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좀 줄여!"
괜한 화풀이라는 걸 알면서도 루리카와 유키는 소리를 질렀다. 미안, 미안! 복도의 어느 문 너머에서 미요시 카즈나리의 사과가 울렸다. 분위기를 돋우려 틀어놨을 캐럴 소리가 줄어드는 걸 확인 후, 루리카와는 제 방문을 쾅 닫았다.
12월 25일. 오늘은 크리스마스. 예수의 탄생일.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의 생일이었고, 빨간 날도 아니니 평범하게 하던 대로 지내면 되는 하루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아침부터 식사 대신 손수 만든 크리스마스 케이크로 대신한 후시미 오미 때문에? 아니면 등교하느라 바쁜 절 붙잡고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이상한 삼각 인형을 건넨 이카루가 미스미 때문에? 아니면 학교에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오늘은 여자친구랑~"이라 자랑스레 떠들던 동급생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귀가하기 무섭게 "오늘 텐마랑 데이트 안 해?"라 묻던 셋츠 반리 때문에?
"정확하겐 마지막이군."
아침부터 있었던 짜증 나는 일을 곱씹으며 루리카와는 원인을 찾아냈다. 셋츠 반리가 아니라 스메라기 텐마 때문이었다.
연인들의 이벤트에는 별 관심 없었다. 그래, 없었다. 왜냐면 그때는 자신에게 연인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스메라기 텐마와 사귀고 벌써 4년, 이제 루리카와 유키에게 발렌타인도 화이트데이도 크리스마스도 그냥 지나가는 날이 아니게 되었다. 이벤트에 목메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누가 언제부터 정했는지 모를 그 연인의 날에 조금 연인다운 일을 기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스메라기 텐마의 직업은 빌어먹게도 배우였다. 얼간이 같았지만, 어쨌거나 배우였다. 그 말은 즉, 이런 이벤트의 날에는 언제나 바쁘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처음 사귀고 맞은 크리스마스, 스메라기 텐마는 그날 자신이 모델로 있는 홍차 브랜드의 행사로 종일 롯본기에서 음료를 따라주느라 자신과 보내지 못했다. 그다음 크리스마스,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가요제의 MC가 되는 바람에 당연히 함께 보내지 못했다. 심지어 그 날은 12월 27일이나 되어서야 얼굴 잠깐 보는 게 끝이었다. 그리고 작년, 무조건 일정 조정해서 데이트하자고 했던 그는 화보 촬영으로 스키장에 가느라 머리털 하나 구경하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올해에는 CF 촬영이 잡혔다. 이렇게 벌써 사귀면서 맞이한 4번의 크리스마스가 날아갔다. 이 정도면 홀로 보내는 크리스마스에 익숙해질 만도 한데 어째서인지 늘 화가 났다. 그래서 괜한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화를 내고 말았다.
"...있다가 사과해야지."
조용해진 문에서 떨어지며 슬쩍 중얼댔다. 텅 비어있는 방은 늘 같은 모습인데 오늘따라 넓고 휑하게 느껴졌다. 그런 방구석에 곱게도 포장된 선물을 슬쩍 보았다 애써 눈을 돌렸다. 학습 효과가 없는지 또 사버린 스메라기 텐마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어차피 또 내일이나 내일 모래나 되어서 줄 텐데."
캐럴도 들리지 않고 거리의 전구들도 들어가고 트리도 모두 사라진 세상에서 자신만 붉은 포장지를 내미는 건 몇 번을 해도 쓸쓸하고 외로웠다. 그때마다 미안한 얼굴로 받아드는 스메라기 텐마도 별로였다. 괜히 바쁜 그를 신경 쓰게 만드는 거 같아 미안했고 동시에 그럼에도 남들 다 하는 거처럼 연인에게 선물 하고 싶은 제 욕구가 미웠다.
"아, 네오 양키에게 쇼핑이라도 가자고 할까."
