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됩니다."
안됩니다, 안됩니다. 지긋지긋한 소리. 스가와라는 입고 있던 외투를 거칠게 벗어 던지고 침대로 던지듯 몸을 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없이 자신이 던져놓은 외투를 주워드는 남자의 모습에 어쩐지 화가나 근처에 있던 베개를 잡아다 힘을 실어 던졌다. 퍽, 소리가 그의 등에서 울렸다.
"왜 또 심통인데요."
"키스하자니까?"
"방금 안된다고 했잖아요."
"그럼 뽀뽀만 하자."
"... 안됩니다."
"아, 그러니까 왜!"
닳는 것도 아닌데! 답답하게 구는 남자의 행동에 미칠 지경, 스가와라는 마구 발을 발버둥 치며 짜증을 뱉었다. 외투를 털어 옷걸이에 거는 남자, 정확하겐 자신의 매니저인 오이카와 토오루는 어깨를 으쓱이며 10번도 더 들었던 대답을 이번에도 당연하게 툭 던져냈다.
"그게 사장님과의 계약 조건이니까요."
스가와라 코우시와 어떠한 성적 행동도 하지 말 것. 그래, 그 빌어먹을 계약 조항. 웃기지도 않은 그 조항을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후딱 몸을 뒤집었다. 으악, 시트에 대고 짜증을 풀었지만 달래줄 생각은 없는지 매정하게도 오이카와는 쉬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 매정한 매니저, 그래서 매니저인가? 허튼 생각을 하며 스가와라는 꾹 눈을 감았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배우였다. 그것도 잘나가는 배우. 데뷔 10년 차, 당대 또래중에서 현재 가장 많은 몸값을 자랑하고 있었다. 올해는 세금 많이 낸 유명인에 이름을 올릴 계획도 있었다. 물론 하루아침에 로또 맞은 것처럼 모든 게 번쩍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가만히 천장을 노려보며 스가와라는 자신의 데뷔 초기를 떠올렸다.
갓 시골에서 상경해 번쩍이는 도쿄를 즐기던 스무 살, 지금의 사무소 사장을 만났다. 딱히 꿈이나 목표가 있었던 게 아니라 "너 연예인 안 할래? 돈 많이 벌 수 있는데."라는 사장의 말에 쉽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뭐,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쉽나. 반짝이는 별일수록 견고하고 높이 떠 있었다. 막 종이로 오려낸 별이 그 깊은 밤하늘에 닿기엔 사무소도 스가와라도 별로 내세울 게 없었다. 뭐 딱히 다이아로 빚어낸 별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힘들거나 그러진 않았는데, 저를 거둬다 먹여주고 키워준 사장은 재정도 그렇고 사모님 잔소리도 그렇고 힘든 게 많았는지 언제나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보니 하드보드지로 잘라낸 별 정도는 되고 싶었다. 그래서 첫 드라마를 따내기 위해 방송국 PD와 잤다. 흔히 말하는 몸 로비였다. 첫 경험도 아니라 별 감흥도 없었는데, 당당하게 조연역을 따내고 왔더니 사장에게 뺨을 맞았다. 사내놈이 자존심도 없느냐며, 한번 이렇게 굴면 네 취급이 어떻게 될 줄 아느냐며 된통 혼이 났다. 혼나면서 뭐라 했더라.
"에이, 이거로 사장님과 제가 먹고 살수 있으면 싸게 먹힌 거죠! 괜찮아요! 저 게이라 남자 완전 좋아하고, 섹스 좋아하니까!"
