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유키/텐마유키] 악의에서 도망치지 않을 방법
2018. 1. 29. 00:17





루리카와 유키의 심기가 좋지 않았다.
물론 그의 심기는 항상 좋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스메라기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 좋아하는 패션지도 구석에 박혀 있었고, 늘 붙잡고 있던 천들도 뒷전이었다. 무언가 큰 고민에 빠졌는지 홀로 한숨만 푹푹 내쉬는 일도 늘었다. "무슨 일 있어?"라 조심스레 몇 번을 물었지만, "얼간이 배우와 상관없으니까."라는 말로 잘라내기도 수차례.

"뭔가 알고 있지."

스메라기는 답답한 게 가장 싫었다. 그건 저뿐만이 아니었다. 만카이 기숙사 모두의 공통 사항이었다. 티가 날 정도로 풀이 죽은 게 눈에 보이는데 입을 꾹 다문 루리카와의 행동에 모두가 얼음판을 걷듯 발꿈치를 든 게 벌써 일주일, 더는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알고 있으면, 좀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무쿠."

그래서 아마도 그 고민을 알고 있을 법한 인물을 붙잡았다. 루리카와 유키가 한숨을 쉬는 만큼 사키사카의 어깨도 덩달아 숙여지는 걸 몇 번 본 터라 확신이 있었다. 죄인도 아닌데 거실에 무릎을 꿇고 앉은 사키사카는 애써 자신의 얼굴에 박히는 여러 개의 시선을 피해 보려 눈을 굴렸지만, 본인도 더는 버티기 힘들었는지 넙죽 엎드렸다.

"으아, 절대로 유키군에게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저는 해삼, 말미잘이에요!"
"으음.. 괜찮지 않을까? 무쿠군? 일단 우리는 이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 거잖아?"

감독이 최대한 부드럽게 달래듯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유키군이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보통 그런 건 말하라는 신호라고?! 말해도 돼!"

아니, 뭐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루리카와의 경우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는 말 그대로였을걸. 스메라기는 치고 들어오는 셋츠 반리의 말에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그 소릴 했다간, 사키사카가 도로 입을 다물어 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곧... 학교 축제가 있는데요... 성 플로라 제, 라고 해서요. 엄청 크게요."
"그래서?"
"축제 마지막 날, 하이라이트로 성 플로라 킹과 퀸을 뽑거든요... 일주일 정도 투표로 후보를 정해서, 그 후보를 대상으로요..."
"그래서?"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것과 달리 사키사카는 곧잘 감독의 물음에 술술 모든 것을 뱉어냈다.

"그 후보에 유키가 올라가게 되었거든요."

어머, 소파에 앉아 잔을 기울이고 있던 유키시로가 웃으며 탄성을 뱉었다. 뭐야, 별거 아니네. 스메라기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킹 후보로 무대에 서는 게 좀 창피한 건가? 아님 거기에 입고 올라갈 의상에 대한 고민? 어찌 되었든 별로 나쁜 이야기도 아니었고 방에 틀어박혀 한숨만 쉴 내용도 아니라 여겼다. 하지만 뒤이어

"퀸으로요."

사키사카의 덧붙임에 누군가가 쿨럭 기침을 뱉었다. 아아, 곤란하다는 듯 감독이 탄식을 뱉었다.

"으음.. 뭐야? 원래 그렇게도 가능한 거야? 윳키는 남자아이잖아? 그런데 왜 퀸 후보로 올라간 거야?"
"..모르겠어요. 학생회에서 하는 거라... 유키가 가서 항의는 한 모양인데, 투표율이 있으니까 그건 불가능하다고.. 기권도 안된다고 해서..."

미요시의 질문에 사키사카가 시무룩하게 중얼댔다. 이유야 뻔하지. 하지만 스메라기는 굳이 그걸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이 뻔하다고 생각하는 그 이유가 아니길 바랐으니까.

"괴롭힘이네."

그런 저와 달리 뿅뿅 게임기를 두드리고 있던 치가사키는 아주 시원하게도 툭 대답을 내놨다. 이야, 심하네요. 그의 잔인한 결론에 미나기 츠즈루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으음, 그러니까 괴롭힘이 뻔한 그런 무대에 서야해서 유키군 기운이 없었구나.. 어쩌지? 아프다고 그날 학교를 쉬는 건 안 될까? 내가 전화할 테니까-"
"으음, 하지만 윳키 자존심이 강한 아이잖아? 그렇게 도망치듯 꼬리 빼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 같고~?"
"하지만..."
"감독의 마음은 알겠지만 카즈나리 말이 맞아."

