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아카나] Maze
2017. 9. 30. 23:52



Maze


공무원(?) 치아키 x 능력자(?) 카나타 AU









"핫? 아이스?"
"아, 아이스로 부탁드립니다."



모리사와 치아키에겐 살아가는 데 몇 가지 룰이 있었다. 대단한 건 아니고 그저 습관처럼 지키고 있는 것들로 그중 하나가 바로 '겨울에도 차가운 음료 마사기'였다. 이유는 간단, 뜨거운 건 빨리 마실 수 없으니까. 차가운 음료를 마시기엔 꽤 날씨가 쌀쌀해졌지만, 오늘도 역시나 그 룰을 지키며 모리사와는 입고 있던 점퍼의 지퍼를 슬쩍 목까지 채웠다. 등판에 멋지게 신동경(新東京) 치안국의 상징인 매가 수 놓인 점퍼였다. 가슴팍에는 <치안국 현장과 모리사와 치아키>라는 명찰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자, 아이스 커피."



출근길, 우연히 마주친 같은 현장과 직원 선배인 코이와 타카오가 그의 몫의 커피를 사며 고맙게도 한 턱 내주었다. 센스있게 설탕과 크림까지 건네는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모리사와는 얼음이 가득 든 아이스 컵을 받아들었다.



"그나저나 오늘 늦게 출근하네? 교대?"
"네 12시부터 근무입니다. 선배는?"
"난 새벽부터. 졸음 쫓으며 버텼더니 온몸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



눈 좀 붙였으면 좋겠는데, 뭐 어디서 사건 사고가 터질 줄 알아야 말이지. 그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농담 같이 던진 그의 말이 너무도 현실적이라 모리사와는 가만히 잔을 쥘 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약 43건. 치안국으로 연결되는 사건의 평균 숫자였다. 물론 커다란 것만 체크한 것으로 자잘한 건까지 포함하면 하루에 일어나는 사건의 수는 그 수치를 훨씬 웃돌았다. 가볍게는 강도와 살인, 크게는 테러까지. 현재,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은 평화와 거리가 멀고 또 멀었다.

수많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틈에서 터진 화학 무기들은 땅을 시들게 하고 삶을 앗아갔다. 현재의 신동경은 옛 이 국가의 먼 수도의 크기와 비슷해 붙여진 새로운 국명이었다. 그 외의 땅에서 사람은 살아갈 수 없었다. 가난하고 없는 자들이 억지로 숨을 붙여가며 버티고 있었지만, 더는 꽃 하나 제대로 피지 않는 황량한 아스팔트 땅과 살을 태우는 비, 그리고 가끔 불어닥치는 먼지의 바람 속에서는 버티는 것조차도 자유롭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이들은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공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고 그들이 일으키는 온갖 사건 사고로 현재의 신동경은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그걸 바로잡고 평화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설립된 것이 바로 이 치안국, 정부 시설이었다.



"모리사와, 치안국 들어온 지 얼마나 지났지?"
"저 말입니까? 2년 정도 된 거 같습니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신동경의 모든 아이가 그렇듯 기관지가 좋지 않았지만, 앓거나 아픈 법 없이 건강하게 뛰놀며 자랐다. 커서는 농구 선수가 되고 싶었다. 9시만 되어도 빠른 귀가를 유도하는 벨이 울리는 세상에 사람들에게 오락거리라곤 저녁에 방송되는 온갖 스포츠뿐이었다. 농구팬인 아버지를 따라 쭈욱 농구 경기를 지켜보았기 때문일까, 모리사와는 자연스럽게 농구 선수가 되고 싶다 생각했다. 멋진 플레이로 사람들의 밤을 따뜻하게 비추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을 마치 비웃기라도 한 듯



"무슨 계기로 들어왔다고 했더라, 너?"
"사고가 있었어요."



불길이 치솟았다. 제 앞길을 커다란 불이 덮쳤다. 누군가가 설치한 폭탄이 거리에서 터졌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치안국이며 경찰이고 소방대까지 들이닥쳐 무언가 이루어 줄 거처럼 일사불란 움직였지만, 커다란 불은 그 누구도 잡지 못했다. 모리사와는 울지도 못하고 자신의 소중한 것들이 까맣게 재가 되어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분노도 슬픔도 느끼지 못할 때, 그들이 왔습니다. 특수과."



