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카나] 신카이 카나타의 순위
2018. 2. 6. 21:46


"에-취!"



마스크 안에서 요란하게 기침이 터졌다. 감기는 아니었지만, 기록적인 폭설과 한파로 슬슬 몸이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 같았다. 젠장, 하카제는 슬쩍 혀를 차곤 목을 움츠렸다. 두르고 있던 머플러에 최대한 얼굴을 감추며 꾸욱 팔짱을 꼈다. 껴입은 옷과 두터운 패딩 때문에 작은 움직임에도 참 불편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지."



기온이 드디어 영하로 떨어졌다. 얼마 전 내린 눈으로 대부분 땅이 얼어붙어 난리였다. 이런 날씨에는 고타츠에 들어가 밖을 모르는 척 처박혀 있어야 하는데, 왜 자신은 여기에 있는 걸까. 하카제는 눈만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종이를 들고 선 여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뭐가 즐거운지 일행끼리 대화를 나누는 그녀들을 지켜보다, 하카제는 슬쩍 제 손에 들린 종이를 내려보았다. 그녀들이 쥔 것과 같은 거로 <모리사와 치아키 첫 번째 라이브 투어 공식 판매 리스트>가 적혀있었다.
모리사와 치아키, 전국민적이란 타이틀을 붙이기엔 아직 미미한 인기였지만 그래도 이 날씨에 많은 여성을 줄 세울 정도의 스타 배우. 하카제 카오루, 자신과는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자신의 연인인 신카이 카나타와는 함께 유닛 활동을 했던 이였다. 입버릇처럼 정의니 히어로이니를 떠들던 그는 졸업하기 무섭게 스턴트맨으로 특촬 드라마 현장에 뛰어들더니, 이내 바로 주연을 따내 몇 년 동안 아이들에게 '레드 레인저'라는 이름으로 불리다 현재는 음반을 내고 일반 드라마에 출연하며 그럴듯하게 멋진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의 첫 라이브 투어. 지금까지 낸 여러 개의 싱글, 그리고 2개의 앨범의 수록곡으로 세트 리스트가 짜여진 공연은 어느 기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날만을 기다린 팬들을 위한 선물과 같은 공연'으로 티켓 추첨부터가 전쟁이었다. 물론 하카제는 그 전쟁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굳이 그 전쟁에 참가하지 않아도 아이돌 활동을 하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티켓 몇 장 구하는 건 그다지 일도 아니었으니까. 사무소를 통해 받아내는 방법도 있었고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모리사와에게 연락해 초대권을 부탁하는 간편한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왜 그 전쟁을 알고 있느냐 하면, 그건 바로 신카이 카나타때문.



"내 이름이 들어간 당선 티켓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요?"



그런 말을 했던 주제에 하카제 카오루라는 이름은 괜찮은지 제 개인 정보까지 끌어다 2개의 아이디로 총 서른 장, 신카이 카나타의 말로는 아주 적당한 숫자의 티켓에 신청서를 넣었고 그중에서 당선된 티켓은 단 한 장이었다. 그 한 장에 얼마나 기뻐했던가. 권유해도 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정말로 혼자 갈 생각이었는지 신카이 카나타는 고작 그 한 장에 자신이 들었던 것 중에서 가장 큰 소리로 환호를 내질렀다. 아니, 아니. 친구잖아? 그냥 한 장 정도 달라고 하지? 이름이 문제면 이름이라도 적어달라고 하면 되잖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분명 입 밖으로 꺼내면 슬쩍 눈을 흘기며 "카오루는 뭘 모르네요."라고 할 게 뻔해 다물었다. 그렇게 편의점에서 발까지 굴러가며 발권받은 티켓, 그리고 공연. 그 공연을 위해 신카이 카나타는 답지 않게 옷까지 샀다. 전화 한 통이면 볼 수 있는 얼굴을 보러 가는 주제에 꼭 첫 데이트에 나가는 사람처럼. 그걸 지켜보는 건 썩 즐거운 기분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몇 년을 겪다 보니 익숙해진 건지 하카제는 나름 덤덤하게 카드를 긁어 주었다. 새 옷, 티켓, 그리고 비워둔 스케줄. 완벽하게 공연을 위한 준비 완료처럼 보였으나



"카오루우..."



