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카나] 이리와서 내 옆에 앉아줘
2017. 12. 3. 19:41

약간의 치아카나 요소 포함







"아, 젠장! 이 빌어먹을 비! 내릴 거면 확 쏟아붓던가! 머리 세팅한 거 다 망가졌잖아!"



어느 때보다 더 한 짜증을 뱉으며 교실 문을 열어 재낀 세나 이즈미의 아침 인사에 하카제는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대로 그저 그런 비가 온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부슬부슬한 부슬비. 우산을 쓰기엔 비답지 않았고 그렇다고 쓰지 않으면 어느새인가 꿉꿉하게 모든 것이 젖어댔다.

벌써 며칠째 이런 비가 계속되고 있었다. 분명하게 떠 있을 해는 구름에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았고 일기 예보에서는 "내일은 맑을 전망입니다."라 말해대고 있었지만, 틀리기 일쑤였다. 원인도 이유도 모를 비의 행렬에 모두가 "지구의 이상 기후 아냐?" "세상이 이러다 끝나는 거지~"라 농담을 던져댔지만, 하카제는 분명하게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이야기할 수 없고 제보할 수 없으니 입을 다물고 있을 뿐.



"여어! 오늘도 좋은 아침!"



세나에 의해 거칠게 닫혔던 문이 이번에는 우렁차게 열렸다. 아, 짜증 나는 거 왔다. 진심도 아닌 핀잔이 옆자리에서 자동으로 튀어나왔지만, 당사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들어섰다.



"좋은 아침, 세나! 하카제!"
"응, 좋은 아침이네. 모릿치. 요즘 바쁜 거 아니야? 오늘 쉬는 줄 알았는데."



반대편 옆자리를 차지한 모리사와 치아키를 보며 하카제는 물었다. 얼마 전, 학생회장인 텐쇼인 에이치의 소개로 무슨 전대물 드라마 오디션에서 합격했다는 소식이 학교 전체에 알려졌다. 그의 오랜 꿈이였던 것이 또 하나 이루어진 셈이었다. 촉박한 촬영을 앞두고 있어 당분간 출석이 어렵지도 모른다 했다. 그런데도 꿋꿋한 등교라니, 모리사와 치아키 답다고 할까. 하카제는 가만히 교과서를 꺼내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나올 수 있을 때 나오고 싶달까..?"



착실한 그의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의 말대로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겨울이 끝나면 매일 같이 드나들던 교실도 이 책상도 의자도 모두 바이바이였다. 아쉽다거나 쓸쓸하다는 감정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모리사와 치아키와 달리 출석 일수도 채웠겠다, 진로도 결정했겠다 그만 이제 이 교복을 벗어 던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저뿐인지 모두가 졸업을 앞두고 초조해 있었다. 졸업식을 앞두고 비상이 걸린 학생회는 수업에 대부분 들어오지 못했고 겨울이라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한 텐쇼인 에이치마저 청춘의 한 페이지를 완벽하게 끝내겠다는 일념으로 등교를 고수하고 있었다. 낮에는 대부분 관에 처박혀 있던 사쿠마 레이까지 요즘은 책상 앞에 붙어 있으니 말 다 했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인지 여기저기서 달콤한 소리가 던져졌다. 더는 시간이 없다 여긴 소녀들의 고백 러쉬였다. 자신 역시 이번 주만 해도 타교 여학생들을 포함해 14번의 고백을 받은 차였다. 물론 저번주는 더 했다. 앞으로도 더 할 예정이었고. 연애 금지라는 조항이 학교 규율에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암묵적인 룰이라도 있는 건지 아이돌과의 남학생에게 고백해오는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발렌타인 데이 마저도 고백보다는 그저 초콜릿과 쿠키뿐이랄까. 하지만 그대로 자신의 별을 떠나 보내는 건 아쉬운 모양인지 매년 이 졸업 시기가 되면 많은 소녀들이 참고 참았던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용기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성공한 고백은 제로. 좀 더 빨랐다면 대답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이 시기의 아이돌과 3학년들은 대부분 모든 학생이 진로를 결정한 시기라 어쩔 수 없었다.
뭐, 그런때이다 보니 미안해, 마음은 고마워, 앞으로도 응원 부탁할게. 정해진 대답을 뻐꾸기처럼 내뱉었다. 하카제 카오루는 무수한 고백을 받은 만큼 무수한 실연의 장소에 서 있었다. 그리고 예상치도 못하게 저번 주, 다른 이가 실연당하는 순간도 보고 말았다.



"모리사와군, 계속 좋아했어요."