신동경 치안국 특수과. 정확하게 그런 유니폼을 입은 것도 아니고 명찰을 달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모리사와는 여유롭게 불길로 들어서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어렵지 않게 그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가끔 뉴스에서 들려오던 이름. 에도가와구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을 체포했다거나, 신주쿠 역에서 일어난 테러를 해결했다거나 그런 뉴스에서 늘 들려오는 이름이었다. 인간이지만 인간보다 더 우수한 인간. 자연에 녹아 살아가기 위해 생명체가 진화하듯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태어난 진화된 인간. 사람들은 그들을 먼 신화 속 신의 이름을 따와 「타카미무스비」 혹은 신 자체로 「카미」로 칭했다. 그들은 대부분 정부에 소속되어, 정확하게는 신동경 치안국에 특수과에 소속되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해결하곤 했다.



"아무리 잡히지 않을 거 같던 불길이 순식간에 사그라졌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오듯 물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는데, 그 풍경이 경이로울 정도였습니다. 모든 걸 잃었는데도 말이죠."
"아아, 카미니까 말이야. 괴물에 가깝잖아."



그들의 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괴물이라 간단히도 칭했지만, 모리사와에겐 달랐다. 그날, 꺼져가는 불씨 속에서 쏟아지는 비로 불이 발버둥 칠 틈도 주지 않고 잡아먹은 이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였다. "옷이 다 젖어버렸네요." 마치 내일의 일기 예보를 알려주듯 소년은 저를 보며 그리 말했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 꺼내주었다. 위로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지만, 모리사와는 여전히 그 사탕을 붙잡고 있었다.



"커다란 불길에도 동요하지 않는 그 소년이 저에게는 영웅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원했습니다."

"아, 그런데 왜 특수과로 안 가고 현장과로 지원한 거야? 특수과로 갔으면 그때 그 카미를 만났을 수도 있잖아. 현장과라고 해도 카미를 만날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고~? 큰 게 터지지 않는 이상."



물론 코이와의 참견대로 처음 치안국에 지원하면서 지망한 부서는 특수과였다. 그런 영웅들과 함께 일할 생각에 두근두근하며 열심히 시험도 치렀다. 농구 선수라는 선택지는 모리사와 안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로지 꿈은, 목표는 '특수과'였다.



"아! 맞다. 모리사와 너 체력 시험이고 실전 테스트고 다 최상위권이었으면서... 상식 시험에서 바닥이었다고 했지?"
"아픈 곳을 아무렇지 않게 찌르는 건 그만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래, 그랬다. 사실 치안국 시험도 2번이나 낙방하고 겨우겨우 3번째에 턱걸이로 아슬아슬하게 들어온 참이었다. 빌어먹을 일반 상식 시험 과목이 뭐 그렇게 많던지. 겨우 뚫고 들어왔더니 특수과 지원 컷트라인에는 또 한참 모자라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버티다 보면 인사이동이라는 기회도 있고, 현장직 역시 자신이 꿈꾸던 것과는 조금 달라도 나름대로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는 정의를 품을 수 있는 곳인 데다 우연히라도 그때의 그 카미를 마주치지 않을까 싶어 수긍했지만, 헛다리를 짚은 탓인지 2년 동안 카미의 머리털 하나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큰 사건이 터져도 제 담당이 아니거나, 혹은 담당이라도 이미 도착 시에는 종결되어 있다던가, 뭐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힘내라고! 뭐 언젠가는 기회가 있지 않겠어? 진급 시험도 있고. 너무 우울해하지 말고 평소에 책도 좀 읽고, 아 잠깐."



달갑지 않은 잔소리가 터져 나오는 순간, 좋은 타이밍으로 그가 타고 온 순찰차에서 비상 연락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커피잔을 자신에게 맡기며 코이와가 서둘러 통신기의 버튼을 눌렀다. 순찰차의 유리 가득 커다란 지도와 함께 현장 영상과 사진이 우르르 펼쳐졌다.



"타마타 쇼핑센터, 테러라."



타마타역 근처에 위치한 커다란 쇼핑 센터의 한쪽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우르르 대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끊임없이 영상 속에서 흘러나왔다.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인원의 소집을 알리는 레드라잇 표시가 화면에서 깜빡였다. 그야말로 비상사태였다.



"타, 모리사와. 출근 시간 좀 당겨야겠다."
"네."



몇 모금 마시지도 못한 아이스 커피는 거리의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서둘러 조수석에 올라타 벨트를 채우며 모리사와는 코이와의 운전을 돕기 위해 차창에 뜬 자료를 제 쪽으로 당겨 옮겼다.