신카이 카나타가 감기에 걸렸다. 말라버린 목소리로 이불 속에서 시무룩하게 저를 부르는 모습에 하카제는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서 할 줄도 모르면서 전복을 사다 죽을 끓여 바치고 그가 좋아하는 물고기 수조도 곁으로 옮겨주고 화보 스케줄도 뒤로 미루고 붙어 있었다. 그리고



"치아키의 우치와가 갖고 싶어요."



공연 역시 가지 못하게 된 신카이 카나타의 부탁을 위해 지금 이곳에 와 있었다.
처음엔 당연히 싫다고 했다. 왜? 당연히 싫었으니까. 모리사와 치아키의 티켓을 위해 개인 정보까지 빌려주고 옷까지 사줬는데, 이번엔 굿즈를 사다 달라니. 황당하고 기가 찼다. 제 연인은 자신을 뭐라 생각하는 걸까. 언데드의 하카제 카오루라고? 작년에 3대 돔 투어도 성공적으로 끝낸 그 언데드의 하카제 카오루라고? 안기고 싶은 남자 1위는 아직 못했지만, 10위권에 이름 올린 그 하카제 카오루라고? 그런데 그 하카제 카오루가 이 날씨에 몇 시간이나 줄을 서서 모리사와 치아키의 우치와를 산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물론 팬심이 있으면 그런 수고야 뭣도 아니겠지만, 자신은 모리사와 치아키의 친구이지 팬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리사와 치아키의 친구이자 팬인 신카이 카나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치아키의 첫 라이브인데... 우치와도 갖지 못하고 공석으로 자리를 비워두다니.. 최악이에요."
"..."
"오랜만에 치아키가 무대에서 노래하는 모습 보고 싶었는데..."
"..."
"역시 안 되겠어요. 제가 가야 해요. 제가 가서 응원해주지 않으면..!"
"스토옵!"



이불을 걷고 이마에 붙은 열 시트를 떼어내려는 신카이의 손을 서둘러 저지했다. 추운 것도 뜨거운 것도 싫어하는 신카이 카나타는 한 번 감기에 걸리면 꽤 길게 갔다. 작년 여름에는 열이 위험하게 올라 응급실에도 다녀왔다. 한파에 폭설까지 난리인 이 날씨에 무리했다간 응급실에 이어 병실 하나 잡아야 할지도 몰랐다. 누군가 죽고 태어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하카제에게 신카이 카나타의 몸 상태는 중요한 사항이었다.



"내가.. 내가 사올게."
"...카오루가요?"
"...그래, 그래! 내가... 내가 사올게. 공연은 안 볼 거지만!! 절대로?! 우치와인지 치와와인지 뭔지는 내가 사다 줄 테니까... 그냥 누워 있어."



에? 가는 김에 공연도 보고 와요. 제 마음도 모르고 신카이 카나타가 칭얼댔다. 아니, 그러다 모리사와랑 눈 마주치면 진짜 뻘쭘할 거 같으니까 됐어. 하카제는 강하게 그리고 진심을 다해 거절하고 소장하고 있던 것 중에서 가장 따뜻한 패딩을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도착한 라이브 회장. 누군가가 알아볼까 최대한 얼굴 면적을 감출 대로 감춘 후, 줄을 섰다. 서고 또 서고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워커 안의 발가락은 슬슬 감각이 없었다.



"카나타군, 이 값은 진짜 비싸게 받아 낼 거야."



으득, 이를 갈며 하카제는 자신에게 들릴 정도로만 중얼댔다. 신카이 카나타 때문에 수업도 재껴봤고 바다에도 빠져봤고 이상한 바다 생물도 잡아보고 함께 살 집을 구하며 수족관이 갖고 싶다는 그의 말에 큰 돈 들여 대형 수조를 설치하는 온갖 기행을 다 겪고 해냈지만, 모리사와 치아키의 솔로 라이브의 굿즈를 사러 줄을 서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



"질리게 본 얼굴, 도대체 뭐가 좋다고."