스메라기는 슬쩍 머리를 털며 입을 열었다. 고작 열 네 살이 무슨 자존심이 그렇게 강한지, 어려운 일이 있어도 슬럼프가 있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 그냥 털어놓고 방법을 함께 찾아보면 될 텐데, 그게 싫어서 혼자 저러고 있었다. 그런 녀석에게 가서 "아프다고 하고 빠져!"라고 하는 건 오히려 불 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뭐, 일단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자신은 없었지만, 일단은 그렇게 말했다. 괜찮겠어? 유키시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어왔다. 아니, 절대. 완전 저기압인 루리카와 유키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지뢰를 밟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그를 저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일단은 자신이 그를 책임져야 하는 리더의 입장이니까 누군가 나서야 한다면 자신일 거 같았다.
잘 부탁해, 감독의 격려까지 받으며 겨우 방으로 향했지만 쉬이 방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답답한 상황을 끝내려다 더 큰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건 아닐까 슬쩍 겁도 났다. 하지만 이대로 "못 하겠어!"라고 도망치는 건 또 성미에 맞지 않았기에 스메라기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어이, 유키."

여전히 루리카와는 책상 앞에 붙어 있었다. 늘 보던 잡지를 보는 것도 아니고 따로 스케치나 드로잉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부름을 듣지 못했는지, 그는 여전히 빈 책상만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키!"
"아, 깜짝이야!"

그런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작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시 이름을 불렀다. 드디어 닿았는지 그가 화들짝 놀라며 저를 올려보았다. 뭐야? 놀란 눈으로 그가 물었다.

"그..."

뭐라고 말하지. 사키사카에게 다 들었다고?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어떻게는 또 어떻게? 일단 말을 걸기는 했으나, 무어라 해결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뭐야,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해. 루리카와가 쭈뼛거리는 저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들었어."
"뭘."
"학원제 이야기."
"하?!"

역시나. 이야기를 꺼내기 무섭게 톤이 올라갔다. 벌떡, 의자에서 일어서는 그를 스메라기는 서둘러 붙잡았다. 당장 사키사카에게 따지러 갈 게 뻔한데 놓아줬다간 큰일이었다. 정보제공자는 보호해야 했다.

"무쿠에겐 잘못 없어! 네가 말을 안 하고 답답하게 구니까 다들 걱정해서-"
"무슨 상관이야?! 그래서? 다 들었어? 다 알아?!"
"...어."

최악!! 믿을 수 없다는 듯 루리카와가 빽 비명을 질렀다.

"왜 멋대로 남의 이야기를 해? 내가 다 알아서 할 수 있는데?!"
"다 알아서 못해서 한숨 쉬고 있던 거 아니야? 너 요즘 계속 저기압이었어. 그리고 ...남의 이야기라니. 너 그 소리 감독에게 가서 할 수 있어?"
"..."

살짝 힘을 주어 물었더니 금세 입을 다물었다. 불리할 땐, 늘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게 루리카와 유키의 버릇이었다. 그러니까 진심도 아닌 소릴 막 늘어놓으면 안 되지. 스메라기는 슬쩍 작게 숨을 내쉬며 시무룩한 그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학원제는 언제야?"
"다음 주..."
"빠지거나 이런 건 도망치는 거 같아서 죽어도 싫지?"
"응."
"그럼 방법을 찾아보자."

못된 악의에서 도망치지 않을 방법. 너를 괴롭히려 드는 놈들에게서 맞서 싸우는 방법. 정확하게 집어주자 조금 나아졌는지 루리카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던졌으나 딱히 답이 있는 건 아니었다. 운이 좋게 폭설이 내려서 축제가 중지되면 좋겠지만, 이 날 좋은 시기에 절대로 무리였다. 독감이라도 돌면 최고였지만, 역시나 그것도 무리. 어떻게든 당당하게 루리카와가 이 시련을 이겨낼 방법을 모두가 고민했지만,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열 네 살, 무섭네! 며칠을 답을 찾아 고민하다 시트론이 외쳤다.

"정확하게 룰이 뭐야?"
"룰은 딱히 없어. 복장도 자유고 메이크업도 가능하고... 그냥 나가서 자기 뽑아 달라고 이야기하는 거? 그 후에 투표로 킹과 퀸이 뽑히면 둘이 캠프파이어 때, 춤을 춰야 해. 아... 이것도 최악이네."

이야기하다 루리카와가 입술을 물었다. 그런 그를 달래려 곁에 붙어있던 이카루가가 슬쩍 삼각 인형을 품에 안겨주었다. 평소라면 "필요 없어."라 딱 잘라 거절했겠지만, 정말로 우울한지 그는 말없이 그 인형을 끌어안았다.