"인명피해는 현재 집계 불가능, 주변 병원에 모두 대기 명령은 떨어졌다고 합니다. 오전 9시, 쇼핑몰 오픈 시간에 맞춰 폭탄을 설치했다는 통화가 걸려왔으나 몇 번이나 이런 전화가 걸려오고 헛탕 친 사례가 있어서 쇼핑몰 측에서 이번에는 그냥 넘겼다고 한 모양입니다."
"약간 양치기 소년 이야기 같은데?"



그거랑은 상황이 조금 반대 아닌가요? 그렇게 태클을 걸려다 분위기 못 읽는 소리 하지 말라 한 마디 날아올 거 같아 모리사와는 입을 다물었다. 비상 알림음을 켠 차는 고맙게도 비켜주는 차를 통과해 빠르게 달렸다. 치안국에 근무한 지 이제 8년이나 된 코이와의 운전 솜씨는 매끄럽다 못해 완벽한 수준이었다. 그 움직임에 방해되지 않도록 의자에 딱 몸을 붙이고 손잡이를 쥔 모리사와는 저 멀리 연기가 피어오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잿빛 하늘임에도 어둑한 연기는 숨지 않고 제 존재감을 들어내고 있었다.



"도착."



차가 멈추기 무섭게 모리사와는 튀어나오듯 차에서 내렸다. 저와 같은 복장을 한 이들이 서둘러 시민들의 대피를 돕고 있었다.



"난 들어가 볼 테니까, 5급 모리사와 치아키군께서는 사람부터 대피시켜."
"네."



말단이나 다름없는 자신이 끼어들어 봤자 도움 될 리가 없었다. 달려 나오는 사람들과 반대로 뛰는 코이와를 보낸 후, 모리사와는 서둘러 목소리를 키웠다. 터진 규모로 보아 건물이 무너질 확률은 적어 보였지만, 만일 붕괴될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최대한 멀리 물러나세요! 치안국 라인 밖으로 물러 나야 합니다! 건물이 붕괴할 위험이 있어요!"
"치안국 직원인가요?!"



한참을 사람들을 대피시키던 중,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붙잡았다. 놀라 돌아보니 하얗게 질린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무슨 일이시죠? 부인?"
"제 딸이요, 제 딸이 아직 안에 있어요."
"네?"
"제 딸이요! 아직 저 안에 있어요!"



아수라장에 가까운 현장에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정확하게 닿았다. 눈물을 쏟아내며 외치는 그녀의 말에 모시라와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제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아이를 장난감 코너에 두고 나왔어요. 거기 있으라고 했거든요. 아무리 찾아도 딸이 보이지 않아요, 아직 6살이에요. 아마 저 안에 있을 거예요.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우선 상부에 보고 해보겠습니다. 그러니 부인, 진정하시고-"
"착한 아이라 아마 계속 거기 있을 거예요!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치안국에 들어오면 가장 많이 듣는 소리, 동정이나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움직이지 말 것. 귀에 딱지가 앉도록 과장님과 팀장 그리고 선배들에게 듣는 소리였다. 하지만 모리사와는 언제나 그 감정들에 마구잡이로 휘둘리는 편이었다. "알겠습니다."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 말했다.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는 그녀를 겨우 떼어놓고 모리사와는 천천히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치안국부터 경찰, 구급차, 소방대까지 모여있는 걸 보니 딱 자신의 '그 날'이 떠올랐다.



"팀장님!"



하지만 과거에 파묻혀 울고 있을 시간은 자신에게 없었다. 모리사와는 서둘러 익숙한 얼굴을 향해 다가갔다. 자신이 속한 현장과 4팀 팀장인 사카이 유우였다.



"뭐야, 모리사와. 왜 여기 와있어? 대피는?"
"바로 복귀 예정입니다. 어떤 부인이 딸이 아직 안에서 나오지 못했다고 해서요."
"뭐?"
"딸하고 만나기로 했는데, 혼자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6살-"
"그래서, 뭐."



그걸 보고해서 어쩌자는 건데. 사카이의 짜증에 모리사와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곧 특수과 도착할 거고, 애들 투입될 거야. 그럼 상황 끝나니까 그때 찾아보라고 해."



