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bye bye dramatic 2
2017. 7. 3. 18:47


하루아침에 자신이 서 있던 세상이 휙 뒤집히는 경우가 있을까? 30년 가까이 다 되도록 늘 그 자리를 유지하고 지키고 있던 세상이? 스가와라는 단언컨대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하면 "아뇨."라고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단조롭고 지루하고 운이란 전혀 따라주지 않았던 날들을 떠올리면, 조금의 행운조차 비추지 않았던 하루들을 떠올리면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랬는데



"어디 시라고요?"



이 전화는 뭘까. 스가와라는 수화기를 귀에서 떼어내곤 서둘러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우, 심호흡을 두 번 아니 세 번 뱉은 후에야 다시 귀를 바짝 대었다.



-"키타무라 아츠코라고 하는데요, 스가와라군 휴대폰 맞나요?"



키타무라 아츠코, 키타무라 아츠코. 분명히 아는 이름이었는데도 참 생소하게 다가왔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현장에서 수도 없이 듣고 떠올린 이름인데도 그랬다. 아침에 지옥에서 눈을 뜨며 "모두 잊자!"라고 선언해서일까?



"원래 인간은 후회할 걸 알면서도 또 후회할 짓을 해."



하지만 너는 해도 너무 하지. 언젠가 할머니가 했던 말. 그리고 늘 그렇듯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알고 있는 할머니의 말은 이번에도 정확하게 적중했다. 지옥을 뻥 차고 나오면 다시 천국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과 달리, 지옥을 나오니 지옥이었다. 후회할 짓은 하는 게 아니라고 늘 생각하면서도 이번에도 역시 욱하는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저질렀다. 그래, 말 그대로 저질렀다. 그 말 외에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어제, 둘도 없는 행운이 눈앞에 떨어졌다. 인생에 절대로 두 번은 없을 행운이었다. 그리고 스가와라는 스스로 그걸 차고 나왔다. 행운만 찼으면 멍청한 자신만 탓하면 그만이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오이카와 토오루의 정강이를 차버린 것. 차버린 거로 모자라 물에 빠트리고 나름대로 망신을 준 것. 그 때문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아침을 맞이했다. 행운을 찬 건 둘째치고 오이카와 토오루가 그 망신을 당하고 자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배우란 모두 콧대와 자존심으로 이루어진 생물이었으니까. 특히 오이카와 토오루같은 대단한 분은 더욱더. 그래서 아침 대신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통장을 살폈다. 합의금을 요구할 경우 어느 정도 자신이 낼 수 있는지를 살필 생각으로. 하지만 통장에 찍힌 잔액은 약간의 비상금과 4자리 숫자로 된 생활비 정도였고 곧 날아올 공과금을 처리하기 위해 모셔두고 있는 돈이었다. 쥐뿔도 가진 게 없는 주제에 성격만 욱해선! 자신의 정강이를 차주고 싶은 마음에 비어있는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좌절해 있는 순간, 바로 전화가 울렸다. 그리고 그녀는 웃으며 자신이 키타무라 아츠코라 인사했다.



-"으음, 저기.. 전화 연결되어 있는 건가?"
"네!! 되...되어 있어요! 네...! 제가.. 제가... 스..!! 스가와라 코우시입니다!!"



누군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스가와라는 벌떡 식탁 의자에서 일어섰다. 덕분에 애매하게 걸쳐있던 통장이 바닥으로 떨궈졌지만, 그걸 주울 정신은 조금도 없었다. 뚝뚝 아이스크림이 식탁 위로 액체가 되어 조금씩 흘러내렸다. 얼마 전, 마트의 세일기간에 큰맘 먹고 산 간식거리인데도 아깝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전화해서 미안해요. 어제 새벽에야 나카무라 감독에게 이야기를 들었지 뭐예요? 하하, 혹시 오늘 시간 괜찮아요?"



그녀의 부드러운 질문에 스가와라는 급하게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넘긴 것을 잊어버린지 오래라 이미 지난 과거가 그곳에 남아있었다. 붉은 동그라미와 함께 '오디션! 화이팅'이라 기억도 나지 않는 일정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현재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스가와라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냥 이건 습관적인 일이었다. 손목에 찬 시계도 없는 주제에 누군가가 "몇 시야?"라고 물으면 들여보는 것처럼.



