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유키] 158번째 싸움
2017. 11. 12. 23:38



"당분간은 혼자서도 괜찮아. 그렇게 짐이 많을 거 같지 않으니까."



약 한 달 전, 그 말이 시작이었다. 루리카와가 그 말을 뱉은 이후로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설마? 진짜? 그런 생각을 하며 스메라기는 부정했지만, 이제는 부정할 수도 없었다. 언제나 짐꾼으로는 자신을 고르던 그가 최근에는 계속 다른 사람을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핑계도 여러 가지. 사기 엘리트, 차 있으니까. 네오 양아치가 더 보는 눈이 있으니까. 무쿠랑 학교 갔다가 오는 길에 들릴 거니까 등등. 처음에는 그 말이 진짜인 줄 알았으나 최근에 드디어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얼마 누리지 못할 귀중한 휴가를 얻은 참에 건넨 데이트 제안에도 고개를 젓는 걸 보고 확실히 알아챘다. 그는 확실하게 지금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나? 무슨 실수를 했나? 욱해서 또 허튼소리를 떠들었나? 스메라기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으나 짐작 가는 게 전혀 없었다. 속 시원하게 답이라도 듣고 싶어 대화라도 하려고 하면 "없어." 혹은 "무슨 소릴 하는 거야?"라며 짜증을 내기 일쑤. 대화 자체도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키!"



도저히 이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이제는 결단을 내야 할 때, 스메라기는 심호흡 후 벌컥 방문을 열었다. 곧 있을 겨울조의 무대 의상에 파묻혀 있는 동그란 머리가 튀어나와 자신을 향했다.



"뭐야?"
"저녁 먹었어? 나가서 먹자."
"하? 갑자기 왜?"
"오미씨도 외출이고 감독도 없고 지배인도 없어."
"그래서? 그냥 대충 차려 먹으면 되잖아?"
"아니, 뭐 나가는 김에 데이트도 하고...?"
"절대 싫어."



그러니까 도대체 왜? 냉담한 거절에 스메라기는 눈만 껌뻑였다. 사귄 지 뭐, 정확하게 세어보진 않았지만 대략 100일이 넘었다. 보통 이 시기는 서로 좋아 죽어야 할 때가 아닌가? 안 보면 보고 싶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물론 처음부터 썩 사이가 좋았던 사이는 아니니까 그런 닭살스러움을 루리카와에게 기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계속되는 거부 반응은 솔직히 상처였다. 귀여운 겉모습과 달리 그가 무뚝뚝하고 약간은 가시 돋친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고 그걸 알고도 좋아진 거였지만, 해도 너무했다.



"왜 이러는 건데?"
"뭐가?"



이렇게 계속 관계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답답한 건 딱 질색이었다. 다시 의상으로 시선을 돌리는 루리카와의 손에서 스메라기는 거칠게 옷감을 빼앗았다. 빌어먹을 천 쪼가리가 아닌 자신의 얼굴을 좀 봤으면 해서 한 행동이었는데 시선을 붙잡는 데만 성공, 루리카와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이 허당 연기자!!"
"하? 네가 처음부터 대화에 집중했으면-"
"나가! 얼른 나가!"



뭐야, 왜 또 이렇게 흐르는 건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루리카와가 마구 몸을 밀어냈다. 작은 손으로 밀어내는 힘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어쩐지 그가 툭 울 거 같아서 버티고 서있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는 일단 후퇴. 스메라기는 하는 수 없이 쫓겨나듯 방에서 나와주었다. 등 뒤로 쾅 닫히는 문소리에 대신해서 다른 방문이 열렸다.



"아, 또 싸움."



가을조의 리더인 셋츠 반리였다.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보지 말고 위로 좀 해주지그래?"
"아니, 뭐 매일 싸우는데 뭐하러?"
"매일은 아니거든?"