역시 그렇겠지. 이 난리통에서 아이 하나를 위해 인력이 바로 투입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카이의 말대로 특수과가 도착하고 폭탄 전담팀이 투입되면 정리될 일이지만 뭔가, 뭔가 개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듯 가까이에서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뭐야?!?!"



사람들의 비명을 다 삼킬 정도의 굉음, 머리 위에서 후두둑 잔해들이 쏟아져 내렸다. 모리사와는 서둘러 몸을 웅크렸다. 피해, 엎드려! 여기저기 외치는 소리에 정신이 곧 어디론가 빠져나갈 거 같았다.



"두 번째 폭탄입니다! 6층입니다!"



그 틈에서 누군가 외쳤다. 모리사와는 차를 타고 오던 중 보았던 현장 파일들을 떠올렸다. 쇼핑몰 도면. 처음 터진 폭탄은 4층, 신사복이 몰린 층이었다. 그리고 지금 터진 6층은 유아, 아동복 그리고 장난감 코너.



"잠깐 더 있는 거야? 이렇게 충격을 받으면 곧 붕괴.. 어이!! 모리사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역시 이 치안국에 들어오면서 딱지가 앉도록 들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발이 움직였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건물의 잔해들과 폭팔로 인해 튕겨 나온 온갖 물건들을 피해 달리며 모리사와는 이를 악물었다. 저 미친놈! 등으로 달라 붙는 팀장의 말에는 웃음이 나왔다. 저 소리도 몇 번 들었지. 후지 터널 붕괴 때랑 또 하나미츠 은행 강도 사건 때도 그랬고 또, 또 무척 많았다. 네 사사로운 그 정의에 휘둘려 목숨 잃을 짓은 하지 말라고 혼나고 나면 꼭 저 말이 들러붙었다. 미친놈, 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혼나고 나서도 언제나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번처럼.



"6층까지 어떻게 올라간담."



대부분의 사람은 빠져나왔는지 쇼핑몰의 내부는 조용했다. 전기가 나갔는지 어둑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며 모리사와는 우선 계단을 밟았다. 4층이 폭발로 6층까지 가는 길이 끊기질 않기를 바라며. 다행히 폭발의 여파로 불길이 치솟아 연기가 자욱했지만, 5층까지 돌라가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6층이었다.



"....무너졌군."



계단이 끊겨있었다. 점프한다고 해서 닿을 거 같지도 않았다. 모리사와는 뚝 잘려나간 계단의 아래를 내려보았다. 4층의 불길이 번져 계단까지 덮쳐 오르고 있었다. 자칫 잘못 점프해서 착지하지 못하면 다치는 건 둘째치고 불 위로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엘리베이터.."



를 이용하자니 전기가 끊겼고,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자니 건물의 중앙에 있어 위험도가 컸다. 이를 어쩐담. 모리사와는 연기를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궁리했다. 시간은 없고 불길은 빠르고. 하지만 이미 좋다고 뛰어 들어왔는데 털레털레 돌아갈 수도 없었다. 어차피 쓸 시말서라면 좀 더 이유가 있는 편이 좋았다.



"후우."



언제까지고 여기서 버틸 수는 없었다. 아이를 찾기도 전에 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지도 않았다. 괜찮아, 할 수 있어. 멀리뛰기 점수 좋았잖아. 스스로를 달래며 모리사와는 천천히 양팔을 앞뒤로 흔들었다. 그리고 하나, 둘-



"던져 드릴까요?"



신호를 세던 자신의 귓가로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우앗, 놀라 급히 움직인 덕에 몸이 기우뚱 아래로 기울었다. 공중에서 팔이 마구 허우적댔다.



"위험해요!"



그런 제 팔을 작은 손이 튀어나와 단단하게 붙잡았다. 가까스로 불 아래로 떨어지는 걸 면한 모리사와는 자신을 붙잡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특...수과?"
"네! 만나서 반가워요. 특수과 소속 시노 하지메라고 합니다."



작은 소년이 훅 팔을 잡아 당겨주며 상큼하게도 웃었다. 상황과 맞지 않는 그의 웃음에 목숨을 건진 모리사와는 멍하니 시노 하지메를 올려보았다.



