시면 애인분이 아주 난리 나겠어요."
왜 그 말에는 기권하고 말았는가. 하카제는 물끄러미 포장되는 자신의 자켓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꼴깍 침을 삼킨 후, 말했다.
"뒤에 바로 데이트라, 그냥 입고 갈게요."
낮에는 아는 지인의 카페에서 커피를 팔았다. 바리스타냐고 물으면 하카제는 고개를 저었다. 말 그대로 판매만. 바리스타는 따로 있었고 자신은 그저 서서 손님이 부르는 메뉴를 포스기에 찍고 나온 음료를 테이블로 서빙만 했다. 저녁에는 역시나 아는 다른 지인의 부탁으로 밴드의 임시 베이스를 맡아 공연 무대에 섰다. 새 멤버 구할 때까지만 부탁할게, 라고 하도 빌어 끄덕인게 벌써 3년. 임시라는 말은 이제 떼도 되지 않느냐는 멤버들의 말에 하카제는 늘 고개를 저었다. 어디 속하는 거 진짜 싫어, 라고 이유를 대면서.
그렇게 늘 물 흐르는 대로 살았다. 남들이 학교에 가니 학교에 다녔고 졸업하니 졸업을 했다. 공부를 하니 공부도 했는데 그냥 하기만 해서인지 대학에 갈 머리는 되지 못했다. 그러다 당시 누나가 사귀던 남자 친구의 소개로 바닷가에 위치한 서핑 샵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서핑도 배웠다. 한 2년, 그렇게 바다에서 살다 도시에 올라오니 별로 할 게 없었다. 서핑 강사라도 할까 싶었지만, 취미로 배운 걸 남에게 들이밀기도 그랬다. 직업을 묻는 칸에 프리터라 적어 넣는 게 어색하지 않을 즈음, 일하던 선술집에서 지금 밴드의 리더를 만났다. 얼굴이 괜찮으니 악기 배워서 무대에 설 생각이 없느냐 제안받았다. 무대에 설 생각은 없었지만, 시간은 남아돌았기에 베이스를 배웠다. 그러다 또 재미없어져서 또 심심해져서 다른 일을 하다 다른 걸 하다 빙빙 돌고 헤매다 현재. 딱딱한 의자도 싫었고 목을 조이는 넥타이도 싫었다. 본가에 계신 어머니는 매번 전화해 언제까지고 그렇게 살 거냐, 결혼은 하겠냐 잔소리를 던지지만 하카제는 그때마다 웃으며 넘겼다. 사람에게 묶이는 것도 싫었다. 세상에 예쁜 여자들이 이렇게 넘쳐 흐르는데 한 사람만 바라보는 건 아깝다고 여겼다. 고맙게도 다가오는 여자들은 대부분 그런 저를 이해했고 사랑으로 품어주었다. 그러니 이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 없다고, 그냥 이렇게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고 하루만 보고 즐기다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좋은 데이트 되세요!"
데이트라니. 하카제는 가게를 나오며 자신의 꼴을 내다보았다. 방금 산 가죽 라이더가 빛을 받아 번쩍였다. 그뿐이랴. 제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아끼는 옷, 아끼는 시계, 아끼는 구두를 신었다. 몇 달 전에 자고 일어난 그대로 츄리닝 걸치고 나갔다 여자 친구에게 뺨을 맞았던 걸 생각하면 꽤 발전된 모습이었다.
"아, 이거 진짜 위험한데."
하카제는 곤란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스스로에게 경고하면서도 희한하게 입꼬리는 좀처럼 내려올 줄 몰랐다.
"블루 레모네이드, 하나요."
상대는 낮에 일하는 카페의 단골이었다. 슬쩍 명함이나 번호를 주고 가는 여자들은 너무 많아 기억하기 어려웠지만, 매일 같이 블루 레모네이드를 주문하는 손님은 유일했기 때문에 그를 기억하는 건 하카제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 카드나 칩을 사용하는 세상에서 그는 꼭 동전을 사용했고, 물고기가 그려진 작은 지갑에서 언제나 딱 떨어지는 숫자를 내밀었다. 그리곤 적당하게 빈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었다. 소설책이기도 했고 어떨 때는 그림책이기도 했다. 공통점이 있다면 표지에 언제나 물고기나 조개나 뭐, 그런 바다 관련된 사진이나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것 정도일까. 한참을 그렇게 읽고 나면 미련 없이 카페를 떠났다. 몇 번을 반복하는 그의 하루를 지켜보다 보니 슬쩍 눈이 갔다. 그냥 조금 눈이 가는 손님. 하지만 눈이 가다 보니 계속 눈이 갔다. 거기다 여러 가지에 갔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머리카락이나, 그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가락이라든가, 글자를 따라 움직이는 눈동자라든가 뭐 그런 것들에. 그렇게 정처 없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만 시선을 던지던 어느 날
"어제 뉴스 보셨나요?"
