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토모] 한 밤의 꿈
2017. 7. 30. 12:41





"저는 잘 모릅니다. 그저 마을을 지나가는 중이라서요."



저는 잘 모릅니다. 그저 마을을 지나는 중이라서요. 대본에 적힌 대사를 가만히 읽으며 마시로 토모야는 방금 전, 자신의 억양을 떠올렸다. 너무 이상하지 않았나? 약간 높지 않았나? 빠르진 않았나? 하지만 그 고민도 잠시, 들고 있던 대본을 옆으로 밀어 치웠다. 고작 한 줄의 대사, 장면 역시 마찬가지. 길을 묻는 주인공에게 저는 모르오, 라고 던진 후 유유히 퇴장하는 나그네 역. 의미도 없고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그런 역. 그 역을 위해 고민하는 것도 아깝고 사치처럼 느껴졌다. 바싹 마른 연습복에 쓰윽 손을 닦아내며 마시로는 고개를 들었다. 무대 위에는 이번 극의 주연들이 연습에 매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강하게 던져지는 대사와 함께 조명 아래로 땀방울이 날렸다. 자신의 연습복과 달리 그들의 티셔츠는 푹 젖어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개막까지 이제 30일 남았으니까 다들 마지막까지 집중하도록!!"



약 반나절 동안 계속되었던 연습은 이제 끝이 났는지, 연출 감독이 몸을 일으키며 하루의 끝을 알렸다. 그 신호에 모두가 수고했다는 인사를 쏟아내며 저마다 물병을 찾아 들었다. 물병을 따지 않은 것도 자신뿐, 애초에 대사 한 줄 가지고 연습에 참여하는 것도 참 우습게 느껴졌다. 엑스트라 주제에 적당하게 전체 연습에나 낄 것이지, 무슨 생각으로 주연 배우들 연습에 끼었을까. 어색하게 달라붙는 시선을 느끼며 마시로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직업란에 배우라는 단어를 적은 게 벌써 4년째,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은 하고 있는데 4년 동안 극단만 5번째 옮긴 걸 보면 썩 그렇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출신 학교가 유메노사키라서 그랬을까, 첫 극단에서는 선배들의 교묘한 괴롭힘이 있어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2번째 극단에서도 마찬가지, 3번째 극단은 재정난으로 사라졌고 그 끝에 들어간 4번째 극단은 다행히 괜찮았다. 주인공까진 아니었지만 큼직큼직한 역도 맡았고 팜플렛에 버젓하게 이름도 올라갔다. 그리고 그때 활동을 좋게 봐준 지금의 극단 담당 매니저에게 제안받아 옮겼으나 규모가 큰 극단이다 보니 쉬이 배역을 따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미 쟁쟁한 대선배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 분명 몇 년 전이었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도 열심히 임했을 텐데. 여러 번의 고비를 넘고 넘다 보니 이제는 알 수가 없었다. 배우라는 일이 자신에게 맞는 걸까. 그냥 선배였던 니토 나즈나, 니짱의 말대로 아이돌을 길을 가는 게 맞지 않았을까. 그게 아니더라도 사무소에 들어가 적당하게 모델 활동을 하다 오디션을 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왜 배우를 하려고 했더라."



유메노사키에 다닐 시절 목표는 분명히 아이돌이었다. 자신과 달리 화려한 사람들 틈에서 몇 번이고 고민하고 좌절했지만, 아이돌이었다.



"토모야군, 연극부를 잘 부탁합니다. 당신이라면 분명 잘 해낼 겁니다."



이 히비키 와타루가 보장하죠!! 장미꽃까지 흩뿌리며 그가 했던 말. 얼굴에 쏟아지는 그 잎을 털어내며 축하 인사 대신 짜증만 냈다. 그의 졸업식이었지만, 그게 그와 자신의 사이에 가장 어울리는 이별이었으니까. 울지도 않았다. 어차피 곧 다시 지긋지긋하게 볼 얼굴, 지독하게 또 자신을 괴롭히러 올 게 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사라졌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마냥 사라졌다. 연기 공부라는 이유로 불러내던 전화도 간 떨어지게 하던 깜짝 상자도 그의 말도 안 되는 트레이닝도 모두. 그와 함께하면서 그토록 바라고 또 바랐던 일인데, 왜일까. 그가 사라진 곳에 구멍이 남았다. 마시로 토모야에게 있어서 그건 참 이상했다. 딱히 뭐가 이상하다 정의할 수 없었지만, 이상했다.
그리고 그 이상한 날들의 연속. 그 연속이 쌓여 벌써 몇 년째. 만약 그가 있었으면 달랐을까.