"제가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셨죠? 죄송해요. 그래도 제가 도와드리는 편이 올라가는 데 편하실 거 같아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죽을 뻔했던 자신보다 놀란 시노가 발을 동동 구르더니 이내 기다리라며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5층 입구에 설치된 방화 셔터로 다가갔다. 잠깐 잠깐, 그걸 내려서 뭘 어쩌려고. 불길이 올라오는 걸 막으려는 참인가? 아니, 불길은 위에서도 내려올 텐데 무슨 의미가-



"읏차~"



말릴 틈도 없이 소년이 벽에 들러붙은 방화 셔터, 정확하게는 셔터가 매끄럽게 내려올 수 있게 설치된 길을 뜯어냈다. 철제로 된 걸 아무렇지 않게 한 손으로 벽에서 뜯어내는 걸 보며 모리사와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가스가 들어간다는 걸 알면서도 다물지 못했다.



"으아, 급한 대로 뜯어냈는데 이래선 방화 셔터를 사용 못 하게 되겠네요. 괜찮아요. 키류 선배님이 오시고 계시니까 불은 어떻게든 되겠죠..? 저, 현장과 직원분...?"
"아... 모... 모리사와 차아키라고 합니다."
"모리사와씨! 이걸 계단 대신 놓을게요~ 옮겨 주실래요? 하나론 위험하니까 하나 더 드릴게요!"



아무렇지 않게 한 손으로 건네는 셔터길을 받기 위해 모리사와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무겁겠지, 특수과니까 가능한 거잖아? 그런 자신의 판단을 증명하듯 시노가 건네는 철제물은 두 손으로 겨우 지탱할 수 있는 묵직함이었다. 질질 끌어, 5층과 6층의 무너진 계단 사이에 겨우 올려두는 사이 우지끈,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시노가 반대편의 셔터길 역시 아무렇지 않게 뜯어냈다. 그리곤 마지 나무젓가락 옮기듯 한 손으로 가볍게 내려놓았다. 쿵, 육중한 소리가 울렸다. 절대로 나무젓가락이 낼 소리는 아니었다.



"전 오늘 진입을 맡아서요. 이 정도면 선배님들이 오시는데 문제없겠죠?"
"글쎄요. 시노씨-"
"아, 제가 연하인 거 같으니 편하게 부르셔도 된답니다~"
"시노군 같은 분들이면 가능하겠죠?"



특수과니까, 아마도. 그 말은 꼭 붙이지 않으며 모리사와가 말했다. 선배들은 저보다 다들 대단하시거든요! 소풍 나온 것도 아닌데 시노 하지메가 입을 열 때마다 잔디밭에 나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모리사와는 자신의 목적을 떠올렸다. 피크닉을 즐길 틈은 없었다. 서둘러 시노 하지메가 만들어 놓은 길에 올랐다. 아슬아슬하게 놓인 철제물이 덜컹거렸으나, 이런 것 즈음이야. 단숨에 뛰어넘자 등 뒤에서 박수가 들려왔다.

6층, 다행히 4층보다는 불길이 아직 크진 않았다. 아이들의 웃는 사진들이 가득한 광고판들을 지나 모리사와는 서둘러 장난감 코너로 달렸다. 무언가 찾는 게 있으신가요? 훌쩍 따라붙은 시노 하지메가 물어왔다.



"부인 하나가 아이를 여기 두고 나오셨다고, 콜록!"
"그거 위험하네요. 아, 모리사와씨 이거! 마스크 드릴게요."



저는 없어도 되거든요. 시노 하지메가 주섬주섬 들고 있던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냈다. 모래 그리고 먼지 바람이 길게 불면 사용할 수 있도록 단단한 마스크였다. 이거로 유독 가스를 피하기엔 턱도 없었지만, 그래도 없는 편보다 낫겠지 싶어 서둘러 줄을 당겨 머리를 끼워 넣었다.



"마스크도 없이 뛰어드는 건 위험하답니다."



그의 따끔한 충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뿌옇게 가리는 시야 속에서 점점 숨이 가빠지고 눈이 따가웠다. 그런 자신과 달리 시노 하지메는 멀쩡해 보였다. 실제로 이렇게 가까이에서 특수과를 보는 건 처음이라 모리사와는 가벼운 그의 움직임이 참 현실감 없게 다가왔다.



"신고도 안 해, 소방 점검도 제대로 안 했는지 화재 시설은 전혀 작동이 안 되네요...."



이건 사고를 부르는 건데. 안타깝다는 듯 옆에서 중얼대는 소리를 들으며 모리사와는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장난감 코너가 뭐 이렇게 큰지, 둘러보아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그 난리통 속에서 아무리 어리고 부모가 세상 전부인 아이더라도 도망쳤을 텐데. 점점 냉정하게 식어가는 머릿속에서 모리사와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아! 찾았어요!!"



