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도 익숙해지면 후에는 아무런 느낌이 남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야, 괜찮아?"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괜찮아, 아니 괜찮은 것 같아. 어디까지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괜찮아야 했다. 추하게 코트 위에서 운다거나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자신의 자존심과도 같았다.
"코트 비워야해요."
나지막이 떨어지는 쿠니미의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반대편 코트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단 한 번도 넘을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벽이 팀 동료와 함께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시발. 오이카와는 입을 타고 흐르는 욕을 집어삼키며 주먹을 쥐었다. 코트에서 내려가고 싶지 않아. 비켜주고 싶지 않아. 그득그득 몸 안을 채우는 욕심은 아직 끝이 없는데 자신은 졌다. 패배했다. 패배자에게 설 코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이와이즈미에게 끌리다시피 잡혀 움직였다. 오이카와는 누군가 건네주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며 입술을 꽉 물었다. 결국 고교 3년 내내 전국으로 가는 길 앞에서 똑같은 상대에게 똑같이 졌다. 미련하고 멍청하고 추하기 짝이 없어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팀원들이 자신을 불안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오이카와는 그 분노를 삼킬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똑같이 이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 세수 좀 하고 올게."
오이카와는 마른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했다. 들고 있던 수건을 아무렇게나 던지고는 등 뒤로 펼쳐진 코트에서 벗어났다. 조금이라도 눈을 돌리면 자신의 어리석은 미련이 무슨 짓을 할지 가늠을 할 수 없었다. 괜찮아, 한 두 번 진 것도 아니고 오늘도 졌을 뿐이야. 전국에 못 간 것이 한 두 번도 아니고 오늘도 못 갔을 뿐이야. 단지 그뿐이야. 스스로 달래면서 오이카와는 자신을 상처 입혔다. 다음은 다를거야, 이만큼 노력했으니 다음은 다를 거야. 그렇게 다독이던 자신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자신이 노력한 그만큼 상대 역시 노력한다는 것을 오이카와는 간과했다. 아니, 애초에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노력이라는 것을 할까? 그 어마어마한 재능이 두려우면서도 미웠고 부러우면서도 증오스러웠다.
"하아..."
목을 타고 흐르는 숨을 감추지 않은 채 오이카와는 조용한 복도를 걸어 화장실로 향했다. 일단 머리를 식히고, 이 아슬한 분노를 지우고,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내일 다시.. 거기까지 생각이 치밀지 웃음이 나왔다. 내일 다시 배구 연습을 하자. 무엇을 위해서? 이제 자신의 공식적인 3학년 경기는 모두 끝났다. 전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끝나 버렸다. 화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내려보았다. 부어오른 엉망인 손이 눈에 들어왔다. 무너질 것 같아. 이대로 주저앉을 것 같아.
"토오루!!"
벽을 짚고 버티는 오이카와의 분노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정확하게는 그 분노를 가르고. 천천히 돌아보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오는 스가와라 코우시가 서 있었다. 두 손으로 꼭 스포츠백의 끈을 붙잡고 선 얼굴에는 동정도 안쓰러움도 없이 오로지 자신을 걱정하는 감정만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입을 열었다. 마른 입안에서 그를 부르려고 했지만 차마 터져 나오지 못했다.
"괜찮아. 오늘 멋있었어."
입만 벙긋하는 자신을 보며 그가 말했다. 조금 아까웠지만, 그래도 네가 제일 멋있었어. 웃으며 그렇게 말해주었다. 오이카와는 차디찬 시멘트벽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그 팔을 뻗어 스가와라 코우시의 목덜미를 잡아 끌었다. 훅하고 익숙한 그의 로션 향이 코를 뚫고 머리를 잠식해갔다. 그리고 그만큼 익숙한 그의 입술을 찾아 벌렸다. 그 안으로 추한 자신을 밀어 넣었다. 화풀이를 해서는 안 된다고 머릿속으로 경고하면서도 오이카와는 꽉 그 목을 잡아끌며 거칠게 혀를 섞었다.
이런 나를 멋있다고 하지 마. 칭찬도 하지 마. 사실은 아니잖아. 추하고 꼴사납고 병신 같잖아. 네가 하는 소리 하나도 못 믿어.