"이상한 생각."



마시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그렇게 괴롭혀 놓곤 그것도 모자랐는지 사라져버린 남자를 그리워하다니. 아까운 짓이었다.



"토모야군!"



사놓고 따놓지도 못한 물병을 가방에 대충 던져 넣고 나서려는 찰나, 등 뒤로 목소리가 닿았다. 극단 매니저이자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준 사카모토씨였다.



"오늘도 수고했어. 안 와도 되는 날인데 와줘서 고마워. 켄지군도 칭찬하더라."



단 한 장면, 자신과 합을 맞추는 주연배우의 이야기를 던지며 그가 자신을 칭찬했다. 어차피 빈말이라는 걸 알기에 마시로는 적당하게 웃었다.



"지금부터 일정 있어? 켄지군이랑 다른 사람들이랑 간단하게 회식하고 돌아갈 참인데. 같이 갈래?"
"...그게.."
"별 일정 없지?"



항상 이런 제안을 받을 때마다 핑계를 대고 빠져나갔더니, 출구를 아예 막아섰다. 네, 갈게요라 말하지 않으면 비켜서지 않을 거 같은 그의 모습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하게 어울렸다 막차 핑계를 대고 나오면 되겠지,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면서.


하지만 늘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은 자신의 인생처럼, 술자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 잔째인지 모를 맥주잔이 몇 번이고 앞을 차지했다. 술 잘 못 해요, 라 빼봤지만 이미 취한 이들에겐 별 효과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마시로는 웃으며 슬쩍 새로 내려진 맥주잔을 밀어냈다.



"그러고 보니 토모야 여기 오기 전에 '카니발'에 있었다고 그랬나?"
"카니발? 그게 어디야?"
"있어. 긴자에 작은 공연장 가지고 있는 극단. 거기선 뭐했어?"



적당히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즐겨주면 좋은데, 화제의 화살이 자신에게로 향했다. 그것도 주연배우의 지목. 모두의 시선이 따가웠다.



"제가 있을 당시엔 '긴자 레이니' 상영 때라, 거기서 히로시 역을 했었어요."
"긴자 레이니? 히로시? 처음 듣네. 주연이었어?"
"아뇨."
"뭐, 그렇겠지."



술에 취해 적당히 그리고 가볍게 던진 말이겠지만, 약간 입술이 떨렸다. 그도 모자라



"토모야군 뭐랄까, 배우 하기엔 오라가 없잖아? 평범해서. 그러고 보니 유메노사키 출신이라며? 일반과였어? 설마 아이돌과는 아니었지?"



그 설마가 맞는데요. 방금까지 멀쩡했는데 갑자기 목이 탔다. 갈증이 일었다. 마시로는 거침없이 밀어낸 맥주잔을 들었다. 텁텁한 액체가 시원하게도 넘어갔다.



"예전엔 꿈 좇는다고 하면 멋지다 추켜세웠지, 요즘은 그것도 아니야. 재능 없으면 빨리빨리 그만두고 살길 찾는 게 편해. 사람이 밥은 먹고 살아야 할 거 아니야. 꿈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낭만이니 로망이니 그거야 다 재능있고 능력 있고 돈 있는 놈들 이야기지, 하나라도 없으면 어디 쉬운가? 꿈에 매달려 사는 것도 어찌 보면 병이다, 병. 빨리 깨서 현실로 나와야지."



주어 없음. 하지만 마시로 토모야 들을 것. 마치 그렇게 쓰여 있는 이야기 같았다. 틀린 이야기여야 화를 내는데 다 맞는 이야기라 할 말이 없었다. 자존심 때문에 뻐끔대는 입술론 술만 들어갔다. 제 눈치를 보는지 억지로 이 자리를 권한 사카모토씨가 당황해 허한 웃음을 흘려댔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더 마셨을까. 머릿속을 꽉 채운 열기에 무릎을 잡고 일어섰다. 옆에 둔 가방을 들고 나섰다. 아까는 조금만 움직여도 "벌써 가게?"라는 관심이 붙더니 이제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다. 뭐, 별로 섭섭하지 않았다. 마시로 토모야에게 관심이 붙는 게 더 이상했으니까.