계속 방에 박혀 있어 봤자 우울한 크리스마스가 될 거 같았다. 그럴 바에 뭐라도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셋츠 반리가 안되면, 캐럴을 듣고 있는 미요시 카즈나리라도 끄집어내면 될 거 같았다. 기숙사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누구라도 자신과 보내줄 터였다. 그렇게 결심하고 막 다시 방문을 열려는 순간,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루리카와는 자신도 모르게 달리듯 다가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스메라기 텐마, 기다리던 이름이었다.
"여보세요?"
-"어디야?"
"기숙사!"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도 아닌데 급하게 외쳤다. 아 그래? 저와 달리 스메라기는 평온하게 대답했다.
-"방금 촬영 끝나서 한 40분 후면 거기 도착할 거 같아. 3시간 정도 여유 있는데 데이트할까?"
"응!"
이번엔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도 아니면서 급하게 외쳤다. 수화기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
-"그럼 우리 자주 가는 쇼핑몰 앞에서 만나자. 그리로 갈게."
"알았어!"
짧은 통화가 끊어짐과 동시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크리스마스 데이트라니, 드디어! 방금까지 우울했던 기분을 집어 던지고 루리카와는 뛰듯 옷장으로 달려갔다. 3시간밖에 여유가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첫 크리스마스 데이트, 가장 예쁘고 귀여운 옷을 입고 제일 아끼는 구두를 신고 제일 좋아하는 가방을 들고 싶었다. 고작 3시간뿐이라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카즈나리!!"
"어? 어? 왜?!"
"뭐가 나아?"
첫 크리스마스 때, 기대하며 샀지만 입지 못했던 붉은 니트 원피스와 얼마 전에 스메라기에게 선물 받았던 체크무늬 원피스를 들고 미요시의 방으로 들이닥쳤다. 과제를 하고 있던 건지 PC에 집중하고 있던 그가 놀라 돌아보며 서둘러 두 원피스를 눈에 담아갔다.
"윳키에겐 둘 다 잘 어울릴-"
"데이트용으로!"
"그럼 이쪽!"
그가 붉은 니트 원피스를 픽업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서둘러 감사와 사과를 늘어놓고 방으로 돌아섰다. 너무 튀어서, 그리고 입어야 할 때에 입지 못했던 옷이라 미웠는데 오늘은 달랐다. 자신이 그때보다 자라서 안 맞으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도 없이 루리카와는 서둘러 옷에 자신을 밀어 넣었다. 다행히 길이가 생각보다 짧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구두랑 가방은 뭘 하지..?"
블랙? 아니면 화이트? 가방은? 숄더? 토트? 바닥에 우르르 늘어놓았지만, 뭐가 자신과 그리고 이 옷과 가장 잘 어울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하는 수없이 한 번 더 미요시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우르르 들고 방에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럴 수고도 필요 없이 이번엔 막 2층으로 올라오던 셋츠 반리와 마주쳤다.
"그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어딜 가?"
"데이트! 네오 양키, 여기 구두 뭐가 나아?"
"블랙이지."
"가방은?"
"이거."
척하면 척. 고민도 없이 셋츠가 골라냈다. 머리엔 뭘 하지? 꽃이 나아? 리본이 나아? 발에 구두를 끼워 넣으며 묻자 이번에도 단박에 "리본. 선물이라는 느낌도 나고 좋잖아?"라며 대답을 내놨다.
"역시, 네오 양키야."
"과찬이십니다."
"그럼 나 다녀올게!"
그가 골라준 가운데 진주가 박힌 예쁜 리본 핀까지 꼽고 나니 준비 완료였다. 조금 이르긴 했지만, 미리 가서 스메라기를 기다리는 것도 즐거울 거 같았다. 그에게 주려고 산 크리스마스 선물도 까먹지 않고 가방에 챙겨 넣었다. 올해 고른 것은 분재에 관한 해외 사진집이었다. 그가 좋아할 거 같아서 미리미리 저번 달에 해외 주문까지 넣어 받은 귀한 것이었다.
