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이 아니오! 졸자, 닌자의 이름을 걸고 두 눈으로 똑똑히 봤소이다!"
"에이, 말도 안 된다구요. 어디서 잘못 본 게 분명함다."
"시노부군 날이 더워서 잠깐 헛것이라도 본 게 아닐까...? 피곤하면 쉬는 게 최고야."
"진짜라오! 교문에서 대장공이 여학생에게 도시락을 받는 걸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이다!"
코 가까이에서 물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분수대에 둘러앉은 아이들이 작은 새처럼 지저귀는 소리에 신카이는 귀를 반만 세웠다. 도시락, 어려운 단어가 아니었다. 작은 상자에 이것저것 먹을 것이 가득 담긴 물건. 거기에 대장이라. 신카이는 두 얼굴을 떠올렸다. 하나는 지금 자신의 앞에서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나구모 테토라가 존경하는 공수부 부장인 붉은 귀신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그보다 먼저 머릿속을 채운 모리사와 치아키였다. 하지만 답답해하는 동시에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센고쿠의 '대장공'이라는 호칭을 보면, 답은 어렵지 않았다. 지금 눈앞의 아이들은 모리사와 치아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닌자 수련으로 운동장을 돌고 있는데 붉은 머리 여학생이 붉은 주머니에 든 도시락을 건네는 것을 졸자,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왜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것이오?"
답답한지 센고쿠가 탕탕 작은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듯 자신에게 눈빛을 보냈다.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눈을 바라보며 신카이는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 움직임과 함께 후드득 소리를 내며 물이 조각나 요란한 소리를 냈다. 코끝에서 맴돌던 물 내음이 바람을 타고 더 강하게 파고들었다.
"다들 뭐 하는 건가요? 곧 오후 수업이 시작된다고요? 수업을 듣지 않는 아이에겐 「벌」을~"
웃으며 손등을 세워 올리자 분수대에 붙이고 있던 엉덩이들이 후다닥 떨어져 나갔다. 그리곤 방금 전 재잘거리던 화제에 대해선 까맣게 잊었는지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다.
"신카이공, 치사하오! 분수대는 모두의 것인데...!"
"분수는 신카이선배의 것이 아니라구요? 우리 모두의 것임다! 이 폭력에 반대함다!"
"...수업 귀찮고.. 덥고..."
유난히 이번 여름은 더웠다. 교내에 흐르는 점심 방송에선 '기록적인 더위'라는 표현을 썼다. 작년에도 썼는데 올해에도 쓰는 걸 보면, 확실히 더 더워진 거겠지. 물론 교내에 에어컨이 돌아가긴 하지만, 적정 온도를 지킨다는 방침에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학생들에겐 턱없이 부족했다. 저와 어울리는 걸 어려워하는 주제에 이렇게 분수대를 찾는 걸 보면 퍽 더웠구나 싶어 살짝 마음이 쓰이긴 했지만, 아쉽게도 신카이에겐 여름을 끝내줄 힘이 없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춉」이라구요~"
그나마 밖보다 시원한 교실로 쫓아내는 것뿐. 진심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통한 모양인지 툴툴거리며 세 사람이 훌쩍 멀어졌다. 너무하다느니 매정하다느니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지만, 그런 소리를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었기에 신카이는 다시 퍼석하게 마르게 시작하는 몸을 물에 담갔다. 물이 훅 차올랐다. 갑작스러운 입수에도 평온한 심장과는 달리 썩 기분은 좋지 않았다. 늘 맛보는 감각인데 오늘따라 그랬다. 이유가 뭘까, 신카이는 곰곰이 생각했다. 여름이라 차갑지 않은 온도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흐응.."