늘 블루 레모네이드 하나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말고는 따로 대화를 나누어본 적 없는 그가 주문도 전에 물었다. 뉴스? 뭔 뉴스? 하카제는 자신의 인생에도 별 관심이 없었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건 더더욱 그랬다. 미래로 끝없이 흘러가는 세상은 혼돈으로 매일 같이 온갖 뉴스거리를 뱉어내고 있었지만, 굳이 그 카오스에 몸을 던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색다른 말에 "네, 봤어요!"라 외치고 싶었지만 금방 들통이 날 소리인지라 하카제는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얼마 전에 관리 대상으로 풀려난 사카키 나오요, 또 살인을 저지른 모양이에요~"
"아, 안 그래도 오는 길에 공원에 경찰들 어마 무시하던데. 그거 때문이었나봐요?"
그가 블루 레모네이드를 외치지 않았지만, 익숙하게 포스에 찍어내며 물었다. 사카키 나오. 하카제는 사실 그가 뭘 한 사람인지는 잘 몰랐지만 몇 달 전 집으로 배달된 <관리 대상 지역 안내서>를 떠올리며 끄덕였다. 범죄자가 제2의 기회를 받고 인생을 다시 살 기회를 얻었을 때 오는 우편물로 간단히 말하면 '이런저런 짓을 한 놈이 이제 이 동네에서 살게 되었으니 안내드립니다. 이놈에 대한 처리는 모두 일본 관리청에서 관리하고 주시하고 있으며 시민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피해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같은 것들이 길게 적혀져 있는 안내장과 같은 것이었다. 인간도 아닌 놈들에게 인권 운운하는 온갖 단체들의 오랜 시위와 인간은 언제든지 갱생할 수 있다고 믿는 멍청한 놈들로 인해 꽤 오래전 사형 제도가 완벽하게 사라졌고 그 제도 대신 '기회'가 생겨났다. 범죄자들에게 주어지는 기회. 죄를 빌고 회개하여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 물론 모든 범죄자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었고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뽑혔다거나, 뭐 그런 놈들이 잡게 되는 찬스였다. 덕분에 수십 년간 가정 폭력을 견디지 못해 남편을 살해한 여자도 뺑소니로 자식을 잃고 복수한 아버지도 모두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관리 대상으로 분류되어 세상에 나왔다. 마음으로 이해하고 싶은 그런 사건들에겐 좋은 케이스라 모두가 다행이라 입을 모았지만
"여자 다섯을 죽여놓고 모범수가 되어 관리 대상이 되다니, 정말 이 나라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런 경우도 있었다. 동전을 조심스럽게 꺼내며 던진 그의 말에 하카제는 웃었다.
"뭐, 그런 놈들 때문에 '관리인'이 있는 거잖아요?"
관리인, 일본 관리청 소속의 공무원들로 경찰과 비슷했지만 달랐다. 그들은 사건을 수사하거나 조사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오로지 관리 대상을 관리하기만 했다. 관리 대상이 더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그러다 관리 대상이 죄를 뉘우치지 않는다면, 심판은 관리인의 몫.
"곧 해결되겠죠."
늘 그래왔지 않았는가. 하카제는 어깨를 으쓱이며 빠르게 나온 블루 레모네이드를 내밀었다.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겠네요~"
그가 자리를 잡는 대신 빠르게 그리고 바로 잔을 비우며 말했다. 그리곤 다른 날과 달리 바로 가게를 벗어났다.