"무쿠를 킹으로 올리는 건? 투표는 일반인은 못 해? 우리가 다 가서 두 사람에 투표하는 거지. 우리가 가서 투표하면 여유 아냐~?"
"학교 축제에 일반인이 난입하는 건 좀 그렇지 않슴까?"
"마스미짱이 나가는 건? 윳키 교복 입혀서."
"싫어."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이 줄줄 쏟아졌다. 머릿수가 몇 개인데 이거 하나 왜 해결이 안 될까. 스메라기는 슬쩍 손으로 눈썹 사이를 문질렀다. 슬슬 두통이 올 거 같았다.

"다들 그만해. 이야기가 제대로 안 흐르잖아. 장난이 아니라고?"
"하지만 감독짱, 딱히 방법이 있는 건 아니잖아? 학교를 빠지긴 싫고, 그렇다고 무대에 오르기도 싫고. 빠져나갈 구멍도 없고. 이걸 뭐라 그러지~?"
"오~ 나 알아! 파죽지세?!"
"사면초가겠죠. 뭐, 근데 뭐릴까.. 유키를 거기 올리려는 건 괴...괴롭히고 싶어서잖아요...? 반대로 유키가 그걸 즐기면?"

즐길 수 있겠냐! 미나기가 내놓은 방법에 루리카와가 빽 소릴 질렀다. 피할 수 없으면 춤추라는 말도 있잖아! 시트론의 쓸모없는 소리에 스메라기는 눈을 질끈 감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겠지. 춤추는 건 또 뭐... 아, 잠깐.

"즐기면 되잖아?"
"...하?"
"그 무대를 네 거로 만들면 되잖아. 유키."
"날 괴롭히려고 만든 무대를 어떻게 내 거로 만들고 즐겨! 바보 아냐? 얼간이?!"
"그러니까 모두가 너에게 반하게 하면 되는 거지. 찍소리도 못하게!"

꽤 괜찮은 생각 아니야? 저도 모르게 흥분해 벌떡 일어서며 스메라기는 외쳤다.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게, 비웃지도 못하게 만들어서 당당하게 그 주인공이 되면 되는 거였다. 아, 이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왜 그걸 몰랐지? 이 답에 도달한 스스로를 칭찬하며 스메라기는 서둘러 루리카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가자."
"어딜?"
"쇼핑하러."

빙빙 다른 답만 던져놓고 시간을 보낸 터라 이제 축제가 얼마 남지 않았다. 결정된 이상 우물쭈물할 시간이 아까웠다. 갑작스러운 쇼핑 제안에 루리카와는 당황한 듯 보였으나 그렇다고 거절하지 않았다. 휴무에 매니저인 이가와를 사적인 용무로 부르는 건 조금 미안해 기프트 카드 교환 조건으로 치가사키의 차를 빌려 타기로 했다. "텐텐 안목 별로니까~"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미요시 카즈나리가 조수석을 차지했다. 목적지도 딱히 정하지 않고 출발한 차, 우선은 백화점으로 향했다. 하지만 초이스가 그리 좋지 못했던 모양인지 주말을 맞이한 백화점은 사람으로 인산인해였다. 거기다 대부분 옷이 너무 평범했다. "무대에 올라서 딱 눈에 들어와야 하는데 이건 너무 윳키에겐 평범하지 않아~?" 제 생각을 읽었는지 미요시가 몇 벌의 옷을 뒤적이다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럼 브랜드 숍을 돌까?"

나 아는 곳 몇 군데 있는데. 구비된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두드리며 치카사키가 말했다. 브랜드 숍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빙빙 도는 건 너무 시간이 아까웠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스메라기는 행거 앞에서 옷걸이를 밀고 또 미는 루리카와의 뒷모습을 보며 고민했다.

"아. 나 연예인이잖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자신이 던진 말에 미요시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을 얼간이라 부를 때의 루리카와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스타일리스트에게 연락해볼게."

이런 건 역시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최고였다. 스메라기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자신의 스타일리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무라 그런지 신호는 그리 오래 울리지 않았다. 금세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쁘고 화려한 원피스를 찾고 있는데. 무대에서 입을 거야. 눈에 확 들어와야 해. 괜찮은 브랜드 알려줘."
-"에에? 지금? 갑작스러운데? 으음... 이번 시즌에 나온 것 중에서 고르자면-"

스타일리스트의 입에서 줄줄 온갖 브랜드명이 쏟아져 나왔다. 스메라기는 서둘러 미요시가 건넨 펜과 노트를 받아 들리는 대로 적었다.