그나저나, 도시락이라. 신카이는 금세 이유 따위 지워내고 머릿속에 다시 도시락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조금 구체적인 도시락이었다. 붉은 주머니에서 나온 붉은 상자에 도시락. 모리사와 치아키가 좋아하는 색. 그 안에는 붉은 소시지가 들어있을까. 아니면 붉은 콩이 들어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계란 위에 붉은 케찹으로 그린 하트? 그렇게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다 도시락에 가지 절임이나 가지 튀김이 들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키득였다. 그렇게 웃다 신카이는 이내 머리끝까지 물을 끌어 올렸다.
물속은 고요했다. 이것저것 귀찮은 일 혹은 싫은 일이 생기면 신카이는 이 방법을 애용했다. 물 안에서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웅웅거림으로 변했다. 마치 작은 벌레의 울음소리와 같았다. 그건 너무도 작아서 신카이를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 수 없었다. 그렇게 도피처처럼 물로 도망쳤더니 처음엔 몇 초, 다음엔 1분, 그다음에는 3분, 지금은 약 12분 정도까지 숨을 참아낼 수 있었다. 어디 내세울 기록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홀로 방해받지 않고 생각하기엔 좋은 장기였다.
사람들은 모두 여러 가지 꿈을 꿨다. 어려서부터 카나타는 많은 사람이 떠드는 수많은 꿈들을 듣고 자랐다. 이 학교의 학생만 해도 그랬다. 나구모는 남자 중에 남자가 되는 게 꿈이었고 동시에 자신의 부활동 부장과 같은 사람처럼 되는 것도 꿈이었다. 타카미네에게도 꿈은 많았다. 집에 가는 것도 꿈이었고 집에서 나오지 않는 것도 꿈이었으며 부모님이 그리고 형이 항상 웃는 게 꿈이었다. 센고쿠는 닌자가 꿈이었고 닌자 아이돌이 꿈이며 키우는 개구리의 건강과 많은 친구를 갖는 꿈도 있었다. 모리사와 치아키도 마찬가지. 정의의 히어로가 그의 꿈이며 동시에 유성대가 강호 유닛이 되는 게 꿈이었고 또 계속 함께하는 게 꿈이었다. 그리고 도시락 역시.
"그거 알아? 카나타군? 모리사와군 말야, 귀여운 여자 친구에게 도시락 받는 게 꿈이래!"
얼마 전, 하카제 카오루가 말했었다. 모리사와와 같은 반인 하카제는 전혀 웃기지 않은 이야기를 전하며 "완전 웃겨!"라고 박장대소를 해댔다. 그리곤 물었다. 어디 순정 만화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 아니야? 라고. 순정 만화라, 모리사와가 좋아하는 것은 아침의 히어로 방송이지 순정 만화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갑작스러운 장르 전환이라니. 그건 곤란했다. 히어로 방송의 모리사와 치아키 곁의 신카이 카나타는 적당히 그릴 수 있는데 순정 만화 속 모리사와 치아키 곁의 신카이 카나타는 잘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꿈을 방해할 수는 없는 일, 신카이는 방법을 찾으려고 애썼다. 모리사와가 순정 만화의 주인공이 되면 이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 지상에서 버티고 서 있는 건 모두 모리사와 치아키 덕분인데 그가 자신을 두고 장르를 뛰어넘어 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켜보고 함께하기로 했는데, 그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꿈은 바뀌는 거니까 상관없어질까? 장르가 달라지면 유성블루는 사라지는 걸까? 순정 만화에 출연하는 건 좀 이상하지? 끝없이 이어지는 고민과 고민들. 그런 시답지 않은 고민을 몇 번 하지도 못 한 거 같은데 덜컥 현실이 되어 도시락으로 나타났다. 대비도 못 한 히어로 앞에 커다란 적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답을 아직 다 적지 못했는데 억지로 시험지를 뺏기는 기분도 들었다. 그 치사함에 입이 자꾸만 삐죽해졌다.
"어쩐지 「짜증이」 나네요?"