오이카와는 스가가 자신을 밀어내길 바랐다. 이런 우스운 자신을 온 힘을 다해 밀어내고 정강이라도 까던지, 뺨이라도 내 치던지 어떤 방식이라도 좋으니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이 거친 행동에도 불구하고 스가와라 코우시는 아무렇지 않게 엉망으로 입안을 헤집는 자신에게 얽혀들었다. 조심스레 잡고 있던 가방 끈을 놓고 자신의 목을 끌어 안았다. 작은 품으로 자신을 가두는 그 온기에 오이카와는 천천히 목을 틀어쥐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마구잡이로 몰아 붙이던 입술에서 힘을 빼었다. 고개를 틀어 방향을 바꾸며 부드럽게 자신을 받아주는 스가를 옭아 매었다. 코끝이 부딪혔다. 살짝 이도 닿았던 것 같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오이카와는 그제야 웃었다. 스가와라 코우시에게는 언제나 항복이었다. 물러서지 않은 그를 놓아주며 아슬아슬하게 입술을 떼었다. 젖은 그의 입술을 바라보며 오이카와가 겨우 입을 열었다.
"미안해."
너에게 화풀이해서. 뒷말은 담지 않아도 아마 알 것이었다.
"괜찮아. 어리석은 오이카와 토오루도, 추하고 못난 오이카와 토오루도."
목에서 벗어난 작은 손이 머리 위로 올라와 식어버린 자신을 토닥였다.
"너에게 반한 내 탓이니 받아줘야지 어쩌겠어? 그리고!"
스가가 콱 두드리던 손으로 오이카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리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느낌이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나도 너에게 졌잖아. 바로 전 경기에서 너에게 졌다고. 그런데 나에게 위로를 바라는 건 너무하잖아. 오이카와 토오루씨."
"미안..."
"미안하면, 나도 위로해줘. 그날 너 미안해서 내 얼굴 보지도 못했잖아."
아아, 그랬었다. 카라스노를 이기고 나서 그를 위로하는 것이, 달래는 것이 어쩌면 자존심을 건드리는 게 아닐까 싶어 말도 붙이지 못했었다. 그때에도 괜찮다고 먼저 연락을 해 온 것도 자신이 아닌 스가와라 코우시였다. 와, 나 완전 추하지 않아? 오이카와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부끄러운 얼굴을 감췄다. 그를 약하다고 판단해 멋대로 방치하고, 이제는 화풀이를 해대는 자신이 진짜로 추하고 어리석었다. 지고 패배한 오이카와 토오루가 아니라. 그것을 알려주는 스가의 말에 오이카와는 서둘러 손을 떼고 얼굴을 보였다. 붉어진 부끄러운 모습이었지만 아마 스가와라 코우시는 이 모습도 괜찮다고 해 줄 터였다. 천천히 고개를 틀어 숙이며 닿았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아무도 없는 복도로 작은 마찰음이 울렸다.
"고마워. 그리고 정말 미안해."
"수고했어."
자신의 사과에 스가와라 코우시는 위로를 던졌다.
이제 머리를 식혔고, 이 아슬한 분노도 지웠고,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내일 다시 배구를 해야지. 너를 위해서.
이런 나를 멋있다고 말해주는, 잘했다고 받아주는, 수고했다고 위로하는 너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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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고 미야기 예선에서 세죠가 카라스노를 이기고 결승에 가 시라토리자와를 만난다는 날조 설정.
그리고 패배해씀다. 오이카와 미안하닦!!!!!!!!!!!!!!!!!!!!!!!!!!!!!!!!!!
오이카와는 키타이치때도 그러하고 지금도 그러하고 자신에 대한 자신감 + 카게야마나 우시지마를 향한 열등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게
진짜 멋있다. 그리고 그걸 코트 위에서 절대로 풀어놓지 않는 자존심도 조쿠...
하지만 결국 19살, 일본나이로 치면 고작 17, 18살인 애가 그걸 아득아득 견뎌낼 거라고는 생각이 안되고.
이렇게 혼자 이 악물고 참지 않았을꽈........라는 내 안의 동인 설정...
그리고 그걸 받아주는 스가와라 코우시가 있다는 설정........... 휴
19금으로 빠지면 키스로도 분노 못 풀어서 화장실 가서 정신없이 일치루고 무릎 꿇고 비는거지 모... ^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