사귀기 전에는 매일 이긴 했다.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댔다. 반응하지 않으면 그만인데 루리카와가 툭툭 말을 던질 때마다 참을 수가 없어서 같이 달려들었다. 그러다 언제였더라. 무슨 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일로 크게 싸웠다. 싸움은 안 돼! 라며 언제나 달려들던 이카루가 마저도 다가오지 못할 정도로 크게. 아마 이유는 별거 아녔을 것이었다. 그냥 서로 이 말 저 말 던지고 주고받고 하다 보니 터진 거로 기억하니까. 그러다 뭐라 했더라. "여자도 아닌데 매번 그 꼴로 내 방에 있는 거 진짜 역겹거든."이라 했던가? 어쨌든 그런 최악의 말을 내뱉었다. 이제와 변명하자면 절대로 진심은 아니었다. 그냥 자신의 치졸함이었다. 어떻게 해도 말론 루리카와에게서 이길 수 없을 거 같으니까 비겁하게 그의 상처를 후벼판 것이었다. 루리카와는 마구 움직이던 입을 멈췄고 그 입으로 조용히 숨을 골랐다. 미안하다 바로 사과하려 했지만, 그의 굳어버린 얼굴에 사과조차 할 수 없었다. 이어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최악이야."



자신의 앞에서 우는 게 싫었는지 그가 마구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그리 말했다. 마구 닦아내도 눈물은 멈추질 못하고 그의 손등과 발등을 적셨다. 미안해, 그제야 사과의 말을 겨우 뱉었다. 싫어, 안 받아줘. 사과하지 마. 죽어도 싫어. 겨우 우는 소리를 참아내며 그가 마구 내뱉었다. 정말 미안해, 진심 아니야. 뒤늦게 빌어 보고 달래보려 다가갔지만, 루리카와에겐 소용이 없었다. 자신이 다가오는 것도 싫었는지 그가 마구잡이로 잡히는 걸 던지기 시작했다. 책, 노트, 필통.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의 소잉 박스가 떨어졌을 때는 스메라기도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싫어!!"



박스에서 튀어나온 바늘과 깨진 무언가로 바닥이 엉망이었다. 흥분한 루리카와가 그걸 밟을까 억지로 안아 들었다. 작은 주먹이 마구 자신을 때려댔다. 평소라면 이게 얼마짜리 얼굴인데, 같은 농담이라도 했을 텐데 그럴 여유도 없었다.



"미안해, 진심 아니야. 진짜야."
"너, 진짜 싫어. 진짜 싫다고!"
"알아."



알아, 알고 있어. 루리카와 유키가 스메라기 텐마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스스로 돌아봐도 이렇게 무신경한 남자를 좋아해 줄 리가 없었으니까. 싫다는 그 감정만큼 작은 주먹은 꽤 매서웠으나 스메라기는 우선은 버텼다. 발로 상처가 날 만한 것들을 툭툭 차내며 점점 가라앉는 루리카와를 안고 버텼다. 겉모습은 이래도 어쨌거나 중학교 3학년 남자를 안고 있는데도 힘들다거나 저리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 진정되었는지 몸부림도 발버둥도 모두 잠잠해졌다. 그저 훌쩍이는 목소리만이 방을 울릴 뿐이었다.



"욱하는 성격 좀 버려..."



한참을 들썩이던 루리카와가 여전히 화가 난 그리고 눈물 젖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미안, 진짜 진심 아니었어."
"그럼? 진심은 뭔데?"



그건 생각하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스메라기는 작은 등을 토닥이며 대답을 골랐다. 무시하면 말을 섞지 않으면 작고 큰 싸움은 일어날 리가 없는데 왜 자신은 항상 휘두르는 그의 발톱에 맞서는 걸까. 싫다 싫다 하면서도 그와 함께 생활하고 짐꾼이 될 걸 뻔히 알면서도 그와 쇼핑을 나가고 무시당할 걸 알면서도 툭 그냥 문자를 보내고 잠이 들기 전, 다른 침대에서 들리는 고른 숨소리를 확인하는 건 도대체 왜일까.



"좋아해."



머릿속으로 대답을 정리하기도 전에 멍청한 입이 먼저 움직였다. 툭 튀어나간 무드 없는 고백에 제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루리카와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뭐?!" 경악에 물든 그의 얼굴을 보니 이상하게 화끈댔다. 뱉어낸 말은 주워 담을 수도 없었고 흘러간 시간 역시 돌릴 수 없었다.



"좋아해, 좋아한다고."