다급하게 거리로 나오자 아직 다행히도 밖은 크리스마스였다. 여기저기 산타며 루돌프가 장식되어 있고 익숙한 음악들이 흐르고 있었다. 또각또각, 경쾌하게 울리는 구두 소리를 들으며 루리카와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신는 구두라 뒤꿈치 쪽이 조금 아파왔지만, 그 고통도 즐거웠다.
그렇게 도착한 약속장소, 쇼핑몰 앞은 자신과 같이 만남의 장소로 이용한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커다랗게 꾸며진 트리 앞에는 저마다 만난 연인들이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그들처럼 다가가 안기거나 손을 잡거나 그런 행동은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메리 크리스마스!"라 얼굴 보고 말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자꾸 웃음이 나왔다. 미리 어떤 준비도 하지 못해 영화관 티켓도 레스토랑에 좌석도 없을 테지만, 그래도 같이 함께할 생각에 즐거웠다. 얇은 코트와 치마 사이로 들어오는 겨울바람까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래, 그랬는데.
"여보세요?"
대충 잡아놓은 약속시간이 지났는데도 스메라기 텐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곁에서 기다리던 모두가 제 짝을 만나 멀어지는 동안 루리카와 유키는 덩그러니 혼자였다. 차가 막히나? 나오는 게 늦었나? 그런 생각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걸려온 전화는 어쩐지 불안해서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받았다.
-"미안, 유키. 가던 중인데 돌아가 봐야 할 거 같아. 이가와가 뒤에 행사 스케줄이 있던 걸 착각해서 누락했데."
그 불안감이 틀릴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수화기를 넘어 온 소식은 불안감을 그대로 실체화시켰다. 아, 그래? 최대한 떨리지 않은 목소리로 뱉으려고 했는데 잘 떠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벌써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어?"
"아니. 이제.. 나가려고 했었어."
제 옆에 서 있던 여자가 저 멀리 나타난 애인을 발견하고 떠나는 걸 보며 루리카와는 거짓말을 뱉었다.
-"미안, 최대한 일찍 끝나고 들어갈게."
"알았어."
-"화... 난 건 아니지?"
"아니야."
아니야, 화 안 났어. 어쩔 수 없잖아? 한두 번도 아니고, 이제 익숙하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말했지만, 어쩐지 목소리는 딱딱했다. 화났구나? 저를 살피듯 묻는 스메라기의 말에 입술을 한 번 꾹 물었다 놓았다.
"아냐. 난 괜찮으니까, 일이나 잘 해. 얼간이."
계속 그가 물어오면 진짜 화를 낼 거 같아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여전히 거리는 크리스마스, 자신만 또 덜렁 남겨져 버렸다.
"가자.."
차라리 기대감이나 주지 말지. 불쑥 솟아오르는 미움을 겨우 꾹꾹 눌러내며 차게 굳어있던 발을 움직였다. 만나러 와준 이는 없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밝게 구두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애써 다잡으려는 제 마음을 모르는지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후, 루리카와는 천천히 호흡을 뱉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전화를 왜 일방적으로 끊어. 화 안 났다며?"
"..."
-"어쩔수 없잖아.."
"알아."
-"이해 좀 해줘. 화내지 말고, 응?"
최대한 자신의 기분을 풀어보려 좋게좋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화가 났다. 서럽고 눈물이 났다. 길바닥에서 우는 것만큼은 죽어도 하기 싫은데 뚝뚝 바닥으로 눈물이 흩어졌다. 바보같이 엉엉 우는 소리까지 낼 거 같아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를 위해 몇 년 전에 샀던 원피스는 여전히 무용지물이었고, 소란을 떨며 골랐던 가방과 구두도 다 쓸모가 없어졌다. 기대하며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자신도 바보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연말이라 바쁜 거 너도 알잖아."
"알아, 안다니까?!!"
그래서 화를 낼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는 걸 알면서도 결국 화를 냈다. 굳이 이유를 만들자면 이런 자신이 너무 불쌍하고 가여워서 화를 냈다.