주인공은 모리사와 치아키였다. 상대는 일반과 학생. 고개도 들지 못하고 수줍게 건넨 고백에 모리사와 치아키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고심 끝에 "미안."이라는 대답을 던져놓았다. 뭐 나쁘지 않았다. 고백한 상대도 예상했던 대답인지, 웃으며 끄덕였다. 그리고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나중에 다시 고백해주면, 그때는 생각해 볼게!"



슬픈 얼굴을 한 소녀를 달래기 위해 했을 빈말. 하카제 역시 몇 번이나 뱉었던 말이라 진심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곁에 선 이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고, 그 짧은소리에는 여러 가지 복잡함이 뒤섞여져 있었다. 하카제는 천천히 신카이 카나타를 바라보았다. 그는 방금 "미안."이라는 소릴 들은 소녀보다도 더 실연당한 주인공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굳어버린 얼굴, 바보처럼 벌어진 입술은 다물지도 못했다. 한참을 모리사와 치아키에서 눈을 떼지 못한 그는 뒷걸음질 치듯 두어 걸음 물러서더니 이내 말없이 몸을 돌렸다. 건물 안으로 몸을 숨기는 그를 바라보며 당장이라도 따라가 "카나타군, 저거 아무 의미 없는 소리니까?! 정말로 고백을 받아 주겠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서비스니까~?"라 오해를 풀어줄 수도 있었지만, 하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장소에서 실연당한 사람은 두 사람만이 아니었으니까. 실연당한 사람은 총 세 사람. 하카제 카오루 포함.
그리고 그날 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첫 수업이 뭐더라."

"수학."



현실로 당기는 세나 이즈미의 질문에 하카제는 애써 그날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대답했다. 부스럭, 교과서를 꺼내는 그의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가 툭 발치로 떨어졌다. 질리지도 않고 날아온 러브레터였다.



"좋아해 주는 건 고마운데 남의 책상 서랍까지 침범하는 건 좀 아니다 싶은데."



뜯어질 일 없는 러브레터를 주워들며 세나가 중얼댔다.



"어떻게든 마음을 전하고 싶었나 보지."




뱉는 순간 다시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어떻게든 이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가방 속으로 구겨 들어가는 편지가 자신의 마음도 아닌데 애달팠다. 답지 않은 대답이라 생각했는지 세나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비가 오니 센치해졌어?"
"응, 그런가 보다. 다행인 거 같아. 비가 와서."



이 우중충한 기분도 갈 곳을 잃은 제 마음도 모두 비 탓으로 돌릴 수 있으니까. 들리지 않는 빗소리를 상상하며 하카제는 교과서 대신 자신의 머리를 책상에 올렸다. 그리고 슬쩍 눈을 감았다.



"하카제군! 좋아해요!"



수줍게 물들인 뺨, 간절함을 담아 꼭 쥔 두 손, 둘 곳을 정하지 못해 마구 움직이는 눈동자. 조금은 그게 귀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게 다였다. 그 외에는 어떠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설레거나 두근거림은 언제부터인가 자신 안에 없었다. 미안해? 그렇게 말하면서 사실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백받고 돌아설 때마다 카오루는 자신에게 고백한 여자아이의 얼굴 위에 자신의 얼굴을 겹쳤다. 카나타군, 좋아해. 절대로 입 밖으로 뱉을 수 없는 말을 그녀들의 입술을 빌려 떠들었다. 자신과 달리 신카이 카나타는 다정한 사람이니까 아마 미안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고 해주지 않을까? 그리고 동정으로라도 마음을 받아줄 거 같았다. 그래도 상관없는데. 동정이든 뭐든 좋으니 신카이 카나타의 마음 조각 하나라도 얻을 수 있으면, 상관없을 거 같은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실없게 웃었다. 그때는 그런 상상이라도 하며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신카이 카나타가 모리사와 치아키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버린 이상, 동정도 기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전하고 싶은 마음은 분명 신카이에게 귀찮은 무언가가 될 거 같았다. 실연당한 그의 틈을 파고들 얍삽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동시에 실연당한 자신의 마음을 케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미안, 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절망할 거 같았다. 회복 불능이 될 거 같았다.



"모릿치."



하카제는 슬며시 눈을 뜨며 고개를 들었다. 미처 못한 숙제를 하기 위해 안경을 꺼내던 그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대중적으론 유성대가 인기가 많았지만, 언데드도 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받은 발렌타인 초코를 세어보면 모리사와 치아키는 압승으로 이길 자신이 있었다. 고백도 자신이 아마 몇 배로 더 받아 봤을 거고 연애 역시도 손가락으로 세지도 못할 자신이 우세할 것이었다.



"좋겠다."