-"키가 어느 정도야? 작아? 아담한 편?"
"응."
-"그럼 약간 기장이 짧은 게 어울릴지도. 다리는 예쁜 편? 많이 화려해야 해? 피부색은 어때?"
"예뻐. 화려하면 좋지만, 너무 화려하면 안 돼. 하얀 편."
-"그럼 마르케샤 노트는 어때? 화려하지만 이번 시즌에 짧은 기장에 꽃 달린 애들 예쁘더라고."
"당장 구할 수 있어?"
-"수입해서 대여하거나 판매하는 곳 찾아봐 줄게. 급해?"

급해. 딱 잘라 말하자 건너편에서 "오케이."라는 시원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리고 전화를 끊기 무섭게 스타일리스트는 브랜드를 취급하는 숍 리스트를 빠르게도 메시지로 보내주었다. 이야, 프로는 다르네! 주르륵 날아온 메시지를 함께 보며 미요시가 외쳤다.

"별로 아무거나 괜찮아."

백화점을 돌고 돌았던 게 미안했는지 루리카와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평소였으면 "이거 가지고 지치다니, 운동 좀 해!" 같은 소리를 했을 텐데, 기가 죽어 있는 거 같아 슬쩍 마음이 쓰였다. 솔직히 지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지만, 스메라기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왕 하는 거 확실하게 해야지. 확실하지 않으면 뒤가 찝찝한 법이거든. 그리고 어영부영 고르면 솔직히 지금까지 내가 퀘스트 깰 시간도 반납하고 이 휴무를 날린 거에 대한 보상도 되지 않아."

가장 먼저 지칠 줄 알았던 치가사키마저 강하게 나오자 마음이 풀렸는지 루리카와가 슬쩍 웃었다. 아무 소득 없이 백화점을 나와 다시 차에 올랐다. 스타일리스트가 보내준 숍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곳의 주소를 찾아 치가사키가 차를 몰았다. 미리 연락을 넣어준 탓인지, 숍에 도착했을 때는 백화점과 달리 손님이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매니저의 인사에 미요시 카즈나리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 친구가 입을 건데요."
"잠깐...!"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드레스들이 부담스러운지 평소와 달리 루리카와가 소극적으로 굴었다. 평소라면 먼저 이것저것 들추고 있었을 녀석이 멈칫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스메라기는 억지로 그의 팔을 잡아 드레스 앞으로 밀어 넣었다. 그럼 어울릴만한 걸 골라보죠! 매니저는 프로답게 외쳤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이런저런 드레스를 살피는 루리카와를 두고 스메라기는 지친 다리를 쉬게 하기 위해 소파에 자리 잡았다.

"오늘 스메라기 텐마군은 다정하네요."

휴대폰을 꺼내며 치가사키가 중얼댔다. 뭐, 저 녀석이 시무룩하면 그건 그것대로 불편하니까. 어물쩍 말을 흘리며 대꾸했다.

"그나저나 괜찮겠어? 여기 비싸 보이는데."
"옷이 비싸봤자지."
"애들 장난... 이라기엔 도를 넘긴 했지만, 너무 진심으로 달려드는 거 아니야?"
"그쪽은 장난이라고 할지 몰라도 당하는 사람이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아. 그리고-"

백화점과 달리 마음에 드는 옷이 많은지 조금 밝은 얼굴로 옷을 살펴보는 얼굴을 바라보며 스메라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웃기지도 않은 장난에 루리카와 유키가 무너지는 건 보고 싶지 않고."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 이런 일이 있었을 거고 또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마다 루리카와 유키는 분명 아파하고 괴로워하겠지. 하지만 그건 그답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루리카와 유키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언제나 당당하며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으니까. 그런 루리카와 유키로만 기억하고 싶었다. 늘 그 모습으로 있길 바랐다. 그가 원하는 그 모습으로. 그러니 이런 웃기지도 않은 작은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는 건 싫었다.

"돌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괜찮아. 손 내밀어서 잡아줄 거니까. 그걸 녀석이 알아줬으면 좋겠어."

열렬한 고백이네, 툭 던진 치가사키의 말에 스메라기는 벌떡 일어섰다. 이상하게 귀가 뜨거웠다. 쿡쿡 웃어대는 어른의 웃음을 무시하고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드레스를 골랐는지 루리카와가 옷걸이 하나를 쥐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건 푸른색의 플로랄풍 원피스였다. 이중으로 된 드레스로 푸른 원단 위로 화려한 자수가 수놓인 망사가 감싸고 있었다. 어때? 그가 물었다. 보는 눈 있네. 스메라기는 그 말로 대신했다.