-"화났잖아, 지금 너 화 났잖아."
"그래 났어!"
-"일이 많은 시기인 걸 어쩌라고."
빽 외치는 제 목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방금까지 달래던 스메라기의 목소리도 살짝 날이 섰다. 이런 상태에서 계속 전화기를 붙잡고 있어 봤자 서로의 감정만 상할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일이 먼저야? 내가 먼저야? 같은 그런 멋없는 말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아 참았는데, 그것도 끝인 거 같았다.
"알아, 안다고! 너 바쁜 거 안다고."
-"유키."
"그럼 나는? 널 이해하고 생각해주는 동안 내 생각은 해봤어?!"
-"..."
"너랑 사귀고 매년 이런 식이야. 매년! 발렌타인이고 화이트데이고 생일이고 크리스마스고 연말이고 모두다! 그런 거에 연연하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애인이니까 나도 챙기고 싶고 즐기고 싶어! 그래서 서운한 걸 나보고 어쩌라고! 종일 네 연락만 기다리는 날 생각은 해봤어?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싶어 옷이랑 구두 사는 나는 생각해 봤어? 연락 없어도 그래 바쁘니까, 라고 이해하려고 하는 나는? 네 선물사면서 올해는 같이 보낼 수 있을까 멍청한 기대하는 나는? 네 연락에 좋다고 호들갑 떠는 나는? 단원들 붙잡고 데이트 간다고 이거 입을까 저거 입을까 묻고 다니는 나는?? 한껏 꾸미고 나와 이 추위에서 너만 기다리고 있는 나는? 다들 손잡고 팔짱 끼고 걸어 다니는데! 이 길거리에서 혼자 울고 있는 나는?! 나는 생각해봤어?!!!"
-"유키.."
"왜 항상 나만 널 생각해줘야 해? 왜 항상 나만 널 이해해줘야 하느냐고!"
한번 쏟아진 제 안의 화는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이 콸콸 입을 타고 쏟아져 내렸다. 더는 버티고 설 힘도 없어 그대로 무릎을 굽혔다. 사람들의 시선이 제 숙인 머리통에 닿는다는 걸 알면서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이대로 엉엉 울며 집에 가면 온 창피는 자신이 다 당하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거기 있어. 갈게."
"스메라기 텐마랑 사귀는 거 너무 힘들어.."
-"유키-"
"다 예상했고 이제 익숙할 법도 한데 매번 힘들고 외로워."
-"지금 갈게, 그리로 갈 테니까-"
"헤어질래. 나 못하겠어."
언젠가 이별하게 되면 분명 스메라기 텐마쪽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가진 것도 많고 나아갈 곳도 많은 그가 결국 자신을 짐처럼 여겨 떠날 거라 루리카와는 생각했다. 그런데 먼저 이 소리를 뱉게 되다니.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유키, 간절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걸 알면서도 루리카와는 전화를 끊었다. 다시 진동이 오면 멍청하게 그에게 사과하게 될 거 같아서 배터리도 분리했다. 암전된 휴대폰 화면처럼 제 기분도 깜깜했다. 거리는 온통 반짝반짝 아름다운데, 자신만이 엉망이었다.
"...어쩌지.."
얼른 일어서야 하는데 울음도 그쳐야 하는데 기숙사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그 거리에서 웃지 못하는 사람은 루리카와 유키, 자신뿐이었다.
-
유키가 한 이십대 중반이면 스메라기 텐마의 바쁨을 이해하겠지만, 19살이면 못하겠지...
그대로 유키 만나러 가면 또 대판 싸울 거 뻔해서 일하러 가는 스메라기 텐마는 빠르게 끝내고 26일 새벽 2시에 기숙사에 들어와 울며 잠든 유키 보다가 그 옆에서 잘 거 같다...
그리고 아침에 또다시 시작되는 파이트... 2....ㅎㅎ
헤어져야 다시 만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