"네 괜찮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제 작업실에 와줄 수 있어요? 주소는 메시지로 찍어 보낼게요. 이것도 너무... 갑작스럽나?"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보는 이도 없는데 허리를 몇 번이고 숙였다. 숙이고 숙이면서도 스가와라는 자신이 현실에 있는 건지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뚜우 뚜우, 끊어진 통화음을 얼마나 듣고 있었을까. 서둘러 허리를 들었다. 이미 녹아 사라진 아이스크림은 잊어버리고 남겨진 막대는 싱크로 던졌다. 그리곤 달리듯 화장실로 뛰쳐 들어갔다. 조그마한 거울에는 이리저리 잠버릇으로 솟은 머리와 조금이지만 그래도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 까슬한 수염이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꾸미고 정리할 시간은 없었지만, 아닌 건 아닌 거지. 스가와라는 급히 면도기를 들었다.


그렇게 빠르게 준비를 끝내고 집을 나서는 길, 오디션을 보러 가는 것도 아닌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 키타무라 아츠코가 왜 자신을 보자고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뛰었다. 목소리를 들으니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닌가? 태풍의 눈 같은 걸지도 모르잖아."



물론 키타무라 아츠코 자체가 태풍과 같으니 아니겠지만, 그래도 영 진정되질 않았다. 누군가 등을 치거나 혹은 배를 누르면 그대로 왁 모든 것을 쏟아낼 거 같은 기분. 몇 입 삼킨 아이스크림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정말 뭐라도 쏟나낼 거 같은 기분. 그런 기분을 왕창 안고 스가와라는 큰 맘먹고 택시를 잡았다.
키타무라의 주소는 택시요금이 좀 나오는 거리였다. 꽤 멀었다.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집은 도쿄 23구의 외곽이고 그녀가 불러준 곳은 완벽한 중심가였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지갑을 탈탈 털면서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도 아니면서 그랬다. 수고하세요, 스가와라는 힘차게 인사한 후 택시에서 내렸다. 으리으리한 저택을 상상했는데 생각보다는 평범한 가정집 주택이 반겼다.



"괜찮나?"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 무엇 때문에 불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보았던 그 오디션보다 그리고 어떤 중요한 미팅보다도 떨렸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꾹 누른 후, 스가와라는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벨을 눌렀다. 그리고 작게 울리는 새소리의 끝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가와라군?"
"아..! 네!!"
-"문 열어줄게요."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잡지에서 혹은 TV에서 몇 번이고 봤던 익숙한 얼굴이 웃으며 반겼다.



"어서 와요, 스가와라군."



검게 기른 긴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 거기에 늘 어디에나 착용하는 안경까지. 진짜 실물 키타무라 아츠코였다. 세상에! 스가와라는 벌어지려는 입을 간신이 힘줘 막은 후, 서둘러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들어와요, 그녀가 활짝 문을 열어주며 비켜섰다.



"갑작스럽게 불러서 미안해요. 시간이 별로 없어서."
"아뇨, 괜찮습니다!"
"음료는 뭐로 할래요? 커피? 티? 아니면 쥬스?"
"어... 편..편하신 대로?"



집 안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거실에는 그동안 그녀가 집필했던 드라마들의 포스터가 모두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옛 드라마 포스터라 지금의 감성으론 약간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것들이 꽤 되었지만, 벽이 깨끗해서 그런가 아니면 가구가 몇 없어서 그런가 마치 하나의 그림을 전시해 놓은 느낌이 들어 나쁘지 않았다. 키타무라 아츠코가 권한 소파에 먼저 자리 잡으며 스가와라는 쭈욱 그 포스터를 살펴보았다. 자신도 아는 작품, 좋아했던 작품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다 가장 마지막 작품에서 시선이 멈췄다. 데이지, 키타무라 아츠코의 복귀 전 마지막 작품이자 오이카와 토오루의 주연작.



"사기 같죠?"



하얗고 노란 데이지 꽃을 들고 수줍게 얼굴을 붉힌 교복 입은 소년, 오이카와 토오루. 누구라도 반할 수밖에 없었을 그를 가만히 들여보던 제게 커피를 내려주며 키타무라가 물었다. 사기 같냐니, 어쩜 그런 딱 어울리는 소리를! 스가와라는 동감하며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일, 감독님에게 직접 들었어요. 스가와라군 연기 좀 보느라 녹화된 비디오도 봤고. 내가 생각해도 좀 심했더라. 저 녀석."
"그...그쵸?"
"갑작스럽게 씬을 수정하겠다고 나선 내가 가장 나빴지만요. 그래도 생각해보니 영 납득이 안돼서 어쩔 수 없었어요. 기억상실증이라는 요소부터 스토리가 시작되는 거나 마찬가지라, 더 강렬한 사건이 필요했거든요. 칸자키군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죠. 물 공포증이 있는지 몰랐거든요."