주변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나도 하카제는 딱히 눈을 깜빡이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영 찜찜한 터라 그날은 빠르게 마감을 했다. 다른 직원들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요란하게 돌아가는 순찰차의 불빛을 받으며 퇴근하는 길, 평소라면 편의점에서 맥주라도 샀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사카키 나오가 죽었다. 귀가하던 여자를 노리던 그를 관리인이 처리했다고 뉴스는 보도했다.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에요~"
다음날, 남자는 역시나 블루 레모네이드를 주문하며 웃었다. 아이처럼 웃는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하카제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덕분에요. 어제 일찍 퇴근했거든요. 원래 마감이 11시인데, 그쪽이 언급해주지 않았으면 현장에 엮였을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자주 다니던 길이였거든요."
핑계였다. 가게 마감은 11시가 맞았지만 자신의 퇴근은 10시였다. 집으로 가는 길은 여기서 3개는 더 되었다. 그래도 멋대로 입이 움직였다.
"보답...이라고 하기엔 이상하지만,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은가요?"
완벽하게 데이트 신청과 같은 소릴 줄줄 떠들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말은 입을 타고 흐른 후, 대답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손에 땀이 찼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태어나 여자도 아니고 남자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게 될 줄이야. 당장 백룸으로 들어가 제 머리를 벽에 받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한참을 말없이 서있던 그는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잡힌 게 오늘의 데이트였다. 그는 데이트라곤 생각도 못하겠지만, 하카제는 멋대로 데이트라 이름 붙였다. 첫 데이트.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을 어쩌지 못하고 괜히 발로 바닥만 짓이겼다. 그가 물고기를 좋아하는 거 같아 수족관 티켓도 샀다. 그 안에 위치한 레스토랑에도 이미 예약을 끝낸 상태였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지? 하카제는 슬쩍 꽃집으로 향하는 시선을 애써 거두며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늦었나요~?"
돌아보니 기다렸던 얼굴이 있었다. 이 날씨에 덜렁 셔츠 하나만 걸친 그의 모습에 하카제는 저도 모르게 가죽 냄새도 빠지지 않은 라이더를 벗어 그에게 걸쳤다. 습관처럼 나온 행동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자켓은 그의 어깨를 덮은 후였다.
"...어, 추워 보여서요."
놀란건 상대도 마찬가지인지 깜빡이는 그의 푸른 눈을 들여보며 하카제는 서둘러 변명했다.
"차 가져왔는데, 괜찮아요?"
차는 카페를 운영하는 지인, 그러니까 사장에게 사정해서 빌린 것이었다. 데이트에 차는 기본이니까. 그는 좋아요, 작게 대답하며 끄덕였다.
주차해놓은 차를 찾아 오르기 무섭게 하카제는 히터부터 켰다. 안전벨트를 착용하며 남자는 동그란 눈을 굴려 차 구석구석을 살폈다. 자신도 모르는 이상한 게 그의 눈에 걸리기라도 할까 하카제는 꼴깍 침을 삼켰다.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어서 예약했는데, 거기가 수족관 안에 있어서.. 혹시, 수족관 좋아하세요?"
"네! 좋아해요~ 바다도 좋고, 물고기도 좋고, 상어도 좋아요"
다행이다. 그럴 거라 예상했지만, 약간의 가능성으로 싫다는 대답이 돌아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럼 출발할게요. 하카제는 긴장을 꾸역꾸역 삼키고 운전대를 잡았다.
주말 낮이라 그런지 차가 꽤 되었다. 아직 그와 어떤 대화를 나누어야 될지 몰라 차 안이 적막했다. 이름이 뭐예요? 나이는? 직업은? 가족 관계는? 좋아하는 음식은? 혹시 작가에요? 아님 출판사에서 일해요? 왜 블루 레모네이드만 마셔요? 혹시 다음 주도 시간 있어요? 이 영화 봤어요? 저녁에 일정 있어요? 내가 괜찮은 바를 아는데 같이 갈래요? 술은 마셔요? 나 어때요? 묻고 싶은 건 많은데 어느 한 가지도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겁쟁이처럼 오들오들 댔다. 이 불편한 침묵이 싫어 하카제는 여유롭게 한 손을 뻗어 라디오로 손을 뻗었다. 조용한 공간에 노래라도 틀어 놓을 셈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벨 소리가 울렸다.
"으음..."