그렇게 말했다가 맞았다. 크게 혼났다. 혼나고 나서 당연히 잘못했다고 빌고 넘어가긴 했지만, 사실 그 드라마 찍는 내내 그 PD와 편집실이며 분장차며 그의 차 뒷좌석에서 뒹굴었다. 딱히 그와 눈이 맞은 건 아니었다. 목에 입술을 묻을 때마다 까슬한 수염이며 씻지 않아 냄새나는 남자 따위와 눈이 맞을 리가 없지. 그때는 그가 자신의 목줄을 잡고 있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하드보드지는커녕 두꺼운 도화지 별이라도 되려면 무언가 붙잡고 있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소문이 돌았다. 제 귀에 직접 들어온 건 아니니 돌았는지 어쨌는지 확인을 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연이어 스폰서니 뭐니 접근해오는 놈들이 늘었으니 돌았을 것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돈 좀 있는 놈들은 성격은 더러웠지만, 적어도 냄새는 나지 않았다. 차 시트에 저를 구겨 넣고 박지도 않았다. 대부분 좋은 호텔에서 좋은 룸서비스를 시켜주었고 조금 거칠게 밤을 보내고 나면 다음 날, 사무실에는 온갖 화보며 CF며 작품의 계약서가 도착해 있었다.
그렇게 10년, 스가와라 코우시는 다이아몬드 별이 되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통장에는 돈이 쌓였고 롯폰기 맨션에 외제 차에 멋진 수트에 시계에 구두에- 부족한 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남자도 많았다. 그러니까 저 남자, 오이카와 토오루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오늘부터 배우님의 매니저를 맡게 될,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가장 최근에 3주 정도 일해줬던 매니저가 "나 진짜 너랑 못 해 먹겠다!!"라고 선언하고 뛰쳐나간 지 일주일 뒤, 사장이 새 매니저를 데려왔다며 인사하게 사무소에 들르라 난리였다. 새 매니저 따위 누가 되든 그만이었기에 스가와라는 "귀찮아요!"라는 말로 밀어내려 했지만, 사장은 그래도 첫인상이 중요한 거 아니겠냐 호통쳤다. 하는 수 없이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두 남자의 팔을 치워내고 샤워도 하지 못한 채로 사무실에 갔던 그 날, 그를 보자마자 무슨 생각을 했더라. 아, 자신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세수조차 안 한 자신의 뺨을.
새 매니저라며 소개한 그는 스가와라가 보았던 어떤 남자들보다 가장 잘생긴 얼굴이었다. 아니 뭐 잘생긴 얼굴도 취향마다 다르겠지만, 단언컨대 그는 모두가 잘생겼다고 할 정도의 빼어난 미남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몸은 또 얼마나 좋은지! 초면에 이미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주물렀다. "몸 좋네요!"라는 칭찬에 그는 웃으며 "아, 최근까지 건설 현장에서 물건 날랐거든요."라 말했다.
"젠장..."
작업복 입은 오이카와 토오루를 상상하니 갑자기 입이 바짝 말랐다. 스가와라는 낮게 욕설을 뱉으며 마구 고개를 저었다. 불순한 상상 금지. 그걸 이겨낼 힘이 지금 자신에게는 없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얼굴과 몸이면 충분한데 성격도 괜찮았다. 웃음도 많았다.
"아 웃는 거 진짜 꼴리는데."
거기다 목소리는 또 어떻고. 낮은 편은 아니었으나 높은 편도 아니었다. 경쾌해서 딱 듣기 정도의 목소리. 그 목소리로 항상 이름을 불러주는데, 스가와라는 그럴 때마다 확 그를 벽에 밀어 넣고 입술부터 부딪혀 보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니, 실제로 몇 번 시도도 했었다. 하지만 방어로 번번이 실패. 이유는 그래, 그 빌어먹을 계약 조항.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장은 그에게 계약 조건으로 <스가와라 코우시와 어떠한 성적 행동도 하지 말 것>을 걸었다. 성실한 매니저는 그 계약을 착실하게 지켰다. 스가와라는 미치고 팔짝 뛴다는 기분이 어떤 건지 그가 오고 삼 개월, 정말 착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 정도면 사랑 아니냐고..."