그녀가 커피를 홀짝이며 평온하게 말했다.



"촬영 딜레이에 갑작스러운 배우 이탈에.. 아마 오이카와도 이것저것 짜증이 났던 모양이에요. 원래 그런 성격 아닌데.. 미안해요, 원인을 따지면 나니까 저 녀석이 벌인 일에 대해선 너그럽게 용서해줬으면 좋겠어요."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고 사회의 흐름을 생각하면 아마 자신이 해야 했지만,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행동에 스가와라는 다 잊어버리고 고개를 저었다. 살다 보면 맞을 수도 있고 물도 먹을 수 있는 거였다. 사과가 오고 갈 필요는 없었다.



"괜찮아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그 문제로 직접 불러준 건가? 딱히 그녀의 사과까지 필요한 사건은 아니었는데, 베풀어준 이 친절에 아침부터 품었던 불안감이 싹 녹아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걱정했거든요."



그녀가 자신의 몫으로 준비한 찻잔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리곤 이내 한 모금, 조심스럽게 입에 머금은 후 눈을 마주했다. 방금의 다정함과는 달리 약간은 날카로워 보이는 눈에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긴장해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꼭 쥐었다.



"오늘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어제 현장 녹화 비디오랑 스가와라군 오디션 봤던 영상을 제가 봤거든요. 데이지 장면 연기했던데. 맞죠?"
"아...네!"



그 연기가 별로였나? 그녀의 질문에 스가와라는 조심스럽게 끄덕이며 눈치를 보았다. 안 그래도 어제, 오이카와 토오루도 감독의 말에 썩 기분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게 기억났다. 아, 진짜요? 라 웃으며 묻긴 했지만 다시 떠올리니 그랬던 것 같았다. 역시 자신 같은 이름 없는 배우가 이미 완성한 캐릭터를 연기한 건 실례였을까. 키타무라나 오이카와의 입장에선 분수도 모르고 행동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심지어 이미 캐스팅된 오이카와 토오루가 참여하는 드라마에서 그의 캐릭터를 연기하다니. 건방져 보일 수 있는 선택이었다. 충분히.



"제가 너무 생각 없이...!"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고 스가와라는 먼저 사과하기 위해 서둘러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절대로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하면 용서해주지 않을까. 하지만 자신보다 더 먼저 그리고 강하게 키타무라 아츠코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음에 들어서요. 이대로 스가와라군이 싫지 않다면 어제 일은 없던 거로 해주고 계속 내 드라마에 주인공이 되어줬으면 좋겠는데-"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릴 들은 걸까. 스가와라는 키타무라의 말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었고 다른 나라 언어도 아니었는데,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그런가 현실감도 없고 팍 와닿지도 않았다. 주인공, 주인공이라니. 자신이? 누구의? 키타무라 아츠코의 작품의? 간절하게 바란 적 없는 일이었다. 자신에게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꿈에서조차도 일어나본 적 없는 일이었다.



"제작 보고회도 끝나버렸고 이미 시작 단계에 들어간 작품이라 현장 적응이 어려울지 모르지만, 스가와라군이 괜찮다면-"
"괜찮아요."



조심스레 덧붙이는 그녀의 말에 스가와라는 잘라 말했다. 조금이라도 대답을 지체하면 이 기회가 다른 누군가에게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거기다, 괜찮다면 이라 가정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다. 이보다 괜찮은 이야기는 자신의 인생에 더는 없을 정도로 괜찮고 또 괜찮았다. 얼마나 괜찮은지, 이대로 당장 레인보우 브릿지로 달려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로 괜찮았다.



"다행이네요. 대본이랑 여러 가지 연락 사항은 스태프가 연락할 거에요. 그나자나 스가와라군 기획사나 매니저는 없어요? 오디션 명단에 적어 놓은 전화번호가 전부라..."
"아... 네."