그래서 그냥 무작정 고백했다. 루리카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거로 대답을 대신했다고 스메라기는 생각했다. 그 후, 몇 번 의미 없는 외출을 했다. 딱히 쇼핑하거나 장을 보지 않는 외출이었다. 나중에서야 그게 데이트임을 알았다. 그렇게 사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는 나름대로 평화가 찾아왔다. 사귀는 건 둘째치고 스스로 벌인 큰 실수가 있으니 되도록 루리카와의 기분에 맞춰주고 행동하려 애썼고 루리카와 역시 전보다는 성격이 동글해졌다고 해야 하나, 유해졌다고 해야 하나 뭐 그랬다. 전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도 서슴없이 해댔다. 대뜸 팔짱을 끼거나, 가만히 등에 기대온다거나 그런 것들. 그렇게 툭 던지는 애교에 녹아 싸우거나 다툴 틈이 없었다.

그랬는데



"이유를 모르겠어. 왜 화가 난 건지 조금도. 무언가 잘못했으면 알려 줬으면 좋겠어.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고 싶단 말이야. 그런데 알려주지도 않아. 그냥 날 피하고 무시만 하잖아."
"흐음, 무슨 사정이 있겠지."



치가사키에게 부탁받았는지 휴대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셋츠가 대충 대꾸했다. 그의 방으로 피신하긴 했으나 오늘 안으로 돌아갈 수는 있을까. 하아, 괜한 한숨만 뱉어내며 남의 침대를 차지하고 누웠다. "아아, 내 침대는 안돼!" 여전히 휴대폰 액정에서 시선을 고정한 채 셋츠가 외쳤다.



"옷이라도 사 줘보지 그래?"



그리곤 나름의 해결책을 내놨다.



"해봤어."



스메라기는 요 한 달 동안 그에게 사다 준 쇼핑백들을 떠올렸다. 그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셔츠, 원피스, 가방부터 시작해 스타일리스트에게 부탁해서 구하기 힘든 한정판 구두까지. 거절은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걸 받아준 것도 아니었다. 물건은 쇼핑백 그대로 그의 옷장 근처에 놓여 있었다. 왜 안 입어? 슬쩍 떠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나중에."가 전부였다.



"나중에 싹 다 돌려주고 헤어지자고 할 생각인가?"



대뜸 최악의 경우부터 떠올렸다. 아 뭐 그럴 수도 있겠다. 무신경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 그건 안돼. 절대로 싫어."



루리카와야 어떨지 몰라도 자신은 지금 좋아 죽는 시기였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을 때였다. 그런데 헤어진다니, 상상도 하기 싫었다. 반리, 어떻게든 해봐. 쿡쿡 게임에 집중한 그의 등을 찔렀다. 아, 몰라 몰라. 그가 귀찮다는 듯 어깨를 틀었다. 그와 동시에 복도 너머에 소란스러움이 울렸다. 틀림없는 미요시 카즈나리의 귀가였다.



"다른 상담사 귀가하셨네."
"고마워, 반리."



해방감에 씩 웃는 그를 두고 서둘러 방을 나왔다. 막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려던 미요시가 놀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왜 거기서 나와? 텐텐? 아 혹시 또 윳-"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극단 전체에 소문이라도 낼 셈인지 떠들어 대는 미요시의 입을 틀어막고 서둘러 방으로 끌고 들어섰다. 잠깐, 잠깐! 그가 웃으며 급히 떨어져 나갔다.



"뭐 아는 거 없어?"
"뭘? 왜 심문 모드야? 나는 당연히 모르지!"
"뭘 모르는데?"
"윳키가 화난 이유?"
"알고 있잖아!"



줄줄 뱉어내는 주제에 잡아떼다니. 스메라기는 저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확실하게는 몰라. 그냥 짐작만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 짐작이 뭔데."



짐작이든 억측이든 우선은 감도 못 잡는 자신에게 있어서는 지푸라기에 가까웠다. 그걸 잡아보겠다고 버티고 있자 미요시는 몇 번을 머뭇대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왜, 텐텐 파파라치 말이야. 가끔 우리도 찍히잖아? 같이 외출하다가."
"그런데?"
"뭐, 어쨌든 극단에 있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없고 나는 초~기쁘지만! 유키는 힘든 거 같아서."
"그게 무슨 소리야?"
"...넷상에 반응 같은 거 말이야."