하카제는 툴툴대며 회장에 크게 걸린 모리사와 치아키의 펄럭이는 현수막을 노려보았다. 뭐, 그렇게 따지면 이쪽도 할 말은 없었다. 질리게 본 신카이 카나타, 뭐가 좋다고 이 짓까지 하고 있는지. 차라리 언데드의 누군가의 팬이었다면 그래도 이 고생은 안 해도 되었을 텐데.



"음, 그것도 싫네. 좀."



상상하니 그것도 별로였다. 대기실에 와서 수조 안의 물고기 보듯 다른 멤버만 지켜보고 있을 신카이 카나타를 어떻게 지켜보라고. 자신의 일터에 오는 걸 어째서인지 신카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떨어져 있는 게 걱정이라 가끔 지방 투어에 데리고 가면 자신은 뒷전이고 사쿠마 레이부터 찾았다. 그뿐인가? 올 상반기에 나왔던 앨범을 가져다줬더니 특전이 사쿠마 레이가 아니라 하카제 카오루라고 "에에, 이거 아닌데요!"라고 했던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일들로 지금도 충분히 괴로운데, 굳이 이걸 그쪽으로 옮길 필요는 없을 거 같았다.



"다음이요!"



그렇게 홀로 얄미운 신카이 카나타의 사랑, 아니 우상을 대하는 마음을 열심히 떠올리다 보니 어느새 다음 순서가 되었다. 계산대로 가라는 스태프의 말에 하카제는 미리 적어둔 종이를 꾹 쥐고 빈 곳으로 향했다. 몇 시간 째 응대를 하다 보니 너무 익숙해졌는지 기계적으로 웃으며 손을 내미는 스태프에게 온갖 숫자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확인하겠습니다. 우치와 A타입 2개, B타입 2개. 사진 4 셋트. 랜덤 사진 셋트로 10개 해서 A, B 총 20셋트. 야광봉 2개. 클리어 파일 2개씩. 팜플렛 2개. 브로마이드 셋트 2개. 랜덤 아크릴 10개. 랜덤 캔배지 20개. 에코백 1개. 팔찌 1개씩 총 3개."



줄줄 신카이 카나타가 문자로 쳐준 것들의 목록이었다. 한 개씩만 사라는 제 말에 "하나는 소장해야 해요."라는 말로 단호하게 굴며 정한 수량이였다.



"총 53,400엔입니다."



어마어마한 숫자. 담아갈 봉투도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하카제는 신카이가 챙겨준 보조 가방을 꺼내 들었다. 언젠가 수족관에 갔을 때 산 것으로 수달과 물고기 캐릭터들이 손을 흔들고 있는, 참 계절감 없는 물건이었다. 프로답게 직원이 미소를 그리며 차곡차곡 물건 확인과 함께 가방에 물건을 넣어주는 걸 지켜보며 하카제는 지갑을 열었다. 집을 나서는 자신을 배웅하는 길에 그가 쥐여준 만 엔권 여섯 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내밀었다. 열심히 아쿠아리움에서 펭귄들과 어울리며 번 돈을 이렇게 쓰는구나, 싶었지만 그의 돈이었고 그가 뭘 하든 그건 하카제가 간섭할 일은 아니었다. 그냥 조금 질투가 날 뿐이었다. 신카이 카나타에게 중요한 것 1위는 물고기, 아마 아깝게 밀려난 2위는 모리사와 치아키. 자신은 3위에는 들어갈까. 아니 10위에는 있을까. 안기고 싶은 남자 10위권은 아무래도 좋았다. 신카이 카나타의 10위권에 들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허튼 생각을 하는 와중에 모든 계산이 끝났다. 자신을 어마한 남팬이라 생각하는지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다른 팬들에게서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가방을 챙겨 나왔다. 그리곤 도망치듯이 주차장으로 향했다. 딱히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손이 급했다. 서둘러 차 문을 열고 던지듯 쇼핑백을 조수석으로 쳐박았다.



"아차."