살짝 허릴 들어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을 꺼내 확인한 그의 얼굴이 단숨에 곤란해졌다. 무슨 일 있어요? 하카제는 앞을 주시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뇨, 그는 떨떠름한 대답을 던지곤 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
"무슨 일이에요? 와타루?"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귀찮음이 느껴졌다. 와타루라, 남자 이름인데. 툭툭 핸들을 두드리며 하카제는 쫑긋 귀를 세웠다. 남의 통화를 엿듣는 건 나쁜 일이었지만, 들리는 걸 듣는 건 정당했다.
-"카나타? 받자마자 그런 차가운 목소리라니! 심장을 후벼파네요!"
"..에에.. 그래요. 무슨 일인데요?"
귀를 세우지 않아도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렀다. 열렬한 남자의 목소리에 하카제는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오프인 거 알지만, 진짜 진짜 미안한데.... 제 타깃을 놓쳐서요!"
"...그래서요?"
-"저는 지금 피해자랑 있는데 많이 다쳐서요. 완전 겁에 질려서 움직일 수가 없답니다! 불쌍한 비둘기를 두고 떠나는 건 너무 잔인하잖아요? 그런데 따악, 그놈이 도주하는게 카나타군이 지금 열심히 달라고 있는-"
"에~ 싫은데요. 저 지금 수족관 가는 길이라고요? 물고기라고요?"
-"흑흑...! 단칼에 거절이라니! 심장에 칼을 꽂는 거 같군요! 하지만 레이는 지금 자고 있고, 슈는 피가 질색이라 부탁할 사람이 없단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이 불쌍한 비둘기를 두고 갈까요? 그래서 비둘기가 죽으면-"
"사람이잖아요."
동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죠! 남자의 쾌활한 답이 차를 꽝꽝 울렸다. 그보다 무슨 말인지 좀처럼 이해가 안 되는데. 타깃은 뭐고 비둘기는 뭐지? 동물원 이야기인가. 애써 앞만 보며 하카제는 머리를 굴렸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자신의 데이트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것.
"알았어요. 그래서 위치는요?"
그리고 불안은 현실로 다가왔다. 그의 대답을 들으며 하카제는 제발 내려달라는 소린 하지 않길 바라며 꽉 핸들을 쥐었다.
"저기... 미안한데요..."
하지만 신은 제 바람은 들어줄 생각이 없는지 결국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일이 생겼나 봐요? 하카제는 애써 섭섭함을 숨기며 물었다.
"네, 하지만 금방 끝날 테니까 잠깐 도와줄래요?"
"네?"
"금방 끝나니까, 빨리 끝내고 수족관에 가요. 네?"
그가 보채듯 물었다. 아 이대로 내려주지 않아도 되는 건가. 생각과 다른 부탁에 하카제는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웃으며 이내 다시 허릴 들었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귀에 꼽았다. 아주 작은 구슬 같은 거로, 보기엔 이어폰처럼 보였다.
"낫짱~? 들려요? 와타루 일을 넘겨받게 되어서요~ 맞아요! 완전 귀찮다고요? 타킷은 3-459번이요. 위치만 알려줘요."
무전기? 송신기? 마이크도 없는데 그가 혼잣말을 던졌다. 어떻게 반응하면 될까. 이 이상한 상황에 하카제는 입술만 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하더니 이내 안전벨트를 풀었다.
"책임은 제가 질 테니까 속도 밟아주세요."
"네?"
"밟으라고요."
잠, 잠깐! 말릴 틈도 없이 남자가 핸들을 꺾었다. 붙잡을 틈도 없이 핑글 핸들이 돌아가며 차체가 돌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건 저 뿐만이 아닌지 차체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은 그는 다시금 핸들을 잡아 꺾었다. 끼이이익, 바퀴가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비명을 질렀다. 사고를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차들이 꺾었다. 짜증을 담은 클락션에도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무...무슨 짓이에요???!"
핸들은 이미 놓았다. 그는 자신의 비명과 같은 질문에 대답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이쪽으로 넘어올 거 같은 그의 움직임에 하카제는 일단 밟았다. 밟으라고 해서 밟고는 있지만, 제 의지는 아니었다. 다리가 굳은 듯 움직이지 않을 뿐이었다. 남자는 카레이서라도 되는 모양인지 거침이 없었다. 끼익 소리들을 내며 멈춰 서는 차들을 피해 차를 돌린 그는 가볍게 아비규환을 빠져나왔다. 신호까지 무시하며 차를 몰았다. 속도 줄이지 마요, 그가 아이를 달래듯 속삭였다. 하카제는 토할 거 같은 기분을 꾸역꾸역 견뎌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라도 찍고 있는 기분이었다.