이 스가와라 코우시가 삼 개월째 밤의 놀이도 끊고 이렇게 자빠져 있는데. 이 정도면 넘어와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깟 계약이 뭔데? 그게 나보다 중요해? 몸과 얼굴만 가지고 와도 먹여 살려 줄 수 있는데. 아 서럽다. 여기까지 생각이 멈추니 어쩐지 이 밤이 외로웠다. 스가와라는 몸을 돌려 푹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제 기분을 알았는지, 바지 뒷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여보세요?"
-"뭐해?"
"...스케줄 끝나고 집에 들어왔어."
모르는 번호, 하지만 건 사람은 절 알겠지 싶어 대충 받았다. 역시나 익숙한 목소리로 신인 시절 자신의 스타일리스트를 맡았던 야쿠 모리스케였다.
-"목소리가 왜 다 죽어가?"
"내가 뭘."
-"우울해 보여서. 요즘 너 클럽도 안 나가고 바에도 안 보인다더니, 사장님이 감금이라도 시킨 거야?"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남의 불행은 자신의 행복이라더니, 야쿠 모리스케가 딱 그 짝인 모양이었다. 아, 몰라! 밖에 다 들리도록 빼액 소릴 지르자 수화기 너머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아님, 그거야? 새 매니저? 너 매니저 인기 많더라? 인터넷에서도 화제고. 스타일리스트 사이에서도 엄청 말 많아."
"알아!"
알다 마다. 멀리 안가도 사무실에만 가도 느껴졌다. 저를 대할 때와 매니저를 대할 때의 사람들의 다른 태도. 특히 여자. 스가와라는 기본적으로 여자를 좋아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녀들은 예쁘고 친절하고 다정하니까. 하지만 오이카와 토오루가 끼어있다면 그건 달랐다. 그땐 그냥 적일 뿐이었다. 그것도 자신보다 더 강하고 강한 적.
-"그만 낑낑거리고 그냥 너답게 놀아. 나 지금 나갈 건데 나올래?"
"내일 스케쥴 있어."
-"언제부터 스가와라 코우시가 그런거 신경 쓰고 놀았다고."
하아, 스가와라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놀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놀고 싶은 상대는 방 밖에 있는 사람이지 다른 사람은 싫었다. 그냥 노는 것 말고 정말 찐하게 놀고 싶은데.
-"너답지 않게 굴지 말고 나와. 알았지? 방 잡아놓을게!"
뚝, 전화가 끊겼다. 나 답지 않다라. 스가와라는 멍하니 누워 야쿠의 말을 떠올렸다. 확실히, 저답지 않기는 했다. 15살, 게이임을 자각한 이후로 스가와라 코우시 인생에 남자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빽빽했다. 그런데 떡 줄 생각도 안 하는 사람 앞에서 꼬리 흔들기라니. 비참했다. 스가와라 코우시 인생에서 가장.
"갈래, 나가자. 그래 나갈래. 놀 거야. 놀고 말겠어."
석 달이면 많이 참았다. 자신을 잘 아는 이들이 들으면 모두 장하다며 박수를 치고 상장을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다려! 도 아니고 안돼! 를 외친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어 보았자 던져지는 먹이는 없을 것이었다. 보이지 않은 목줄이 아팠다. 그가 채운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사랑은 참 서글프네. 아프네. 일방적이라서 그런가? 스가와라는 허튼 생각을 하며 그가 걸어둔 외투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곤 기세 좋게 뻥, 문을 차고 나왔다.
"어디 가려고요?"
전 매니저는 따로 살았다. 이번엔 누굴 고문하는 것도 아니고 '감시'라는 명목으로 사장이 그를 이 집에서 지내게 했다. 처음엔 좋다고 콜했지만, 이젠 괴로웠다. 스가와라는 읽고 있던 잡지를 내려놓는 오이카와를 보며 슬쩍 입을 물었다. 왜 갑자기 끼지도 않는 안경을 쓰고 난리야, 사람 마음 약해지게.
"나가려고."
"11시가 넘었는데요."