망가질라. 퍽 소리에 놀라 다시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이 고생을 해서 샀는데 조금이라도 망가지면 더 큰 문제였다. 신카이 카나타의 징징거림에는 이길 수 있어도 눈물에는 못 이기니까.
출근도 퇴근도 없는 주말의 거리는 한산했다. 하카제는 시원하게 속력을 내며 차를 몰았다. 액셀을 밟는 발도 그리고 핸들을 잡은 손도 오랜 시간 추위에 닿아있던 탓인지 얼얼하고 찌릿했지만, 그래도 놓지는 않았다. 집에 홀로 남겨진 신카이가 슬슬 걱정되었다. 정확하겐 뜨거운 걸 질색하는 그가 창문을 열어두거나 찬물을 뒤집어쓰고 있을까 걱정이었다. "절대로 이불 밖에서 나오지 마!"라고 당부하고 나오긴 했으나, 여러 전적이 있는 탓에 안심되진 않았다. 가까스로 신호와 규정 속도를 지켜내며 익숙한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읏차."



묵직한 가방을 챙겨 들고 차에서 내렸다. 어깨에 걸치자 저도 모르게 몸이 기우뚱했다. 별짓을 다하네, 그런 생각이 들어 절로 웃음이 나왔다. 평소에는 "누군가요~?"라고 묻는 신카이 카나타의 목소리가 좋아서 벨을 누르곤 했지만, 오늘은 얌전하게 키를 꼽았다. 다행히 집에는 찬 바람도 들이닥치지 않았고 샤워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카오루~"



대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신카이 카나타가 등장했다. 땀으로 젖은 잠옷 바람으로 기운차게 달려온 그가 입으론 저를 부르곤 손으로는 저를 안아주는 대신 가방부터 찾아 들었다.



"나보다 그게 더 반갑지? 카나타군."



슬쩍 질투 섞인 투정을 뱉었지만,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그대로 현관에 앉아 그가 물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산타에게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꿈만 같아요."
"뭐가?"



한참을 그리고 조용히 물건을 살펴보던 신카이가 마지막으로 모리사와 치아키의 환한 얼굴이 가득한 클리어 파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도 혼잣말이었을 그 말을 하카제는 무시하지 않고 곁에 앉으며 물었다.



"치아키요. 치아키가 무대에 서고 노래를 하고 이렇게 나오는 거요."
"그래?"
"네. 저는 늘 치아키의 꿈을 응원했으니까요."



그래, 그랬지. 먼 옛 기억들을 떠올리며 하카제는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옆얼굴이 뜨끈한 신카이 카나타의 어깨에 닿았다.



"고마워요, 카오루! 감기 금방 나을 거 같아요."



웃음을 터트리며 그가 말했다. 주사는 아파서 싫고 약은 써서 싫고 감기 따위 낫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애도 아니면서 그런 소리를 늘어놨던 사람은 어디의 누구더라. 현대 의학은 싫다고 거부한 주제에 참 속 편한 소리 한다 싶었다. 그런 그가 얄미워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코를 꼬집었다. 아아, 아파요! 그렇게 세게 잡지도 않았는데 그가 꾀병을 부렸다.



"그렇게 아프지도 않으면서. 약았어, 신카이 카나타."



별로 넣지 않았던 손가락의 힘을 더 빼내며 투정하자 그가 금세 찡그렸던 미간을 피며 이를 드러내곤 웃었다. 그리곤 물었다.



"그런 저도 사랑하잖아요?"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그 말에 하카제는 픽 웃었다. 그래, 그런 너도 사랑해. 그런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너는?"이라고는 묻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신카이 카나타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로 답은 확실하니까. 그가 자신의 곁에 있는 거로 답은 이렇게나 확실하니까. 이 정도면 3순위는 아마 확정 아닐까. 하카제는 머릿속에 순위표를 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전히 사 온 물건에 정신 팔려있는 신카이 카나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신카이 카나타의 순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하카제 카오루의 1위가 가장 중요했다. 신카이 카나타의 감기. 그게 1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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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카나타가 모리사와의 라이브에는 가고 싶어 하면서 카오루의 일터나 라이브에는 별로 안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모리사와 라이브에 온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동료지만 카오루의 일터나 라이브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라이벌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ㅎ 죽어도 카오루는 모르겠지만... ㅎ 고로, 1위는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