 하지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 정작 제일 원하는 마음은 자신이 아닌 모리사와 치아키가 가졌는데.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은 스스로에게 독밖에 되지 않아 품고 싶지 않은데 요즘은 불쑥불쑥 그가 너무 미웠다. 사랑 때문에 친구를 배신하는 그런 멋 없는 우정은 하지 않겠다 어려서부터 다짐했는데 훌쩍 자란 하카제 카오루는 우정보다 사랑을 택하고 싶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아니 모릿치 잘생겼잖아. 키도 크고 춤도 잘 추고 농구도 잘하고 성격도 밝고 노래도 뭐 잘하고."
"...."
"아, 부럽다! 모리사와 치아키!!!"
"하카제, 어디 아픈 거면 양호실에 가는게...?"
"그래, 그래야겠다. 나 아파 죽을 거 같아."



상처가 난 마음에 반창고는 도대체 어디에 붙여야 할까. 어디에 연고를 발라야 낫는 걸까. 뭐 아물게 노력이라도 해야 할 거 같은 데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당황한 모리사와 치아키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있다간 죄 없는 그를 끝없이 미워하고 동시에 자기 혐오까지 일어날 거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이야, 사랑 참 무섭네. 이렇게 무서운데 왜 세상엔 사랑 노래로 넘쳐나는 걸까. 조심하라고 모두 경고해주는 걸까? 아니면 공포를 뱉어내면 덜 무서워서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니면 괴로움을 토해내면 좀 나아져서 그런 걸까?



"사쿠마씨에게 다음 언데드 노래는 사랑 노래로 하자 해야겠어."



아주 애달프고 감미로운 그런 거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을 억지로 이어가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발을 멈췄다. 창 너머 부슬비 사이로 익숙한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다. 이 빗속에 둥둥 떠 있는 푸른 머리, 신카이 카나타였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칸자키가 찾아와 "부장공 상태가 이상하오!"라고 말하긴 했었다. 평소라면 바로 살펴보러 갔었겠지만,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시위를 했다. 신카이 카나타가 아픈 만큼 하카제 카오루도 아프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저건 아니지. 하카제는 달렸다.

등교 시간이라 교실로 향하는 학생들과 반대로 뛰었다. 로비 앞에서 만난 아도니스에게서 우산을 빌렸다. 계속되는 비로 땅이 엉망이었다. 달릴 때마다 흙탕물이 튀어 올랐다. 교복 바지와 신발이 엉망이 되어 갔지만, 상관없었다.



"카나타군."



우산을 펼쳐 내밀었다. 분수대에 기대있던 신카이가 고개를 들었다. 카오루, 오랜만이네요! 그가 밝게도 인사했다. 그가 웃고 있는데 비는 멈추지 않았다. 네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비가 온단다, 그런 동요가 있었던 거 있었던 거 같은데. 머릿속으로 그리운 멜로디를 그리며 좀 더 우산을 숙였다.



"이러다 감기 걸린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뭐가 괜찮아? 그만 울어, 비가 안 그치잖아. 울고 싶은 건 나라고? 너는 이렇게 달래줄 나라도 있지, 나는? 나는 누가 달래주는데? 그런 억울한 마음이 훅 찼다. 울컥해서 입술을 물었다. "어? 카오루 얼굴이 이상해요." 그것도 모르고 신카이 카나타가 속 편하게 떠들어 댔다.



"내가 누구 때문에 그러는데."
"누구 때문에 그러는데요?"
"누구긴 누구야, 신카이 카나타지. 얼른 일어나. 감기 걸리면 나만 혼난다고?"



어깨에 우산을 끼고 팔을 뻗었다. 싫다고 버티는 그를 억지로 잡아 일으켰다. 에에, 그가 아이처럼 투정 부렸다. 여기 있는 게 편해요! 팔에 힘을 주며 그가 외쳤다.



"카나타군, 나라면-"



나라면 널 여기 혼자 두지 않을 거야. 울게 하지도 않을 거고, 행복하게 해줄 거야. 그런 말이 하고 싶어졌다. 울상으로 버티는 그를 보고 있으니 툭 제 마음을 꺼내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카제는 입을 다물었다. 나라면 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었다. 나라면, 이라는 말로 신카이 카나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은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가자."



입 밖까지 튀어나온 말을 다시 갈무리했다. 차리리 "뭔가요?"라 물어주었으면, 그의 호기심에 기대서라도 확 질러버릴 텐데 잔인한 신카이 카나타는 제 마음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은지 묻지 않았다. 억지로 끌려 나오는 신카이 카나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하하, 꿉꿉한 공기로 마른 웃음을 터트리며 하카제는 꾹 그의 팔을 힘 넣어 쥐여보았다. 여전히 그의 마음은 잡히지 않았고 하카제 카오루는 또 실연했다. 비 역시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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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그냥, 지금 하카제 카오루가 가장 바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