좋아하는 물속인데도 평온함은커녕 쓸쓸함만 피부를 감쌌다. 신카이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물 밖으로 몸을 꺼냈다. 그나마 몸이 식지 않는 것을 여름의 장점이라 여기며 분수를 넘었다. 주르륵 흘러내린 물이 마구잡이로 퍼져나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남는 자국은 열에 녹아 금세 사라졌다. 아이들에게 교실로 가라 어울리지 않은 훌륭한 어른 흉내를 냈으니 자신도 모범이 되기 위해 수업을 들을까 싶었지만, 중간부터 들어서는 건 내키지 않았다. 분명 귀찮은 잔소리가 날아들 게 뻔하니까. 잘못했으면 벌을 받는 건 당연하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낫겠지. 어차피 비가 오기 직전의 날씨 같은 기분으로는 수업에 들어가도 집중하지 못할 게 뻔했다. 신카이는 젖어 엉망인 옷을 내려보곤 가볍게 발걸음을 돌렸다.
"...."
얼마나 정처 없이 복도를 걸었을까. 조용조용한 수업 소리 외에 다른 것이 끼어들었다. 누군가 열어둔 창에서 흘러들어온 웃음소리였다. 소리를 따라 창 너머로 시선을 돌리자 그 끝에는 방금, 자신이 풀고 있던 시험지를 뺏어간 주인공이 있었다. 체육 시간인지 저와 똑같은 체육복을 입은 모리사와 치아키였다.
"역시 치아키는 태양이네요."
이런 날씨에 저렇게 뛰면서도 웃는 얼굴이라니. 신카이는 걷고 있던 걸음을 가만히 멈추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늘 수업의 주제는 축구인지 손에 공을 쥐던 언제나와 달리 이번에는 뻥뻥 차대고 있었다. 축구가 어떤 스포츠고 어떤 룰인지 알지 못했지만, 신카이의 눈에는 무척 잘해 보였다. 모리사와 치아키가 웃고 있으니 그래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지켜보다 살짝 잊었던 도시락을 다시 떠올렸다. 분명 모리사와 치아키의 순정 만화 속 주인공이 될 여자아이는 저런 웃음에 반해서 도시락을 선물했겠지. 축하해요, 치아키. 드디어 꿈이 하나 이루어졌네요. 신카이는 살짝 손바닥을 두어 번 마찰시켰다. 짧은 박수가 복도를 채웠다. 아직 알 수 없는 적을 해치우지 못했고 빼앗긴 시험지도 되찾아 오지 못했지만, 신카이는 우선 축하했다.
"으음, 「이상한」 기분."
어디선가 축하할 때는 기쁜 마음으로! 라고 배웠던 거 같은데 왜 자신은 지금 기쁘지 않은 걸까. 항상 모리사와 치아키의 꿈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많은 사람의 꿈을 들었지만, 이토록 간절하게 누군가의 꿈을 이루어주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뭘까, 이 쓸쓸한 기분은. 신카이는 가만히 따끔거리는 눈에 눈꺼풀을 몇 번 빠르게 감았다 떴다. 머리에 달라붙은 물방울들이 아직 가득한지 뚝뚝 뺨으로 떨어져 내렸다.
"치아키의 꿈을 이루어주고 싶었는데-"
아이일 때도 해본 적 없는 투정 같은 목소리가 불쑥 입술을 타고 흘렀다.
"저는 귀여운 소녀는 될 수 없겠죠?"
도시락은 무리여도 맛있는 생선 요리를 할 줄 아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신카이는 꾹 눈을 감았다. 태양이 너무 눈 부셔서 눈을 감아도 느껴지는 빛이 아팠다.
무척 아팠다.
-
이 이후 "카나타! 키류는? 같은 반이지? 아까 교문에서 키류의 귀여운 여동생에게서 도시락을 부탁받아서 말이지! 오늘 키류가 의상 제작으로 학교에 늦게까지 남는 모양이다! 여동생이란 정말 귀여운 존재구나! 하하하!" 라고 한 치아키는 옆구리에 영문 모를 춉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