"맞아, 늘 그랬지."



아슬아슬 유메노사키에 입학했을 때도 그랬다. 반짝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그나마 머리라도 있어 학급 위원장이라도 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자신은 이룬 거 하나 없이 고교 생활을 끝냈을 것이었다. 유닛 활동도 그래. 라빗츠의 마시로 토모야따위 기억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겠지. 아이돌 활동하던 그때도 그랬으니, 아마 그럴 터였다. 그런 자신인데 왜



"부탁한다고 했을까."



히비키 와타루 당신은. 당신처럼 무대에서 빛날 수도 없는 나에게 왜, 연극부를 부탁한다고 했을까. 그 말이 마치 저주처럼 자신에게 들러붙었다. 그가 있을 때에 비하면 사람이야 많았지만, 한 학년 위에였던 히다카 호쿠토 선배가 졸업하고 나서는 내리막길. 시시하기 그지없는 평가만 받았다. 그런 연극부에서 3년을 보냈다. 아이돌도 그만두고 배우로 길을 잡았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왜.



"...나 진짜 뭐가 뭔지 모르겠어, 변태 가면."



당신 잘하잖아. 내 인생에 끼어들어서 이것저것 참견하고 괴롭히는 거.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거 맞아? 맞다면 그냥 비웃어도 좋으니까, 그 이상한 웃음소리 좀 들려줘. 나를 안심시켜줘. 예전처럼 날 지켜보고 있다고, 그렇게 이야기해줘. 



"오야오야, 토모야군. 안 되겠네요! 이렇게 술버릇이 고약해선!"



그래, 그렇게 좀 떠들어 달란 말이야.

멋대로 머릿속에 재생되는 목소리에 마시로는 웃음을 흘렸다. 그의 말대로 고약하기도 하지. 핑글핑글 돌아가는 머리처럼 몸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누군가 끌어당긴듯 툭, 차가운 바닥에 뺨을 대며 웃었다. 날씨는 분명 여름인데, 날이 참 찼다.



"사카모토씨의 연락을 받고 달려왔더니, 이런 꼴이라니!! 오랜만의 재회가 정말 재미없네요. 토모야군. 물론, 취한 토모야군을 보게 된 건 어메이징~한 일이지만!"



시끄러워.



"씩씩하게 잘 버틴다 했더니 벌써 패배 선언인가요? 답지 않네요, 토모야군?"



시끄러워.



"날 쫓아 온다던 그 소년은 어디 갔죠? 기다리다 목이 빠지겠어요. 아, 목이 빠지면 죽어버리니까 안 되겠군요. 하하하, 어쨌든. 4년 동안 날 기쁘게 하더니, 이렇게 슬프게 하면 못써요."



시끄러워, 진짜!



깜빡깜빡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달빛만큼 반짝이는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면서 괜한 심술에 손가락에 온 힘을 넣어 꾹 눌렀다. 머리 위로 하하하, 즐거운 웃음소리가 퍼졌다. 하지만 이내, 꿈에서까지 그를 놓칠세라 마시로는 손바닥을 펴 그 구두를 꼭 쥐었다. 당신 꿈을 꾸었으니 내일은 아마 더 최악의 날이 펼쳐질 거야. 하지만, 뭐. 용서해줄게. 이 세상에서 마시로 토모야에게 지독한 관심을 보여준 사람은 히비키 와타루, 당신뿐이니까.



"잘 자요, 토모야군."



답지 않은 다정한 인사가 귓가를 채웠다. 차가웠던 뺨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장미꽃잎처럼 흐트러지는 온기를 붙잡으려 했지만, 알코올에 절여진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내일부터 또다시 이상한 날들의 연속. 그 날들을 견디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이 선택에 답을 알게 될까. 툭 던져본 질문에 팔랑거리는 긴 머리가 떠올랐지만, 마시로 토모야는 모른척했다. 어느새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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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모야를 극단으로 캐스팅한 사카모토와 와타루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는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