반응? 무슨 소리인지 몰라 미간만 구기고 있자 그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손가락만 몇 번 움직이더니 이내 이쪽으로 액정을 돌려주었다. 그곳에는 언젠가 자신과 유키가 의상을 위한 물건을 잔뜩 사 들고 돌아가는 길의 사진이 있었다. 짐 대부분을 든 것은 자신이었고 유키는 그 옆에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확히 언제인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그가 입고 있는 귀여운 도트 무늬의 스커트는 기억에 남아 있었다. 잘 어울린다고 칭찬했던 것도.



"윳키말고 댓글을 보라고."



멍하니 사진을 들여보고 있던 자신을 대신해 미요시가 친절하게도 화면을 내려주었다. 수많은 댓글이 사진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글들은 [텐마군의 동료였던가?] [지난 공연 때 봤는데 귀여웠어.] [둘이 자주 붙어 다니네.] [텐마군에게 좋은 동료들이 생겨 기뻐.] 같은 댓글들. 그다음에 눈에 들어온 것들은 다른 종류였다.


[여자? 남자?] [만카이 극단 모두 남자니까 쟤도 남자지?] [옷이 왜 저래?] [기분 나빠] [어울리긴 하는데 웃기다. 여장변태?] [텐마군 곁에서 떨어졌으면] [징그러워] [쟤 부모는 알아?] [저런 건 경찰에 신고 안 되나? 보기 싫은데] [길에서 마주치면 눈앞에서 토해줄 거야.]



"그만하면 이유가 설명되지?"



연예계에 몸을 담고 있으면 악플은 싫어도 안고 가야 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자신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듯이 세상 모두도 스메라기 텐마를 사랑해주지 않으니까. 이유 없는 비난은 이미 몇 년에 걸쳐 받아왔던 것들이었고 그건 더는 스메라기 텐마에게 어떠한 흠집도 상처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루리카와 유키는 달랐다. 그는 이런 세계에서 살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하루아침에 자신 때문에 끌려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학교에서 혹은 거리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시선을 던지고 말을 던진 적은 있을지 몰라도 이렇게 끊임없이 얼굴도 모르는 많은 이들이 온갖 비난과 욕설을 던지는 건 처음일 터였다. 이걸 예상도 못 하고 생각도 못 한 스스로가 한심해서 기가 찼다.



"같이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이 사진을 봤거든. 댓글도... 내가 읽지 말라고 했는데 윳키가 막무가내라."
"...왜 말 안 했어? 미리 말했어야지?!"

"이 문제를 다시 꺼내는 게 윳키에게 좋을지 몰라서 그랬어! 텐텐이 알면 이 문제를 또 윳키가 떠올려야 하잖아. 해결 방안도 딱히 없는 문제인데!"



미요시 카즈나리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니었지만 그래도 화가 났다. 그럼 한 달 동안 루리카와는 홀로 이 문제를 떠올리고 앓고 아팠다는 건데, 원인에 가까운 자신은 조금도 모르고 그저 그의 화만 풀겠다고 선물이나 갖다 바치고 데이트나 하자 떠들었으니. 최악이었다.



"고마워."
"그냥 모르는 척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텐텐..?"
"내가 알아서 할게."



모르는 척, 하면 편하기야 하지.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지금까지 자신이 모르고 지냈던 것과 모르는 척 지내는 것은 같았다. 루리카와 유키는 계속해서 자신을 피할 테고 결국은 이 관계는 끝이 나고 말 것이었다. 스메라기는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알아서 한다니, 뭘! 미요시가 말리려는 듯 붙잡아 왔지만, 원인을 안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몸 안에서 터져 나오는 화를 억지로 억누르며 스메라기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문이 잠겨 있지는 않았다.



"유키."



잔뜩 펼쳐놓은 의상들은 그대로, 싸운 후 새로 사주었던 소잉 박스도 그대로. 하지만 그 안에 있었던 주인공은 없었다. 스메라기는 천천히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둥그렇게 솟은 이불 곁에 앉았다.



"유키."
"왜."



이불 안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웅웅댔다.



"카즈나리에게 이야기 들었어."
"...."
"말 좀 해봐."
"..."
"좋아해."
"..."
"그러니까 제발 헤어지자고만 하지 말아줘."
"..."
"그런 생각한 거 아니지?"



사라진 대답에 불안해 물었다. 막상 물었더니 이번에는 "했어."라고 대답할까 불안했다. 하지만 루리카와는 대답 대신 이불을 들치고 일어섰다. 울었는지 얼굴이 엉망이었다.