그녀의 빠른 진행에 멍하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기획사니 매니저니 모두 별나라 이야기라 더 정신이 없었다. 20대 초반에 잠깐 작은 극단에서 일했던 것을 제외하면 스가와라는 늘 혼자 일했다. 프리랜서 같은 뭐 그런 그럴듯한 이름을 붙일 상황은 아니었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거나 혹은 부리기에 자신이 큰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고작해야 오디션 몇 개, 겨우 붙는 역이란 단역이나 엑스트라. 기획사나 매니저가 붙어 있는 게 더 신기한 이야기였다.



"슬슬 알아보는 게 좋을 거예요. 방영 시작하면 촬영 쫓기느라 혼자선 힘들 테니까."



기획사나 매니저를 알아본다라, 그건 어떻게 하는 걸까. 예전처럼 오디션을 보러 다니면 되는 걸까? 아니면 이제 당당하게 주연이 된 입장이니 대본을 들고 미팅을 요구하면 되는걸까. 10년 넘게 이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발을 담그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해 계속 그 자리였다. 그래서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간단한 미팅을 끝나고 나오는 길, 키타무라 아츠코는 친절하게도 "전에 절 돌봐주던 매니저가 지금 일하는 사무실도 있고 주변에 아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원한다면 대신 미팅 잡아줄게요."라 친절을 보였다. 하지만 이제 막 스스로 뻗는 첫걸음, 지옥에서 천국으로 그리고 뒤집힌 새로운 세상으로 달려드는 그 첫걸음은 스스로 해내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괜찮다 거절했다. 그녀가 배웅하며 끝까지 걱정스러운 얼굴을 지우지 못했지만, 그래도 정말 괜찮을 거 같았다.


그리고 다음날, 그 생각을 증명하듯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우선은 기사.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기사에 떴다. 저녁에 키타무라 아츠코에게 [내일 아침신문으로 캐스팅 변경 뉴스가 뜰 거예요]라고 메시지를 받아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그래도 아침신문을 쥔 손은 후들후들 떨렸다. 잠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탓인지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1면도 아니고 전면 기사도 아니고 그냥 캐스팅이 변동되었다는 작은 기사였지만, 그래도 너무 기뻐서 편의점에 서서 두 팔을 크게 벌렸다. 속으로 요란하게 환호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푸른 새벽의 공기가 축하 인사라도 되는지 상쾌하게 느껴졌다.



 [어둠을 외치는 소리, 주연 교체로 키타무라의 새 신데렐라 탄생]



유치한 제목의 기사는 깔끔하게 오려져 거실의 벽 가운데에 붙었다. 사진 하나 실리지 않은 손바닥만한 기사였지만, 그래도 스가와라는 이 순간부터 다가올 시간들은 지금까지와 다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모두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휴대폰이 쉬지 않고 울려댔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전화를 받은 건 처음이라 정신이 없었다. 인터넷 신문사며 잡지며 모두 자신과 대화를 하고 싶다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아직은 부담스럽습니다."라는 말로 죄다 거절하고 부정적인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입꼬리는 자꾸 올라갔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다리를 꼬고 턱을 추어올리며 "네, 제가 바로 이번 키타무라 아츠코의 신작에 캐스팅된 스가와라 코우시입니다!"라고 자랑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을 뱉어야 하는지 그리고 뱉지 말아야 하는지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을 캐스팅해준, 그리고 신경 써준 그녀에게 폐가 될만한 일은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인터뷰를 거절하고 나니, 스가와라는 확실히 키타무라 아츠코와 나눈 기획사 혹은 매니저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신중하게 자신을 맡아줄 곳을 찾아 나섰다. 오디션을 보러 갈 때마다 낙방을 마셨던 온갖 기획사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을 만나고 싶다 요청해왔다. 전화로 간절하게 미팅 날짜를 잡으려는 곳도 있었고 혹은 어떻게 알았는지 메일로 간단하게 의사를 표명하는 곳이나 어마어마한 계획서를 보내는 곳도 있었다. 모두가 원해주는 기분은 이런 거구나. 스가와라는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자신의 노트북 앞에 앉아서 몇 번이고 신나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그 많은 구애에도 좀처럼 마음을 정하는건 쉽지 않았다. 한 두 군데였으면 고민하다 하나를 고르면 그만이었지만, 여러 가지를 두고 고르는 건 영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엔



"도와주시겠어요?"