시야 속으로 아이의 다리가 눈에 들어온 것은.
먼저 다가간 건 시노였다. 가스를 마셨는지 쓰러진 어린 소녀에 곁에 앉은 시노는 서둘러 가방에서 물병부터 땄다.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건지 전 잘 모르는데! 방금까지만 해도 평온했던 그가 울먹이며 우왕좌왕했다. 특수과가 여기서 무너지면 어쩌라는 거야. 모리사와는 마스크 아래로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데리고 나가..."



죠? 그 말을 끝내기 전에 어디선가 커다란 바람이 불어왔다. 안 그래도 겨우 힘을 주고 서 있던 다리가 어마어마한 강풍에 휘청대다 못해 풀려 넘어졌다. 쿵, 바닥에 부딪힌 무릎이 아팠다. 바람 탓인지 불길이 순식간에 타올랐다. 이제 죽는 건가 싶은 그 순간에 기적처럼 강하게 타오르던 불길이 한순간에 훅, 사라졌다. 마치 환상처럼.



"...무슨.."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삼켜 먹을 것만 같았던 불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까맣게 타버린 공간 속에 작게 살아있는 불꽃만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방금까지의 기세를 증명하려는 듯 버티고 있었다.



"키류 선배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사라진 공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피어오르던 불꽃과 같은 머리색을 한 남자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신카이, 마무리를 부탁해."
"네~"



그가 있었다. 모리사와는 가만히 천장으로 손을 뻗는 푸른 머리의 남자를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날, 자신이 모든 것을 잃었던 그 날. 그 날 만났던 그 소년. 맞아도 따갑지 않은 비를 내리며 모든 악몽을 잠재웠던 소년. 그때보다 자란 자신만큼 똑같이 자라 소년이 아닌 청년이 된 그가 눈앞에 있었다.

무어라 말을 걸어야 할까. 당신을 만나고 싶었다고, 그때 당신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당신이 내 꿈이 되었다고.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좀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우선 뭐라도 말해야, 말해야 하는데-



"「머리」 조심하세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뒤늦게 터진 화재 경보의 소리였다. 동시에 천장 위에서 물줄기들이 요란하게 쏟아져 내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벽에 붙어있던 소방 시설까지 터져 나가며 폭탄과 같이 물이 터져 나왔다. 익숙한 듯 쿠로 선배라 불린 남자는 가볍게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가렸다. 시노 하지메 역시 마찬가지였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그대로 맞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물을 잔뜩 쓸 수 있어서 기분이 좋네요. 더 즐겨도 되나요? 빨간 귀신씨?"
"적당히 해. 오늘 담당은 나라서 시말서를 써야 하는 건 내 쪽이라고."
"그럼 사양하지 않고~"



그가 손가락을 휘둘렀다. 터져 나온 물줄기들이 그의 손가락을 타고 움직였다. 그리고 가볍게 바닥을 스치고 지나갔다. 겨우 버티고 있던 불씨를 물이 몽땅 덮어 죽였다. 마치 파도의 결처럼 움직인 물은 모리사와의 구두를 훑고 빠져나갔다.



"4층도 정리했고, 곧 폭탄 해지 담당이 들어올 테니 비켜줄까?"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갈까요? 제가 손으로 움직이면 될 거 같은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거 같네요~ 하지메~"



하지메가 만들어 준 계단으로 가죠! 눈앞에서 남자가 탁탁 손을 털며 상쾌하게도 말했다. 아 잠깐, 가는 건가? 벌써? 모리사와는 서둘러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었다. 쿨럭, 이미 들어간 가스 탓인지 기침이 자동으로 터져 나왔다. 하지만 기침 따위가 자신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우선은 만나고 싶었다고, 진짜 만나고 싶었다고



"모리사와씨?!"



말해야 하는데 풀린 다리는 후들거렸다. 따가운 눈에서는 절로 눈물이 나왔다. 아, 안 되겠다. 일단 잠깐 쉬었다가. 모리사와는 눈을 감았다. 무너진 몸이 축축했다. 아득해지는 정신으로 키득키득 웃는 목소리가 닿았다. 그 목소리라도 붙잡기 위해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손을 뻗었다. 잡히는 건 차가운 물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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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만나는 걸 쓰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앞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당황스러워따...

그러고보면 나 진짜 능력자물 짱 좋아하는듯 ㅎ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