"그럼 입어 봐! 윳키!"

사이즈가 맞는지 안 맞는지 입어봐야지! 쭈뼛대는 루리카와를 미요시가 탈의실로 밀어 넣었다. 잠깐! 발끈하는 목소리가 울렸지만, 문을 닫아버리니 이내 조용해졌다. 분명 잘 어울릴 거야. 사진 찍어놔야지. 그가 웃으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 사이 스메라기는 쓰윽 매장을 둘러보았다. 어울리지 않으면 다른 걸 골라줄 셈으로 이것저것 뒤적였지만, 옷에 대해 뭘 알아야지 다 괜찮아 보였다. 그렇게 쭈욱 돌다가 선반에 놓인 구두들이 눈에 들어왔다. 옷을 샀으니 구두도 사야겠지. 학생화를 신고 올려보낼 수도 없고. 푸른색이니까 같은 계열의 어두운색이 나으려나? 아니면 튀도록 밝은색? 핑크색은 아니겠지? 흰 색은 어떨까. 이 정도 굽도 신을 수 있을까. 조금만 건드려도 망가질 거 같은 구두들을 이리저리 살피는 사이 달칵, 소리와 함께 탈의실 문이 열렸다. 하지만 다 옷을 입은 건 아닌지 루리카와가 고개만 내밀었다.

"왜?"
"도와줘."
"뭐, 문제 있어? 설마 안 맞아?"
"아니거든!"

가능성 있는 소릴 하기 무섭게 그가 짜증을 냈다. 스메라기는 살펴보고 있던 검은 구두를 들고 탈의실로 들어섰다.

"지퍼가 안 잠겨."

가슴부터 수놓아진 꽃들이 하늘거리며 무릎으로 떨어졌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어디서 향기가 나는 듯했다. 무릎 위를 아슬하게 덮은 원피스 자락이 흔들렸다.

"텐마?"
"어?"
"지퍼 안 잠긴다고."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스메라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차, 서둘러 구두를 내려놓고 다가가 등을 보이는 루리카와 뒤에 가 섰다. 옷이 날개라더니, 평소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루리카와 유키가 입던 옷과는 약간 분위기가 달라서일까. 좀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모습에 스메라기는 얼음을 제 귀에 가져다 대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목까지 쭈욱 지퍼를 올리자 팔랑, 루리카와 유키가 돌아섰다.

"어때?"
"...잘 어울리는데."
"괜찮아?"
"응. 구두도 신어볼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그리 말하면서 거절은 하지 않았다. 예쁜 옷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루리카와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서둘러 발을 구두에 넣었다. 중심을 잡는 그가 넘어지지 않게 스메라기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제 손 위에 포개지는 작은 온기를 잡았다.

"마음에 들어?"
"응. 근데.. 괜찮을까? 이렇게까지 했는데..."

그가 다시 시무룩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괜찮아, 서둘러 손에 힘을 넣으며 스메라기는 돌에 걸릴 뻔한 루리카와를 붙잡았다.

"장담하는데 거기서 네가 제일 귀엽고 예쁠걸. 날 믿어."
"얼간이를 믿으라고?"
"믿어. 내가 어디서 일하는지 잊어버렸어? 여배우들하고 일하거든? 걱정 마. 내가 보증할게."
"...그래도..."
"너 답게 당당하게 하면 돼."

도망치지 마. 자꾸만 넘어지려는 루리카와를 꽉 붙잡으며 스메라기는 부탁했다.

"널 무시하고 비웃고 경멸하는 놈들에게 조금의 틈도 주지 마. 도망치지도 말고 울지도 마. 나가서 네가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보여주고 과시해. 다들 너에게 무릎 꿇게 만들란 말이야."

못된 악의에서 도망치지 마. 널 괴롭히는 놈들에게 져주지 마. 맞서 싸워. 같이 싸워줄게. 네가 얼마나 강한지, 네 뒤에 누가 있는지 알려줘. 온 마음을 다해 루리카와를 응원했다. 그게 제대로 닿았는지 루리카와가 물었다.


"너라면 꿇을 거 같아?"
"어."

스메라기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귀에 달라붙어 있던 열이 머리로 퍼져가고 있었지만, 그 열에서 도망치지 않고 대답했다.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활짝 웃었다. 그의 높은 힐이 돌멩이를 걷어찼다. 루리카와 유키 다운 완벽한 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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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오류 먹어서 한 번 날림;;;;;;;;;;;;;;;;;;;;;;;;;;;;;;; 참나...


텐마가 유키 사준 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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