호의를 거절한 주제에 키타무라 아츠코에게 S.O.S를 칠 수밖에 없었다.
조금 늦은 시간, 하지만 너무 늦지 않은 시간. 그녀에게 민폐를 끼치는 게 죄송해 무릎까지 꿇고 전화를 걸었다. 사정 설명과 함께 도움을 요청하자 그녀는 웃음을 터트리면서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네, 스가와라군!"이라 말했다. 그러게요. 살다 보니 이런 구애를 제가 다 받아보네요! 쑥스러워서 웃음만 흘렀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다 만나는 건 아마 어려울 테니까 그중에서 스가와라군을 진짜 만나고 싶다고 어필하는 곳을 골라서 만나봐요. 만나면 아마 팟! 오는 곳이 있을 테니까. 규모가 크면야 전문적이고 투자도 좋겠지만, 대신 그만큼 관리하는 연예인들이 많아 스가와라군을 신경 써주지 않을 수도 있어요. 반대로 작은 곳은 처음은 좀 힘들겠지만, 스가와라군에게만 신경 쓰겠죠. 어디나 장단점은 있어요. 나도 연예인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뭣하면 오이카와 연락처라도 알려줄까요? 이런 쪽으론 역시 동업인에게 듣는 게-"
"아뇨!"



무시무시한 소리! 자신을 물에 빠트린 그리고 자신이 물에 빠트린 상대에게 다짜고짜 친분도 없이 전화해 "기획사를 고르고 있는데요."라고 말할 뻔뻔함은 자신에게 없었다. 다행히도 키타무라도 진심은 아니었는지 "농담이었어요."라 웃었다. 그리곤 고맙게도 "조금 계약 조건이나 마음이 끌리는 곳은 있었어요? 같이 생각해봐요."라 덧붙였다. 민폐라는 걸 알면서도 정말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기에 스가와라는 냉큼 기억에 남았던 기획사 사무소 이름을 줄줄 뱉었다. 꽤 이름 있는 곳들이라 그녀에게도 익숙한 듯 "나쁘지 않네요."라는 평이 들어왔다.



-"'스타라이트 엔터테인먼트' 어때요? 거기 유명한 배우들 많이 데리고 있잖아요. 아, 니시원은 패스해요. 거긴 개그맨 사무소거든. 새로 사업을 벌리려는 건 지는 모르겠지만, 비추천. 그것도 싫으면 '라이'도 괜찮을 거 같은데. 작긴 해도, 여기 실장이 배우들 아낀다는 이야기 많이 들었거든요. 모델 사무소긴 하지만 최근엔 그런 경계선도 없는 모양이니까."
"아, 안 그래도 엄청 장문의 메일을 보내주셨어요. 저랑 미팅 하고 싶다고."
-"어머! 그런 정성 보이는 곳이면 당연 잡아야죠."



거기 만나봐요. 그녀의 충고에 스가와라는 끄덕이며 자신이 적어놓은 리스트에서 '라이'라는 이름을 찾아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이어서 스타라이트라는 이름에도 별표를 그려 넣었다. 그 외에도 그녀의 추천에 따라 몇 가지 무늬를 더 그려 넣었다.



-"뭐 이 정도면 되려나? 잘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 많이 만나면 선택지가 늘어 힘드니까 골라보도록 해요."
"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대본 곧 집으로 갈 거예요! 잘 부탁해요."



대본이라니! 그 소리에 스가와라는 마구 별표와 동그라미를 그리던 펜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대본을 받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쓰던 것 혹은 복사 용지에 프린트된 것이 아닌 자신을 위한 대본은 처음이었기에 벌써부터 쿵쿵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금방 천국으로 날아오른 자신이 우스웠는지 신은 가볍게 발목을 잡아 지옥으로 당겼다.



-"대본 도착하면 우리 집에서 간단하게 오이카와랑 미팅 좀 할게요. 우선 주연 배우 호흡은 맞춰야 하니까."



언젠가는 마주할 얼굴, 그래도 되도록이면 미루고 미뤄서 가장 늦게 보고 싶었던 얼굴. 지옥의 악마가 쩌억 입을 벌리고 성큼 다가왔다. 스가와라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떠올리며 침을 꼴깍 삼키곤 대답했다.



"네, 그렇게 할게요."



마음은 단단하게. 드디어 자신에게 펼쳐지는 꽃 길,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악마에게 발목 잡혀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 스가와라는 결심하며 두 주먹을 꾹 쥐었다. 주먹과 달리 단단하게 굳힌 마음이 불안하게 덜컹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