"모르겠어."
"..."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며 살고 싶어. 나는."
"하면 되잖아."
"사람들이 싫어하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네가 하고 싶은 건데 남이 뭐가 중요해?!"
"네가 같이 욕먹으니까!!"



빼액, 루리카와가 소릴 내질렀다. 젖어있던 눈에서 결국 또 눈물이 흘렀다.



"나 때문에 너까지 욕먹으니까 신경 쓰여! 너랑 있으면 그게 계속 신경 쓰인다고! 너에게 그런 피해를 주면서까지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게 억지처럼 느껴져. 너에게 좋은 영향 아니니까 자꾸 나 자신이 싫어져! 그러다 보면 이런 고민까지 하면서 스메라기 텐마를 만나야 하는지 생각해! 하지만... 하지만... 나는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면 살고 싶단 말이야... 텐마도 거기에 있는데...!"
"..."
"헤어지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텐마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도 않아.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
"아무것도 하지 마."



안 해도 돼. 루리카와 유키가 변하길 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지금의 루리카와 유키가 싫었다면, 처음부터 좋아지지도 않았을 테니까. 남자아이이면서도 귀여운 걸 좋아하는 그가 솔직히 처음에는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러다 제 일이 아니니 무시하고 넘겼다. 그러다 잠도 자지 않고 의상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대단하다 생각했다. 아침마다 옷장 앞에서 고민하는 그를 보며 귀엽다고 생각했다. 같이 거리를 걷다 누군가 휘파람이라도 불면 주저 없이 가운뎃손가락을 뻗는 걸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걸 할 거야, 그의 마인드를 존경했다. 그러니 루리카와 유키는 변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힘들면 지금처럼 지내도 괜찮아. 밖에서 데이트 못 해도 뭐 집에서 이것저것 하면 되니까. 오붓하게 둘이 먹는 식사는 무리일지 몰라도 몰래 먹는 야식 정도는 가능하겠지. 인터넷으로 쇼핑하자. 영화는 DVD 빌려서 보면 돼. 가끔 드라이브하고 싶으면 다 같이 나가지 뭐. 뭘 하든 전처럼 무감각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네가 안전할 수 있는 곳에서 내가 노력할게. 그러니까 피하거나 입을 다물거나 나만 따돌리지만 말아줘."
"..."
"우리 사귀는 사이잖아. 너만 아프고 나만 모르는 건 너무 괴로워."
"..."
"진짜 괴로우니까. 응?"



한 달 동안 죽는 줄 알았다고. 최대한 불쌍한 척, 앓는 얼굴을 하자 그제야 조금 화가 풀렸는지 루리카와가 눈물을 닦아내며 웃었다. 그리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이마가 가볍게 어깨에 닿았다.



"갑자기 한 달 동안 끙끙 앓던 내가 바보인 거 같이 느껴지네.. 말하니까 이렇게 편한데."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말해줘."



참 잘했어요, 그 말을 떠올리며 루리카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당장은 무서워서 그렇게 지내주면 고마울 거 같아."
"응."
"그래도 텐마랑 같이 있으려면 내가 감당해야 하는 문제니까, 무시하고 이겨내 보도록 노력할게."
"..."
"고맙지?"



웃음을 터트리며 그가 슬쩍 고개를 틀어 물었다. 볼 가까이에 닿는 입술에 스메라기는 주저 없이 그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응."



미요시나 루리카와의 말대로 아마 이 문제는 스메라기 텐마로 살아가는 이상 피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루리카와 유키는 강하니까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해내는 것처럼 좋아하는 자신 역시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스메라기는 믿고 싶었다. 그리고 그 간절함을 담아 가만히 눈을 감는 루리카와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오랜만에 닿아보는 그의 입술에서는 무드 없게도 짠맛이 났다. 



"밥 먹자."
"응."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그가 제대로 대답해주었다. 그 작은 대답이 소중해서 그리고 좋아서 스메라기는 슬며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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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46번째 싸움도 있었을 거고 345번째 싸움도 오겠지ㅎㅎ

숫자는 별 의미가 없다..



아 퐁코츠는 도대체 무어라 표현해야 딱! 이거다 싶은지 모르겠다.

얼간이..? 허당...? 사전적 의미로 나오는 폐품이나 고물은 너무 하자나..


퇴고는 나중에. 오늘 2개나 연성해서 자야게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