"세워요!"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길과 길, 골목과 골목. 자신의 차도 아닌데 어느새 사이드 미러 하나는 날아간지 오래였다. 기계도 아니면서 남자의 말에는 이상하게 즉각 반응, 하카제는 겨우 브레이크를 밟았다.
"금방 올게요!"
어마어마한 짓을 벌인 주제에 그는 사과도 없이 급히 차에서 튀어 나갔다. 잠깐, 잠깐만요! 하카제 역시 서둘러 따라 내렸지만, 멀미라도 한 모양인지 구역질이 올라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여기는 어디고? 고층 건물에 뒤덮여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골목이었다. 어디까지 달려왔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수족관은 아니라는 것 정도였다. 레스토랑 예약까지는 앞으로 30분. 하카제는 속을 문지르며 남자가 사라진 골목을 향해 발을 뻗었다. 일단 그를 찾아서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부터 묻고 싶었다. 첫 데이트에 범버카, 나쁘지 않지. 하지만 그건 장소가 놀이 공원 일 때의 경우였지 도로에서는 아니었다.
"...차 수리비는 어쩌고 분명히 벌금 물 텐데..."
4만엔짜리 가죽 라이더를 지른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통장 잔고가 넉넉하지 못했다. 하카제는 머릿속으로 가장 빠른 공연 일자를 떠올리며 걸음을 옮겼다. 좁고 어둑한 골목은 사람들이 잘 지나지 않는 곳인지 조용했다. 그 덕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움직임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앞 쪽에서 들리는 발소리 그리고 말소리를 따라 하카제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둔탁한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
아주아주 경쾌한 소리였다. 동시에 묵직했다. 두어 번 더 울리는 그 소리는 태어나서 하카제가 들어본 적 없는 소리였다. 어떤 소린 지도 모르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거 같았다. 더 앞으로 가면 안 된다고 본능적으로 떠올렸지만, 제 마음과 달리 걸음은 자꾸만 앞으로 향했다. 걷고 또 걸어 마주친 코너에서 몸을 꺾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관리인 신카이 카나타 보고~ 타킷 3-459번, 관리 종료."
남자와 마주쳤다. 언제나 블루 레모네이드를 시키는 남자. 쏟아지는 햇빛을 제 것처럼 받으며 반짝이던 남자. 그림처럼 푸른 머리카락을 넘기던 남자. 그의 눈동자와 같은 바다를 읽어 내리던 남자. 자신이 반했던 그 남자가 거기 있었다. 뚝뚝 붉은 무언가가 떨어지는 파이프를 쥐고.
"어...? 따라왔어요?"
그가 자신을 발견했는지 천천히 돌며 물었다. 남자의 발치 아래에는 눈도 감지 못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철철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피가 남자의 구두를 적셨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저 남자 죽은 건가? 요란한 레이스 후에 찾아왔던 토기가 다시 올라왔다. 하카제는 하는 수 없이 서둘러 고개를 돌려 벽을 짚었다. 우웩, 첫 데이트를 앞두고 겨우 입에 털어 넣은 것들이 우르르 입을 타고 흘렀다. 수족관은 못가겠네요, 자신의 라이더 자켓에 피를 묻히곤 남자가 뻔뻔하게도 말했다. 완벽하게 망해버린 첫 데이트 때문인지 아니면 더는 쏟아낼 것도 없는데 쥐여짜내는 구역질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엉망이 된 4만엔짜리 라이더 자켓 때문인지, 눈물이 났다. 이유 모를 눈물이 조금 흘렀다. 이건 악몽일 거야, 꿈을 깨면 내 방 침대일 거야. 그리 생각하며 하카제는 꾹 눈을 감았다 떴다. 주륵 흐르던 눈물이 끊어져 떨어졌다.
"...수족관... 가고 싶었는데..."
하지만 다시 눈을 뜬 세상은 똑같았다. 눈앞의 혼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토해내는 하카제의 귓가로 서운한 남자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자장가도 아니고 마법의 주문도 아닌데 툭 다리가 풀렸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어둠이 그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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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주제 첫 데이트... ㅎ
60분이 아니라 120분 정도 되버렸지만... 지각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