"그게 뭐? 놀다 올 거야. 내일 아침에 픽업하러 와."
"사장님께 연락 드릴까요?"
"그런 협박 안 먹히거든?!"
"협박하는 거 아닙니다. 내일 오전부터 스케쥴 있어서 새벽부터 숍에 가야 해요. 그만하고 들어가서 주무시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나 어린애 아니야."
"저랑 지금 입씨름하는 꼴은 딱 어린앤데요."
"뭐?"
"그만하고 들어가요. 이런 의미 없는 다툼이 하고 싶은 거 아니시잖아요. 저랑."
그래, 아니야. 너랑 하고 싶은 건 다른 거라고!
그렇게 빼액 외치고 싶은 걸 참으며 스가와라는 오이카와를 노려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은 언제나처럼 미동도 없어서 더 화가 났다. 아까 화보 촬영 때 방문한 스튜디오에서는 잘 웃기만 하더니. 속상했다. 서러웠다. 뭐가 아쉬워서 자신이 이렇게 애달파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 눈물이 날 거 같았다. 태어나서 남자 때문에 울어본 거라곤 침대에서밖에 없는데 지금은 멀쩡한 정신에 멀쩡하게 서서 울 거 같았다.
"들어가서 자요. 우유라도 데워드릴까요?"
"애 취급하지 마...."
"백세 인생에서 28살은 애죠."
"오이카와군, 말 진짜 안 진다? 그치?"
다른 놈이었으면 분명 주먹이라도 날려줬을 텐데. 그런데 이런 하기 싫은 입씨름조차도 좋아서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오이카와 토오루라면 무조건 항복이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언제나 지는 법이었다.
"알았어. 들어갈게."
"잘 생각했어요."
"말 잘 들었으니까 키스해 줘."
"그냥 사표 쓰라고 말을 하세요."
"사장님에게 내가 입 다물면 되잖아."
"제가 양심이 거대한 사람이라."
얄미운 핑계. 그래도 오늘은 넘어와 주지 않을까 했는데 또 실패인 모양이었다. 스가와라는 두 번째 항복을 뜻하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뭐, 사실 이런 기분으로 밖에 나가 다른 누구와 밤을 보낸다 한들 오이카와 토오루만 잔뜩 상상하다 허무해져 질질 울 거 같았다. 스스로를 더 불쌍하게 만들 바에 덜 불쌍한 꼴로 잠드는 게 낫겠지. 후우,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방으로 걸음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쪽.
처음에 느껴진 건 소리. 그다음엔 부드러운 감촉. 뒤이어 팔을 붙잡은 온기. 마지막으론 뺨에 닿은 손. 마치 온몸에 무언가가 퍼져나가듯 하나하나 천천히 간질간질한 감각이 이마를 시작으로 뻗어 나갔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멀어지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며 스가와라는 서둘러 두 손으로 이마를 가렸다. 그리곤 다급히 외쳤다.
"한 번 더...!!"
"네?"
"한 번 더!!!"
방금 오이카와 토오루가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동정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스가와라는 돌아서는 그의 팔을 붙잡으며 외쳤다.
"나를 개라고 생각해도 좋아! 어감이 그러니까 강아지로 할까? 굿나잇 키스잖아?! 성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엄마가 아이에게 해주는 거잖아? 난 오이카와군의 아이가 되어도 좋아!"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는데."
"오이카와 코우시가 될게!!"
그러니까, 한 번만 더! 방금 내가 느낀 이 아찔한 감각이 꿈이 아니라는 걸 알려줘. 스가와라는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안경테 위의 눈썹이 곤란하다는 듯 휘어졌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리고 다시 입술이 닿았다.
1초도 되지 않을 가벼운 순간, 하지만 그 순간으로 스가와라는 앞으로 72년을 더 살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습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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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스가와라 코우시가 미치고 팔짝 뛰지만 나중엔 오이카와 토오루가 미치고 팔짝 뛰면 정말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